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왜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에 집착할까

 

루저와 약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흔히들 변변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배경도 없어 그저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을 낮추어 루저(패배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들이 왜 이런 상황에 몰렸는가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루저란 표현은 지나치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 태생적으로 모든 게 정해져버리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사회적 약자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추적자>에서 백홍석(손현주)은 사회적 약자인가 아니면 루저인가.

 

'추적자'(사진출처:SBS)

아마도 우리의 도덕적인 의식은 백홍석을 사회적 약자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선택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백홍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끊임없이 권력의 힘에 의해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 어딘지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다. 사실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백홍석과 강동윤(김상중)의 대결구도로 끝까지 달려가지 않고 중간에 갑자기 강동윤과 서회장(박근형)의 대결구도로 바뀐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백홍석이라는 사회적 약자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루저 같은 이미지로 바뀌게 되면 드라마의 매력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반을 넘어서면서 <추적자>에 더 집중되는 관심은 백홍석과 그가 밝혀내려는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가 강동윤과, 그를 막는 것과 도와주는 것 사이에서 주판을 튕기고 있는 서회장 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대결구도다. 과연 강동윤은 서회장과의 정치적 대결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서회장이 강동윤의 야심을 무참히 꺾어버릴 것인가. 최근 몇 회 동안 <추적자>에 보인 언론의 관심은 백홍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회장과 강동윤을 위시하여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서지수(김성령), 신혜라(장신영)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반전드라마였다.

 

백홍석과 강동윤의 대결이 뻔해 보이는 반면,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은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기묘한 상황이 생겨난다. 백홍석과 강동윤의 대결지점에서 강동윤이란 인물은 절대적인 악으로 위치하지만,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에서는 다르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발사 아버지를 둔 소시민의 아들 강동윤의 성공스토리가 그 안에는 깔려 있다. 성공하기 위해 뭐든 했던 이 인물은 어쩌면 우리네 근대사의 아버지들을 표징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강동윤이란 인물에 묘한 동정심을 갖게 된다. 무표정한 얼굴, 그 뒤에 놓여진 처절함 같은 것.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강동윤 같은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은 대표적인 사례다. 성공하기 위해 뭐든 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는 속물적인 인간이지만 많은 대중들은 그가 그토록 성공하려는 그 마음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인물은 남성 캐릭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도 넓은 의미에서 이들과 같은 부류다. 성공을 향한 강력한 욕망과 그 좌절의 캐릭터. 이런 부류의 캐릭터들에 열광하는 건 아마도 우리네 불행한 근대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동윤의 말처럼 “마차가 달려가다 보면 바퀴에 벌레가 밟히기도 한다”는 것이 우리네 개발시대의 정서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발밑과 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강박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네 아버지들. 우리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래서 양가적이다. 어떤 이들이 개발의 결과를 놀랍도록 눈부신 성장으로 바라보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 개발이 누군가를 짓밟은 결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양가적인 시선과 겹쳐진다.

 

물론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추적자>라는 이전투구의 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원 같은 존재다. 사실상 강동윤과 서회장의 복마전이 허용되는 이유는 백홍석이라는 절대적인 선이 한 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이지만 가해자가 되어 쫓기고 있는 그가 눈앞의 진짜 가해자에게 총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문제 해결 방식이 단순한 복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것. 백홍석은 그저 서민을 대변하는 아버지처럼 보이지만 이 부분에서는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선 인물처럼 보인다. 자식을 죽이고 아내마저 죽게 만든 장본인을 눈앞에 두고 복수가 아닌 진실을 선택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이 절대 선으로서의 백홍석이라는 인물보다 강동윤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추적자>를 단순한 추적 장르물이나 복수극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프게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장과 성공에 대한 갈망(아마도 그토록 빠른 근대화를 가져오게 했던 동인이었을)과 그 결과로서 생겨난 희생들에 대한 죄의식이 겹쳐져 있다. 백홍석이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인물이라면, 강동윤은 여전히 욕동하고 있는 그 성공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당신은 어떤 인물을 추적하고 있는가. 백홍석인가 강동윤인가.

백홍석,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실로 참혹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뺑소니를 당했고 간신히 이어붙인 생명줄을 돈 앞에 무너져 내린 친구가 끊어버렸다. 딸의 죽음에 비통해하던 아내마저 죽음을 맞이하고 진실을 밝혀내려던 그는 오히려 범법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진실은 은폐되었고, 그렇게 돈과 권력으로 진실을 은폐한 이들은 정치 일선에서 ‘서민 운운’하며 정권을 잡기 위한 쇼를 한다.

 

'추적자'(사진출처:SBS)

형사로서 그토록 지키려 애쓴 법 질서가 이제 거꾸로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현실, 그 누가 법에 정의를 기대할까.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은 그렇게 끝단에 몰려 세상의 추악한 진면목을 바라보게 된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강동윤(김상중) 앞에 총을 들이대지만 백홍석의 그 행동을 강동윤은 거꾸로 정치적 음모론으로 덮어버린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마음이 없는 강동윤과 같은 권력자들 앞에서, 우리네 정 많고 눈물 많은 수정이 아빠 백홍석은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늘 땀에 절어 번질번질한 얼굴에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눈으로 처연하게 이 더러운 현실을 바라보는 백홍석에 똑같은 가슴 먹먹함을 느꼈다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게다. 도대체 우리네 서민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고 무엇보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던 우리들이 아닌가. 그런데 권력자들은 저들끼리 권력을 잡으려고만 혈안이다. 그들은 서민을 외치지만 서민 정치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서민’이라는 이름은 이제 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호명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IMF가 터졌을 때 우리네 서민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그네들의 사라져버린 도덕성 위에 무너져가는 기업들을 회생하기 위해 저들끼리 공적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뽑아간 것은 서민들의 세금이었다. 잘못은 저들이 했지만 고통은 서민들이 겪었다. 수많은 전시행정들과 일관성 없는 정책들이 서민들을 향해 있었던 적이 몇 번이나 되던가. 백홍석이라는 이 시대 아버지의 초상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눈물이 나는 이유는 그의 진심이 보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처절하게 짓밟힌 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추적자>를 드라마 그 이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진짜 서민들이 갖고 있는 정서에서 비롯된다. 사실 드라마적으로 보면 백홍석이 위기의 순간에 도주하는 장면이 어색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강동윤 앞에 총을 들이대고 있는 백홍석을 향해 경호원이 총을 쐈다면 그 자리에서 사살했거나 그를 체포했어야 개연성이 있다 여겨지지만 사실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도주에 성공하는 백홍석을 시청자들이 마음 속에서 지지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적자>가 단순한 드라마 이상이라는 반증이다.

 

그래서 <추적자>의 슬픈 아버지 백홍석을 보며 눈물을 흘린 시청자들은 그가 적어도 드라마 속에서라도 진실이 통하는 세상을 만나기를 희구한다. 우리를 닮아버린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적어도 드라마라는 작은 공간에서나마 숨통을 틔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진 현실을 드라마 속에서조차 확인하는 셈이 될 테니. 물론 섣부른 드라마의 판타지가 현실을 바꿀 수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바뀌지 않는 현실이 마치 바뀐 것인 양 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래도 백홍석이라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초상이 최소한 한 번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니 말이다.

<추적자>에 숨겨진 명쾌한 복수의 공식

 

제목이 <추적자>이니 당연히 추적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딸과 아내를 모두 잃고 이 비뚤어진 정의를 바로 잡고자 법 바깥으로 나온 백홍석(손현주)이다. 추적하는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도망치는 자도 있다. 백홍석의 딸, 백수정(이혜인)을 뺑소니친 장본인 서지수(김성령), 사건을 덮어주는 대가로 정계 진출을 거래하고는 가까스로 살아난 백수정을 결국 죽이도록 시킨 서지수의 남편 강동윤(김상중),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가족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더 챙기는 서지수의 아버지이자 강동윤의 장인인 서회장(박근형)이 그들이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추적자>의 힘이란 결국 진실을 세상에 공표하기 위해 쫓는 자와 그것을 필사적으로 덮기 위해 할 수 있는 뭐든 저지르는 진짜 범인들 사이의 간극에서 나온다. 백홍석은 이 과정에서 심지어 서지수를 납치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너무 쉽게 잡히면 극의 힘은 빠지고 만다. 그러니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거리감이 드라마의 몰입감을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 구조는 드라마를 뻔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백홍석은 진실을 밝히게 될 것이고, 서지수나 강동윤 그리고 서회장은 그로 인해 법의 심판을 받거나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게 이러한 추격 장르의 공식이다. 이 공식이 흐트러지면 드라마는 문제작이 된다. 드라마의 차원을 넘어서서 일반 대중들이 공분을 자아내게 할 정도의 <추적자>에서 공식을 흐트러뜨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너무 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이 도망치는 자들 사이에 또 다른 대결구도가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강동윤과 서회장이 대립하고 서지수는 처음에는 서회장과 같은 편에 서 있다가 강동윤이 자신을 위해 백수정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의 편으로 돌아선다. 서회장은 자신의 아들인 서영욱(전노민)을 해외 도피 생활하게 만든 강동윤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 분노는 강동윤 편에 선 자신의 딸조차 버릴 정도다. 그는 납치된 딸을 구해 달라 요청하는 강동윤에게 "그 애는 이제 내 딸 아니다. 니 마누라다."라고 말한다.

 

서회장의 이런 초강수에 서지수와 강동윤은 한호그룹 불법승계사건의 증거가 들어있는 비밀회의록을 공개하겠다고 밝힌다. 이미 이들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서회장이 강동윤에게 했던 말을 강동윤은 다시 서회장에게 되돌린다. "이제 지수는 장인어른의 딸이 아닙니다. 제 아냅니다." 서회장과 강동윤의 대립구도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많은 변수들을 만든다. 이것이 백홍석의 추적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지점은 가족이라는 틀을 염두에 두고 봤을 때, 서회장과 강동윤, 서지수라는 백홍석의 가족을 파탄낸 인물들이 자신의 가족들도 스스로 파탄내고 있다는 점이다. 딸이 납치돼도 눈 하나 깜박 하지 않는 서회장이나, 그런 서회장과 그 아들인 서영욱의 비리를 공개하겠다고 나서면서 "이제 할 말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강동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다만 정치에 대한 욕심과 자신의 부에 대한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일 뿐이다.

 

애초에 백수정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들은 한 사람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탐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이 사람보다는 욕망에 충실한 태도가 결국은 자신들의 가족을 파탄 내는 동인이었다는 것. 한 가족을 파괴한 그들은 바로 그 욕망 때문에 자신들도 파괴한다. 이 얼마나 명쾌한 복수의 공식인가.

 

사실 백홍석이 바라는 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닐 것이다. 만일 복수였다면 눈앞에 납치해온 서지수를 당장에 죽이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강동윤으로 하여금 진실을 밝히라고 했다. 백홍석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그것은 이미 서회장과 그 가족들이 서로를 물고 뜯고 있는 이 과정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복수할 수 있으랴. 결국 자신이 한 행동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올 따름이 아닐까.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잃었던 아버지

 

사실 최근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어딘지 클리쉐에 발목이 잡힌 듯한 인상이다. IMF 이후 줄곧 콘텐츠 속의 아버지들은 고개 숙인 남자, 허리 휘는 가장, 그래도 꿈을 꾸려는 아저씨들,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 식탁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가족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혹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사실 이런 클리쉐는 어찌 보면 목소리를 내는 순간 어딘지 권위적인 상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대변한다. 지금은 그래서 아버지 부재의 시대처럼 보인다.

 

 

'추적자'(사진출처:SBS)

그런 의미에서 <추적자>의 아버지 백홍석(손현주)은 지금까지 봐왔던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던 아버지의 틀을 깨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 세상의 온갖 부조리 앞에 무릎 꿇고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소주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던 아버지와는 다른, 그 부조리에 분노하고 싸우고 있는 아버지라는 점. 이것이 기존 아버지들과는 다른 백홍석이란 아버지의 면모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다. 그것은 <아저씨>와 <마더>다. 이 두 영화는 제목처럼 모두 사회 내의 특정 부류, 즉 아저씨라고 불리는 이들과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을 세워두고는 그 클리쉐를 뒤집는다. 남자라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게만 여겨지는 아저씨라는 어딘지 늙수구레한 이미지는 이 <아저씨>라는 영화에서는 반전요소다. 이 영화 속에서 원빈이 옆집 소녀를 위해 조폭들을 하나 하나 깨부술 때, 아저씨라는 클리쉐도 부서졌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마더>는 기존 모성애로서 주로 소비되던 엄마라는 클리쉐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섬뜩한 본능으로까지 바꿔놓는 영화다. 이 영화는 엄마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그저 당연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왔던 그 이미지를 깬다. 그런데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 그간 웅크려왔던 본성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들 존재의 새로운 면모가 포착된다.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그 안에 <아저씨>도 <마더>도 갖고 있는 드라마다. 기존 아버지로 그려졌던 그 쓸쓸한 뒷모습의 아버지만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분노를 마침내 드러내는 그런 아버지. '세상 어차피 다 그런 거야' 하고 세파에 찌들어 살아오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저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왔던 그 아버지에게 가족은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런데 그 가족이 여지없이 파괴되었다면?

 

이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드러내는 절망과 분노에 수많은 대중들이 공감하게 된 것은 작금의 사회적 상황이 아버지들에게 똑같은 절망과 분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히며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자신을 퇴출시키는 사회의 비정함과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아버지들의 권위, 그리고 가진 자들에 의해 여전히 농단당하는 좀체 바뀌지 않는 세상이 주는 절망감과 분노.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분노하는 순간, 아버지의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회의 부조리 속에 타협하며 살아가던 아버지는 이제 그 사회와 싸워나가는 새로운 존재로 각인된다.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깨치고 새로운 아버지의 상을 그려내고 있다.

 

아저씨의 이미지를 깨버린 원빈과 엄마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김혜자가 있었다면 아버지의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단연 도드라지는 손현주라는 배우가 있다. 사실 손현주는 그 연기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배우지만, 어딘지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나 착한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전은 더 효과적이다. 마치 모든 어머니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김혜자가 <마더>의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이처럼 분노하는 아버지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이 생겨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의 웬만한 충격에도 끄덕 않던 아버지들 역시 그 맷집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증은 아닐까. <추적자>의 백홍길이라는 아버지를 보며 자기 일처럼 분노했거나, 아니면 그 아버지를 기꺼이 응원했다면 이미 우리가 생각해왔던 아버지상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어쩌면 그 잃었던 아버지의 모습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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