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 연기, 연출 뭐하나 만족되지 않는 '해품달'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의 뜬금없는 장면 하나. 자신의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처인 민화공주(남보라)임을 알고 허탈해 하는 허염(송재희)에게 갑자기 자객들이 나타난다. 이 자객들은 윤대형(김응수)측이 보낸 것이라는 암시만 있을 뿐 누가 보낸 것도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보낸 이유조차 애매하다. 애초부터 이렇게 자객을 보내 죽일 거였다면 굳이 그에게 민화공주가 자신의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편지로 보낸 이유는 뭔가. 이 스토리는 어딘지 매끄럽지가 못하고 억지스러운 구석이 많다.

즉 허염이 모든 사실을 알고 민화공주를 질책하는 장면이 필요한데, 그 사실을 알리는 방법으로서 윤대형을 활용한 것이라고밖에 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뜬금없는 장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허염을 해치려는 자객들 앞으로 갑자기 설(윤승아)이 등장해 그들을 가로막는다. 결국 자객들과 싸우다 칼에 맞고 쓰러지는데, 또 여기서 느닷없이 운(송재림)이 나타나 나머지 자객들을 모두 물리친다. 물론 운의 갑작스런 등장은 후에 훤(김수현)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지지만 이것 역시 훤이 왜 그런 지시를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럴 듯한 이유는 별로 없다.

즉 이 장면은 허염 앞에서 설이 죽는 장면이 필요하고 또 그러면서도 허염은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운을 등장시킨 것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이런 식의 스토리 전개는 결말 부분 이 모든 드라마의 사건들이 해결되는 방식이다. 물론 훤이 양명군(정일우)을 통해 윤대형의 역모를 뒤집으려 계획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서 윤대형이 죽고, 그 순간에 중전(김민서)도 스스로 목을 매고, 양명군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식의 해결은 너무나 급작스럽고도 쉬운 선택이 아닐까. 결국 문제의 해결을 작가가 나서서 했다는 인상이 짙다. 이것은 저 그리스 비극에서 좋지 않은 극으로 지목되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갑작스럽게 신이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하는 방식)'를 떠올리게 한다. 캐릭터들이 스토리 속에서 저 스스로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마치 작가가 체스놀이를 하듯 이리 던지고 저리 움직여 스토리를 이어가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취약점으로 지목되는 것은 연기력 부족이다. 설을 연기한 윤승아는 죽는 순간에서조차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설픈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연기도 연기지만, 이 순간에 지루하게 던져지는 긴 대사로 인해 더더욱 몰입이 어려워졌다. 죽기 전에 할 말을 다 하는 이런 대사처리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대왕대비 윤씨(김영애)에서도, 또 양명군의 죽음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했는데, 주로 과거 신파극에서나 많이 쓰던 방식이다. 가뜩이나 연기 몰입이 안 되는 상황에 대사까지 이러니 발연기라는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연기력에 대한 문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중견연기자들을 빼고는 대부분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물론 아역 여진구와 김유정 그리고 김수현은 예외다.

그렇다면 연출력은 어떨까. 아역들이 연기하던 초반에는 판타지와 멜로가 뒤섞이는 괜찮은 장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뒤쪽으로 갈수록 어딘지 어설퍼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파업의 여파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모가 벌어지는 장면에서 고작 수십 명의 병사가 등장하는 건 좀 너무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연출은 볼만한 구석들도 많았지만, 끝없이 옥의 티가 발견되는 등(시청자들은 그래도 이것조차 귀엽게 받아들이는 아량을 베풀었지만) 허점이 많이 드러났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해를 품은 달'의 미스테리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생겨난다. 대본이 앙상하고, 연기가 받쳐주지 않는데다가, 연출도 실수투성이였는데 어떻게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던 것일까. '해를 품은 달'은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뿌리 깊은 나무'에 훨씬 미치지 못했고, 퓨전사극의 참신함에 있어서 '바람의 화원'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청춘 멜로사극의 풋풋함에 있어서도 '성균관스캔들'을 넘어서지 못했다. 주제의식이 불분명한 이야기는 너무나 느슨했고, 좀 더 풋풋했어야 할 멜로의 정조는 신파조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그 여타의 작품들이 도달하지 못한 40%라는 시청률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은 거꾸로 40%라는 시청률에 우리가 경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40%의 시청률을 낸다고 해서 그만한 완성도의 작품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꽉 짜여진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뿌리 깊은 나무'의 시청률이 20% 언저리에 머물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해를 품은 달'의 40%라는 수치가 만들어낸 열광에는 다분히 착시현상이 있었다는 얘기다. 드라마 시청률이란 주지하다시피 중장년층의 시청률을 의미한 지 오래다. 따라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이라고 해서(그래서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그 드라마의 질이 높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해를 품은 달'이 어떻게 중장년층의 입맛에 맞아떨어졌을까. 어쩌면 이 기묘한 사극의 성공은 바로 이 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사극이라는 친숙한 장르가 갖는 착시현상이 그 한 가지였을 것이고, 사실은 중장년층에 익숙한 신파적인 멜로면서도 그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낮았기 때문에 어딘지 세련되어있다는 착각을 주면서 동시에 '청춘'에 대한 향수를 불러왔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요인일 것이다. 기실 중장년층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콘텐츠(신파, 느린 전개, 사극)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구닥다리처럼 보이지 않는 포장(청춘멜로, 아역, 젊은 연기자)이 아닌가. 중장년층은 이제 그들 세대가 나와 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젊은 세대들이 전하는 그들이 젊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에 매료되곤 한다. 이것은 최근 복고를 내세우는 대부분의 트렌드들(예를 들면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복고풍 영화들 같은)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해를 품은 달'의 성공은 바로 이 기획의 성공이지 그것을 작품의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40%라는 시청률에 경도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양적인 것이 질적인 것을 담보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를 품은 달'에 반짝이는 순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루한 전개와 몰입을 방해하는 연기와 실수 연발의 연출은, 그 순간들마저 상쇄시켜버린다. 어쩌면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완성도는 떨어지는 '해를 품은 달'의 미스테리는 점점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시청률 추산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품달', 절묘한 제목에 담긴 의미들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이란 제목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물론 음양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해는 양, 즉 왕을 뜻하고 달은 음, 즉 여인을 뜻한다. 이 사극에서 해는 훤(김수현)이고 달은 월이라고도 불리는 연우(한가인)다. 이처럼 '해를 품은 달'은 그 제목만으로도 이 사극이 멜로를 지향하고 있다는 걸 극명하게 드러낸다. '해를 품은 달'이란 훤과 연우의 가까운 듯 먼 그 안타까운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는 사극이다.

달이란 본래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콘텐츠들 속에서 달이 종종 그리움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해가 뜨면 달은 사라진다. 즉 눈 앞의 현실은 그리움이나 추억 같은 과거의 기억을 마치 없는 것처럼 저편으로 밀어낸다. 그래서 하루의 현실이 지나가고 이제 오롯이 자신으로 돌아오는 밤이 되면 그 없었던 듯 떠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달, 그리움이다.

그래서 '해를 품은 달'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기억을 잃고 월(月)이 된 연우는 자신을 비춰주었던 해(훤)의 곁에서 액받이 무녀로 살아가며 조금씩 기억을 찾아낸다. 이것은 마치 그믐이었던 달이 초승달과 반달을 거쳐 보름달로 바뀌는 그 과정을 그려낸다. 하지만 연우는 훤과의 관계를 통해 차츰 기억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남의 기억(신기로 들여다보는)이라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이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은 바로 '일식'이다. 사실상 '해를 품은 달'이란 제목은 이 일식을 뜻하는 것이다. '해를 덮어버리는 달'은 잠시 현실을 지워버리고 과거의 기억만을 오롯이 띄우는 시간이다. 이 반전의 시간에 연우가 어린 시절 세자빈으로 있을 때 거처했던 은월각의 혼령받이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절묘하다. 그것은 현재의 월이 과거의 연우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래서 월이 자신이 연우임을 알고 비로소 훤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해와 달이 겹쳐지는 현상, 일식으로 상징화된다.

이렇게 보면 음양 사상과 무속적인 판타지가 뒤섞인 이 사극 콘텐츠에 왜 무녀라는 낯선 인물들이 들어왔는가가 설명된다. 일식은 특히 사극에서 무녀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선덕여왕'에서 일식이라는 현상은 미실이 민초들을 현혹시키는 방법으로 활용된다. 이 에피소드에서 무녀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이것은 과거 정통사극 시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때도 무녀들은 일식이라는 설정과 함께 왕의 실정을 드러내는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곤 했다.

'해를 품은 달'이 가진 판타지적인 요소들은 이처럼 해와 달, 그리고 일식이라는 자연현상을 인물들로 상징화한 스토리와 엮어냄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멀리 떨어져 마주보고 있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그 아련함은 이 압도적인 자연현상에 그리움 같은 애절함을 부여한다. 이것은 '해를 품은 달'이 가진 기존 사극과는 상반되는 정조를 만들어낸다. 기존 사극들이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와 숨 쉴 틈 없이 흘러가는 소설적인 흐름을 갖고 있었다면, 이 사극은 조금은 멈춰 서서 그 순간의 감정을 깊이 느껴보는 시적인 정조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우러나는 마치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은 그래서 대중들이 이 사극에 빠져들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해품달' 성공이 중견작가들에게 시사하는 것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이 시청률 37%를 넘어섰다. 이런 기세면 40%도 손쉽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한 때 사극이란 장르가 첫 회부터 20% 시청률로 시작해 통상 40%를 넘기는 것이 다반사였던 걸 떠올려보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드라마들의 시청률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해는 사극마저 20% 넘기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항간에는 대신 예능이 드라마의 권좌를 빼앗았다는 얘기마저 돌았다. 그러니 '해를 품은 달'이 첫 회에 18%의 시청률을 기록했을 때 심지어 제작진마저 깜짝 놀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해를 품은 달'의 성공은 그저 한 작품의 성공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즉 이 작품은 똑같은 패턴을 반복함으로써 침체됐던 사극의 부활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과정에는 '역사로부터의 탈피'라는 과감한 선택이 있었다. 역사 바깥으로 나와, 완전한 허구가 된 사극은 그 장르적 특성이 가진 장점만을 취한 셈이다. 하지만 '해를 품은 달'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역사적 배경만 떼어놓고 보면 전형적인 청춘 멜로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해를 품은 달'의 성공은 그간 침체기를 겪은 멜로 장르가 사극이라는 틀을 접목시켜 부활한 작품으로도 평가될 수 있다. 그만큼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작년 한 해 우리의 주목을 끈 드라마들의 면면을 보면 그 핵심에 바로 이 '참신한 시도'가 깔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주의 남자'가 본래 역사를 재구성하여 팩션 사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의 한글 창제라는 소재 속에서도 전혀 다른 장르적 재미를 덧붙인 팩션 사극의 새로운 실험을 완성했다고 평가된다. 작년 초 '현빈 앓이'를 만들었던 '시크릿 가든'은 영혼 체인지라는 판타지를 덧붙여 멜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독고진 현상'을 만든 '최고의 사랑' 역시 연예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 대중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보기 드물게 법의학이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룬 '싸인', 의학드라마의 틀 안에서 심지어 컬트적인 시도를 보인 '브레인'도 그 참신한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반면 작년 두드러진 현상은 중견작가들의 저조한 성적이다. 김정수 작가가 쓴 '내일이 오면'은 10%대 초반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문영남 작가의 '폼나게 살거야'도 시청률 10%를 못 넘기고 있다. 그나마 임성한 작가가 '신기생뎐'으로 24%의 시청률을 올렸지만, 이 작품은 시청률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졸작이었다. 유령에 빙의되고 심지어 눈에서 레이저광선을 쏘는 장면들은 이 작품을 막장 중의 막장으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알츠하이머라는 기억의 문제를 덧붙여 절절한 멜로를 만들어냈던 김수현 작가의 '천일의 약속'은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지만 그 명성에 비해 저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중견작가들이 써내는 거의 비슷비슷한 도돌이표의 작품들에 대중들이 시선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것. 가족드라마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것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 중견작가들이 주로 써온 가족드라마들은 인물 구성만 달리했지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굳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또한 중견작가들의 작품들이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거나 연구해서 나온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한 마인드 게임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점도 대중들의 외면을 가져온 이유 중 하나다.

'해를 품은 달'의 진수완 작가, '공주의 남자'의 조정주 작가, '무사 백동수'의 권순규 작가, '싸인'의 김은희 작가, '브레인'의 윤경아 작가 등등, 사실상 신진작가들이 작년 대거 주목을 받은 반면, 중견작가들의 성적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제 제작진들의 시선도 바꾸고 있다. 그래서 벌써부터 드라마 업계에는 작가의 '세대교체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이다. 신진작가들에 비해 원고료는 터무니없이 비싸면서도 그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중견작가를 굳이 쓸 이유가 없다는 것. 게다가 시청률이 나온다 해도 매번 비슷한 패턴에 머물러 있는 드라마에 대한 대중들의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시청률이 좋아도 이런 작품에 광고가 잘 붙을 리도 없다.

물론 이렇게 중견작가들의 몸값이 성적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아진 데는 방송사의 책임이 있다. 시청률을 담보하기 위해 참신한 신진작가들의 실험보다는, 안정적인(?) 중견작가를 너나 할 것 없이 모시다 보니 이런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사실 극성이 높아 시청률은 잘 나오지만 드라마의 완성도는 떨어지기 마련인 막장드라마의 양산은, 바로 이런 몸값에 걸 맞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중견작가들의 안간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시청자들이 이런 작품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방송사 입장에서도 그런 작가를 기용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같은 패턴만 반복하는 것으로는 중견작가라고 해도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만큼 작품은 쏟아져 나오고 드라마가 아니어도 점점 볼 건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 중견작가들은 이제 스스로도 연구하고 실험하는 작품을 고민해야 될 시기다. 중견작가로서 '뿌리 깊은 나무'를 쓴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그런 점에서 모든 중견작가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자기 스타일이 있고 글 잘 쓰는 중견작가라고 해도 이제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해를 품은 달'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 속에는 그 참신함에 대한 갈증이 느껴진다.


'해품달', 기억과 착각의 변주곡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요즘 어떤 것에 매료되는 것을 흔히들 '앓이'로 표현한다. 특히 드라마가 성공하면 그 드라마는 물론이고 캐릭터에 대한 '앓이'는 당연히 따라붙는 영광의 수식어가 됐다.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도 바로 그 '앓이'의 드라마다. 그토록 절절하게 연우(김유정)를 외치던 어린 훤(여진구)의 절규가 귀에 쟁쟁하고, 떠나면서도 훤의 강녕을 비는 연우의 오히려 담담한 서신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성장한 훤(김수현)은 죽었다 생각하는 연우(한가인)를 앓고, 시청자들은 왕이 된 훤과 액받이 무녀가 된 월이 운명적으로 만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장면에 '해품달'을 앓는다.

'앓이'란 결국 기억의 장난이다. 어린 시절 훤이 연우를 만나지 않았던들, 그녀와 어떤 함께 한 기억을 갖지 않았던들, 그가 그토록 연우를 앓지는 않았을 터다. 훤은 어느새 장성한 왕이 되어있지만 과거 연우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연우는 깊은 상처 때문에 바로 그 훤과의 기억만을 잃어버린다.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훤과 그 기억을 잃어버린 연우. 바로 이 균열의 지점에서 '앓이'가 만들어진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하는 것은 그 '앓이'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훤은 자꾸만 월에게서 그녀가 연우라는 증거들을 찾아내고 놀라지만, 그것을 '미혹'으로 여긴다. "미혹됐다. 하지만 떨쳐버릴 수가 없구나."라는 훤의 대사는 그래서 보는 이를 더 아프게 한다. 한편 연우 역시 점점 돌아오는 과거의 기억들을 무녀인 자신에게 생긴 '신기'로 여긴다. 연우가 교태전 앞에서 과거 기억을 떠올리고는, 그것이 자신의 신기로 훤의 과거를 보게 된 것이라 생각하는 장면은 그래서 아프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 서 있지만 '앓고' 있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가깝지만 먼 거리감이 바로 '해품달'을 앓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흔히 '그리움'을 담는 콘텐츠들이 사랑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물리적인 먼 거리를 세워둔다면, '해품달'은 기억과 착각이라는 거리를 두는 셈이다. 사실 무녀라는 설정(그것도 주인공으로)은 사극에서 그다지 익숙한 것이 아니지만, 이런 신기로 착각하는 장치가 가진 힘을 생각해보면 실로 절묘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억과 착각의 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일수록 절절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훤과 연우의 '앓이'는 기억과 착각의 거리 속에서 점점 깊어지지만, 이 거리가 좁혀져 결국 서로를 알아본다 해도 채워지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왕과 무녀라는 신분의 거리가 그들 앞에 다시 놓이기 때문이다. 멜로라는 '앓이'의 장르가 기능하는 것은 남녀 사이에 놓여진 끝없는 장애와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해품달'은 사극이라는 틀거리를 통해 이러한 남녀 사이의 거리두기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그 지점에서 '앓이'의 강도가 깊어지게 된다.

이렇게 그리움이라는 '앓이'의 실체를 놓고 보면 '해를 품은 달'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해와 달은 그만큼 먼 거리에 놓여져 있지만 달은 그 해의 볕을 받아 빛을 낸다. 그런 점에서 달과 해는 멀리 있어도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결국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이것은 또한 우리가 고전을 통해 익숙한 달과 그리움의 이야기에 닿아있다. 멀리 있어도 달을 보며 자신의 님도 저 달을 보고 있으리라는 아련한 생각. 이것이 '해품달'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가슴 한 켠의 설렘과 절절함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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