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숨은그림찾기, 드라마만큼 재밌네

‘추노’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까메오로 출연한 개그맨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했던 드라마. 이 드라마에 장동건, 이병헌, 송강호, 한석규라는 이름에 이어 유재석과 박명수의 이름이 소현세자의 추종세력 명단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네티즌들에 의해 찾아내져 화제를 만들었다. ‘개인의 취향’에 갑자기 등장한 구준표(?)는 ‘추노’가 주었던 이 숨은그림찾기의 재미를 재발견해주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향숙이!”를 연발하던 백광호 역할의 박노식씨가 소라 머리를 하고 가슴에 ‘구준표’라는 명찰을 단 채 등장했던 것. 시청자들은 반색했다.

그러나 ‘개인의 취향’의 숨은그림찾기는 ‘구준표’에만 머물지 않는다. ‘추노’에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왕손이 역할로 나왔던 김지석은 이 드라마에서도 한창렬이라는 바람둥이로 나온다. 그는 주인공 박개인(손예진)과 사귀었지만 결국엔 그녀를 버리고 그녀의 친구인 인희(왕지혜)와 결혼하려던 사내다. 재미있는 건 이 한창렬이라는 바람둥이의 아버지 역할로 나오는 안석환이다. 그는 ‘추노’에서 방화백으로 출연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뜻이 그렇다는 거여?”, “그게 말이여 당나귀여” 같은 감칠맛 나는 대사로 시청자들을 배꼽 잡게 만들었던 인물.

자세히 보면 그는 얼굴에 난데없는(?) 칼자국을 하고 있는데,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추노’에서의 대길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추노’에서는 손바닥을 삭삭 비비며 서민들의 처세술을 보이던 그가, 이 드라마에서는 대길이처럼 마초 중의 마초로 변신한 것. ‘개인의 취향’에서 안석환이 맡은 한윤섭이란 캐릭터는 진호(이민호)의 아버지를 배신해 현재의 사업기반을 이룬 인물이다. ‘추노’에서 대길의 칼자국은 본래는 없다가 연기자인 장혁의 제안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 과연 이번 한윤섭 캐릭터의 칼자국 역시 안석환의 제안일까.

한편 결혼식장에서 방송이 연결된 지도 모른 채 남자친구를 빼앗긴 것에 대해 넋두리를 한 것으로 인해, 오해를 사게 된 다른 결혼 커플로 등장한 송선미와 정찬은 다름 아닌 주말 드라마 ‘민들레 가족’의 부부. ‘민들레 가족’에서 아내의 몸매가 망가지는 것이 싫어 일일이 식단까지 간섭하는 완벽주의자 민명석(정찬)과 그로 인해 겉으론 화려해보여도 속으로는 망가지는 지원(송선미)의 결혼식 장면이 삽입된 것.

물론 드라마 속의 숨은그림찾기는 의도된 것도 있지만, 의도되지 않은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처럼 숨겨진 그림들을 네티즌들이 찾아내는 과정이 주는 쏠쏠한 재미는 이제 드라마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재미가 분명하다. 그만큼 드라마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깊어졌고, 그로 인해 대중들이 드라마에 참여하려는 욕구도 커지고 있다. 이 숨은그림찾기는 그런 면에서 그 상호작용으로서의 욕구를 채워주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또한 이것은 드라마 간의 상호텍스트성의 재미를 느낄 만큼 우리네 드라마에 대한 대중들의 깊은 이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의 취향' 속에서 발견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추노'의 대길. 그 숨은그림찾기의 색다른 재미는 계속 이어질까. 아마도.

사극불패 신화, 새로움에 달렸다

한 때 사극의 기본 시청률은 20%라고 했다. 그만큼 사극은 극성이 강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시청률을 먹고 들어간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이젠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사극과 의학드라마, 중세와 근대의 하이브리드를 주창하며 야심차게 시작한 '제중원'은 초반 현대극 '파스타'에 밀리더니 정작 '파스타'가 종영한 후에도 26회가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13% 대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다. 새롭게 시작한 이병훈 감독의 '동이'는 한효주와 지진희가 등장하면서 차츰 시청률을 회복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14%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부자의 탄생'이 두 사극을 앞지르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주말시간대에 편성되어 있는 '거상 김만덕'도 마찬가지다. 조금씩 시청률이 오르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15%에 머물러 경쟁작인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에 밀리고 있다. 물론 '동이'나 '거상 김만덕'은 초반이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중원'을 통해 우리는 사극이면 무조건 된다던 그 사극 불패 신화가 깨져가고 있다는 징후를 읽을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에 이른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사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기 때문이다. 작년 '선덕여왕'에 이어, 올해의 '추노'는 사극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최대치로 보여주었다. '선덕여왕'은 여성사극의 성장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스토리의 극점을 보여주었고, '추노'는 스타일리쉬한 영상을 통해 사극이 제공할 수 있는 볼거리의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 '제중원'의 스토리는 너무 정석적이었고, '동이'의 볼거리는 사뭇 밋밋하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제중원'은 구한말 제중원이란 공간의 좋은 소재를 갖고 있으면서도 시청자들에게 어떤 매력을 제시하지 못했다. 주인공 황정(박용우)은 착하나 남성적인 매력이 돋보이지 않았고, 여주인공 석란(한혜진) 역시 개화된 여성이기는 하나 어떤 당찬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다. 황정의 라이벌인 도양(연정훈)은 신분 이외에 황정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는 인물로 설정되어 라이벌로서의 매력을 보이지 못했다.

이들이 보여주는 멜로가 신분제에 얽매여 신파로 흐르는 반면, 제중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추진력을 만들기보다는 일회적인 에피소드의 나열에 머무르는 경향이 짙었다. 가장 극성이 큰 부분일 수 있었던 황정이 형장에 서게 되는 위기상황에서 왕의 부름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는 고대 그리스극의 한 방식)를 떠오르게 하는 해결방식으로 시청자들을 맥 빠지게 만들었다. 또한 갑신정변이나 을미사변 같은 거대한 사건이 지나치게 소소하게 다뤄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동이'는 초반부 캐릭터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빠른 스토리 전개로 몰입이 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이병훈 PD 특유의 추리적인 연출기법은 캐릭터가 형성되었을 때는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극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성인 연기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부분은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또한 '추노' 이후 생겨난 사극에 대한 시청자들의 새로움에 대한 욕구 역시, 성인 연기자들로 전환되면서 '동이'가 소재로 내세운 음악이 등장하며 차츰 채워져 나가고 있다. 이 상황이라면 '동이'는 초반의 부진을 금세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거상 김만덕' 역시 이미연의 등장과 함께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 복수극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상황이 차츰 나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그 스토리가 가진 전형성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이미 '대장금'이 보여준 성장스토리에 '상도' 이후 일련의 퓨전사극들이 보여준 경제 이야기의 재미, 그 이상의 새로움을 현재의 시청자들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극이면 무조건 되던 시대는 지났다. 그만큼 사극은 우리에게 친숙한 장르가 되었고, 어떤 새로움을 기대하게 만드는 장르가 되었다. 그러니 역사 바깥에서 인물을 찾아내고, 거기에 상상력을 붙여낸다고 해서 모두 성공적인 사극이 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제 사극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움이다. 지금껏 다루지 못했던 소재와 지금껏 듣지 못했던 이야기구조, 그리고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상미학. 이제 작금의 사극에 요구되는 것들이다.

역사가 외면한 낮은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추노’는 왜 그토록 많은 죽음을 보여주었을까. 혜원을 호위하던 백호(데니안), 명나라 출신 여자 자객 윤지(윤지민), 원손을 지키던 궁녀 필순(사현진)의 죽음은 소소한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을 저주한 천지호(성동일)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가장 안타깝게 했으며, 태하의 심복 한섬(조진웅)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울렸다. 본래 죽을 운명이었던 최장군(한정수)과 왕손이(김지석)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순진하게 ‘노비들의 세상’을 꿈꾸던 개놈이(이두섭)나 끝봉이(조희봉)를 위시한 노비당 인물들은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 업복이(공형진)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경식(김응수)과 그 분(박기웅)을 죽이고 결국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주인공 대길(장혁) 역시 사랑하는 여인 혜원과 이제는 같은 길을 걷게 된 송태하(오지호) 그리고 원손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위해 죽는 길을 선택했다.

이처럼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줄초상을 당한 경우가 있을까. 캐릭터는 일종의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대리자라는 점에서 그 캐릭터들의 연속된 죽음은 실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따라서 ‘추노’의 줄초상에 대한 일부 시청자들의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추노’는 엔딩에 공을 들였다. 실제 엔딩은 대길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초복(민지아)과 은실이 해를 바라보는 장면(이를 통해 이 실패한 혁명이 실패가 아니라는 전언을 남겼다)과 대길이 해를 향해 화살을 먹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것도 아쉬웠는지 드라마가 완전히 끝난 그 자리에 왕손이와 최장군이 땅을 일구는 장면까지 삽입되었다. 그만큼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고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캐릭터들은 죽었지만, 그 캐릭터들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생생히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캐릭터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결국 새드엔딩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이 사극이 가진 메시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사극 속에서 우리의 시선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많은 낮은 자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쟁 사극 속에서는 한 신에 수십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말 그대로 ‘높은 자들’, 주인공들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그런 사극과 비교해볼 때, 이 사극 속의 죽음은 실로 그 수가 적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저들과는 달랐을 뿐이다. 그저 산 속 나무 둥치에 쓰러져 죽어간 낮은 자들을 ‘추노’는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타의 사극이 지나쳐버린 이름 모를 낮은 자들의 죽음에 대한 조명. 역사가 외면한 그들을 기억하라는 것. ‘추노’의 줄초상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추노', 역사에 이름 한 줄 없는 그들만의 역사

송태하(오지호)가 석견(김진우)을 구명하기 위해 한밤중 몰래 저자거리에서 봉림대군(이준)을 만나는 장면에서 대길(장혁)은 태하처럼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저 건들대며 간단한 목례를 할 뿐. 짧은 장면이지만 이 길바닥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추노꾼 대길과 봉림대군의 만남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것은 우리가 사극이라고 하면 늘 봐왔던 그런 풍경, 즉 왕이나 세자 앞에서는 누구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그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봉림대군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곳은 대길과 태하가 그를 좇는 철웅(이종혁)과 부하들이 한 판 벌이는 자리로 바뀐다. '추노'는 이처럼 역사 속의 인물을 어둠 저편으로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역사 바깥에 존재하던 인물들을 세워놓는다. 봉림대군은 아마도 역사에 수많은 말을 남겼을 것이지만 이 사극에서는 주인공인 민초들이 심지어 농 섞인 말을 계속 떠들어댈 동안 줄곧 침묵하고 있다. 허구의 인물 대길은 그렇게 역사의 인물 봉림대군을 만나 "여기는 내 세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추노'가 그리는 세계는 확실히 과거의 사극들과는 그 시선부터가 다르다. 과거 사극에 등장하던 천민들은 신분상승을 꿈꾸었지만, '추노' 속의 천민들은 더러운 양반들의 세상과 한 판 대결을 벌이고 있다. 신분이 엄연한 시대에 천민들과 양반들이 벌이는 대결. 즉 이 사극은 세상이 뒤집어질 혁명을 꿈꾼다. 하지만 어디 혁명이 쉬운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그 혁명이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혁명은 그리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송태하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열망이 욕망으로 바뀐" 조선비(최덕문)로 인해 뒤집어지고, 노비들의 세상을 꿈꾸는 노비당은 결국 그 분(박기웅)이 이경식(박응수)의 사주를 받은 인물로 밝혀짐과 동시에 와해된다. 업복(공형진)의 의구심은 현실로 나타난다. 즉 '추노'는 저 '수호지' 같은 혁명의 낭만성을 판타지로서 그려내는 사극이 아니다. 오히려 '추노'는 그 혁명의 실패를 아프지만 똑똑히 바라본다.

그래서 결국 남은 것은 혁명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이 되었다. 대길은 조용히 살아가라고 하지만 송태하는 석견과 혜원을 데리고 청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그들을 좇는 철웅과의 마지막 대결이다. 하지만 이 대결 역시 이제는 혁명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대결이 되어버렸다. 대길은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꼭 갚는다"는 말처럼 철웅에 남은 빚을 갚으려는 것이고, 송태하는 개인적인 이유로 끝없이 그를 추격하는 철웅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혁명은 저물었고, 남은 자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렇다면 민초들이 꿈꾸었던 혁명이 이처럼 무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이 사극은 왜 굳이 주목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실패했으나(그래서 역사에 한 줄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당대에 사람답게 살고자 꿈꾸었고 싸웠던 민초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추노'를 통해 수없이 죽어나간 민초들의 삶을 보았고, 그 역사에 한 줄 남겨지지 않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더럽게 팍팍한 인생을 살다간 천지호(성동일)는 물론이고, 업복이와 짝귀(안길강) 그리고 노비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개놈이(이두섭)와 끝봉이(조희봉) 같은 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추노' 속의 혁명은 실제 역사에서처럼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혁명을 낮은 자들의 위치에서 조명함으로써 '추노'는 저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기존 역사의 재현으로서 시작되었던 사극이, 지난한 세월을 거쳐 이제는 사극 스스로 역사를 써가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로 추노가 그려내는 역사는 공자왈 맹자왈 하는 양반들의 이야기를 알아먹지 못할 외계어로 만드는 세계다. 낮은 자의 시각으로 저자거리의 언어로, 때론 몸의 언어로 한 컷 한 컷 그려진 민초들의 역사, 사극이 복원해낸 그네들의 역사, 그것이 바로 '추노'다. 역사의 사극에서 사극의 역사로. 혁명은 과거의 그 때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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