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숨겨왔던 깊은 상처와 마주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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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왔던 깊은 상처와 마주하다

D.H.Jung 2006. 3. 2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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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왈츠> 상처에 대한 변주곡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그 아문 흔적들이 있는 걸까. 지금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숨어있을까. 상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얼굴은 또 얼마나 많은 걸까. <봄의 왈츠>는 이제껏 보여줬던 트렌디한 등장인물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긁을수록 점점 커져만가는 딱지처럼 이 치유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처들은 윤재하, 박은영, 필립, 송이나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물들, 윤재하의 어머니와 아버지, 박은영의 어머니와 필립의 어머니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이제 상처들은 조금씩 몸을 간질이며 봄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봄의 왈츠를 추기 전에 먼저 해야될 일이 있다. 마음 속 깊숙이 너무나 깊이 숨겨두어서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고 믿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 그 상처와 마주하는 일이다.

윤재하, 나는 누구인가
윤재하가 가진 상처는 마치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원죄의식에 가깝다. 윤재하는 본래 이수호였다. 그런데 그 이수호의 아버지는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하는 박은영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수호는 그 깊은 죄의 공모자라는 원죄의식과 함께,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것에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된다. 그는 박은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이수호를 죽이고 윤재하로 태어났다.

윤재하는 피아노를 닮아버렸다. 어쩌면 그가 피아노를 두드리며 자라온 그 세월은 이수호의 흔적을 지우고 윤재하라는 새로운 인물을 자신 속으로 박아 넣는 아픔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였다고 생각했던 이수호가 깨어난다. 그의 눈앞에 박은영의 실루엣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가 다시 대면하게된 상처에서 그는 머뭇거린다. 박은영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수호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 상처를 덮고 자신을 윤재하로 믿고 사랑하는 송이나를 받아들일 것이냐.

자꾸만 거울 앞이나 유리창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의 애잔함, 피아노 건반 위에서가 아니라 가끔씩 허공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의 절망감, 마치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다는 듯이 악다문 입술, 고개를 가로젓거나 방을 뛰쳐나갈 때의 쓸쓸한 어깨...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수호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기 위한 위장술이다. 박은영이 과거의 박은영으로 드러나는 그 지점이 윤재하 속의 이수호가 깨어나는 날이다. 그것이 봄의 왈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박은영과 필립, 그 대책 없는 미소 뒤의 아픔
도무지 참아낼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오히려 얼굴에 행복의 가면을 씌우는가. 참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다못해 맑기까지 한 대책 없이 발랄하고 명랑한 현재의 얼굴을 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캔디와, 씩씩함의 대명사 김삼순의 캐릭터가 반쯤 섞인 박은영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웃는 순간,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 저릿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수호의 아버지로 인해 죽게된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병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야 했던 그녀가 사랑한 이수호, 그럼에도 다시 나타난 이수호의 아버지의 꾀임에 넘어가 겪게되는(그녀는 어느 여관에 버려진 것이다. 혹은 팔렸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 윤재하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남으로 해서 그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다시 떠오른다. 저 외딴 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소녀는 이제 낯선 서울까지 너무나 멀리 오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그녀 옆에 강력한 환상, 행복에로의 몰핀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필립이다. 이 유쾌한 친구는 드라마 전체의 무거움을 일순간 날려버릴 만큼 가볍다. 하지만 저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자체로 무거움을 내포한다. 그의 과거는 철저히 가려져 있으나 그가 은영 모의 무덤가에서 자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때 그 어둠이 얼핏 드러난다. 굳이 혼혈의 아픔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쾌활한 웃음이 어린 시절의 어떤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을 예고하게 한다. 그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고만 한다. 그런 그가 은영을 사랑한다. 윤재하(과거)와 필립(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은영은 갈등한다. 아프지만 진정한 사랑인 과거로 갈 것인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답고 행복하기 만한 현재와 미래로 갈 것인가. 허공에 발이 1센티 정도 떠 있는 듯한 필립과 은영의 만남, 사랑의 드라마는 그래서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송이나와 현지숙, 자기기만이 불러오는 아픔
어느 날 사랑했던 이가 떠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잡고 있는 과거 한 자락의 추억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 둘은 똑같이 과거의 윤재하(죽은 실제 윤재하)의 영혼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는가. 송이나는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윤재하를 만났을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 어딘가 달라 보여. 하지만 그게 더 좋아”라고 말하는 송이나 속에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그가 아니지만, 그를 지금 눈앞의 윤재하와 묶어두려는 강력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송이나가 그럴진대 윤재하의 어머니인 현지숙은 오죽할까.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녀의 환상은 과연 한번도 깨지지 않았을까. 그는 진짜로 지금의 윤재하를 죽은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을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붙들고 있는 윤재하의 영혼은 그러나 박은영이 나타남으로 해서 조금씩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윤재하의 영혼에 매달리지만 그것은 사실 끝없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윤재하의 존재론적 고민의 끝은 그들에게 끝없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윤재하가 윤재하를 포기하고 이수호가 되는 순간, 그들이 잡고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은 무화되고 마는 것이다. 온통 윤재하로 채워왔던 그 나날들 속에서 그가 빠져나간 후, 남게되는 커다란 공백을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매달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픔과 치유의 변주곡
피아노는 자신을 두드림으로 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은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피아노곡으로 흐르는 ‘클레멘타인’이 아프면서도 승화와 치유로 변주되는 것처럼, <봄의 왈츠>는 인물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리들의 변주곡이다. 작고 가녀린 영혼들이 내는 작지만 반짝이는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혹 우리들 삶 속에서 숨겨왔던 우리네 상처들을 거기서 만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