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효주, 이종석만큼 흥미진진한 <W>의 세계

 

역시 송재정 작가의 판타지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나인>을 통해 독특한 타임워프의 세계를 보여줬던 그녀가 이제는 <W>라는 판타지의 세계를 들고 왔다. 그 세계는 웹툰과 현실이 교차되는 세계다. 풋내기 의사인 현실 세계의 오연주(한효주)와 웹툰 속 주인공인 강철(이종석)의 만남. 혹은 가상 세계인 웹툰 ‘W’와 그 웹툰을 그리는 현실세계의 부딪침. 어찌 보면 너무 만화 같은 설정이지만 송재정 작가는 그 판타지를 실감나는 흥미진진한 세계로 바꿔 놓았다.

 

'W(사진출처:MBC)'

송재정 작가는 어떻게 이 만화적인 세계를 실감나는 몰입감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을까. 그 첫 번째는 오연주라는 캐릭터의 성공이다. 결국 현실과 웹툰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인물로서 오연주라는 캐릭터가 그 과정을 제대로 납득시켜야 시청자들 역시 <W>의 세계에 대한 공감이 생긴다. 오연주를 어딘지 허술하고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하는 코믹한 캐릭터로 세운 건 그래서 대단히 전략적인 선택이다.

 

그녀는 웹툰 W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느끼는 황당함이나 놀라움을 약간은 코믹하게 시청자들에게 전해줘 가상에 대한 몰입에 진지함을 덜어내는 효과를 가져온다. 웹툰의 세계로 빠져든다는 그 이야기를 유머 섞인 농담처럼 던지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별 심리적 저항감 없이 그 설정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게다가 <W>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웹툰의 세계가 가진 흥미로운 설정들을 연달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이 이 세계를 즐기게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웹툰 바깥에서 그림을 바꾸면 그 안의 세계가 바뀌는 설정이나, 주인공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오연주에게는 한 30분 정도 지난 시간이 웹툰 속에서는 두 달이 훌쩍 가버리는 설정. 또 연재물이기 때문에 어떤 엔딩에 걸맞는 극적 상황이 나와야 그 회가 끝나 오연주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설정 같은 것들이 주는 흥미진진함이다.

 

이 웹툰 세계의 흥미로운 설정은 그대로 오연주와 강철이 가까워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 웹툰을 꼼꼼히 다 챙겨 본 오연주로서는 강철이 다른 사람들과 나눈 대화까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강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오연주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또 극적 상황을 만들어 빨리 회를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려고 오연주가 강철의 뺨을 때리고 그래도 안되자 키스를 하는 장면도 은근슬쩍 웹툰 세계의 설정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이 드라마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W>의 세계에 시청자들이 몰입하게 되는 건, 이 허구성 짙은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예술과 철학에 대한 질문 같은 것일 게다. 결국 이 드라마는 W라는 웹툰을 창조해낸 오연주의 아버지 오성무(김의성)와 강철-오연주의 대결구도를 다룬다. 오성무는 W와 강철이라는 피조물을 만든 신의 위치에 서려한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능동적으로 살아가려 하는 강철을 그는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거꾸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손길을 의식하고 강철이 그에게 당신 누구야라고 질문하는 장면에서는 신에 대항하는 피조물의 서사가 느껴진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생각보다 크다. 예술은 절대적 신의 위치에 서 있는 작가의 전유물인가 아니면 일단 주어지면 저 스스로 살아 움직이고 그 내적인 개연성의 룰에 의해 흘러가는 세계인가. 나아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존재들은 운명을 넘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존재인가.

 

이런 다소 상징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이 있어 <W>의 세계는 그저 허무맹랑한 판타지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로맨틱 코미디와 판타지를 엮어 놓은 듯한 그 가벼운 드라마로 여겨지지만, 그걸 통해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까지를 담아낸다는 것. <W>의 세계가 볼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이유다. 잠시 숨고르기를 했던 송재정표 판타지가 다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대박>의 폭주, 어째서 막장이 떠오를까

 

SBS 월화사극 <대박>이 폭주하고 있다. 그 폭주는 이인좌(전광렬)의 폭주를 닮았다. 그가 연령군(김우섭)을 찾아가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은 이 사극이 이제 갈 데까지 갔다는 걸 말해준다. 연령군이 누군가.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비록 서자지만 숙종이 그토록 아끼던 자식이 아닌가. 그런데 일개 이인좌 같은 인물의 폭주에 의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너무 과한 허구다.

 

'대박(사진출처:SBS)'

이인좌라는 인물 역시 역사적 기록에 남아있는 실존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이런 설정은 지나치다. <대박>은 이인좌라는 인물의 힘이 중요한 게 사실이지만, 너무 이 인물을 크게 그려놓았다. 연잉군(여진구) 따위는 애송이로 바라보는 존재이며 심지어 한 나라의 임금인 숙종과도 대적하는 엄청난 존재다. 이제는 왕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칼로 찔러 죽이는 희대의 인물로 그려졌다.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서고 있다.

 

문제는 허구조차도 개연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대박>의 여주인공은 담서(임지연). 그런데 담서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하고 또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사실은 이인좌라는 걸 알고 있는 담서는 복수를 하려던 인물.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숙종의 명을 받고 이인좌를 죽이러 온 김체건(안길강)의 앞을 그녀가 막아선다. 그가 자신을 제자로 삼은 것만은 진심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란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김체건의 칼에 맞아 죽으며 이인좌를 살려달라고 말하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물의 일관성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걸 보고 역시 이인좌를 처단하기를 그토록 원해왔던 백대길(장근석)이 구생패를 던지며 갑자기 그를 살려달라고 김체건에게 말하는 대목도 그렇다. 그는 갑자기 살인검 활인검이야기를 꺼내며 담서가 목숨을 걸고 부탁한 일인데 그를 살려달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일관성이 없는 캐릭터의 행보다. 모든 비극이 이인좌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대길이 담서의 죽음과 부탁(이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지만)으로 이렇게 이인좌를 살려 달라 하는 대목이 이해될 수 있을까.

 

앞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대길의 아버지 백만금(이문식)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며 돌아오는 이야기에서도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여주인공으로서 훨씬 더 많은 역할이 가능했을 담서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대목에서는 작품이 너무 쉽게 인물을 죽이고 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박>에도 일종의 데스노트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다른 게 막장이 아니다. 충분히 납득될 만큼의 개연성이 없는 것, 인물의 일관성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 궁극에는 인물들이 마치 작가의 노리개처럼 별다른 이유 없이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런 전개가 바로 막장이다. 이런 막장이 목적하는 건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아니라 자극이다. 충격적인 장면들을 연달아 보여줘 주목을 끌려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자극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던 시대는 지나갔다.

 

<대박>의 시청률은 결국 8.5%(닐슨 코리아)로 월화극 꼴찌로 전락했다. 시청률에서 유리한 사극이고, 장근석, 여진구, 전광렬, 최민수 같은 쟁쟁한 캐스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된 건 결국 폭주하는 이야기 때문이다. 연기는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개연성을 잃어가고 있다

사극의 새 역사 쓴 <육룡이 나르샤>

 

SBS 월화 사극 <육룡이 나르샤>가 이제 종영한다. 50부작에 이르는 긴 여정의 드라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듯한 느낌이다. 어느 정도 흐르고 나면 늘어지기 마련인 장편 드라마들 속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확실히 다른 밀도를 보여줬다. 마치 한 회 한 회가 잘 짜여진 완성도 높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긴장감이라니. 이 사극이 50부작이었다는 게 실로 믿기지 않는 건 그래서일 게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정통사극, 퓨전사극, 판타지사극, 장르사극 등등. 사극은 역사와 상상력이라는 두 날개를 갖고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 왔다. 정통사극이 역사에 방점을 찍었다면 퓨전사극부터 장르사극까지는 서서히 상상력쪽으로 그 무게중심이 이동해왔다. 하지만 상상력의 끝단이 만들어낸 결과는 역사라는 사실의 진중함이 결여된 허구라는 문제를 양산했다. <정도전> 같은 정통사극으로의 회귀는 사극이 지나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사극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상상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역사로 회귀할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이 둘을 다시 껴안고 나가는 제 3의 길을 제시했다. 역사적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결합하고, 역사적 인물의 사실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허구의 인물들이 그려내는 상상력 또한 포기하지 않는 길. 이것은 <육룡이 나르샤>가 누구나 다 아는 여말선초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흥미진진할 수 있었던 이유이고, 상상력을 무한히 펼치면서도 허구의 가벼움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육룡이 나르샤>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건 MBC <화정>KBS <징비록>, <장영실>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MBC는 이병훈 PD에서부터 만들어낸 퓨전사극의 전통 이후, <빛나거나 미치거나>, <화정>처럼 상상력에 더 치중하는 사극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선택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화정>은 심지어 지나친 역사왜곡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청률도 곤두박질치는 결과를 맞이하기도 했다.

 

정통사극으로 회귀한 KBS 역시 마찬가지다. <정도전>은 좋은 평가와 시청률을 가져갔지만 이어진 <징비록>은 그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장영실>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위인전기를 보는 듯한 이야기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기 어려워진 것. 여러모로 <육룡이 나르샤>와는 비교되는 결과다.

 

<육룡이 나르샤>가 이전 사극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점은 인물에서도 나타난다. 보통의 사극이 한 사람의 영웅담이나 성장담을 그려내고 있는 기존의 사극의 패턴과 비교해보면 <육룡이 나르샤>는 여섯 명의 인물을 동등한 위치에서 그려내면서 그들이 서로 관계하고 대립하는 과정들을 흥미롭게 다뤘다.

 

즉 누구 한 사람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사극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도전(김명민)의 입장과 이방원(유아인)의 입장이 서로 부딪치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양자의 입장을 이해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사극이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재단하지 않고 여러 입장을 드러내 궁극의 판단은 시청자에게 남기는 것. 그것이 지금의 역사를 보는 달라진 시각에 맞는 사극이 아닐까.

 

또한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그 연결고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사극으로서 그 사극만의 어떤 패턴이나 유형들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밀본이나 무명같은 조직이 그렇고, 척사광(한예리)이나 무휼(윤균상), 이방지(변요한)가 그려가는 무협적 요소들, 게다가 분이(신세경)를 통해 그려진 반촌이라는 역사적 공간까지 <육룡이 나르샤>는 새로운 사극의 전통이 될 만한 요소들을 잘 그려냈다.

 

사극은 역사를 보는 관점을 담는다는 점에서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 이방원의 이야기를 다룬 그 무수한 사극들과 <육룡이 나르샤>가 같은 역사라도 다른 이야기와 관점을 보여주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무수한 진화들 속에서 그 새로운 첫발을 내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육룡이 나르샤>가 디딘 이 첫발은 그래서 새로운 사극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육룡>의 시대, 진정한 역사 교육이란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는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실존 역사적 인물 이외에도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 같았으면 실제 역사의 왜곡이 아니냐는 질타를 받았을 수도 있는 인물설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실제 역사와 가상을 구별할 줄 안다. 사극은 진짜 역사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대 하나의 허구로 꾸며진 드라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대중들이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틈입을 허용한 건 단지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깔려 있는 의도의 진정성 때문이다. 역사라는 건 완벽한 팩트일 수 없다. 그것은 기록하는 자의 시선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의 역사다. 그들의 관점이 담겨진 편향된 역사일 수 있다.

 

거기에 삭제되어 있는 건 다름 아닌 민초들의 역사다. <육룡이 나르샤>에 허구로 들어간 세 인물, 이방지, 무휼, 분이는 그 삭제된 민초들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조선을 개국한 건 몇몇 왕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민초들 또한 있었고 그들의 희생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육룡이 나르샤> 같은 팩션 사극의 허구를 허용하는 이유가 된다.

 

<육룡이 나르샤>가 과거처럼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극, 이를테면 <주몽>이나 <선덕여왕>, <태조 왕건> 등등의 사극과 달리 여러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그 다양한 관점들을 포섭하려 하고 있는 데는 지금의 대중들이 생각하는 달라진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역사는 몇몇 한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관점만이 투영된 사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다른 관점들이 혼합된 사극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시대에 이제 대중들은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이성계다 라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 그 이면에는 이방원도 있었고 정도전도 있었다. 또 정몽주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인물도 있었고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모른 채 스러져간 민초들도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 이제 역사는 그 다양한 관점들과 그걸 통한 토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역사의식을 제대로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이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교과서는 많은 사례들과 관점들을 하나의 재료로서 제공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관점들을 담은 다양한 교과서들이 담보되고 그것이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스스로 가질 수 있게 하는 단초이자 실마리가 되어야 진정한 역사 교육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이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런 다양성을 해치고 한 가지 관점을 마치 정답처럼 제시함으로써 획일화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국가관이나 애국 같은 단어들이 덧붙여지지만 그것은 특정인들을 위해 역사를 호도하는 일이 된다.

 

본래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창업을 노래한 용비어천가1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것은 태조의 6대 선조를 한 마디로 찬양하는 노래다. 그런데 왜 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그 육룡을 조선창업을 했다는 태조의 6대 선조에 대한 찬양이 아닌 민초들이 함께한 조선 건국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을까. 그것은 역사 왜곡이 아니라 기록이 편향해 내놓았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다. 누군가 몇몇 사람들의 역사로 기록하려 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처럼 가려진 것들은 어차피 재해석되고 새롭게 가치매김 된다는 걸 하다못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지금은 육룡의 시대. 역사의 주역은 왕만이 아니라 민초들도 함께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한 마리의 용의 관점을 정답처럼 제시하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그건 과연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일일까. 이러다 진짜 역사의식에 대한 공부는 교과서보다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을 통해서나 배우는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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