‘미스 함무라비’의 고구마와 ‘무법변호사’의 사이다

대중들은 <무법변호사>를 꿈꾸지만 현실은 <미스 함무라비>다? 두 드라마 모두 법 정의를 다루고 있지만 다루는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JTBC <미스 함무라비>가 그리는 세계는 너무나 현실적이라 답답하고 암담할 정도다. 반면 tvN <무법변호사>는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판타지에 가깝지만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느낀다.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고아라)은 바로 그 법 현실의 절망감을 잘 드러내는 캐릭터다. 정의를 꿈꾸며 판사가 되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법원 내에서 부정한 청탁을 받은 부장을 지적한 문제는 그를 ‘내부고발자’로 찍히게 만들어 사실상 왕따를 당하게 만든다. 판사라면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심판하는 게 당연할 줄 알았지만 법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적용되기도 한다. 회사 내 성추행 사건으로 부당해고 당한 피해자가 낸 소송에서 회사 측의 잘못이 명백히 보여도 법의 차원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박차오름은 분노와 자괴감에 눈물을 흘린다.

물론 <미스 함무라비> 역시 이렇게 답답한 법 현실을 뒤집고픈 욕망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제목이 <미스 함무라비>인 이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함무라비 법전의 정의 구현 방식을 꿈꾸는 것. 박차오름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놓은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 역시 이 갑갑한 현실을 마주하고는 절망한다. 정의를 꿈꾸었지만 법은 결국 가진 자들에 의해 이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복수가 나을 것 같은 심정을 갖게 된다. 

‘미스 함무라비’로서의 박차오름이라는 판타지 캐릭터를 세우면서도 드라마가 현실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 건 작가가 현직 판사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너무나 깊게 법 현실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타지를 담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를 이 드라마의 작가인 문유석 판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스 함무라비>는 어떤 시원한 결말을 보여주기보다는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할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본드를 하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가를 파고 들어가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식이다. 

반면 <무법변호사>는 <미스 함무라비>와는 완전히 다른 판타지를 그린다. 공간 자체도 기성시라는 가상도시이고, 그 곳에서 법을 쥐고 흔드는 차문숙(이혜영)이라는 적폐 권력을 하나씩 무너뜨려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야기는 <무법변호사>가 아니라 <무협변호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전형적인 복수극에 액션 장르로 그려진다. 현실성을 찾기가 쉽지 않고, 이야기도 촘촘하지 않아 개연성이 흔들리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시원함을 안겨주는 단순한 재미는 분명히 존재한다. 워낙 악당들이 제대로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을 무너뜨릴 봉상필(이준기)의 활약이 기대되고, 실제로 그 기대는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법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며 문제제기를 하는 <미스 함무라비>와 비현실을 통해서라도 시원한 판타지를 담아내려 하는 <무법변호사>. 시청자들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을까. 시청률로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미스 함무라비>가 3%(닐슨 코리아)대 시청률로 떨어진 반면, <무법변호사>가 7%를 돌파하게 된 건 두 드라마가 법 현실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영향이 있다고 보인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판타지에 더 이끌리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시청률의 차원일 뿐이다. 완성도로 보면 <미스 함무라비>만큼 현실을 실감나게 담아낸 드라마가 있을까.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사이다보다는, 두고두고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고구마가 때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사진:JTBC)

정의 없는 세상, ‘파수꾼’의 판타지가 만들어지는 지점

“니들이 못 잡고 안 잡으니까 내가 대신 잡았잖아!” MBC <파수꾼>이라는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 조수지(이시영)가 던지는 한 마디 속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검찰이 있고 검사가 있지만 그들은 범인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검장의 아들이 조수지의 아이를 살해한 혐의를 받자 검찰은 그 아들을 무혐의로 만드는 것으로 지검장에 줄을 서려 한다. 결국 아이가 희생되자 조수지는 법 정의가 이 사회에서 무력하다는 걸 실감하고 스스로 총을 든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녀가 살인미수로 현상수배범이 되어 쫓기며 살아가는 것이었고, 그 지검장은 검찰총장이 되어 그녀를 더더욱 궁지로 몰아넣는다. 

'파수꾼(사진출처:MBC)'

법이 정의의 편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편이라는 걸 담은 드라마들은 꽤 많았다. 대부분의 법정을 다루는 드라마들이 이런 테마들을 담고 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수상한 파트너>에서도 가진 것 없는 여주인공이 엉뚱하게 살해 용의자가 되었다가 남주인공에 의해 가까스로 풀려나지만 그 후로 이 남녀의 미래는 가시밭길이 되어버린다. 법 정의가 진실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가진 자들을 비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생겨난 현실들이다. 

<파수꾼>은 그래서 아예 법 바깥에서 스스로 정의를 구현하려는 가상조직을 판타지로 그려낸다. 조수지를 끌어들인 이 조직은 장도한(김영광)을 수장으로 서보미(김슬기)와 공경수(키)가 함께 모여 비뚤어진 법 정의를 바로잡는 일을 음지에서 한다. CCTV를 통한 감시와 해킹을 통한 정보 수집 등을 서보미와 공경수가 한다면, 조수지는 몸으로 부딪쳐 임무를 수행하는 행동대원이다. 

그래서 <파수꾼>의 관전 포인트는 시작부터 보여졌던 이시영의 액션이 그 첫 번째다. 오토바이로 자동차를 추격하며 아슬아슬한 액션을 선보이는 이시영의 걸 크러시는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화제가 되는 포인트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드라마가 가진 겉모습일 뿐이다. <파수꾼>이 가진 실제의 힘은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숨겨진 분노와 울분 속에 들어 있다. 

이시영이 연기하는 조수지라는 인물은 딸을 잃는 그 과정을 통해 그 울분을 드러내지만, 시작부터 어딘지 출세에 눈먼 속물 검사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장도한은 더 큰 분노를 숨긴 채 와신상담하는 중이다. 그는 정의를 향해 직진하려 애쓰는 김은중(김태훈) 검사에게 말한다. “너처럼 하면 절대 저들을 못 잡아.”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장도한은 그래서 검찰 조직 속으로 들어온 언더커버나 마찬가지다. 보통 조폭들 속으로 들어간 형사들의 언더커버가 그려지는 것과 달리, 검찰 조직을 상대로 들어온 검사의 언더커버가 의미하는 건 이 법 정의를 구현해야할 집단에 대한 불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파수꾼>은 법 집행을 하는 검찰과 싸우는 은밀한 조직의 이야기가 된다. 누군가의 사적인 정보들을 캐내고 그것을 통해 협박을 하기도 하는 이 파수꾼들은 그래서 법 바깥에 존재한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범죄행위가 포함된 사투지만 더 큰 악과 싸우다는 점에서 용인된다. 

어찌 보면 단순한 대결구도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의외로 힘이 세지는 건 지금의 대중들이 느끼는 법에 대한 정서가 이 불씨를 불길로 만들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무수히 쏟아지는 법비들과 싸워나가는 법정드라마들은 돈 없으면 무고해도 죄인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담고 있다. 이들의 액션이 그저 통쾌하기보다는 어딘지 짠하게 다가오는 건 이렇게 해서라도 잠깐이나마 속이라도 풀어보겠다는 정서가 그 안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휴먼다큐 사랑’, 그 아픈 사랑이 묻는 국가의 존재이유

여러 권에 이르는 엄마의 노트는 빼곡한 글씨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노트 안에는 성준이의 하루하루의 기록들이 담겼다. 의사 선생님은 그 노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성준이가 어떤 상태인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인해 산소통을 끼고 살아야 하는 성준이. 엄마는 그 성준이를 끼고 살았다. 하루 종일 옆에 붙어서 성준이의 상태를 살피고, 성준이와 놀고, 학교를 가서도 교실 문 밖에서 혹여나 아이가 아플까봐 노심초사 들여다봤다. 

'휴먼다큐 사랑(사진출처:MBC)'

MBC <휴먼다큐 사랑> 4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산소통을 끼고 살아야 하는 성준이와 그 가족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살아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고 감사한 일이라는 엄마. 그 엄마가 보여주는 성준이의 어린 시절 모습들은 그것이 왜 기적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아이가 연습을 통해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생일 날 촛불도 끄지 못했던 아이가 드디어 촛불을 끄는 그 순간이 엄마에게는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삶 따위는 모두 지워버린 채 온전히 성준이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엄마. 그 빼곡한 노트에 채워진 글씨들에서 느껴지는 건 엄마의 아들에 대한 부채감이었다. 안전하다는 문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던 가습기 살균제. 그래서 믿고 사용했지만 그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 줄이야.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아이를 잃은 다민이 아빠는 “이건 부모가 자식을 서서히 죽인 것”이라고 그 비통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납득되지 않는 법원의 판결들 앞에서 피해자 가족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게 나라냐?”는 외침에는 부모 같아야할 나라가 자식 같은 국민을 내버리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담겼다. 

성준이의 안타까운 사연 속에 어른거리는 건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올해 <휴먼다큐 사랑>의 이야기에 담겨진 특별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파양에 학대 그리고 추방까지 당한 신성혁의 사연이 그랬고, 세월호 참사로 인해 바다만큼 많은 눈물을 흘리며 3년 간 딸들이 유해로나마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해온 다윤, 은화 엄마들의 사연이 그랬다. 

그들은 마치 그 가슴 아픈 일들이 자신들이 잘못해서 생긴 일인 것처럼 무거운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가난을 벗어나 잘 살라고 입양시켰지만 결과적으론 고통스런 세월을 보낸 신성혁의 부모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고, 그 누구보다 어른스러웠던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에 다윤, 은화 엄마는 가슴을 쳤다.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로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성준이를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까. 

하지만 그 가슴 절절한 사랑을 들여다보면 그 아픔을 보듬어줘야 할 국가의 부재가 느껴졌다. 도대체 이 부모들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그럼에도 어째서 그 부채감을 부모가 온전히 떠안고 알아가야만 한단 말인가. 국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올해 <휴먼다큐 사랑>은 특별한 사랑의 이야기 속에 사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적인 질문들까지 담아내는 기존과는 다른 면들이 주목되었다. 

사랑은 그래서 국가의 존재이유를 물었고, 정의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해 국가의 존재이유를 묻고 정의를 묻는 그 질문들이 그저 갑자기 터져 나온 분노만이 아니라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인간과 생명에 대한 사랑. 그 상식적인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 안에서 눈물 속에 그 희생어린 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는 개인들의 이야기. 우리가 올해 <휴먼다큐 사랑>을 보며 느낀 먹먹함과 아픔과 함께 그 안에 어른거리던 분노의 실체가 아닐까.

‘피고인’ 시청자들이 그토록 사이다 엔딩 기대했건만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이 종영했다. 모두가 바라던 해피엔딩. 박정우(지성)는 차민호(엄기준)를 결국 사형수로 감방에 집어넣으며 정의를 실현했다. 마지막 시청률도 28.3%(닐슨 코리아)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모든 것이 정의로 돌아간 해피엔딩에 최고 시청률까지 기록했지만 어딘지 시청자들의 반응은 찜찜하다. 사이다이긴 한데 어딘지 김빠진 사이다란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피고인(사진출처:SBS)'

가장 큰 문제는 이 드라마가 연장 2회를 더해 18회를 끌고 왔던 그 힘이 고구마 전개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고통스런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박정우를 다시금 원상태로 돌려놓는 방식을 반복하면서 생겨난 시청자들의 갈증을 동력으로 삼았던 것. 마지막회까지 이렇게 갈증들을 증폭시켜놓았기 때문에 웬만한 엔딩으로는 그게 채워지기가 어려웠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 차민호가 사형수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인 척 가장하며 법망을 피해나가려는 상황에 갑자기 나연희(엄현경)가 증인으로 등장해 자신이 차민호를 사랑했다고 말하며 아이 역시 차민호의 아들이라고 밝히는 장면은 너무 신파적이었다. 결국 그 증언이 차민호의 마음을 움직여 그 실체를 드러내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사형수가 된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결말이다. 

그토록 권력자들을 좌지우지하며 잘 빠져나가던 차민호가 “본래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에 감상적으로 빠져버리는 이야기는 18회 동안 쌓아 놓은 정의 구현을 통한 사이다 결말에 대한 갈망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일이다. 갑자기 약해진 악역이 신파적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 결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진정한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권선징악이라는 단순한 구도조차 명쾌하다고 보기 어려운 <피고인>은 그래서 나아가 어떤 주제의식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피고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드라마는 애초에 “누가 이 시대의 피고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중한 질문을 담아낼 수도 있었다. 박정우라는 무고한 인물이 피고인이 되고, 정작 살인자인 차민호가 권력을 손에 쥐고 버젓이 잘 살아가며 법망을 빠져나가는 그 구도만 잘 살려냈어도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고인>은 그런 주제의식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고구마 전개를 통한 시청률 낚기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였던 것. 물론 주제의식 같은 메시지보다 이야기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됐다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가 개연성을 잃어버리면서 억지 반전을 통해 만들어내는 충격요법이 진정한 이야기의 재미를 주기는 어렵다. 

최근 들어 이만한 시청률을 가져간 드라마도 드물었지만 <피고인>은 여러모로 적지 않은 문제들을 남긴 드라마였다.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시청자들의 혹평도 늘어갔다는 건 그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애초에 고구마를 통해 시청자들의 감정을 억압함으로써 시청률을 겨냥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 제대로 된 엔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애초 사이다 엔딩은 고구마 전개의 끝에 보상처럼 주어질 것처럼 여겨진 환상이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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