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동물농장’ 800회, 동물은 어느새 가족이 되었다

사실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 중 장수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KBS ‘동물의 왕국’같은 프로그램을 빼놓을 수 없다. ‘동물의 왕국’은 1969년부터 방영되어 물론 중간에 잠깐 잠깐씩 휴지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방영되고 있는 동물 소재 프로그램이다. 그토록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시청률이 적게는 5%에서 많게는 7%를 유지하는 스테디셀러다. 

'TV동물농장(사진출처:SBS)'

그러니 이 보다는 상대적으로 짧은(?) 16년차를 맞은(물론 이것도 짧은 건 아니다) SBS ‘TV 동물농장’이 지금 그 의미가 남다른 건 단지 장수 프로그램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TV 동물농장’은 ‘동물의 왕국’과 달리 단 한 차례도 휴지기를 가진 적 없고 꾸준히 16년을 달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는 그 과정들을 고스란히 프로그램의 변화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지금 현재도 뜨거운 관심을 받는 프로그램으로 서 있다.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구경꾼에서 반려자로 조금씩 바뀌어왔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예민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서 프로그램에 적극 반영해온 것이 ‘TV 동물농장’이 거둔 가장 큰 성과다. 사실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물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구경꾼’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각의 변화를 조금씩 보여줬던 프로그램이 바로 KBS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동물의 입장에서 붙여진 내레이션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교감의 문을 열어주었다. 

‘TV 동물농장’ 역시 초창기에는 동물들의 신기한 행동 관찰기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만 차츰 동물을 캐틱터화 하기 시작했고 그 의인화는 동물과의 거리감을 대폭 좁혀 놓았다. 그리고 ‘TV 동물농장’이 고민한 건 동물과 인간과의 공존에 관한 것이었다.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그 이야기들은 커다란 감동을 주기도 했지만 때론 처참한 동물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들을 공분하게 만들기도 했다. 

2009년에 방영된 ‘동물심리분석가 하이디의 위대한 교감’ 같은 코너는 상처받은 동물들과의 교감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TV 동물농장’의 방식은 거꾸로 우리들이 사는 방식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우화적 기능을 부여하기도 했다. 피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길바닥에서 만나 그 차가운 몸을 부비며 마치 친 자식을 돌보듯 챙긴 고양이 이야기나, 사정이 어려워 떠난 주인을 하염없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개의 이야기 같은 소재들은 우리를 새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TV 동물농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대당하는 동물들의 실태를 고발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난해 방영됐던 ‘강아지 공장’ 실태에 대한 르뽀는 현행 ‘동물보호법’에 대한 경각심을 되새겨줬다. 또 학대당하는 강아지를 주인으로부터 격리시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TV 동물농장’이 해온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어느새 동물들은 우리와 함께 공존해야할 가족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와의 공존은 그것이 동물과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 사이의 관계로 확장되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적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단지 16년 800회의 수치로만 얘기할 수 없는 ‘TV 동물농장’만의 진정한 가치다.

<워크래프트><정글북>, 타자를 보는 두 개의 시선

 

최근 개봉된 두 편의 할리우드 영화는 CG 기술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한 예견을 가능케 한다. 블라자드의 게임을 영화화한 야심작 <워크래프트 : 전쟁의 서막>과 월트디즈니의 <정글북>이 그 영화들이다.

 

사진출처 : 영화 <정글북>

<정글북>은 이미 수차례 애니메이션, 영화화된 전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다. 정글에 버려진 아이 모글리가 늑대들에 의해 키워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호랑이 쉬어 칸과 함께 공존하려는 무리들(늑대들과 곰 발루, 흑표범 바기라 등)이 대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정글에서 인간 모글리와 공존할 것인가 아니면 정글은 정글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 결국 인간에게서 불을 가져온 모글리는 쉬어 칸 같은 맹수들을 물리치고 정글의 평화를 이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 이야기가 영화로 재현되고 전 세계적인 흥행을 이끈 데는 CG 기술이 큰 몫을 차지했다. 모글리를 빼놓고 정글까지 온통 CG로 완성한 작품은 한 마디로 애니메이션 기술의 총아를 보는 듯하다. 이야기의 성격 상 아이와 맹수들이 정글에서 함께 뒤엉키는 장면들은 결국 CG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월트디즈니는 이 작품을 통해 이제 자신들이 세워놓은 상상력의 제국에 날개를 단 셈이다. <정글북>은 기존의 월트디즈니 만화 애니메이션들이 이제 실사 애니메이션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한편 블리자드사의 <워크래프트 : 전쟁의 서막>은 유명한 게임을 영화화했다. 게임 원작 영화들은 물론 이전에도 <툼레이더><레지던트 이블>, <페르시아의 왕자> 등등 많았다. 하지만 <워크래프트>는 마치 영화가 판타지물을 끌어안게 됐던 <반지의 제왕>처럼 영화가 게임을 끌어안은 신기원으로 여겨진다. 물론 <반지의 제왕>만큼의 탄탄한 완성도를 보여주진 못하지만 <워크래프트>의 성취는 이후 블리자드를 비롯한 많은 게임사들의 영화화 러시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워크래프트>는 게임 원작이기 때문에 그 스토리가 게임을 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른바 덕후라면 이 영화에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오크족의 행성이 황폐해지자 인간의 행성으로 와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려는 오크들과 이와 맞서는 인간과 마법사 등의 대결이 그 스토리다. 오크족의 듀로탄은 이 영화의 화자이자 거의 주인공에 가까운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흥미로운 건 <정글북>의 세계관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이 너무나 상이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글북>이 키플링에 의해 소설로 나왔던 19세기 말과 <워크래프트>가 게임화된 20세기 말, 1세기가 변화해온 세계관의 영향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알다시피 <정글북>은 근대의 제국주의의 시선이 정글과 인간이라는 대립구도를 통해 담겨져 있다. 야만을 대변하는 맹수를 무너뜨리고 정글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는 언뜻 공존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시선이 정글에서는 이방인에 해당하는 인간의 시점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덧씌운다. 물론 영화는 흑표범 바기라의 내레이션으로 흘러가지만 그것은 모글리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것이다.

 

반면 <워크래프트>는 인간이 아닌 오크족의 듀로탄이라는 영웅을 내세움으로써 이러한 시선의 중심이 해체된다. 오크족도 인간들도 서로 싸우게 되는 건 그들 자체가 반목해서가 아니라 그 각각의 내부에 존재하는 진짜 적들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워크래프트>는 오크족과 인간들의 대결 이면에 오크족 내부와 인간 내부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물론 오락영화로서 <정글북><워크래프트>CG 기술이 만들어낼 미래의 영화를 가늠할 정도로 흥미롭다. 하지만 그 화려한 스펙터클 이면에 깔려 있는 너무나 다른 세계관은 역시 CG가 제아무리 화려한 미래의 영화라고 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오히려 잘 드러내준다. 동시간대에 방영되고 있는 놀라운 CG 기술의 영화지만 <정글북>이 어딘지 구시대적이고, <워크래프트>가 동시대적인 느낌을 주는 건 바로 이런 세계관 때문이다

<손님>, 타자에 대한 폭력은 어떻게 일어날까

 

<손님>은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영화다. 유명한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갖고 있지만 1950년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겹쳐지면서 무국적성의 이야기는 특수한 우리네 상황의 이야기로 전화된다. 공포를 다루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판타지가 있고 그 안에는 사회 비판적인 요소들이 은유적으로 담겨져 있다. 중요한 건 공포가 갖고 있는 장르적 속성 따위가 아니다. 대신 그 공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진출처:영화 <손님>

이 공포의 연원은 제목에 이미 들어가 있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다. 주인이 제 집처럼 생각하라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다. 그런데 만일 주인들이 손님을 철저히 타자로 바라보고 낯선 이방인으로 경계를 그어버린다면 어떨까. <손님>의 피리 부는 사나이 우룡(유승룡)이 아들 영남(구승현)과 들어가게 된 마을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마을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그 마을사람들이 외부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우룡은 아들 영남의 이름을 설명하며 호남에서 태어났지만 이름은 영남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호남과 영남으로 대변되는 오랜 세월동안 반복된 지역갈등과 경계, 타자화를 적어도 우룡과 그 아들은 뛰어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자신들을 타자로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건 그래서 오로지 이 우룡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우룡이 가까워지는 걸 탐탁찮게 바라보는 이도 있다. 그것은 이 배타적이고 고립된 마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촌장(이성민)이다.

 

마을 사람들이 촌장과 공동운명체가 된 이유로 원죄가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네 불행한 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짓밟은 땅 위에 세워진 공동운명체는 그래서 공포를 기반으로 유지된다. 쿠데타의 이미지와 그로 인해 권력을 쥐게 된 권력자의 이미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전쟁의 이미지 그리고 고양이를 잡아먹는 쥐의 공포는 두렵지만 이 마을이 유지되는 이유다. 공포로서 유지되는 마을과 지도자가 독재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와 이 마을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를 신비로운 피리소리로 물러나게 만드는 악사는 권력자에게는 자신의 권력 유지 기반을 지워내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촌장과 악사는 약속으로 맺어지지만 그 약속이 파기되면서 죽고 죽이는 비극은 시작된다. 공포는 이미 주인과 손님,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이미 심어져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구분이 비정상적인 이 마을의 권력체계를 유지하는 기반이었으며, 따라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그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것이다.

 

<손님>이 놀라운 건 이 작은 마을의 가상의 이야기 속에 우리네 현대사의 비극들을 대부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대적 배경으로 한국전쟁의 상황을 두고 있다는 건 이처럼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시선이 바로 그 비극적인 전쟁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공포와 권력의 이중주는 우리네 비극적인 현대사를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손님>은 그러나 이러한 사뭇 현대사의 복잡한 심리적 배경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판타지와 영상 미학 또한 담아내고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가진 그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그림들은 그래서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잘 살려내고 있다. 우룡이라는 주인공을 악사이자 광대로 세워놓은 것은 그래서 이런 영화 미학과 맞물려 잘못된 권력의 악순환을 폭로하고 저항하는 예술의 힘을 에둘러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은 이처럼 그 미적인 장치를 통해서 현실과 대적한다.

 

<손님>은 한 가지로만 해석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상징적 이야기를 그리면서 어떤 주석을 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리네 현실이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들이 권력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인이어야 마땅한 우리들이 어쩐지 늘 손님으로만 대해져 왔다는 그 불편함 때문이 아닐까.



<혹성탈출> 변칙 개봉 논란과 영화의 공존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하 혹성탈출)>에서 시저는 유인원 종족들을 이끌고 인간들 앞에 서서 서로의 영역에 대해 말한다. 숲은 유인원들이 사는 공간이고, 도시는 인간 생존자들이 사는 공간이라는 것. 시저는 각자의 영역에서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즉 인간과 유인원 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혹성탈출>20세기 내내 인류를 전쟁으로 내몰았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사진출처: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10여 년을 각각 살아가던 인간과 유인원이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해 총성이 울리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인간은 낯선 숲에서 갑자기 마주친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유인원에게 느낀 공포로 인해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인원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잡혀 갖가지 실험을 당했던 유인원 코바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다른 선택도 있다. 시저와 말콤이 유인원과 인간이라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어 신뢰와 우정으로 나아가는 선택이 그렇다. 말콤이 유인원들의 숲에 죽음을 불사하고 들어간 것은 그 두려움을 공존의 의지로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공존에 대한 노력은 양자 간의 대결이 아니라 평화를 깨려는 내부의 적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블록버스터이면서도 진지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혹성탈출>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개봉에 있어서 아이러니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즉 이 영화는 공존을 이야기 하지만 이 같은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를 점령하다시피 하는 상황은 작은 영화들에게는 공존은커녕 생존을 얘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같은 변칙개봉 논란은 이 거대한 몸집의 영화가 개봉일 변경 하나만으로도 작은 영화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되는 현 영화 생태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논란을 단지 할리우드 vs 우리 영화로 구분해 대결구도를 갖는 건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혹성탈출>의 이야기가 인간 vs 유인원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과 유사하다. 시저는 영화의 말미에 유인원이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그것은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할리우드와 우리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네 영화는 상당 부분 할리우드를 닮아가고 있다. 우리 영화에 있어서도 끝없는 스크린 독점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개봉되면 작은 영화들은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 버린다. 그러니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의 문제는 우리 영화를 포함한 블록버스터들의 독점적인 스크린 장악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이제 자본이 장악하고 있다. 자본 아래 국적성이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진정 <혹성탈출>이 주제로 보여주는 것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전 세계의 영화관을 거의 독점 하다시피 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욕하면서도 우리의 자본은 그 시스템을 철저히 배워 우리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결국 <혹성탈출>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은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은 영역과 종족 구분 없이 전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인간의 총을 가져와 유인원들에게조차 총구를 겨누는 코바의 모습은 그래서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저 할리우드의 습격을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잣대를 내세워 욕할 자격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그 총을 들여와 우리 영화계를 향해 겨눈 것은 우리네 거대자본이 아니던가.

 

시저와 말콤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존을 꿈꾸면서도, 시저의 말대로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유인원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다. 공존하겠다는 의지와 모든 걸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현재 우리네 영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크린 전쟁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 논란은 할리우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현재 처한 문제이기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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