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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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드라마 시청률 경쟁, TV는 바보상자인가

D.H.Jung 2006. 3. 2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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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흔히들 “예술영화는 졸리다”는 자조적인 농담처럼, 잘 만들어진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근 <봄의 왈츠>, <굿바이 솔로> 같은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생각하게 만드는’ 웰 메이드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은, ‘TV는 바보상자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꺼내게 만드는 씁쓸함이 있다.

조기 종영되거나 연장 방영되는 드라마가 나오는,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작금의 현실은 한편으로 ‘한류의 종주국’이라는 호칭을 무색케 한다. ‘시청률이 몇%’라는 애매한 잣대로 작품을 난도질하는 대부분의 연예기사들도 시청률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류라는 힘으로 전 세계 컨텐츠 비즈니스의 중심에 서겠다는 포부에 맞는 일일까.

물론 시청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문제는 시청률에 올인 하는 방송사와 그런 시류에 밀착하는 제작자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많은 매체들이 문제다. 그저 재밌으면 됐지. 뭐가 그리 거창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지금 우리네 드라마가 문화계 전체에서 갖는 비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일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그냥 드라마가 아닌, 우리네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인 시청률과 범아시아적 시청률
한류는 모든 상황들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드라마였다. 한류의 성공은 드라마 제작에 범아시아적인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드라마 제작은 붐을 이루었다. 게다가 케이블을 비롯해 위성방송, DMB 등 다양한 채널들은 더 많은 컨텐츠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과거 방송사에서 하던 드라마 제작은 대부분 외주 프로덕션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경쟁력도 있고 비용측면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제작사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드라마 제작이 활기를 띄면서, 웰 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쪽대본으로 상징되는 기존 드라마제작 관행은 사전제작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쪽대본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화 제작인력들은 사전제작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영화를 찍는 날보다 찍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HDTV라는 환경변화에서 드라마 제작에 영화용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역시 영화 제작인력들에게 유인이 되었다.

감독은 물론, 촬영감독, 의상, 조명 등등 영화계 현장인력들은 물론이고, 이제 드라마 제작 현장은 각계 각층의 문화계 인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조악한 현실 여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드라마 제작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드라마 홍보 역시 영화 홍보 대행사들이 나설 만큼 전문화되었고, 선 마케팅은 드라마가 제작되기 이전에 제작비를 모두 끌어 모았다. 유통 채널은 이제 전 세계를 향해 뻗어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네 드라마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좀더 잘 만들어진’,  ‘우리네 것이 분명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담는’, 그래서 ‘누가 봐도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는’, 그런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숨어서 복사된 일본 드라마를 보던 우리가, 일본 본토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한데는 윤석호 PD라는 국제적 안목을 갖춘 연출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서 “한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최근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자극적으로 흘러가는데 반해 정작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대장금>과 <겨울연가>처럼 건강하고 부드러운 작품”이라고 했다. <봄의 왈츠>에 대해 범아시아적인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작가주의 드라마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들
<봄의 왈츠>와 <굿바이 솔로>의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위 ‘작가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가 그 첫 번째이다.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열어놓았다. 윤석호 PD의 작품들이 절제된 대사와 감성을 자극하는 뛰어난 영상으로 그 세계를 만들었다면, 노희경 작가는 직설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대사들, 인물에 대한 끝없는 탐구 혹은 애정, 러브스토리 같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그 속에 숨어있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들로 굳건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평가들은 그들을 작가라고 호칭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작가주의라고 한다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드라마를 개봉하면 단 첫 회를 보고도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작가적 면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전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이것은 다시 말해, 한껏 작가로서 추앙해서 풍선을 부풀려놓은 다음, 한번에 바람을 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가 한번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어쨌든 다 보아야 뭐라 얘기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는 몇 달에 걸쳐 방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초기의 평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봄의 왈츠>의 경우 초기의 설정과 흐름이 과거 윤PD의 드라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아직 방영되지 않은 나머지 회의 드라마들까지 그럴 것이라는 짐작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봄의 왈츠>는 사실 전반부 설정보다는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 극중 인물들의 깊은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윤PD가 이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선보이려 했던 ‘휴머니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아직 본 게임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굿바이 솔로>는 마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노희경 매니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된다. ‘좋은 드라마지만 매니아들이나 보는’, 이라는 평가는 우리네 드라마계가 가진 보수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계적인 설정과 판에 박은 대사, 선남선녀의 주인공들에 화려한 외관을 씌우는 과거의 방식만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20%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마당에, 주인공들이 무려 7명이나 되는 이런 형식 파괴적인 드라마는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거를 답습하며 연장방영에 들어간 드라마들은 30%대의 시청률을 끌어 모으며 잘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 시청률 놀음이 가진 함정이 있다. 윤PD가 말했듯 ‘자극적인 설정’은 눈앞의 시청률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정서를 말해주지는 않으며, 또한 ‘끊임없이 좀더 자극적인 설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으로 나가야할 드라마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우리네 드라마계가 확고한 문화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로서 가능했던 것이지, ‘전통적인 드라마들의 답습’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청률에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나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의 작품들이 그다지 시청률이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윤석호 PD의 작품은 초기에 10%대의 시청률에서 시작해서 끝에 가서 30%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마의 시청률이라는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달성했다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또한 노희경 작가는 알다시피 시청률 안나오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약 27%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윤PD나 노희경 작가나 모두 “시청률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국과 드라마를 만드는 프로덕션이 이원화된 상황에서 시청률은 미묘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직ㆍ간접적인 압력을 받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잣대로 방송국은 시청률이란 카드를 내밀 것이다. 안 본다는 데야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시청률이란 것이 정말 그렇게 공정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반문해보고 싶다.

드라마 시청률은 현재 10대와 4, 50대가 주축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해도 가벼운 만화 같은 드라마와 전통적인 문법의 드라마들이 현재 시청률 1, 2위를 다투고 있는 걸 보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있는 20대 30대 시청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TV 이외의 다른 매체들이 많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혹시 그들을 위한 드라마들은 ‘시도조차 되지’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과거에 TV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바보상자의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창을 통해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TV에 의견을 전한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건강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의견들이 파시즘이 돼서는 안 된다. 자칫 이러한 파시즘은 제작자들의 마음 속에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식의’ 자기검열의 족쇄를 채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의견들을 이용해 파시즘으로 활용하려는 어떠한 시도들이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됐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 인터랙티브한 사회를 보여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지고선이 된 시청률에 동참하라는 심리적인 압박일 수도 있다.

시청률이라는 순위경쟁의 껍데기를 벗어내야 다채로운 드라마들의 스펙트럼이 TV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방송국의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묶어두고 싶겠지만 어느 한 드라마의 독식보다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TV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