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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같은 아이가 전하는 애들 같은 어른 세상

 

이 숟가락 무겁다. 무거워서 좋아요. 이모랑 살 때는 즉석밥 많이 먹었거든요. 설거지거리 안 생기게 일회용 숟가락으로. 밥을 거의 다 먹으면 숟가락으로 그릇 바닥을 긁게 되잖아요.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플라스틱 바닥을 긁게 되면 너무 가벼워서 튕겨나가기도 하고 그냥 기분이 이상해져. 먹은 밥도 날아가 버릴 것 같고.”

 

'오 마이 금비(사진출처:KBS)'

이제 열 살짜리 아이 금비(허정은)가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 놓는다. 이 아이는 곧 자신이 보육원에 가게 될 것이라는 걸 안다. 애써 아이를 보살피려 노력했지만 부모도 친족도 아닌 강희(박진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고작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 한 끼를 내주는 것뿐. 밥그릇을 숟가락으로 툭툭 치는 금비는 그 소리가 좋다고 말한다. “묵직하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강희는 아이에게 언제든 자신의 집으로 와도 된다며 아이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자신이 이 집에서 제일 무거운 그릇이랑 숟가락 꺼내놓고기다릴 거라고 얘기해준다.

 

이 아이에게 밥이란 그냥 밥이 아니다. 그건 아이가 응당 가져야할 안정감 같은 것이다. 그래서 플라스틱 숟가락과 플라스틱 밥그릇이 주는 그 가벼워 튕겨나갈 것 같은 느낌은 아이가 현재 처한 현실 그대로다. “먹은 밥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그런 불안한 집, 혹은 가족. 아이는 그래서 무거운 그릇과 숟가락이 좋다고 말한다. 이렇게 어른스러울 수가 있나.

 

그 무거운 그릇과 숟가락을 챙겨줘야 할 어른들은 그러나 마치 애들 같이 철이 없다. 엄마라는 사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가 묘연하고, 사실상 아이를 키워온 이모라 불리는 어른도 아이를 버렸다. 그리고 보내진 아빠 모휘철(오지호)은 사기꾼이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그는 떼어내야 할 혹처럼 버거운 존재가 되어있다. 제 앞가림하기도 어려운 처지니.

 

그래서 아빠라는 자가 틈만 나면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려고 하지만 그래도 자식이라 달려드는 차 앞에서 아이를 구하려 뛰어든다. <오 마이 금비>가 대놓고 금비라는 아이와 저 비정한 사기꾼들이 득시글대는 어른들의 세계를 대결시키고 있다면 모휘철이라는 아빠는 그 중간지대에 서 있는 인물일 게다. 아이가 무슨 힘이 있을까 싶지만 모휘철은 점점 이 아이에게 마음이 기운다.

 

대신 차에 치인 모휘철이 가까스로 깨어나자 금비는 아빠를 놓아주겠다고 말한다. “약속은 지켜야지. 아저씨 정신 잃고 있을 때 기도했어. 아저씨 살려주면 보육원 가도 좋다고. 그러니까 빨리 가. 들키면 나까지 창피하다고.” 아이를 챙겨야할 어른이 거꾸로 아이의 배려를 받는다. 그것도 스스로 보육원에 들어가겠다고.

 

앙다문 입술, 푹 숙여진 고개,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는 얼굴은 어린 나이지만 어른의 그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눈물을 쏟아낼 때는 영락없는 아이일 수밖에 없다. KBS 수목드라마 <오 마이 금비>는 어찌 보면 지독할 정도로 잔인하다. 이 어린 아이 금비(허정은)를 이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에 던져놓다니.

 

하지만 금비는 그 비정한 세상에서 어른들이 잃어가는 많은 것들을 그 존재 자체가 드러낸다. 아이는 어른을 오히려 걱정하고 배려하고 그를 위해 울어주며 심지어 떠나 주겠다고도 말한다. 악덕 채무업자로 모휘철을 쫓아다니는 차치수(이지훈)가 자신이 한 때 (아빠의)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자, 금비는 한번 친구면 친구지 아닌 건 뭐야?”라고 되묻는다. 그런 금비에게 차치수는 아빠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고 나중에 자기가 속였다는 사실도 잊어버려. 남의 인생 망쳐놓고 지가 그런 짓 한 건 기억도 못하고... 그놈하고 있으면 너도 그렇게 돼.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금비는 절대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다.

 

유일하게 금비를 챙기려는 강희는 자신의 아이를 잃었다. 그래서 유독 금비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 어째서 어른들은 아이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의 아이들이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는 걸 깨닫게 될까. <오 마이 금비>는 그래서 금비라는 아이를 세워두고 어른들을 혼내는 중이다. 이토록 맑고 순수한 영혼의 아이가 무거운 그릇에 무거운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밥 한 끼를 먹지 못하게 만들었는가를 질책한다. 하수상한 시국과 사건과 사고들 속에서 아이들을 잃은 기억이 있던 우리 어른들은 그래서 이 아이 앞에서 모두 유죄일 수밖에 없다

Posted by 더키앙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 <부산행>보다 더 독하다

 

<부산행>에서 시작해 <터널>로 이어지고 <서울역>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만 같다. 올 여름 영화 시장을 뜨겁게 달군 키워드는 다름 아닌 재난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좀비 영화로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우리네 현실을 떠올려보면 왜 이런 신드롬이 일어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좀비만도 못한 우리네 현실에 대한 서민들의 공감이다.

 

사진출처:애니메이션<서울역>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서울역><부산행>의 프리퀄의 성격을 갖지만 훨씬 더 독한 현실 비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본래 연상호 감독 자신의 영역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실의 디스토피아를 가감 없이 그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연상호 감독은 이번 <서울역>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의 현실이 어떤 지옥을 만들고 있는가를 여실 없이 드러내주었다.

 

서울역의 한 켠을 채우고 있는 노숙자 중 한 사람이 좀비의 시작점이라는 건 이 애니메이션이 하려는 이야기를 압축한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부산행>은 막연하게나마 부산이라는 목적지가 제시되지만(물론 그게 해결점은 아니겠지만) <서울역>은 애초에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섬뜩하다. 그들은 좀비들이 출몰하는 서울역 주변을 도망 다니며 헤매다 좀비가 되거나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집 나온 소녀 혜선은 남자친구인 기웅과 동거하며 근근이 살아가기 위해 몸을 팔기도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인 주인공이다. 어느 날 기웅이 인터넷에 하룻밤 파트너를 찾는다며 혜선의 사진을 올리고 그걸 본 아빠 석규가 좀비들이 득시글대는 서울역 근처에서 그녀를 찾아다니는 게 이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보다 더 흥미로운 건 좀비들이 출몰하는 상황들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네 현실을 아프게도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좀비들에 쫓겨 서울역 근처를 탈출하려 하지만 이미 전경들에 의해 봉쇄되어 시위대 취급을 받게 된 생존자들 속에서 갑자기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한 사내가 나서는 장면이 그렇다. “난 나라를 위해 일한 애국자야. 아마도 빨갱이 놈들이 저지른 짓 같은데 난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과 같이 죽을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외치는 사내의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해 섬뜩하게 다가온다.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지하철 철로를 걸어가던 혜선이 같이 탈출한 노숙자에게 아빠가 절 찾고 있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울며 말하자 그 노숙자가 난 갈 집이 없어.”라고 울먹이는 장면이나, 마지막 시퀀스에 혜선이 종착점처럼 당도한 곳이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모델하우스라는 것도 연상호 감독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돌아갈 집이 없는 그들에게 모델하우스는 진짜 집이 아니지만 너무나 환상적인 공간처럼 다가온다. 물론 그곳은 결코 그들의 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결말이지만.

 

<서울역>은 그래서 비극적인 우리네 삶의 밑바닥을 그려내고 거기서 현실의 비정함을 끝까지 담아내는 결코 해피엔딩 따위를 기대하게 만들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구마만 만 개 먹는 것 같은 무거움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네 삶이 좀비만도 못하다는 걸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통쾌함을 주는 면이 있다. <부산행>보다 더 독하고 끔찍한 상황이 펼쳐지지만 우리네 답답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흥미로워질 수 있는 작품, 바로 <서울역>이다

Posted by 더키앙

아주 예전 곤지암에 사는 화가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작업실로 쓰시는 집이었는데 넓은 마당과 집 구석구석 
선생님의 손때가 묻은 작품들이 투박하게 놓여져 있었죠.
TV가 없어서 우리는 서로 얼굴보고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술도 많이 마셨죠.
선생님이 집 뒤켠에서 따온 호박을 듬성듬성 자르고
햄 하나를 통째로 꺼내서 역시 대충 썰어 넣고는
볶아서 안주로 내놓으셨습니다.
글쎄요... 맛으로 치면 식당처럼 맛깔나진 않았지만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여긴 농약도 없어. 그냥 먹어도 되지."
그 말 한 마디에 왠지 더 맛이 나더군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노래도 듣고
그러다 녹차도 마셨습니다.
차와 술은 함께 하면 안된다고들 했지만
그 때는 녹차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죠.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곤지암 소머리 국밥집에서 해장을 하고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곤 했죠.
사실 뭐 특별한 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저는 늘 그 집을 떠올립니다.
선생님...

아마 시간이 지나고 내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일 것입니다.
그 집은 아주 아름다운 집으로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언제든 가고 싶은 곳. 힘들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곳.
뭔가 늘 얻어갔던 곳. 마음 하나 편하게 놓고 사색에 잠길 수도 있었던 곳.

블로그를 하면서, 나는 늘 이 곳이 내 집이다, 이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촌스럽게도 '홈페이지' 세대였던 나는 그 홈페이지도 집으로 생각했죠.
그래서 가끔씩 누군가 허락도 받지 않고 저벅저벅 들어와 침을 뱉거나
심지어 용변(?)을 보고 가면 정말 화가 났습니다.
이 곳,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던가요?
요즘은 꼭 그런 것 같지 않더군요.
이제 블로그가 마치 공적인 공간이나 되는 것처럼
당연스럽게 마구 글을 달기도 하니까요.

어떤 한 블로거가 자기 집에서 장사를 한 모양입니다.
뭐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죠.
세상의 많은 것들이 처음부터 상업화되진 않았을 겁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자본이 찾아오고,
그 때부터 그 사람 많은 곳은 사람살기 어려운 곳이 되버리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인 듯 합니다.

덕지 덕지 상품들의 흔적이 묻어난 곳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지금 그 때 그 아름다운 집이 떠오릅니다.
선생님도 떠오르고요..
Posted by 더키앙

어린 시절, '날으는 교실'이라는 책을 보고 마음을 온통 빼앗겼던 적이 있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책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이었는데, 1930년대초 히틀러 집권시기에 작가가 독일국민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전해주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하는군요. 책 내용 속에 실제로 날아가는 교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동급생들의 좌충우돌 재미난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이 책에서 날아가는 교실을 자꾸만 떠올렸더랬습니다. 저렇게 재미있게 지내는 학교생활이라니! 그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과외를 전전했던 저로서는 마치 진짜 신나게 날아가는 교실처럼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업'을 보면서 저는 이 어린 시절의 상상을 다시 떠올리게 됐습니다. 집에 풍선을 가득 매달아 하늘로 둥실 떠오르는 상상력이라니! 이제 나이 사십을 넘겨 두 아이의 아빠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저에게 현실의 집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파트 청약통장과 은행 대출과 자꾸만 오르는 전세비를 뜻하는 것이고,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마땅히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구해야하는 보금자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운좋게도 금싸라기 아파트에 당첨되어 순식간에 몇 억씩을 벌었다는 로또 같은 것이고, 누군가는 단 몇 평 남짓한 그 공간도 용납되지 않아 쫓겨나야만 하는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업'의 주인공 칼 할아버지의 중년의 삶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의도적으로 이 중간지대인 중년의 삶을 짧게 축약해버리죠. 어린 시절의 칼이 앨리를 만나 모험을 꿈꾸는 시기의 에피소드가 나오고는, 둘이 결혼하고 늙어가고 결국 앨리를 먼저 보내는 장면은 경쾌하면서도 짧게 처리돼죠. 그 때 그 시간을 축약하는 상징적인 동작들 중에 연달아 목에 채워지는 넥타이가 인상적입니다. 칼 할아버지의 중년의 삶은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무게에 붙박여있었던 것이죠.

칼 할아버지와 앨리가 늙어가는 것만큼 눈에 띄는 것은 집의 변화입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집은 폐가처럼 남루한 곳이었지만, 둘은 결혼해서 그 곳을 보금자리로 꾸미고 차츰 그 텅빈 공간들은 두 사람의 살림으로 채워지죠. 이것은 살아가며 쌓여가는 삶의 무게와 거의 같은 것으로 은유됩니다. 어린 시절 그토록 가벼워보였던 집은 점점 그 안에 쌓여진 물건들과 현실의 기억들로 무거워지고 그럴수록 집이라는 공간은 거기 살아가는 이들을 속박하게 만들기 마련이죠.

주변지역이 개발되고 있는데 고집스레 그 집을 지키고 있는 칼 할아버지는 앨리와의 기억의 무게 속에 침잠해 살아가는 무거운 존재입니다(실제로 이 캐릭터는 육중한 몸과 거동 또한 불편한 설정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집에 풍선을 달아 날아올리는 것은 발상의 전환입니다. 풍선을 파는 것은 그의 직업이었는데, 그 현실적인 일은 이처럼 재기발랄한 상상력의 일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칼 할아버지의 그 모험에 동참하게 되는 러셀(7세)은 어쩌면 칼 자신의 분신인지도 모릅니다. 그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이 차츰 가까워지는 과정은, 칼 할아버지가 그렇게 멀리 두었던 자신의 순수했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것이니까요.

이 애니메이션은 대단히 매력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보다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더 깊은 인상을 만들어냅니다. 현실을 벗어나 모험을 꿈꾸는 이야기를 이처럼 집에 풍선을 다는 것 하나로 간결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작품은 드물죠. 풍선이 하늘 위에 떠 있고, 그 풍선이 무거운 집을 들어올리고 있고, 그 집이 날아갈까봐 칼 할아버지가 줄로 집과 자신의 몸을 묶어놓는 그 그림은 우리네 삶을 그려놓은 기막힌 초현실적인 구도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풍선에 매달려 날아가는 집은 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물론 저와 함께 간 아이들은 그 기발한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히 유쾌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저는 그 유쾌함 속에서 어딘지 모를 울컥함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죠. 칼 할아버지를 연기한 이순재의 더빙은 작품을 더 친근하게 만들어주었고, 본 영화 시작 전에 한 '업'의 미니 버전 같은 단편도 좋았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저는 저대로, 한층 업된 분위기로 극장을 나설 수 있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Posted by 더키앙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한낮의 극장 풍경은 꽤 낯설기 마련이죠. 텅빈 극장 안 곳곳을 채우고 있는 습기 젖은 먼지 냄새, 아무도 없는 그 거대한 공간 속에 혼자 앉아 있다는 스산함 혹은 음산함, 그리고 압도적으로 커보이는 스크린과 압도적으로 비어있는 객석의 대비가 주는 묘한 쓸쓸함까지... 영화를 얘기하려고 하면서 이런 극장풍경을 주절대고 있는 건, '우리 집에 왜 왔니'란 영화가 바로 이 극장의 풍경과 서로 닮아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가끔 그런 경험이 있지만 '우리 집에 왜 왔니'를 보던 날은 비가 왔고 극장은 텅 비어 있어 저 혼자 그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앉았더랬습니다. 이 영화가 공포영화였나? 죽은 수강(강혜정)의 사체를 근접촬영으로 보여주는 첫 장면에서 이런 생각이 든 것은 그 텅빈 공간이 주는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공포와 스릴러의 트릭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멜로 이야기(그렇다고 이 영화가 사랑타령을 하는 영화는 아닙니다만)를 하고 있죠.

스토리로만 보면 이 영화는 참 기이합니다. 아내와 아기(뱃속의)를 모두 잃고 난 후 자살을 꿈꾸는 한 남자(병희 : 박희순)의 집에, 한 남자에 대한 집착으로 노숙자처럼 살아가게 된 수강이 무단침입을 합니다. 마침 병희의 집에서 그녀가 집착해온 남자 지민(승리)의 동태를 살피기가 좋기 때문이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감금한 채 기이하게 함께 살게된 그들은 서로의 사연들을 털어놓으며 점점 가까워지게 되죠. 그리고 결국엔 헤어지게 되고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병희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수강이 죽음으로써 병희와 그 마음을 연결시킨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 이렇게 얘기하면 참 단순한 영화로만 보이죠.

하지만 제가 주목한 것은 이 영화가 가진 공간, 즉 집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제목이 '우리 집에 왜 왔니'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도 바로 그 공간에 대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수강이라는 캐릭터는 '외딴 집에 혼자 사는 미친 년'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죠. 바로 그것 때문에 지민이 말하듯 사람들이 그녀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녀의 집에는 애초부터 아무도 없죠. 그리고 그 집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지민이었기에 그녀는 스토커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게 됩니다. 수강에게 집이란 누군가 들어와 채워주었으면 하는 그런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반면 병희의 집은 있었던 모든 것이 파괴된 공간입니다. 아내가 아이까지 갖게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여겼었죠.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집은 이제는 지워내버리고픈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어버리죠. 아무리 내다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기억을 비워내는 방법은 자살이 유일하기에 그는 자살을 꿈꿉니다. 수강의 집은 애초에 비워져 있어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이고, 병희의 집은 이제는 비워내고 싶어도 비워내지지 않는 악몽으로 변한 기억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공간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병희의 대사대로 표현하자면 병희는 "이제 누굴 사랑하기 글렀고," 수강은 "이제 누구한테 사랑받기 글른" 그런 공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수강의 집착적인 사랑은 자신의 공간에 누군가를 채워넣으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란 걸 깨닫고 또 그걸 깨닫게 해준 병희를 어느새 사랑하게된 수강은 이제 병희의 집 주변을 서성일 뿐,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 집착을 벗어난 진정한 사랑에 대해 알게 된 것이죠. 수강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여전히 비관적인 병희(그 자신이 수강을 이미 사랑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에게 수강은 병희가 한 말을 되돌려줍니다.

"아저씨가 말한것처럼, 아저씬 다시 사랑하기 글렀고 난 다시 사랑받기 글렀다는게 맞는거 같아. 하지만 그 반대는 어때? 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저씬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그랬죠. 수강이 자신의 공간을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기다리고 갈구하던 모습에서 병희의 집을 찾아 들어간 순간부터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바로 그 순간부터 병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아왔는 지도 모르지요. 수강이 끝내 웃으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그 차디찬 비닐하우스에서도 따뜻했던 병희네 집에서의 추억을 환상처럼 떠올렸다는 건 이 영화가 말하는 독특한 사랑에 대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 텅빈 공간이 꽤 쓸쓸했고, 그것이 마치 저 수강이 평생을 느껴왔던 쓸쓸함과 닮아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누군가 찾아와주길 바라는 수강과 이 영화가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죠. 이 정도면 비오는 한낮에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값어치는 충분하다 생각되었습니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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