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의 진화, <뿌나>에 이은 <육룡>

 

사극의 전형은 아마도 왕이 명을 내리고 신하들은 일제히 통촉해 주시옵소서!”하며 외치는 장면이 아닐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아니 아예 왕은 전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동시대를 다뤘던 KBS <정도전>에서 그래도 공민왕도 나오고 공양왕도 나오며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도 나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왕이 전면에 나오지 않자 대전의 모습도 거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도당의 풍경이다. 도당은 고려후기 최고의 정무기관으로 도평의사사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이 도당이 지금 현재의 국회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왕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시대, 그 실세는 도당3인방이라고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다. 물론 이들은 가상인물이다.

 

이것은 <육룡이 나르샤>의 독특한 인물구성이다. ‘육룡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실존인물인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이방원(유아인)과 함께 가상인물인 분이(신세경), 땅새(변요한), 무휼(윤균상)이 뒤섞여있다. 이런 구성은 이미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인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시도됐던 것이다. 거기에서도 세종(한석규)이라는 실존인물과 강채윤(장혁), 소이(신세경) 같은 가상인물이 함께한다.

 

이들 가상인물들은 그저 역사적 인물들을 보조해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실제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들로 그려진다. 전면에는 역사적 인물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을 돕거나 그들이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서의 가상인물들이 자리한다.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에 이은 <육룡이 나르샤>라는 사극이 이제 어떤 새로운 진화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사극이 역사로부터 조금씩 떼어져 나와 상상력을 가미하기 시작한 건 이병훈 감독이 시작했던 이른바 퓨전사극이라고 불리는 시도에서부터였다. <허준>, <대장금>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이들은 실존인물이지만 역사적 사료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머지 행적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이렇게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만들어지자 사극은 좀 더 과감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즉 결국은 권력자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추노> 같은 사극은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을 노비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에서 점점 벗어나 심지어 역사의식 자체를 버리고 상상력 깊숙이 들어가자 사극은 하나의 장르극일뿐 사극 특유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를 품은 달>이나 <성균관스캔들>은 현대적 장르물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재연된 느낌을 주었다. 물론 그것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지만 사극이라면 응당 있어야만 될 것 같은 역사의식이 배제된 느낌은 사극만이 가진 독특한 영역을 허물어뜨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극이 다시 회귀한 것이 <정도전>이나 <징비록> 같은 정통사극이다. 다시 역사와 역사의식을 회복시키는 것이 사극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료에 충실한 정통사극이 다시 주목을 받았으나 이 또한 역사라는 틀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서 보면 <뿌리 깊은 나무>에 이어 <육룡이 나르샤>가 구축해가고 있는 역사와 가상의 공존방식은 사극의 대안적인 진화가 아닐까 싶다.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지만 그 과거는 현재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식과 상상력이 투영되어야만 그 역사는 박제된 것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된다.

 

역사란 이처럼 팩트에만 머물러 있을 때 오히려 왜곡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은 권력자들에게는 팩트일 수 있어도 피권력자들에게는 왜곡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인물과 가상인물이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로서 어떤 역사를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관점이 들어있다. 이것은 저 역사학자 E.H 카가 말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맥락을 잘 구현해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사극조차도 역사를 바라보는 이런 식견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객주> 장혁의 등장, 그 기대감과 불안감

 

과거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다룬 고 최인호의 원작을 드라마화 했던 <상도>IMF 이후 제기된 상도덕과 기업 윤리에 대한 대중정서에 힘입어 큰 성공을 거두었던 바 있다. <객주2015>는 여러모로 <상도>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지만 사실은 소설가 김주영이 쓴 <객주(1979년 작)>는 최인호 원작 <상도(2000년 작)>보다 훨씬 앞서는 작품이다.

 


'객주2015(사진출처:KBS)'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객주>를 통해 <상도>를 떠올리게 된 까닭은 드라마로서 <상도>가 그만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는 작품의 선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작품의 성공과 그로 인한 화제성이다. <상도>가 얘기하는 기업가 정신이나 기업 윤리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객주>의 초반부를 장식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천가객주 천오수(김승수)의 곧은 삶을 통해 다시금 환기된다.

 

물론 초반의 이야기는 천오수의 아들 천봉삼(장혁)이 어떤 배경을 갖고 성장하는가를 보여주는 일종의 밑그림이다. 그래서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6% 남짓에 머물러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객주>는 결코 이야기성에 있어서 약하지 않다. <상도>가 임상옥이라는 인물 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성장드라마의 성격이 강하다면 <객주>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수호지><삼국지> 같은 말 그대로의 대하드라마의 성격이 강하다.

 

한 인물의 성취나 성장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 부를 쥐려는 욕망들이 꿈틀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갈등은 드라마를 더 긴박감 넘치게 만들어낼 수 있고, 무엇보다 선악의 단순 대결구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사실 부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개인적 노력만큼 중요한 게 어떤 우연적 계기다. 그것은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우연히 생겨나는 것들이다. <객주>가 부의 성취를 다루는 관점이 <상도>보다 낫게 여겨지는 건 바로 이 점이다. 어디 돈을 버는 일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만 되는 일인가. 대하드라마는 이것을 인간군상의 조감도로 그려냄으로써 부의 성취를 좀더 겸허하게 바라보는 시점을 제공한다.

 

아역을 지나 성인역으로 들어오면서 천봉삼의 역할을 맡게 된 장혁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결국 드라마의 중심축으로서 장혁이 그려낼 천봉삼이라는 인물의 매력이 <객주>라는 드라마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혁에게서 여전히 저 <추노>의 대길이가 먼저 떠오르는 건 어찌 된 일일까. 치켜뜨는 눈이나 비아냥대는 목소리 그리고 특유의 제스처까지 <객주>의 장혁은 <추노>의 장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래서야 <객주> 특유의 개성적인 색채를 만들어내기가 어렵게 된다. 아역 봉삼이가 보여줬던 캐릭터를 떠올려보라. 장사에는 관심도 없고 심지어 장사가 두렵다는 그 여리디 여린 인물이 바로 아역 봉삼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10년이 지나고 이 봉삼이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물론 성장과정을 통해 성격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본바탕으로서의 여리고 섬세한 봉삼이의 캐릭터는 깔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객주>는 원작이 그러하듯이 이야기성이 탄탄하고 캐릭터들 또한 매력적인 작품이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제대로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있다. <객주><상도>의 이미지를 벗어내야 하고, 장혁은 <추노>의 이미지를 떨쳐내야 한다는 점이다. 장혁의 등장으로 기대감도 커졌지만 불안감도 커진 게 사실이다. 이 불안을 떨구고 그것을 기대로 채우는 일. 그것이 <객주>가 제 색깔로 훨훨 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폼 잡던 장혁은 어떻게 연기변신을 시도하고 있나

 

장혁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절권도. 사실 이 이미지는 <추노> 때만 해도 장혁에게 굉장한 이점이었다. 스타일리시 액션 영상을 선보인 <추노>에서 식탁을 치고 날아올라 원투 펀치를 날리는 장혁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였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사진출처:MBC)'

이런 캐릭터는 <뿌리 깊은 나무>에서 겸사복 관원으로 등장해 이도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강채윤에게서도 거의 비슷하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이다. 하지만 비슷한 캐릭터가 두 번 주목받기는 힘든 법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주목된 건 장혁보다는 송중기와 한석규였다.

 

그런데 <추노>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작품선정의 잘못일까. 장혁은 <아이리스2>를 통해 또 이 비슷한 역할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드라마 속에서 빠르게 손을 움직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절권도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진짜 사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배우의 한 가지 일관된 이미지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장혁 하면 이제 배우가 아니라 절권도 하는 모습이 더 떠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칫 굳어져버릴 위험성이 있던 장혁의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이 깨져나가고 있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첫 시퀀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샴푸 광고 촬영현장에 들어와 과장되고 허세 섞인 모습으로 머리를 감고 옷을 풀어헤쳐 몸을 드러내는 장혁의 모습은 기존 드라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처음에는 지나친 과장연기가 아닌가 싶었지만 이것이 자꾸 보면 볼수록 의외의 중독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과장되게 고개를 젖히고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웃어대는 모습은 마치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웃음소리만으로도 하나의 캐릭터가 떠오르는 그런 인상.

 

사실 이 과장연기는 제작사쪽에서 주문한 게 아니라 장혁 스스로 갖고 온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이건이라는 캐릭터를 연구하고 어떻게 그 결을 만들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해 나온 결과라는 것. 결과적으로 보면 장혁의 조금은 과장된 캐릭터 구축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로맨틱 코미디의 결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 판타지적인 분위기에 조금은 희화화된 재벌남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고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자칫 위화감을 주는 이유는 상대방인 왕자님이 너무 일방적으로(그것도 거의 돈의 힘을 빌려) 신데렐라를 구제하는 모습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널 사랑해>에서 장혁이 연기하는 이건은 이런 위화감이 거의 없는 캐릭터다. 과장된 웃음이 보여주듯 그에게서는 허당기 역시 가득하게 느껴진다.

 

그 비현실적인 이건의 캐릭터를 현실로 잡아 끌어내리는 인물이 바로 상대역인 김미영(장나라)이라는 점에서도 장혁의 선택은 옳았다고 보인다. 이 드라마는 웃음과 판타지를 주는 이건과, 눈물과 현실감을 주는 김미영이라는 캐릭터의 알콩달콩한 사랑을 다룬다. 따라서 장혁의 과장 연기는 김미영이라는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여지를 부여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장혁의 코믹한 과장연기를 통해 다소 논란이 될 뻔했던 이 드라마의 도입부분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원 나잇 스탠드에 임신이라는 그 자체로 보면 자극적인 소재가 전제가 되는 드라마다. 하지만 장혁의 과장연기와 맞물린 드라마의 코믹한 연출은 이 부분을 밝고 무난하게 만들어주었다.

 

결국 장혁과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작품의 만남은 양측에게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장혁은 지금까지 보였던 액션의 모습에서 벗어나 코믹과 멜로까지를 어우르는 다채로운 연기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이런 변신의 성공은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작품이 대중들에게 좀 더 다가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코믹한 장혁의 발견. 그것은 이 작품이 장혁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개콘>, 노예, 거지 캐릭터 전성시대 왜?

 

“지가 마님 옷을 떨어뜨렸슈.” “우리 목도 떨어지겄구만.” “옷이 찢어졌슈.” “내 사지도 찢어지겄어.”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의 새 코너 ‘노애’는 드라마 <추노>의 상황을 패러디한다. ‘분수도 모르고 종놈들끼리 눈 맞으면’ 개죽음을 당하는 그 상황에 송영길과 허안나는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액션(?)으로 표현한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빨려던 마님의 옷을 떨어뜨린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신들의 목도 떨어질 거라고 말하는 송영길의 모습은 그 과장된 처절함 때문에 웃음을 준다. 하지만 고작 웃전의 옷 하나 때문에 사지가 찢어질 것을 걱정하는 이 노비들의 죄를 들은 마님의 반응은 이들의 상황을 더 처참하게 만든다. “나 이 옷 안 그래도 질려서 버리려던 참인데. 이거 개집에나 깔아줘라.”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물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개집에 버리는 그런 물건. 하지만 그렇게 버리려는 물건을 허안나는 굳이 자신이 챙겨 입겠다고 한다. 그러자 송영길은 만류하며 이렇게 말한다. “글쎄 입지 말라면 입지 말란 말여. 그거 입으면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릴 거잖여. 너는 선녀니께.”

 

분노의 빗자루질로 사랑을 표현하는 송영길과 먹다 버린 고기를 챙겨먹으려는 허안나의 처절과 분노가 과장되게 뒤섞인 이 개그는 그러나 어느 한 사극 속의 한 대목을 패러디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웃음 속에는 양극화로 시름하는 현실의 처절함이 공감대로 깔려 있다. 우리는 이 웃전들의 옷 한 벌에 또 고기 한 점에 온 몸을 떠는 노비들의 삶에 빵 터지지만, 그 뒤에 남겨진 씁쓸함을 공감하게 된다.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원.” 이 대사 하나로 대중들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된 ‘거지의 품격’이 거지가 되어버린(어쩌면 과거에는 어떤 품격을 갖추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삶을 유쾌하게 뒤집어 웃음을 주었다면, ‘노애’는 그 노예가 되어버린 처절하며 분노에 찬 삶을 과장되게 드러냄으로써 웃음을 준다. 그래도 ‘거지의 품격’이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면 ‘노애’는 그런 여유가 보이지 않는 절절한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제 첫 코너로 등장한 ‘노애’가 주목받는 것은 그 캐릭터가 공감가기 때문이다. 웃전이 씹다 질겨서 뱉어버린 고기를 서로 먹으려 아옹대는 모습에서는 날선 풍자가 느껴진다. 한 편에서는 ‘정여사’ 같은 이들이 질려서 버리며 흥청망청 살아가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바꿔줘”를 연발하는 천민자본주의가 횡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돈 한 푼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현실이 아닌가.

 

“아들 아들 아빠 회사에서 잘렸어. 너도 곧 유치원에서 잘릴 거야.” “저는 아들 갈비도 못 사주는 쓰레기니까요.” ‘갑을컴퍼니’의 홍대리(홍인규)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던지는 이 말은 그래서 그 공감 때문에 웃음이 터지지만 한참을 곱씹어보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진다. 도대체 그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극과 극의 삶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이건 해도 너-무한 삶이다. 그러니 ‘정여사’의 말을 빌어 한 마디 던져볼밖에. “바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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