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모색하는 곳 더키앙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818)
블로거의 시선 (96)
네모난 세상 (4607)
SPECIEL (19)
문화 코드 (1)
생활의 발견 (23)
술술 풀리는 이야기 (4)
스토리로 떠나는 여행 (10)
책으로 세상보기 (8)
문화 깊게 읽기 (4)
스토리스토리 (24)
사진 한 장의 이야기 (4)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7)
대중문화와 마케팅 (9)
Total13,268,947
Today44
Yesterday349

2009 MBC 드라마, 두 여왕(?)의 성공과 주목할 실험작들

2009년 MBC 드라마는 대중적인 성공으로만 보면 두 여왕(?)이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상반기 3월부터 5월까지 방영된 ‘내조의 여왕’과 5월부터 12월까지 방영된 ‘선덕여왕’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성공한 두 여왕(?)의 성격이 상반된다는 점이다. 하나는 현대극이고 다른 하나는 사극이며, 하나는 소소한 기획물이며 다른 하나는 야심찬 대작이었다는 점이다. 성공 포인트 또한 사뭇 다르다. ‘내조의 여왕’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공감을 그 포인트로 하고 있다면, ‘선덕여왕’은 물론 현실을 담고 있지만 사극이 갖는 성공 판타지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두 여왕은 성격 또한 다르다.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는 맹렬 여성이지만 그 활동은 결국 남편 뒷바라지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현모양처로서 가지는 최고의 위치, 즉 남편을 성공시키는 것이 그녀가 꿈꾸는 최상의 목표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왕비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왕이 되려는 목표를 세운다. 그것은 여왕이 된 덕만(이요원)은 물론이고, 좌절된 꿈이었지만 여왕을 꿈꾼 미실(고현정)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내조의 여왕’이 우리와 공감한 것은 학연 지연 혈연 같은 줄로 연결된 사회가 가진 벽 같은 절망감이고, 그 사회 속으로 편입되지 못한 자들의 절규였다. 반면 ‘선덕여왕’은 여성적 카리스마를 내세워 현 여성성의 사회가 꿈꾸는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줌으로써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까지 지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두 편이 모두 ‘여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드라마가 이제 주시청층인 중년 여성층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남성적인 이야기들이 대중적으로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이러한 작금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2009 외인구단’은 그 시대착오적 시각이 가진 거부감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한편 ‘친구, 우리들의 전설’은 참신한 실험성과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의 결과에 머물렀다. 결국 완성도만큼 중요해진 것이 드라마 주 시청층의 취향이라는 것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실험성이 돋보인 상대적으로 젊은 드라마들 역시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탐나는도다’는 17세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만화적인 설정과 이야기로 사극적인 친숙함이 아니라 실험적인 현대극이 갖는 낯설음을 그려낸 문제작이지만 편성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드라마가 되었다. 이것은 ‘돌아온 일지매’나 ‘혼’ 같은 파격적인 드라마 실험을 한 작품들과도 결을 같이 한다. 만화적 상상력이 실험적으로 가미된 이들 작품들의 미완의 성공은, 아직까지는 이런 실험이 드라마의 주시청층들에게는 낯선 체험이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올 한 해 MBC는 드라마에서 다양한 실험들을 했다고 보여지지만 성공은 두 여왕을 빼놓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편중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불황이라는 시대적 정서, 드라마 주 시청층으로 자리한 중장년 여성들, 그리고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회로의 변화 등이 만들어낸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9년 MBC 드라마에서 두 여왕의 성공이 햇볕이었다면, 거꾸로 남성드라마들의 실패, 그리고 실험작들의 미완의 성공은 그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빛과 그림자는 언제든 그 상황이 바뀔 수 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올 한 해는 ‘여왕의 해’였다는 점이다.

Posted by 더키앙

‘혼’을 담은 문제작, 왜 마침표를 못찍었나

“사람들은 작은 것에는 분노하지만 큰 것에는 분노하지 않아. 왜?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까.” 백도식(김갑수)은 진정 분노해야할 대상에는 분노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분노함으로써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그러면서 불쑥 정치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래서 정치를 좀 해보려구 해.” ‘혼’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백도식이란 인물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그저 공포극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거든.” 법과 정의에 대한 그의 대사는 아프게도 현실이다. 그러니 법을 이길 수 없는 피해자들은 법 외부의 힘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하려 한다. ‘혼’이라는 공포물의 탄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가해자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같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으로 혼령의 힘을 비는 빙의와 처단자로서의 연쇄살인을 동원한다는 것이 이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 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덱스터’라는 미드를 통해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혼이 복수를 하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많은 ‘전설의 고향’ 귀신이야기의 단골메뉴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한 군데 얽혀있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프로파일링 기술을 가진 신류(이서진)가 혼령에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임주은)를 이용해, 법으로 이길 수 없는 살인범들을 제거해나가는 이야기는 확실히 신선한 면이 있다.

게다가 공포 코드 이면에 사회적인 부조리를 넣어 그 공감의 울림을 키운 것도 이 작품을 명품으로 만든 요인이다. 우리는 사람(물론 살인범들이지만)이 혼령보다 더 무섭고, 그 사람을 혼령이 처참하게 죽이는 것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가 그런 경험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령에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여기서 공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분노가 자리하게 된다. 무섭기보다는 화가 나고, 살인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저런 자는 죽어도 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공포물이 사회극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은 저 백도식이 경고한 부분이다. 엉뚱한 분노가 결국은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예언처럼 들리고, 결국 그 예언에 따라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결말에 있어서 신류와 건일(정시우)의 죽음은 공포극으로 본다면 지나치게 허무하게 보인다. 무언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도식은 그 누구에게도 응징을 당하지 않했다. 그는 스스로 건물에서 밖으로 뛰어내렸고, 거기에서도 살아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공포극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공포의 끝장, 즉 절대 악의 죽음, 문제의 해결 등이 보여지지 않은 채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극의 틀로 보면 말이 달라진다. 신류와 건일의 허무한 죽음은 흔한 말일 수 있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그 복수의 순환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처단한다는 것이 가진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그것에 분노하며 결국에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하나는 이 복수의 비극적인 순환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준다. 게다가 사라져버린 백도식은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다”고 그가 말한 바 있는 그 현실을 그대로 우리 앞에 들이민다.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현재 상태로 돌려놓은 이 결말은 사회극으로서는 그 울림이 크다. 해결된 것은 없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목도했고, 결국 현실의 문제는 드라마 같은 판타지가 서둘러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혼’은 사회극을 꿈꾼 공포극이다. 겉으로 공포극의 외관을 하고는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그러니 공포극으로서는 여러 모로 그 장르가 갖는 재미를 빗겨간 면이 있다. 하지만 ‘혼’은 충분한 사회극으로서의 재미를 주었던 드라마다. 적어도 공포와 현실이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는지, 이 드라마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혼’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에 남았지만, 그 시도만큼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는 드라마다.

Posted by 더키앙

임주은, 빙의연기가 끄집어낸 그녀의 스펙트럼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여고생 같은 이미지였다. '메리대구 공방전'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되바라진 중학생 역할을 했던 임주은이었기에 그것은 더욱 그랬다. 그 지나치게 평범해 보이는 얼굴은 임주은이라는 연기자를 그저 지나치게 만들었다. '여고괴담'류의 이제는 트렌디해 보이는 여고생 원혼의 연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귀신에 빙의되는 윤하나라는 연기를 해야 하는 임주은은, 평범한 여고생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분노로 일그러진 원혼들의 얼굴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신은 임주은이라는 평범해 보이는 연기자의 속에 꽤 많이 내재된 연기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혼'은 표현이 자극적일지는 몰라도, 완성도로 보면 명품이라고 할 만큼 짜임새가 있는 작품이다. 얼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나 그것을 전하는 방식 또한 신선하다. 보통 공포물이라고 하면 원혼을 무서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더 무섭고, 따라서 이들을 처결하는 원혼의 복수가 속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 아이러니한 체험을 이 드라마는 주고 있다. 공포물을 표방한 사회극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모두 갖고 있는 양가적인 모습이다. 신류(이서진)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범죄자 프로파일러지만, 처참하게 파괴된 자신의 가족의 복수를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한다. 따라서 과거의 피해자지만, 현재의 가해자가 된다. 살인범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 역시 하나의 치밀한 연쇄살인범으로 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하나의 구조다. 그 핵심적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윤하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윤하나를 연기하는 임주은의 역할이 녹록치 않게 된다. 그녀는 피해자로서의 모습과 가해자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순간순간 오가야 한다. 그것도 한 인물의 변화가 아니다. 여러 원혼들이 그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 많은 캐릭터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얼굴은 오히려 이 연기를 더 효과적으로 만든다. 조금 크게 떠지면서 힘이 들어가는 눈빛으로의 변신은 편안한 소녀의 눈빛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보는 이들을 더 소름끼치게 만든다.

'여고괴담'이 수많은 여성 스타 연기자를 발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여성이 원혼으로 등장하는 공포영화는 연기자들을 연기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한 가지 모습이 아닌 여러 모습을 한 작품에서 드러나게 해준다는 이야기다. 그런 면으로 보면 여러 인격체를 그 속으로 끌어들여 복수를 하는 '혼'이 임주은에게 요구하는 연기는 그 폭이 더 넓다. 그리고 임주은은 그것을 꽤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이 변신이 '혼'이라는 작품의 핵심적인 것이라고 봤을 때, 임주은의 연기는 말 그대로 '혼'을 살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Posted by 더키앙
요즘 주목해서 보는 드라마 중 하나가 '혼'입니다. 사실상 공포물이란 것이 TV라는 매체에서 그다지 시청률을 담보하지는 못하는 장르죠. 특히 요즘처럼 여성 시청층의 입김이 세진 경우라면, 그저 보기만 해도 끔찍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공포물로 채널을 고정시킨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혼'을 처음 접하는 마음은 같았습니다.

처음 시작은 전형적인 귀신영화의 틀을 따라가죠. 거꾸로 자신을 바라보는 혼령과, 거울 속의 혼령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데 이와는 병렬적으로 사이코패스의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처음에는 혼령이 무서웠지만, 차츰 사이코패스가 더 무서워지는 것은 이 이야기의 의도 그대로입니다. 폭력이 넘치는 세상, 그리고 그 폭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법, 심지어 폭력을 감싸는 법은 공포의 대상을 뒤바꿉니다. 그 희생자인 혼령은 두려움의 존재에서 불쌍한 존재로 바뀌고, 대신 혼령에게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는 사이코패스 혹은 범법자들은 오히려 무서운 존재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드라마는 조금 지나고 나면 무섭다기보다는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공포의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혼령의 등장은 오히려 권선징악의 차원으로 봤을 때, 이 도대체 어찌할 길 없는 악인들을 처단할 유일한 방법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어떤 면으로는 통쾌함마저 줍니다. 바로 이 부분, 혼령의 등장을 반기고, 혼령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부분은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드라마가 이렇게 악인들과 싸우는 이들, 예를 들면 혼령에게 빙의되는 하나(임주은)나, 범죄심리학자인 신류(이서진)의 행위가 정당하냐는 질문까지 던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류는 자신의 복수심을 억누를 수가 없고 그래서 혼령의 복수를 방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사이코패스의 죽음 앞에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장면은 실로 인간 자체를 섬뜩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죠.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종잡을 길 없는 상황. 오히려 선과 악이 공존하는 그 상황을 보면서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어떤 면으로는 복수를 즐기고, 어떤 면으로는 죄의식을 느끼는 그 경험은 이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과 다르지 않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는 점에서 절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하나가 보는 혼령이라든지, 그녀가 겪는 빙의라든지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어떤 면으로는 바로 인간이 가진 본능을 과학과 이성이라는 잣대로 합리화하려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즉 흔히들 말하는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이 괴물이 되는 것'이라는 명제를 이 드라마는 공포물과 범죄물을 엮어서 잘 보여주고 있죠.

'혼'은 그저 공포물이라고 하기에는 담고 있는 것들이 꽤 많습니다. 혼령의 출연이 무서움을 안겨주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드라마를 공포물로 바라보지 않게 만듭니다. 실제로 혼령은 전혀 무섭지 않고, 오히려 이 변하지 않는 인간들이 더 무섭게 느껴지며, 그들을 처단한다는 것이 또한 방법이 되지 않는다는 인간의 조건을 이 드라마에서는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잔인한 장면들이 TV매체에서는 과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차치하고 보면 이 드라마는 분명 공포물 그 이상을 담고 있는 드라마가 분명합니다.
Posted by 더키앙

공포물이 사회물이 될 때

공포물. 무조건 놀라게 하고 잔인하면 된다?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이야기의 맥락이 없는 단순한 자극으로서의 공포란 물리적인 반응으로서의 소름을 돋게 할 지는 모르지만, 마음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진짜 무서운 것은 단순 자극이 아니라, 이야기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금기와 죄의식을 건드릴 때 저절로 피어나오는 두려움이다. 공포가 어떤 공감까지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그 이야기가 주는 무서움을 오래도록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MBC 수목드라마 ‘혼’은 공포와 공감을 둘 다 가져가는 공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두 가지 장르가 혼재한다. 그 하나는 혼령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공포물이고 다른 하나는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범죄물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서로 다른 장르가 어떻게 한 가지로 엮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혼’은 법을 이용해 오히려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빗나간 법 정의의 문제를 건드리면서, 그 해결되지 않는 사회 정의를 혼령이 처결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전설의 고향’ 같은 민간 설화에서 우리는 억울한 혼령들의 복수극을 늘 목도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원형을 현대적인 공포물로 다시 만드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작업이다. 따라서 혼령과 사이코패스가 연결된 공포범죄물이란 사실상 실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혼령의 이야기와 사이코패스의 이야기 중간에 혼령이 빙의되는 윤하나(임주은)라는 인물이 서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억울한 죽음을 목격하는 인물이고 심지어는 동생 두나(지연)마저 눈앞에서 죽는 장면을 보게 되는 인물이다. 그 충격으로 그녀의 눈에는 혼령들이 나타나고 심지어 혼령들이 그녀의 몸을 통해 복수를 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은 이 드라마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윤하나의 시선, 즉 혼령들을 보고 그 혼령들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누군가를 죽이게 하는 그 과정으로 본다면 드라마는 혼령이 등장하는 공포물이 되지만, 윤하나의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그녀의 행동을 보면 이것은 그녀가 또 하나의 사이코 패스가 되어가는 공포범죄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사회정의가 지켜지지 않는 법이 존재하는 한, 사이코패스는 복수를 안고 피어나는 악의 꽃처럼 반복되어 악순환된다는 점이다. 두나는 사이코패스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 복수를 하는 언니 하나는 그 과정에서 사이코패스처럼 되어간다.

만일 ‘혼’이 그저 기괴한 혼령과 접신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었거나, 아니면 사이코 패스를 잡으려는 범죄 심리학자와, 법을 이용해 사이코패스의 죄를 덮어주는 변호사와의 대결구도로 갔다면 이처럼 박진감 넘치는 장면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는 공포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혼’은 이 두 지점을 엮어서 공포에 사회적 공감을 덧붙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먼저 잘 짜여진 대본의 힘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물의 특성상 이 드라마가 갖는 연출의 힘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초반부 사거리에서부터 아파트 옥상까지 쫓고 쫓기는 장면은 이 드라마에 확실한 추동력을 만들어준 것이 사실이다. 공포물이 갖는 디테일적인 영상들 역시 왠만한 공포영화보다 뛰어난 것은 모두가 다 이 연출이 힘을 발한 탓이다.

다만 이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포물이라는 점이, 대중적으로 어떻게 어필할 것인지 점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본래 공포물은 대중성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의 측면만이 아닌 이 드라마가 가진 사회적인 함의나 주제의식을 들여다본다면 어쩌면 이 드라마는 공포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드라마가 될 지도 모른다. 공포와 공감이 공존한다는 점은 ‘혼’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Posted by 더키앙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