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패', 자기 운명과 대결하는 사극

'짝패'(사진출처:MBC)

왈짜패들은 폭력으로 민초들의 피를 빨아 부를 축적하고, 포청의 관원들은 잡아야할 이들 왈짜패들의 뇌물을 받아먹고 오히려 그들을 비호해준다. 그렇게 관원들에게 들어간 검은 돈은 구석구석 상납되면서 조정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 왈짜패의 두목, 왕두령(이기영)은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포청까지 가마를 타고 들락거린다. 관원들마저 민초들을 핍박하는 도적이 되어버린 상황. 민초들에게 희망이 있을 리 없다. 부정축재한 관원들을 털어 민초들에게 되돌려주는 아래적의 탄생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짝패'는 의적이 어떻게 탄생하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래적의 수장 강포수(권오중)는 일찍이 소명을 깨닫고 썩어빠진 조정을 향해 먼저 총을 겨누는 인물. 그러자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이 하나 둘 그의 밑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어찌 목숨을 거는 이 의적의 길이 쉬운 선택일까. 장꼭지(이문식)는 그저 도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었으나, 아들인 도갑(임현성)이 아래적에서 활동하다 죽음을 맞게 되자 자신도 아래적이 된다.

천둥(천정명) 역시 마찬가지. 그는 거지 움막에서 자라나면서 천민 출신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지만 처음에는 아래적의 활동에 비판적이었다. 의적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민초들에게 되돌려지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를 가로막는 것은 귀동(이상윤)과의 우정과 동녀(한지혜)에 대한 연정 때문이기도 하다. 양반집 자제이지만 자신을 짝패로 여기는 귀동과 역시 양반집 규수지만 자신을 존중해주는 동녀 사이에서 천둥은 핍박받는 민초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천둥의 조력자처럼 여겨지지만, 어찌 보면 천둥이 넘어서야할 벽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강포수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천둥은 자신의 그런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존중해준다고 생각했던 동녀가 사실은 철저히 반상을 나누고 차별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반쪽 양반의 운명을 가진 그는 "양반이 자랑이냐. 양반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느냐"며, "내 몸에 흐르는 더러운 양반의 피, 아씨 면전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뽑아버리고 싶다"고 외친다.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결국 천둥은 강포수의 유지대로 아래적의 수장이 되기로 마음먹고 그 징표라도 보이겠다는 듯이 민초들을 괴롭히는 왕두령을 척살한다.

천둥의 캐릭터가 선명하지 않고 어딘지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이 사극이 그리는 것이 단순히 홍길동 같은 의적의 활약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짝패'는 대신 그 과정을 포착한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는 한 상단의 행수가 어떻게 해서 의적의 수장이 되는가를 아주 느린 속도로 보여준 것. 그 과정에서 천둥의 행보를 가로막는 인물로서 동녀와 귀동의 존재 역시 확실한 어느 한 선을 보여주지 못한다. 즉 동녀는 어찌 보면 민초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두철미하게 반상을 나누는 인물이고, 귀동은 천둥과 반상을 넘어 우정을 쌓는 인물로 포청의 부패를 혐오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소속, 즉 김진사(최종환)의 아들이자 포청의 관원이라는 뿌리를 부인할 수 없다.

즉 '짝패'는 태생적으로 결정되어있는 자신들의 운명과 스스로 대결하는 사극이다. 즉 천둥은 반쪽 양반이라는 운명을 넘어 의적이 되는 인물이고, 동녀는 그 양반이라는 틀 속에 갇힌 인물이며, 귀동은 반상을 구별하는 세상과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어찌 운명을 넘어선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짝패'의 캐릭터들이 어딘지 방황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 과정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이것이 드라마의 대중성을 위해서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게 분명하지만, 그 개인적인 갈등의 양상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의적의 탄생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낭만적이고 명쾌하며 간단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닐 테니까.

'짝패', 출생의 비밀 코드를 역주행하는 드라마

'짝패'(사진출처:MBC)

'짝패'의 주인공들, 즉 천둥(천정명)과 귀동(이상윤) 그리고 동녀(한지혜)는 왜 존재감이 별로 없을까. 강포수(권오중)나 장꼭지(이문식), 달이(서현진)같은 주변인물들과 비교해보면 이 주연들의 힘은 너무나 약하다. 천둥은 아직까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고, 귀동은 알아버린 출생의 비밀의 덫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다. 동녀는 민초에 대한 의식도 없고 하다못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심마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천둥과 귀동 사이에서 어장관리나 하는 속물처럼 그려지고 있다.

주변인물들이 자기 위치에서 명쾌한 삶의 선택을 하며 심지어 죽기를 각오하고 절실한 삶을 살아가는 반면, 이 주인공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다. 세상에 대한 고민보다 자신에 대한 걱정(출생, 신분 같은)을 더 많이 하며, 사랑과 우정 타령을 하고 있는 이들은 주변인물들의 절실함을 따라오지 못한다. 왜 주인공은 조연이 되어가고, 주변인물들은 주연처럼 여겨지게 되는 걸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것은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짝패'는 '출생의 비밀' 코드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 출생이 정해버린 운명을 뛰어넘는 인물들에 주목하고 있다. 천둥과 귀동은 막순(윤유선)에 의해 서로 신분이 뒤바뀐 운명을 살아가지만, '짝패'라는 우정으로 그 운명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귀동과 갖바치 딸인 달이가 서로 교류하고, 천둥을 사윗감으로까지 생각하는 김진사(최종환)의 이야기도 바로 이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는 관계를 말해준다.

김진사가 자신의 아들이 사실은 천둥이라는 것을 알게된 후에도 귀동에게 "너는 둘도 없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출생의 비밀' 코드에서 봐왔던 그런 장면이 아니다. 결국 출생과 신분으로 나뉘어진 운명과 대결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짝패'다. '짝패'라는 제목은 이 사극이 그 신분을 넘어서는 해법으로서 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출생의 비밀'이 보통의 흐름, 즉 복수극으로 흘러가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해하는 관계로 이어지면서 주인공들은 너무나 노회해버렸다. 드라마의 힘은 주인공들이 가진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짝패'의 천둥이나 귀동에게서는 뭔가 강렬한 욕망이 잘 보이질 않는다. 사극에서 가장 큰 욕망이라면 신분을 뛰어넘는 일이지만, 이 사극에서는 이미 '짝패'라는 관계로 신분 따위는 초월해버린 상태다. 그러니 욕망이 사라진 주인공들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짝패'가 가진 '출생의 비밀'을 뛰어넘는 주제의식은 물론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좀 더 천둥과 귀동의 욕망이 전편에 그려질 필요가 있다. 강렬한 욕망을 가진 이들이 부딪치고 거기서 어떤 화해의 접점을 찾아가야지, 욕망이 거세된 주인공들이 그저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은 자칫 극의 힘마저 빼버리게 된다. 강포수나 달이, 그리고 심지어 장꼭지 같은 인물들은 그 성장과정이 눈에 띄지만, 천둥과 귀동의 성장은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역시 욕망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녀가 이 둘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대상인 그들이 너무 한가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천둥과 귀동, 그들이 어떤 소명을 깨닫고 거기에 몸을 던지는 과정이 보여진다면 그들을 연모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동녀의 캐릭터도 바뀔 수 있다.

'짝패'는 '출생의 비밀'을 코드로 가져왔지만, 사실상 이 코드와 역주행을 하는 사극이다. 왜 모든 건 출생이 정한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하는가. 그 태생부터 정해진 운명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시청률면으로 본다면 이런 역주행은 사실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이미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에 깊이 중독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저항감은 분명 있을 수밖에. 그래도 주인공들이 다시 욕망을 깨워 이 역주행을 성공시키는 과정을 보기를 바란다. '짝패'의 우정이 '출생의 비밀' 같은 운명의 고리에 붙박힌 우리네 드라마의 고질적인 코드를 깨주기를.

좌절된 욕망을 투사할 악역이 필요해

'로열 패밀리'(사진출처:MBC)

'짝패'의 막순(윤유선)은 자신을 겁탈해 아이까지 갖게 한 양반집 주인을 찾아가 그 임종을 함께 해준다. 물론 선한 의도는 없다. 유산 때문이다. 죽음에 임박한 사내를 종용해 막순은 5만 냥의 유산을 받아낸다. 이 과정에서 그 죽은 사내의 아들로 둔갑한 착한 천둥(천정명)은 막순의 쇼를 괴로워한다. 유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막순은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순박한 쇠돌(정인기)에게 한 몫을 떼어주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필요없다"며 "너만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서민들의 질박한 삶에 천착하는 '짝패'의 인물들은 대부분 선하다. 하지만 이 사극에서 막순만은 예외적인 존재다. 그녀는 적극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로 자신의 아들을 양반으로 둔갑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이 된 천둥을 이용해 그 아버지의 유산마저 노리는 인물이다. '짝패'는 이른바 착한 사극으로 긍정적인 인물들의 따뜻한 이야기들이 넘쳐나지만 그만큼 소소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강한 극성을 부여하는 인물은 역시 막순 같은 악역이다.

'마이더스'의 유인혜(김희애) 대표와 그 라이벌로 등장하는 유성준(윤제문) 역시 이 드라마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다. 유인혜 대표는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속으로는 욕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악녀다. 유성준은 뭐든 갖고 싶을 걸 갖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 머니 게임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김도현(장혁)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이자 착한 캐릭터인 이정연(이민정)은 너무 존재감이 약하다. 현실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악역의 존재감이 더 뚜렷하기 때문에 월화 드라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천정명과 한지혜의 연기력 논란은 일정부분 어딘지 욕망이 거세된 캐릭터가 갖는 희미한 존재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민정이 연기하는 이정연이라는 캐릭터가 어딘지 답답하고 수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악역이 주목받는 상황은 수목극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로열 패밀리'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 주인공이 그저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괴물 같은 야누스적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김인숙(염정아)이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반면, 한지훈(지성) 같은 캐릭터가 보조적인 느낌을 주는 건 그 욕망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욕망에 몸을 던지는 정가원의 여인들의 암투가 재미의 근간을 이룬다.

반면 시작부터 관심을 끌었으나 어딘지 소소한 느낌에 머물고 있는 '49일' 역시 이른바 착한 드라마다. 물론 신지현(남규리)이 사고 뒤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민호(배수빈)와 친구라 여겼던 인정(서지혜)이 사실은 재산을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실상이 드러나고 신지현은 분개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과적으로 복수가 아니라 '진실된 눈물 세 방울'을 찾아가는 스토리를 갖고 있다. 주인공인 신지현의 현실적인 욕망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선한 인물들의 선한 이야기에 대중들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일까. 어떤 강렬한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실현시켜 나가려 심지어는 어떤 선을 넘는 그런 캐릭터들에 대중들은 열광하고 있다. 반면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착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대중들은 비현실적으로 여긴다. 왜 그럴까. 드라마의 키가 악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은 '욕망'이다. 욕망 추구가 윤리나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얘기는 그만큼 욕망이 좌절되는 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비록 탈선한다고 하더라도 그 욕망의 질주를 해보고 싶은 욕구.

특이한 점은 이 악역들에 단연 악녀들이 부쩍 눈에 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심지어 속내를 숨긴 채 십여 년을 칼을 갈고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서슴지 않고 밟고 올라서는 그 악녀들은 지금 대중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풍경에서 엿보이는 것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여성들(로 대변되는 약자들)의 좌절된 욕망이다. 착하게 모든 걸 감내하고 견디는 삶이 더 이상 현실적인 보상이나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는 현실. 그 누가 이들 악역에 매료되는 대중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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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불꽃'(사진출처:MBC)

알고 보니 재벌가 숨겨진 자식? '출생의 비밀' 없이는 드라마가 안되는 걸까. 한때 비판을 받으며 사라지는 듯 했던 드라마의 '출생의 비밀' 코드가 이제는 드라마의 필수적인 항목으로 자리하는 느낌이다. '욕망의 불꽃', '웃어라 동해야', '호박꽃 순정', '신기생뎐', '폭풍의 연인', '마이 프린세스'처럼 아예 출생의 비밀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는 물론이고, '드림하이', '프레지던트' 같은 드라마에도 양념처럼 출생의 비밀은 등장한다. 물론 사극도 예외는 아니다. '선덕여왕'에서도 비담이 사실은 미실의 자식인 것이 뒤늦게 밝혀지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드라마적 흥미를 위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최근 시작된 '짝패'는 아예 전면에 출생의 비밀을 내세운다. 같은 날 양반의 자제와 천민의 자제가 동시에 태어나는데, 양반 자제의 모친이 죽게 되자 천민 자제의 모친이 양반 자제의 유모가 된다. 그 유모가 자신의 아들과 양반 자제를 바꿔치기 하면서 서로 엇갈리는 운명이 펼쳐진다.

'출생의 비밀' 코드가 점점 드라마 전체에 사용되게 된 것은 이만큼 시청률을 견인하는데 좋은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던 '제빵왕 김탁구'는 대표적이다. 회장님의 아들이지만 어린 시절 내쳐져 스스로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다뤘다. '자이언트'는 물론 출생의 비밀을 그대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변형된 형태의 이 코드가 등장한다. 즉 어린 시절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성장한 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가족이 상봉하는 그 지점부터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 코드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흩어졌던 가족의 만남'이다. 즉 '출생의 비밀' 코드 밑에는 우리네 특유의 혈연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 혈연과 함께 깊게 연루되어 있는 것이 신분상승이다. '마이 프린세스' 같은 드라마는 공주병을 가진 이설(김태희)이 사실은 조선 마지막 공주였다는 게 밝혀지고 궁으로 들어와 공주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폭풍의 연인'에서 별녀(최은서)는 우도에서 자라난 장애까지 가진 여자로 서울 부잣집에 얹혀사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실은 굴지의 재벌기업 회장인 유대권(정보석)의 숨겨진 딸로 밝혀지면서 하루아침이 삶이 바뀌어버린다. 혈연의식과 신분상승이 맞물리면서 생겨나는 강력한 욕망들은 드라마에 다양한 흥밋거리를 만들어낸다.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서 서로를 찾기 위해 갈망하는 시퀀스가 그 하나가 되고, 엇갈리는 운명 속에서 부모 자식이 만나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원수 관계에 서는 시퀀스가 그 하나다. 그러다가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만나는 지점에서 그 욕망은 폭발하게 되고, 그 후에 순식간에 바뀌어지는 운명을 확인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출생의 비밀' 코드에 핵심적인 것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알 수 없는 운명 속에 허우적대고 있지만, 그걸 시청자들은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신적인 시선'이다. 저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운명. 이 시점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치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쥔 듯한 권력을 부여한다. '출생의 비밀' 코드에 유독 시청자들이 열광하면서도 비난이 끊이지 않는 건 이 '쥐고 있는 듯한 권력'이 사실은 작가에 의해 휘둘리면서 어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막장드라마가 자주 쓰는 '출생의 비밀' 코드는 따라서 시청자들이 열망하는 운명조종자로서의 권력과 늘 거리를 만들어 애태우게 하는 작가의 노림수인 경우가 많다.

사실 스토리텔링의 역사를 통해 보면 '출생의 비밀'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근원적인 욕망이다. 유리왕이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가는 이야기, 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 스토리의 원형이 우리 유전자 속에 오랜 세월 동안 각인된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작금의 우후죽순 생겨나는 '출생의 비밀' 코드들은 이것을 그저 인간의 본능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는 현재의 현실과 맞물리는 사회적인 맥락이 읽혀진다. 즉 가족 같은 혈연에 대한 집착, 마치 로또처럼 출생 하나로 인생을 역전시키겠다는 욕망, 그만큼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이런 것들이 그 속에서는 꿈틀거린다.

한때 유행처럼 불었던 성장드라마들이 최근 들어 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늘어난 '출생의 비밀' 코드와 연관되어 주목될만한 현상이다. '대장금'이나 '선덕여왕' 같은 사극, 특히 여성사극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 인물의 성장드라마가 대중들을 열광시켰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이 이미 제목에서부터 덕만이 여왕이 될 거라는 걸 암시하는 것처럼, 이들 드라마는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장의 과정에 집중한다. 어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장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 코드는 다르다. 과정이 아니라, 아예 태생적으로 결과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인물은 마치 기연처럼 자신이 본래는 이렇게 비천한 인물이 아닌 비범한 출생을 가진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고 하루아침에 삶이 바뀐다.

물론 출생이 뒤바뀌어도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 운명을 바꾸는 인물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개인적인 성공을 구가하던 인물들에게도 결국 출생의 비밀은 하나의 선물처럼 여겨지게 된다는 점이다. 네가 그렇게 고생했으니 응당히 받아야 될 선물이라는 판타지를 주는 셈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현대인들의 변신욕구는, 현재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니라 가장 손쉽게도 과거의 출생을 바꿈으로써 이루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바로 꽉 막힌 현실이 좌절시키는 현대인들의 성장이다. 얼마나 팍팍한 삶이면 그 삶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출생마저 바꾸고 싶어 하겠는가.

출생에 목매는 드라마들이 양산되는 것은 물론 시청률을 염두에 둔 얄팍한 상술이다. 하지만 이 상술에 과거나 지금이나 시청률이 담보되는 현상은 변하지 않는 사회 현실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신화들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이 출생의 비밀을 건드린다고 해서 그것을 그저 인간의 본능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 바꿀 수 있는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출생)을 바꾸려 하는 걸까.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전해 내려오는 스토리들은 어찌 보면 우리를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라며 교육시켜온 사회 시스템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머금고 있는 메시지들, 그것들의 싸움이 그저 스토리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변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출생의 비밀' 코드 속에 숨겨진 지배 시스템의 비밀을 바라봐야 될 시점이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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