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세상을 지배하는 돈, 그걸 거부하는 김서형
“돈의 위치를 바꾸는 거야. 자신이 얼마를 가졌는지도 모르는 추악한 노인보다 꼭 필요하고 절박한 그 손자에게로.”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종이달>에서 이화(김서형)는 자신이 담당하게 된 VIP 병식의 통장에 손을 대며 그렇게 생각한다. ‘돈의 위치를 바꾸는 것.’ 하지만 그건 세상의 말로 하면 ‘횡령’이다. 저축은행 직원이 VIP 고객의 돈을 인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이달>에서 돈은 세상을 지배한다. 이화의 남편은 모든 게 계산적이다. 마트에서 어떤 노인이 계산도 안하고 계산했다 생떼를 부릴 때 자신이 대신 돈을 내준 일을 남편 기현(공정환)에게 ‘재미있는 일’로 이야기하자,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자기 카드를 건네준다. “자 써요. 노인처럼 현찰만 고집하지 말고.” 그러면서 이 이야기를 카드 하나 만들어달라고 한 소리로 듣는다.
모든 걸 계산적으로 생각하고 사내에서 승진하기 위해 상사들을 접대하고 그 자리에 이화 또한 나서서 도우라고 은근히 부추기는 기현은 그런 말과 행동들이 아내를 얼마나 수모주고 굴욕을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아이를 갖기 위해 이화가 주사를 맞고 산부인과를 다니다 지쳐 이제 그만 하고 싶다고 하자, 그것조차 계산적으로 받아들인다. “요즘 스마트한 사람들은 다 딩크지. Double Income No kids. 왜 그런 말 있잖아. 아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좀이라고. 죽을 때까지 파먹기만 한다고.”
이화가 저축은행 면접을 보겠다고 하자 기현은 돈이 필요하냐, 생활비 부족하냐고 묻는다. 돈이 아니면 집에서 살림만 하기 미안해서 그러냐고 한다. 하지만 이화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의 존재감’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떤 필요한 존재로서 인정받는 것. 그는 숨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난 내가 이 집 빌트인 같아요.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자리만 차지한 것 같아요. 이 집이 내가 돌아오고 싶은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저축은행에 들어가게 된 이화는 거액을 예치한 VIP 고객을 관리하는 일이다. 거기서 돈밖에 모르고 심지어 저축은행에서 고객관리를 위해 온 여자들에게 성추행까지 하는 고약한 노인 병식을 만난다. 롤 케이크 선물이라고 속옷을 주는 그런 인물. 거기서 우연히 다친 친구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병식을 찾아온 외손자 민재(이시우)를 보게 된다. 영화에 꿈을 갖고 있지만 등록금도 없고 학자금 대출도 더 이상 받을 수 없어 휴학한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사는 청춘. 이화는 병식이 믿고 맡긴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 민재를 돕고 싶어진다.
돈에 의해 통제되고 구별되는 세상. 이화가 저지르는 행동들은 그래서 신문 사회면에 나올 법한 ‘은행 여직원의 횡령 사건’이지만, <종이달>은 이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얼마나 사람을 소외시키고 수모주고 굴욕감을 느끼게 만드는가 하는 그 비정함을 꺼내놓음으로써 이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즉 이화의 행동들이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반항과 거부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
시작부터 해외로 도주한 이화가 어느 숙소에서 갈 곳 몰라 하는 모습은, 그가 어쩌다 그 먼 길까지 가게 되었는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민재라는 청년을 만났고, 거기서부터 비롯되어 고객의 돈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그건 결국 거액의 횡령으로까지 이어졌을 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화가 원한 건 돈이 아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대해주는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다친 친구를 위해 보증금까지 빼서 수술비를 내놓는 민재처럼, 돈이 아닌 사람이 있는 그런 세상에 대한 갈증이 아니었을까.
최근 들어 <사랑의 이해>처럼 은행이라는 공간이 자주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거기에는 좀 더 직설적으로 자본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비정한 삶이 포착되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일까. <종이달>에서 이화가 저축은행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다양한 VIP들을 만나고 그들의 돈에 손을 대고 급기야 횡령을 해 외국으로 도피하는 그 일련의 과정은 이 자본화된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하나의 모험처럼 느껴진다. 과연 이화는 이 돈의 세상을 벗어나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돌아가고픈 집’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의 모험이 기대되는 이유다.(사진:지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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