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허 라디오, <무한도전>과 찰떡궁합인 이유

 

MBC 라디오 <두시의 데이트>의 남태정 PD<무한도전> 라디오스타 특집으로 1DJ를 맡게 된 노홍철의 장점으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예측불허를 들었다. 한때 <두시의 데이트>를 한 적이 있는 박명수도 라디오 방송의 묘미를 방송사고가 날 것 같은 불안감과 긴장감에 오히려 있다고 말했다. 유재석은 본 방송 전 미리 찾은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에서 추석을 맞아 뜬금없는 달 타령을 틀게 해 청취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노홍철과 박명수, 유재석이 보여주는 것처럼 라디오의 매력이란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라이브의 묘미에 있다. 물론 어떤 기본적인 얼개를 갖고 방송을 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전적으로 거기 앉아 있는 DJ와 그를 둘러싼 그 날의 공기와 그와 함께 호흡하는 청취자들에 의해서다. 그 돌발적인 우연의 조합들은 결과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게 한다. 다만 그 순간의 과정들을 함께 하고 있다는 그 느낌이 더 중요할 뿐이다.

 

이처럼 라디오 방송은 그 자체가 무정형의 형식을 추구하는 <무한도전>을 그대로 닮았다. 매 회가 그 자체로 도전이고 그 도전 속에서 그 시간들이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 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따라서 만일 그 라디오 방송이 예전만큼의 팽팽한 맛을 내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방송이 패턴화되어 있지 않은가를 들여다봐야 한다. 예측 불가능이고 때로는 방송사고가 날 정도로 긴장감을 유발하며 때로는 뜬금없이 흘러가는 것이 그 본질이지만, 너무 안전한 틀 안에 갇혀버리는 순간 라디오는 그 본질적인 재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무한도전>MBC FM4U1DJ로 출격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무한도전>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라디오 청취자들이 동시에 반색한 것은 그 조합이 기획만으로도 양자에게 모두 괜찮은 효과를 가져올 거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획은 <무한도전>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 되는 셈인데다 우리가 주로 방송을 통해 귀로만 접해왔던 라디오 방송을 방송 이외의 시간을 포착하고 또 눈으로 직접 보여줌으로써 라디오를 좀 더 다양한 감각 체험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은 <무한도전>으로서도 라디오 방송으로서도 모두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무한도전>은 그래서 라디오스타 특집의 첫 방송으로 사전 미팅을 통한 라디오 방송의 이면을 보여주었다. 방송을 하는 DJ만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작가와 PD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감하는 이야기는 그저 흘러나오는 라디오가 아니라 거기 방송 뒤에서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라디오를 느끼게 해주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배철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김경옥 작가도 있고 배순탁 작가도 있으며 정찬형 PD도 있다는 걸 <무한도전>은 정형돈을 일일 DJ로 투입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드러내 주었다.

 

어찌 보면 이 기획은 상암동 시대를 맞은 MBC FM4U의 홍보 프로젝트라고도 볼 수 있다. 하루를 온전히 <무한도전> 출연자들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도전> 팬들에게는 반색할만한 일이다. 또한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MBC FM4U에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있고 DJ들이 있으며 또 각 프로그램들 속에는 어떤 코너들이 있는가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라디오 방송의 홍보 프로젝트에 머물지 않는다는 건 거꾸로 <무한도전> 역시 이 기획을 통해 본인들이 하고 싶었던 라디오라는 영역에 도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태호 PD는 언젠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무한도전>TV’ 같은 걸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루를 채워넣은 라디오 방송은 그래서 마치 ‘<무한도전> 라디오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라디오 홍보만이 아니라 <무한도전>에게도 엄청난 홍보효과를 준다.

 

실로 <무한도전>과 라디오의 만남이 찰떡궁합이라는 건 이를 통해 우리가 라디오를 듣는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집이나 직장에서 일을 하며 또 자동차에서 이동 중에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라디오를 듣지만 그러다보니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익숙해져버린 것도 사실이다. <무한도전>의 일일 DJ는 그래서 배철수가 정형돈에게 말했던 것처럼 라디오 방송 자체에 큰 자극이 되어주었다. 그 자극을 통해 라디오가 새롭게 들린다면 그것은 <무한도전>이 해낸 또 하나의 마법이 될 것이다. <무한도전>은 잊고 있던 라디오의 맛을 되살려주었다.

 

로이킴 논란, 무엇이 불씨를 키웠을까

 

<슈퍼스타K>의 최고 전성기는 허각이 배출됐던 시즌2다. 당시 친숙한(?) 외모에 환풍기 수리공으로 생활하며 노래를 부른 허각은 <슈퍼스타K>, 아니 오디션 프로그램의 아이콘이 되었다. 단지 오디션 우승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

 

'로이킴(사진출처:CJE&M)'

그로부터 2년 후 <슈퍼스타K> 시즌4가 배출한 로이킴은 여러모로 허각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잘 생긴 외모에 모 주류업체 대표 아들이라는 배경, 유학파에 누가 봐도 매너있어 보이는 신사 이미지 그리고 심지어 노래까지. 게다가 로이킴은 작사 작곡 능력까지 선보이며 작년 오디션 프로그램의 화두라고도 할 수 있었던 아티스트 이미지까지 갖고 있었다. 허각이 서민들의 동일시 대상이었다면 로이킴은 로망이었던 셈.

 

실제로 로이킴은 ‘봄봄봄’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바람을 일으켰다.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묻어나는 이 곡은 컨트리풍에 ‘-소’로 끝나는 옛 어투를 구사하는 것으로 그가 갖고 있는 폭넓은 세대에 걸친 팬덤을 겨냥하고 있었다. ‘봄봄봄’은 싸이와 조용필이 본격 활동을 벌이던 시기에 음원차트와 각종 음악 프로그램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발표와 동시에 표절 논란의 불씨가 생겨났던 것도 사실이다. 도입 부분은 고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후렴구는 노르웨이 밴드 아하의 ‘테이크 온 미’와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로이킴측은 ‘고 김광석을 가장 좋아했던 로이킴이 그분 음악을 베낄 수 있겠느냐’며 ‘공식대응이랄 것도 없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사실 이 초창기 불씨에 대해서 로이킴측이 조금 더 신중하게 대처를 했다면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란까지 불거지지는 않았을 수 있다. 너무 쉽고 단순한 일로 치부했던 것. 하지만 이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로이킴이 콘서트에서 언급한 장범준 코멘트로 인해 다시 불이 붙었다.

 

“버스커 버스커 장범준이 곡 중간에 '빰바바밤'이라는 결혼식 축가 멜로디를 넣어 부른 걸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했는데 비난을 많이 받았다. '축가'는 내가 작곡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면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장범준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 코멘트는 아마도 표절이 아니라는 자신감의 표명이었을 것이지만 과한 발언이었고 결국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어쿠스틱레인의 ‘Love is cannon’ 표절 논란으로까지 확산된 건 분명 이 장범준 코멘트가 만들어낸 후폭풍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난 5월에 어쿠스틱레인이 블로그에 적은 글이 안티 팬들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 하지만 일련의 논란에 대한 로이킴측의 대응도 적절치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싱어 송 라이터로 로이킴을 이미지 메이킹하던 차에 표절 논란이 나오자 공동작곡가 배영경씨가 언급되는 대목이 그렇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로이킴측의 대응이 지나치게 논리적인 주장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누가 먼저 발표했느냐는 선후관계를 따지거나 전문가 의견을 덧붙여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식은, 이 문제의 핵심인 ‘대중들의 정서적인 부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는 점이다. 마치 표절이냐 아니냐가 핵심인 것 같지만 이 문제는 이미 그 진위공방의 사안을 넘어서 로이킴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문제로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만일 허각 같은 서민들과 동일시되는 인물이었다면 설혹 표절 논란이 나왔다고 해도 이 정도로 문제가 비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갖춘 듯한 엄친아 이미지의 로이킴은 그것이 잘 유지될 때는 반짝반짝 빛나지만 어떤 작은 틈이라도 보일 때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것을 타블로의 사례에서 확인한 바 있다. 그의 화려한 스펙이 모두 사실이지만 대중들이 믿지 않게 된 건, 정서의 문제를 팩트의 문제로 풀려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표절 논란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로이킴측은 아마도 이 문제가 거기에서 그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로이킴은 이 대중들의 정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표절 논란이 해결된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허각과는 정반대 이미지의 소유자, 로이킴에게 벌어지는 논란은 그래서 타블로의 경우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왜 그들은 희생양을 찾았을까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스캔들. 이것은 마치 사이비 종교를 닮았다. 20세기 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때의 사건 말이다. 당시 그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이 잘못됐다고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다. 뇌리에 각인되어버린 믿음이란 그렇게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일(고통이 따른다)이기에 그들은 또 다른 믿음을 스스로 만들기 마련이었다. 타진요 공판에서 법정이 증거와 사실정황을 들어 그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릴 때조차 몇몇은 끝까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타블로'(사진출처:MBC)

물론 사법적 판결은 이들의 유죄선고로 일단락됐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의 불씨가 모두 꺼진 것으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타진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이른바 왓비컴즈(whatbecomes)로 알려진 김모(58)씨가 여전히 아무런 제재 없이 활동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왓비컴즈가 일으킨 사건에 애꿎은 동조자들만 처벌되었다고 말한다. 사이비 종교로 치면 믿음에 속은 이들만 처벌되고 교주는 여전히 활동 중인 셈이다. 당사자인 왓비컴즈가 소재파악이 되지 않아 기소 중지되었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누가 처벌되고 사법적 판결이 어떻게 나왔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사건이 터졌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점이다. 타진요 스캔들의 핵심은 단지 몇몇 스토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면에 나선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사법적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 휘둘린 사회도 일정 부분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왜 그들이 한 사람의 학력사실에 그토록 의혹을 제기했는가와 대다수 대중들이 그 의혹에 흔들렸던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타진요 스캔들은 몇 가지 심리학적인 실험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첫 번째는 솔로몬 애쉬가 했던 이른바 ‘동조현상’에 대한 실험이다. A와 같은 길이의 선을 찾는 문제에서 그 답이 명백히 B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의도적으로 C를 선택하자 따라서 C를 선택하는 행위. 이 실험 결과 무려 37%의 학생이 B가 답임을 알면서도 C를 선택했다고 한다. 집단의 압력에 의해 설사 답이 확실하다고 해도 다수 의견을 따라가는 심리. 집단과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면 소외되고 평판이 나빠질 것으로 두려워하는 심리가 동조현상이다.

 

타진요 카페를 통해 김모씨가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를 졸업했다는 타블로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의혹이 제기된 이후, 언론에 공개되면서 많은 대중들이 그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는 사건 이면에 숨겨진 대중정서가 작용했다. 우리 사회에 깊이 드리워져 있던 뿌리 깊은 학력과 스펙사회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그것이다. 이미 교육조차도 돈과 태생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서 학력이란 이른바 고위층들이 시스템을 저들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인 셈이다. 여기에 병역과 국적문제가 겹쳐지면 대중정서는 폭발하고 만다.

 

어찌 보면 이 사회적인 분노가 타블로라는 개인을 엉뚱한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단 사회정의 차원의 ‘믿음’이 되어버린 타블로의 학력문제는 사실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부인되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의 사례다. ‘인지부조화’는 위에서 말한 사이비 종교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감정, 행동이 불일치하게 될 때 일종의 스트레스를 갖게 되는 상태로, 사람들은 그것을 없애기 위해 사고와 신념을 바꾸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고 한다. 물론 ‘인지부조화’는 때론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보호막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험한 폭력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타진요 스캔들에서 발견하게 되는 동조현상이나 인지부조화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동조현상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강박적으로 갖고 있는 개인의 자존감 부재나 혹은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해 갖게 되는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지부조화는 이렇게 강박적으로 소속된 집단이 공격성을 띄게 되었을 때 사실과 상관없이 신념을 합리화해버리는 위험에 도달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크게는 황우석 사건에서부터 작게는 심형래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 기저에는 이러한 집단적인 심리가 깔려 있다.

 

무엇보다 타진요 스캔들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광신의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광신이 한 개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사적인 이야기들이 공개적으로 끄집어내지고 때로는 날조되기도 하는 이 폭력은 동조현상과 인지부조화와 맞물리면서 더 큰 사회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심지어 가해자들조차 스스로 무엇을 가해했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재판 선고 마지막 변론에서 타진요 측 일부 피고인들이 한 이야기는 이 스캔들 밑에 깔려진 심리를 드러낸다. "학벌주의 사회에서 타블로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가 제시한 학위를 믿을 수 없었기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대한민국에서 언제부터인가 학력세탁이 성행하고 있다. 학력을 갖고 장난치는 무수한 사람들이 단죄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익이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우리가 대신하게 됐다." 전형적인 자기합리화의 발언들이다. 자신들은 무죄이고 나아가 애국자라는 얘기다.

 

물론 분노는 이해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이 스캔들에 가담하지 않은 일반 대중들 역시 학력사회가 주는 분노에는 모두 동조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적절하지 않은 방향으로 한 희생양을 강요하게 된 것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지점이다. 앞으로 제2의 타진요 스캔들이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사실은 명명백백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이 가진 힘이 너무나 약해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블로의 이야기다. 한 네티즌에 의해 제기된 학력의혹은 타블로 당사자에게 처음엔 우스워보였을 지도 모른다. 왜 그렇지 않을까. 분명 자신은 대학을 나왔다는데 누군가 나오지 않았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좀 심한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언제든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여겨온 타블로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언론들이 네티즌이 제기한 학력의혹을 기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언론들은 점점 경쟁적으로 이를 기사화하면서 여기에 대응을 하지 않는 타블로를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수상함'은 곧이어 '사실'로 둔갑한다. 뒤늦게 타블로는 결국 사실을 제시하면 모든 일이 종료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몇 가지 증거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웬걸? 사실들은 오히려 의혹을 더 증폭시킨다. 이 놀라운 마술 상자는 증거를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 커다란 의혹으로 돌아오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왜 한 쪽은 사실이라고 증거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타블로를 믿지 못하는 걸까. 결국 사건은 검찰에게까지 가게 되었다. 상황은 아직 종료된 것이 아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이 타블로 사건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우리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타블로 본인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연예인들(실제로 현재 몇몇 연예인들은 이 소통의 문제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는 팩트(fact)의 시대에서 스토리(story)의 시대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팩트의 시대에 사실 그 자체는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즉 증거 제시는 그 자체로 사건의 일단락을 맺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의 시대에 상황은 달라졌다. 팩트는 그저 스토리의 재료가 될 뿐이었다. 따라서 이런 정보들이 소문에 의해 증폭되고 변질되는 사건 속에서 그것을 막기 위해 던지는 팩트란 오히려 스토리만을 더 크게 만들기 마련이다. 어째서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진원지는 정보의 과잉이다. 팩트의 시대에 정보들은 지금처럼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처럼 그 정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는 자체적으로 정보가 생산되는 매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이 매체 속에서는 과거 수용자로 존재하던 대중들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정보는 과잉일 수밖에 없다. 이 정보의 과잉은 이제껏 우리가 알 필요도 없었던 어떤 이들의 사적인 생활까지를 정보로 끌어들임으로써 정보를 더욱 과잉되게 만들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반인들의 사생활이 노출되어 정보로 생산되는 시대. 그리고 이미 트위터나 미니홈피 등으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혼재가 일반화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이 무수히 많아진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한 가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쏟아지는 정보들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 채 쓰레기(공해)가 되어버린다. 마치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다고 해도 그 별과 별 사이에 어떤 선을 그어서 별자리가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의 과정이 바로 팩트가 스토리가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인터넷이라는 무수한 정보의 별들이 쏟아지는 공간에서 중요해진 것은 그 별이라는 팩트 자체가 아니고, 그 별과 별들이 이어지는 스토리의 별자리다. 카더라 통신이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그 통신이 제공하는 스토리가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블로 사건처럼 그 스토리가 사적인 영역을 침투해들어갈 때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즉 팩트의 시대에 진실처럼 보였던 공적인 영역은 이미 스토리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연예인들의 신비주의화 경향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적 영역이 보호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대중들이 공적영역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적으로 발표된 자료에 대해 사적인 의심이 제기될 때, 그 스토리는 더욱 진짜처럼 믿어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사적인 내밀함을 정보가 드러낼 때(혹은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정보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것은 우리가 종이신문의 콘텐츠를 대하는 것보다 블로그나 트위터의 콘텐츠를 더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하다못해 제품의 기능에 대해 어떤 전문가가 연구결과를 토대로 쓴 신문의 정보들보다, 한 주부가 직접 쓴 사용기가 더 신뢰가 높아진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시대가 진실을 매도하는 시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스토리가 가진 힘은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다. 스토리는 혹독한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다.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스토리를 통해 구체화된 것들이다. 이러한 맥락잇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류가 발전해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제기되고 있는 스토리화의 문제는 아주 작고 사소한 부작용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쁜 스토리가 나쁜 미래를 가져오듯이 좋은 스토리는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은 진통을 겪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의 시대에 대한 이해다. 어떤 정보의 왜곡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이제는 스토리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곡이 벌어진 그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왜곡이 말해주는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 즉 타블로 사건에서 팩트(사실)는 학력의혹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스토리는 병역문제나 국적문제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걸 안다면 어떻게 자신이 가진 진실을 대중들에게 전해주어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언론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 때, 늘 하는 태도로서 몇몇 네티즌들을 악플러로 몰아가는 자세 역시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해 사건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은 합당한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싸잡아 모두를 악플러로 모는 것은 소통을 불통으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실이 중요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실 뒤에 놓여진 스토리를 바라봐야 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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