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의 논란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걸까

7회 만에 시청률 34%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는 '추노'. 40%를 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고 말할 정도로 대중들의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높다. 그래서일까. '추노'의 논란 또한 끊이질 않는다. 이다해의 화장 얼굴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는 논란, 유독 노출이 많은 데다 어린 노비를 수청 들게 하거나 언년이(이다해)가 겁탈당하는 등의 내용이 가져온 선정성 논란이 그것이다. 심지어 이 선정성 논란을 의식한 블러 처리가 과잉 반응이었다는 논란까지 일어났다. 물론 논란 또한 관심의 표명일 것이다. 하지만 유독 '추노'에서 왜 이처럼 계속 논란이 쏟아지는 것일까.

먼저 이다해의 화장얼굴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는 논란은 물론 설득력은 있지만 조금은 과장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극은 영상연출에 있어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기존 사극과는 달리 표현주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노'가 '300' 같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영상연출이 자연 상태 그대로를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연출자에 의해 효과적으로 연출되기 때문이다. '추노'에서 대길(장혁)과 태하(오지호)가 대결을 벌일 때 허공에서 두 얼굴이 멈춘 채 한 바퀴 카메라가 빙 도는 그런 장면은 물론 현실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만화적인 구도나 타 영화를 통해 그 장면이 주는 액션의 질감을 알고 있다. '추노'는 리얼한 영상이 아니라, 효과적인 영상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영상들은 끊임없이 감독에 의해 색채가 입혀지고, 느린 속도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빨라지면서 어떤 리듬감을 만든다. 대길이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그저 말을 타고 달리는 대길의 장면과는 천지차이의 이야기를 해준다. 이다해의 말끔한 얼굴은 이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에서 봤을 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의 목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를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혜원(이다해)이 가진 정결한 모습은, 노비역할로 얼굴에 낙인이 찍힌 채 늘 검은 칠을 하고 있는 초복이(민지아)의 모습이나, 얼굴에 늘 화사하게 분칠을 하고 있는 설화(김하은)처럼 의도된 것이다. 이다해의 화장 얼굴 논란은 물론 이해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기존 사극과 이 사극의 영상연출의 차이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리얼리티 영상연출의 시각으로 보면 논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극의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을 생각해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선정성 논란은 왜 불거져 나오고 있을까. 그것은 이 드라마가 하층민을 다루고 노비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하층민들을 다루는 '추노'가 양반네들의 품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비상식적인 일일 것이다. 그네들의 삶과 정서가 드라마에 묻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층민들의 드러낸 몸과 질펀한 농담은 그네들의 힘겨운 삶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들이다. 몸은 힘겨운 노동과 연관이 있고, 질펀한 농담은 그 힘겨운 노동 속에서의 유일한 여가(?)일 테니까.

따라서 '추노'가 몸을 드러내고, 질펀한 농담을 쏟아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드라마 전략적으로도 맞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처럼 깊게 하층민의 삶을 다룬 사극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은 이 사극의 이러한 모습들을 낯설게 만든다. 따라서 '추노'는 그 소재에서부터 벌써 수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사극이다. 이것은 성적인 선정성뿐만 아니라 액션 장면에 등장하는 피가 튀는 리얼한 폭력 신에서도 그렇다. '추노'는 성인들의 드라마이지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그러니 제한을 15세가 아니라 그 위로 올렸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 수 있다. 물론 TV라는 매체에 있어 나이 제한이라는 것이 그다지 효과적인 것은 아닐 것이지만.

어쨌든 '추노'가 인기만큼 논란도 많은 이유는 이 사극이 지금껏 사극이 다루지 않았던 영역을, 역시 색다른 영상연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추노'는 꽤 높은 완성도를 가지는 작품이지만, TV라는 매체에 방영되기에는 조금 앞서가는 느낌이 있는 사극이다. 바로 이 실험성 강한 작품과 TV의 관습적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는 논란을 야기한다. 그러니 이러한 드라마의 도전적인 실험과 거기서 발생하는 논란은 모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은 문제는 이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좁혀나갈 것이냐가 될 것이다. 논란은 어쩌면 그 거리를 좁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추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한 것은 그 때문이다.

'추노'에서 몸이 의미하는 것

'추노'의 몸은 남자가 봐도 멋지다. 초콜릿 복근이란 표현이 선정적이라고 해도 딱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멋진 몸. 그 멋진 몸이 때론 공중으로 붕 떠오르고, 때론 뛰어내리며, 때론 바람을 가르듯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짐승의 눈을 가진 레드 원 카메라와 강렬한 배경 음악은 이 몸의 동작들을 우아하고 리드미컬하게 만든다. 이건 액션이 아니라 무용에 가깝다. 그 속에서 몸은 멋지다 못해 아름답다.

한바탕 도망친 노비를 잡고 여각으로 돌아온 추노꾼, 최장군(한정수)이 땀에 젖은 몸을 씻는 그 모습을 훔쳐보며 설레는 마음은 큰 주모(조미령)뿐만은 아닐 것이다. 장군의 몸이 되고 싶었으나 한낱 노비 사냥꾼의 몸이 되어버린 그 몸은 장군의 갑옷은 입지 못했어도 갑옷 못지않은 멋진 몸을 갖게 됐다. 최장군의 몸은 냉철한 판단력에 맏형으로서 대길(장혁)과 왕손이(김지석)를 생각하는 그 따뜻한 캐릭터처럼 군더더기 없이 멋지다.

독종 중의 독종으로 불리는 대길의 몸은 슬프다. 한때는 양반집 자제로 백면서생의 뽀얀 살결을 가졌을 그 몸은 이제 여기저기 난 칼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그는 애꿎은 자신의 몸에 벌을 주고 있는 중이다. 그가 좋아했던 노비 언년이(이다해)의 오빠에 의해 멸문지화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찾아다닌다는 그 사실이 그를 인간 말종 추노꾼의 삶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몸은 상대방을 잔혹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가격해대지만, 뒤에서는 자신이 잡아온 노비를 몰래 빼내 풀어줄 정도로 가슴 한 구석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한다. 그의 몸에는 분노와 자포자기와 연민이 뒤엉켜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되어버린 이 혼돈의 애증 속에서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언년이를 찾는다. 그것이 복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 채.

왕손이의 몸은 한 순간의 쾌락을 좇는다. 몸은 그저 늙어가는 것. 그러니 살아있을 때 즐기기 위해 그 몸은 쉴 새 없이 여자를 찾는다. 아직 젊기 때문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 순간을 살아온 몸에 마치 상이라도 주듯. 젊은 치기로 번득이는 이 몸은 그래서 웃긴다. 그 몸이 추구하는 방탕한 삶이란 한낱 한 때의 좌충우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청춘이 주는 시행착오 속의 몸은 그래도 유쾌하다.

'추노'의 멋진 몸, 슬픈 몸, 웃기는 몸은 이 시대 민초의 삶을 설명하지 않고도 보여준다. 늘 머리의 지시를 받고 따르는 몸의 운명. 그 몸이 생채기를 입어도 허허 웃으면서 다시 아물고 더 팽팽해지면서 멋진 몸이 되는 것은 몸의 항변인 셈이다. 세상에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 뿐인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는 그 몸은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힘겨운 노동의 상처를 오히려 힘으로 아름다움으로 전화시키는 몸은 그래서 이 땅의 민초들을 그대로 닮았다. 그들의 살갗이 칼날에 찢기고, 그 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그 상처가 아물어 더 단단한 피부가 되는 그 과정을 담은 몸은 그래서 왜 그 몸이 그렇게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추노'는 그래서 정치를 얘기하지 않아도 정치적이고, 전쟁을 보여주지 않아도 더 참혹한 이야기를 몸의 언어를 통해 전한다. 레드 원 카메라의 저속 고속 촬영은 단지 식스 팩의 몸을 전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몸이 전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아주 미세한 떨림까지 전하기 위한 것이다.

드라마 속에 어른거리는 루저와 남자

언제부턴가 남자와 '루저'라는 단어가 만나면 폭발적인 반향이 일어나는 사회가 되었다.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 여대생이 건드린 이 '루저'라는 뇌관은 그잖아도 힘겨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꾸만 위축되어가는 남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었다. 김혜수와 유해진의 연애사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이 단어는 다시 등장했다. 외모와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의 연애담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의 열기를 띄었다. 그 기저에는 루저와 위너라는 남성들의 마음 한 구석에 담겨진 불씨가 들어 있었다.

실제 사회 속에서 우리네 남자들의 상황은 그다지 썩 좋지 않다. 남자들은 여전히 가장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으면서도, 여성성의 사회 속에서 조금씩 여성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청년실업이니 조기퇴직 같은 사회 분위기는 물론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 힘겨운 현실로 어깨를 짓누르지만 문화적인 콘텐츠들은 상대적으로 여성 편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방송에 있어서 여성 편향은 두드러져 왔다. 그것은 TV의 주시청층이 중년여성층이 되었기 때문이다.

힘겨운 현실에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와 막 TV를 켰을 때, 거기 존재하는 판타지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현실로 돌아갔을 때도 어떤 힘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드라마의 캐릭터는 현실에 부재한 것에 대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작년 '아이리스'가 방영된다고 했을 때, 일부에서는 그것이 가진 남성적인 코드 때문에 성공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성공했다. 이병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액션과 멜로 양면을 잘 섞어내는 연기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남성적인 코드는 물론이고 여성적인 코드도 잘 맞춘다는 이야기다.

'아이리스'에 이어 방영된 '추노', 이 두 드라마는 장르도 다르고 이야기도 다르지만, 묘하게도 비슷한 점들이 있다. 먼저 '추노' 역시 마초적인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대길(장혁)과 태하(오지호)의 멋진 몸이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어떤 이야기나 메시지보다 더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것은 '아이리스'의 이병헌이 연기한 김현준이라는 캐릭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두 드라마는 모두 드라마로서는 보기 힘든 영화적 연출 장면들을 선보였다. 즉 영화적으로 연출된 장면 속에서 강한 남성들이 아름다울 정도로 멋지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추노'는 그 캐릭터들의 면면을 통해 이 현실의 남성들의 억눌린 감성을 건드린다. '추노'는 양반가의 외아들이었다가 멸문하고 도망친 노비를 쫓는 추노꾼이 된 대길, 조선 최고의 무장이었으나 도망노비가 되어버린 태하, 그리고 그 사이에 서서 쫓는 자의 첫사랑이자 쫓기는 자의 마지막 사랑이 된 언년이(이다해)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대길은 아마도 현재 우리들의 입에 붙어버린 '루저'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겉으로 보면 인간 말종의 '루저'처럼 보이는 대길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멋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고 보면 작년 한 해, 드라마보다 예능 프로그램이 그토록 약진을 했던 데는 이런 루저와 위너라는 두 단어를 가슴 한 구석에 불씨처럼 품고 살아가는 남성들의 시선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 최고 히트 예능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는 '해피선데이'의 '1박2일'과 '남자의 자격'은 모두 남성들을 캐릭터로 세우고 있고, 그 캐릭터들은 저 '무한도전'이 일찍이 세워두고 성공시킨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주창(?)하고 있다. 그 평균 이하가 열심히 하는 모습 속에서 공감과 감동과 웃음을 주었던 것이다.

'추노'의 남자들이 주목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평균 이하의 위치에 서 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짐으로써 현실에 치여 답답한 남성들의 가슴 한 구석을 열어준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마초적으로 보이는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드라마 속 남자들이 돈과 배경 같은 권력을 통해 매력을 보이려 했다면, 이 남자들은 오로지 노동으로 단련된 멋진 몸뚱아리 하나로 매력을 발산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에게도 매력적이다.

여성성으로만 포장된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 가요계에 '짐승남' 같은 마초적인 아이돌들이 등장하고, 드라마에서 '버럭남'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추노'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으면서, 이른바 루저와 남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억눌린 감정을 터트리는 남성 캐릭터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추노'의 성공은 어쩌면 여성 편향적으로만 되어왔던 드라마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은 ‘선덕여왕’, 사극의 향방은?

1999년 ‘허준’에서 비롯된 사극의 퓨전화는 2003년 여성사극 ‘대장금’을 통해 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성사극의 등장과 성공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사극의 시청층이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렸고, 여성들이 즐기는 사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또한 선 굵은 남성사극들(주로 전쟁사극이나 정치사극)과 달리, 섬세함이 주 무기가 되면서 여성 사극 작가들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대장금’, ‘선덕여왕’의 김영현 작가가 대표적이고,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대왕세종’의 윤선주 작가, ‘이산’, ‘동이(2010년 방영예정작)’의 김이영 작가 등이 모두 여성 사극 작가들이다.

여성들이 그리는 여성 사극은 당연히 여성성을 담아낸다.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고, 남성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그 남성 속에는 여전히 여성성이 들어가 있다. 사극은 인물의 심리나 사건 전개가 보다 디테일해졌고, 감성 또한 풍부해졌다. 일련의 여성사극들은 과거에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의 뒤안길에 서있는 여성들을 역사로 끌어냈다. ‘대장금’이 그랬고, ‘황진이’가 그랬으며, ‘이산’(이 작품은 정조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모습과 성송연이라는 여성이 역사 위로 올라왔다)이 그랬다. 이러한 여성 사극 속의 인물들이 성장드라마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억압받는 존재가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성장은 여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2009년 여성사극들은 이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처럼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남성들을 거느리는 여성 카리스마의 등장은 그간 여성사극들이 보여준 일련의 자신감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까지 올라간’ 이 여성들의 영웅담을 담은 작품들이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는 야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천추태후’와 ‘선덕여왕’은 결이 달랐다. ‘천추태후’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지만 남성적 세계를 반복한 ‘무늬만 여성사극’의 한계를 드러냈다면, ‘선덕여왕’은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고현정)과 덕만(이요원)이 때론 대결하고 때론 토론하면서 보여준 여성적 카리스마의 세계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까지 매료시켰다.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는(혹은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야 되는) 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성별을 넘어서 이 사극이 보여주는 여성적 카리스마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실의 억압적이면서도 적까지 끌어안을 줄 아는 포용력은, 남성적 사회의 잔재와 여성적 세계관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사람들을 꿈꾸게 하고 때론 모성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덕만의 모습은 온전한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덕만이 그 여성적 카리스마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리네 여성 사극 역시 어떤 정점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사극이 일궈온 일련의 성장곡선이 여성사극 속에서 여성 주인공이 거치는 성장과정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여성사극에서 주인공의 성장이 어떤 정점에 올라갈 때, 그 사극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리막길을 밟았다는 것은, 이제 정점에 서게 된 여성사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어쩌면 성별은 무의미해졌고, 오히려 여성사극이 가진 일련의 장점들, 예를 들면 성장드라마나 섬세한 심리묘사, 혹은 입체적인 캐릭터 같은 요소들이 오히려 여성적인 강박을 버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사극의 진화가 시작될 거라는 점이다. 여성들만큼 남성들도 섬세하게 그려질 것이고, 왕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인물들이 신분적 위계에 갇히던 과거와는 달리, 동등한 눈높이에서 그려질 가능성이 높다.

퓨전사극으로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여성사극으로 신분과 성별이 가진 한계를 넘어버린 사극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스타일을 입은 장르화의 길이 되기도 하고(‘추노’가 대표적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중세와 근대가 섞여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되기도 하며(‘제중원’), 여전히 여성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여성의 성장 드라마(‘동이’)가 되기도 한다. 2009년 ‘선덕여왕’이 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음으로써, 2010년의 사극은 좀 더 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