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독’, 바나나 하나로 이렇게 치열하다는 건

 

‘바나나’ 하나가 불러온 파장이 이렇게 클 줄이야. tvN 월화드라마 <블랙독>이 다룬 시험문제 출제와 정답에 대한 이의제기 상황이 야기한 파장을 다뤘다. 국어 시험 문제에 등장한 ‘성순이가 바나나와 수박 두 개를 샀다’는 지문이 문제가 됐던 것. 이 지문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성순이가 바나나 한 개와 수박 한 개를 샀을 수도 있고, 바나나 한 개와 수박 두 개를 혹은 바나나 두 개와 수박 두 개를 샀을 수도 있다 해석되었던 것.

 

하지만 학생들은 거기에 또 다른 이의제기를 했다. ‘어휘적 중의성’으로 보면 바나나가 성순이와 마찬가지로 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는 것. 학생들은 그래서 자신들이 쓴 답도 맞는 것으로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어과 선생님들이 모여 한 회의에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이런 이의제기를 받아줄 수 없다며, 심지어 이건 “교권침해”라고까지 했다. 고하늘(서현진)은 이럴 때는 수업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회의결과 수업시간에 가르친 것을 중심으로 판단해 복수정답은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회의결과를 통보했지만 학생들의 반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유라(이은샘)는 그 ‘어휘적 중의성’이 수업시간엔 배우지 않았지만 수능 기출에 나온다며 반박했고, 상위권 학생들의 특별반인 이카루스 수업에서는 아이들이 ‘어휘적 중의성’을 배운 적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이 문제를 들고 교육방송 문제집 집필 교사까지 찾아가 조언을 얻은 결과 “시험 문제가 정확하지 않았다”며 조건을 달아주지 않았다면 억울해도 정답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블랙독>이 다룬 이른바 ‘바나나 사건’은 결국 복수정답을 인정하고 고하늘이 학생들에게 사과하는 장면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시험문제 하나를 내는데 있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선생님들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기도 하고, 그렇게 낸 문제가 정교하지 못해 이의제기를 받는 상황이나 그로 인해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깨져버리는 신뢰는 지금의 우리네 학교 교육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면이 있어서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권위만을 지켜내려는 일부 선생님들도 문제지만, 이런 문제 하나에 목숨 걸고 들고 일어나 이의제기를 하는 학생들이 처한 상황도 문제다. 이미 이 학교에서 벌어졌던 과학시험문제 오답 정정 사건은 학부모가 나서서 인맥을 활용해 문제의 허점을 발견해내고 결국 오답 처리된 사건으로, 문제 하나에도 치열해진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의 갈등을 보여준다.

 

고하늘은 바나나 하나로 이런 엄청난 파장이 일어난 사실에 당황하지만 결국 그 문제 하나가 한 학생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실수를 인정하기로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제 하나로 아이의 미래가 바뀌는 이 현실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그로 인해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 신뢰가 깨져버리고 서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이 상황은 어째서 생겨나고 있는 걸까.

 

<블랙독>은 대치고등학교라는 학교에 입성해 고군분투하는 기간제 교사 고하늘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에 집중하지만, 이런 사건들이 진짜로 지목하는 건 이 문제를 야기하는 우리네 교육 전반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은 문제 하나로 미래가 바뀔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경쟁자가 되는 상황이고, 선생님들은 문제 하나에도 신뢰가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 처해 버린다. 게다가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의 차별로 인해 교사들 간의 경쟁 또한 학생들만큼 치열한 상황이니 말이다.

 

<블랙독>을 보다보면 그래서 우리네 사회가 가진 문제의 근원들이 바로 이 학교와 입시교육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저렇게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생존할 수 있다는 걸 학교에서부터 체득한 아이들에게 공존이나 상생 같은 가치들이 눈에 들어올 수 있을까. 선생님들조차 기간제라는 비정규직의 틀에 묶여 무한 경쟁하는 상황이니 우리네 학교는 마치 경쟁 시스템을 체화하는 곳처럼 인식된다. 바나나라는 단어 하나에도 이토록 치열한 현실이니.(사진:tvN)

‘학교 2017’, 학교가 부조리한 현실의 축소판이라는 건

이걸 어떻게 청소년 드라마라고 볼 수 있을까. KBS 월화드라마 <학교 2017>은 어른들이 불편한 드라마다. 학교라고는 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대로 우리네 부끄러운 현실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학교. 그래서 공부를 못하면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학교. 심지어 공부를 못한다고 문제아가 되는 이 학교의 시스템은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현실 그대로다. 

'학교2017(사진출처:KBS)'

끝없이 이어지는 시험과 그렇게 나온 결과를 버젓이 벽보에 붙여 자신의 등수를 확인시키는 이 학교에서 은호(김세정)는 성적이 바닥이다. 공부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 이 아이는 웹툰 작가가 꿈이다. 하지만 학교는 이 아이의 꿈 따위는 소중하게 바라봐주지 않는다. 애써 그려온 습작노트를 보고 그 꿈의 등을 두드려주지 못할망정, 선생님은 그 노트를 빼앗아가 버린다. 소중한 노트를 찾기 위해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게 된 은호는 마침 그곳에서 불을 지르고 있는 의문의 인물을 목격하고, 오히려 자신이 그 범인으로 몰려 퇴학 위기에 처한다. 

학교는 범인을 찾기보다는 희생양을 찾으려 한다. 범인 잡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른바 학교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음에도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세운다.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은호는 희생양으로서 최적의 인물이 된다. 제자를 구제하려는 담임선생님의 노력은 무시된다. 결국 그렇게 제자가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선생님과 그녀와 아빠 같은 힘없는 어른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자신들을 자책한다. 

학교 바깥은 더 살벌한 현실이라는 것을 선생님들조차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학교가 그 현실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바깥으로 내몬다. 과연 이건 학교라는 곳이 해도 되는 일일까. 학교가 너무 쉽게 아이들을 바깥으로 내몬다는 담임선생님의 한탄 속에 우리네 현실의 부끄러운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이 학교라는 단어를 사회로 바꾸면 그 굴러가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똑같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공부를 못하면 있을 수 없는 곳이 학교라지만, 그 공부 또한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고가의 학원을 보내고, 심지어 족집게 과외를 시키는 부모의 아이들이 학교의 상위권을 형성하고, 그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만을 위한 학교가 되게 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세한다. 가진 것 없는 집의 아이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범인으로 몰린 은호에게 공부를 못한다며 그래서 문제아라는 선생님의 지적이 이어지고, 청문회를 예로 들어 결국은 사실대로 다 불게 되어 있다며 몰아세우자, 은호가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이 모두 수재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장면은 그래서 따끔하다. 그렇게 부조리한 시스템에서 자신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며 자라나 이른바 성공이란 걸 한 어른이 어찌 제대로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학교 2017>은 그래서 그저 청소년 드라마가 아니다. 그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우리네 현실의 축소판이고, 그런 학교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청소년 드라마가 풋풋한 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런 살벌한 현실을 담게 되었을까. 그것이 우리네 학교의 현실이기 때문이겠지만.

진실의 은폐, <솔로몬의 위증>이 건드리는 것들

 

저희 반에 빈 책상만 네 개예요. 그게 어른들의 보호고 도움이에요? 그럼 전 안 받을래요. 필요 없어요.” 고서연(김현수)이 말하는 빈 책상 네 개. 어째서 이 빈 책상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더 큰 잔상으로 남을까.

 

'솔로몬의 위증(사진출처:JTBC)'

JTBC 금토드라마 <솔로몬의 위증>은 학교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한 학생 이소우(서영주)로부터 시작한다. 평소 그를 괴롭혀온 최우혁(백철민)과 그 친구들에 대한 미심쩍음이 있었지만 학교는 서둘러 이를 덮으려 하고 경찰은 자살로 사건을 종결하려 한다. 사실 학내 폭력사태나 혹은 자살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걸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학교 이야기는 우리가 신문지상에서 너무나 많이 읽어온 것들. 그래서 <솔로몬의 위증>은 일본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어쩐지 우리의 이야기 같은 현실감을 준다.

 

물론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평소 최우혁과 그 친구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이주리(신세휘)가 그를 따르는 박초롱(서신애)과 함께 최우혁이 이소우를 죽였다는 고발장을 만들어 서연의 집 앞에 놓아두게 되고, 이를 입수한 언론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터트리자 두려움을 느낀 초롱은 주리와 말다툼 끝에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가 된다. 즉 한 학생이 죽고, 다른 한 학생은 혼수상태가 되며 다른 학생은 그로 인해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물론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고서연은 친구들의 책상이 하나씩 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학교에서 벌어진 한 학생을 둘러싼 추리극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 고발극에 가깝다. 드라마가 고발하려는 건, 한 학생의 죽음이라는 중차대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그 진실을 제대로 알려 하기보다는 자기들 유리한대로만 처리하려는 어른들이다. 그 어른은 다름 아닌 학교와 경찰과 언론이라는 탈을 쓰고 있다.

 

학교는 그럴 듯한 추모식을 거창하게 열었지만 그건 죽은 학생을 진심으로 추모하려하기보다는 서둘러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다. 경찰은 고발장을 보게 된 후 이 사건으로 갖게 된 학생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심리 상담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아이들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한 구실이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파헤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박기자(허정도)흥미에 더 관심이 많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보도를 내기 위해 그는 금수저 천지인 정국고에서 위선과 허위를 폭로하면서 정의를 수호하는” ‘정국고 파수꾼이라는 가명의 SNS 계정을 추적하려 한다.

 

박기자는 본래 사람은 자기 유리한대로 움직이는 것이라며 학생들은 가만있는 게유리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2학년은 어른들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나이라며 너 네가 어른들 도움 없이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서연은 안다. 어른들의 보호와 도움이라고 했지만 결국 자기 반에 빈 책상만 늘어가게 됐다는 것을.

 

결국 <솔로몬의 위증>은 그래서 이렇게 진실을 덮으려고만 하거나 혹은 자기들 유리한대로만 하려는 어른들에 대항해 아이들이 직접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을 담는 드라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네 부끄러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끄러운 현실들을 염두에 둔다면 아이들의 이런 반발에 심정적 지지가 가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그래서 <솔로몬의 위증>은 광화문 촛불 집회 현장에 나온 학생들이 또박또박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던질 때 어른들이 갖게 되는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특히 교실에 빈 책상을 볼 때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아이들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학교, 군대, 회사의 부당함, 꼰대냐 어른이냐

 

주머니 속의 송곳. 언제든 바지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그 송곳 같은 존재. 아마도 JTBC 드라마 <송곳>은 그런 의미에서 달린 제목일 것이다. 이수인(지현우)은 그런 인물이다.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님을 거부하고 대신 매를 맞는 걸 선택하는 인물이며, 대선에서 특정 인물을 강요하는 사관학교의 장성에게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나서는 인물이다.

 


'송곳(사진출처:JTBC)'

그런 그에게 푸르미 마트의 정민철 부장은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는 송곳 같은 존재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이 평탄치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장래희망을 꼰대라고까지 적기도 했었다. 즉 송곳 같은 선택이 늘 그를 힘겹게 했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송곳 같은 선택을 한다. 모두 해고하라는 명은 불법이라고.

 

사실 학교에서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님이나 대선에 특정인물을 찍으라 강요하는 일, 그리고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요구하는 일은 모두 잘못된 일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부당함을 토로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부당함을 얘기하기보다는 그것을 감수하는 걸 선택한다. 그것이 훨씬 편안한 삶을 만들어주는 현실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과연 옳은 일일까. 이런 식의 포기가 결국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송곳>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간단하다. 그리고 지극히 상식적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는 것일 뿐. 하지만 그 송곳 같은 한 마디는 의외로 큰 파장을 일으킨다. 모두가 수긍하고 포기했던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곳>이 겨냥하고 있는 건 바로 이 상식 없는 현실이다.

 

이수인이 송곳이 된 공간이 학교, 군대, 회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 세 곳은 다름 아닌 사회집단이다. 우리네 사회집단이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함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으며 심지어 그 부당함을 당연한 것처럼 체화시키는 곳이 되어 있다는 건 통탄할 일이다. 흔히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이 사회생활도 잘한다고 말하는 데는 그 부당함이 하나의 요령이 되어버린 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송곳>은 이수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런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부당한 현실에도 적당히 수긍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거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 비로소 그런 문제제기를 통해서만이 현실이 그 부당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을 때는 그저 당연한 듯 흘러가던 현실이 아닌가.

 

그저 그런 꼰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것인가는 그래서 <송곳>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단할 것도 없는 상식적인 일을 생각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일 뿐이라는 걸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러니 이수인을 송곳 같은 존재로 만든 건 그 자신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비상식적으로 굴러가는 현실이다.

 

<송곳>이라는 드라마의 재미는 바로 이 현실과 조응하면서 생겨난다. 우리 현실이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체화시키고 교육시켜 왔던 포기. 그래서 어른이 아닌 꼰대가 되어야 살기가 수월하게 되는 현실. 그 주머니로 가려진 현실 속에서 주머니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송곳 같은 역할을 해주는 드라마.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은 꺼내지 않았던 그것을 말해주는 드라마. 그것이 <송곳>이 주는 통쾌함의 이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