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잃었던 아버지

 

사실 최근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어딘지 클리쉐에 발목이 잡힌 듯한 인상이다. IMF 이후 줄곧 콘텐츠 속의 아버지들은 고개 숙인 남자, 허리 휘는 가장, 그래도 꿈을 꾸려는 아저씨들,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 식탁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가족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혹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사실 이런 클리쉐는 어찌 보면 목소리를 내는 순간 어딘지 권위적인 상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대변한다. 지금은 그래서 아버지 부재의 시대처럼 보인다.

 

 

'추적자'(사진출처:SBS)

그런 의미에서 <추적자>의 아버지 백홍석(손현주)은 지금까지 봐왔던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던 아버지의 틀을 깨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 세상의 온갖 부조리 앞에 무릎 꿇고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소주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던 아버지와는 다른, 그 부조리에 분노하고 싸우고 있는 아버지라는 점. 이것이 기존 아버지들과는 다른 백홍석이란 아버지의 면모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다. 그것은 <아저씨>와 <마더>다. 이 두 영화는 제목처럼 모두 사회 내의 특정 부류, 즉 아저씨라고 불리는 이들과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을 세워두고는 그 클리쉐를 뒤집는다. 남자라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게만 여겨지는 아저씨라는 어딘지 늙수구레한 이미지는 이 <아저씨>라는 영화에서는 반전요소다. 이 영화 속에서 원빈이 옆집 소녀를 위해 조폭들을 하나 하나 깨부술 때, 아저씨라는 클리쉐도 부서졌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마더>는 기존 모성애로서 주로 소비되던 엄마라는 클리쉐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섬뜩한 본능으로까지 바꿔놓는 영화다. 이 영화는 엄마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그저 당연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왔던 그 이미지를 깬다. 그런데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 그간 웅크려왔던 본성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들 존재의 새로운 면모가 포착된다.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그 안에 <아저씨>도 <마더>도 갖고 있는 드라마다. 기존 아버지로 그려졌던 그 쓸쓸한 뒷모습의 아버지만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분노를 마침내 드러내는 그런 아버지. '세상 어차피 다 그런 거야' 하고 세파에 찌들어 살아오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저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왔던 그 아버지에게 가족은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런데 그 가족이 여지없이 파괴되었다면?

 

이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드러내는 절망과 분노에 수많은 대중들이 공감하게 된 것은 작금의 사회적 상황이 아버지들에게 똑같은 절망과 분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히며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자신을 퇴출시키는 사회의 비정함과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아버지들의 권위, 그리고 가진 자들에 의해 여전히 농단당하는 좀체 바뀌지 않는 세상이 주는 절망감과 분노.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분노하는 순간, 아버지의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회의 부조리 속에 타협하며 살아가던 아버지는 이제 그 사회와 싸워나가는 새로운 존재로 각인된다.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깨치고 새로운 아버지의 상을 그려내고 있다.

 

아저씨의 이미지를 깨버린 원빈과 엄마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김혜자가 있었다면 아버지의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단연 도드라지는 손현주라는 배우가 있다. 사실 손현주는 그 연기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배우지만, 어딘지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나 착한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전은 더 효과적이다. 마치 모든 어머니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김혜자가 <마더>의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이처럼 분노하는 아버지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이 생겨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의 웬만한 충격에도 끄덕 않던 아버지들 역시 그 맷집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증은 아닐까. <추적자>의 백홍길이라는 아버지를 보며 자기 일처럼 분노했거나, 아니면 그 아버지를 기꺼이 응원했다면 이미 우리가 생각해왔던 아버지상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어쩌면 그 잃었던 아버지의 모습인지도.

먹먹한 <닥터 진>, 막막한 현실에서 나온다

 

<닥터 진>은 허구다. 이 사극의 핵심 장치인 타임 리프(시간을 뛰어넘는 것)가 그걸 말해준다. 그러니 조선시대에 괴질(콜레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수액을 주사하기 위해 링거(?)가 등장한다거나 천재적인 신경외과의 진혁(송승헌)이 끌과 정으로 뇌수술을 하고, 인공호흡으로 사람을 살리는 그런 장면들에 리얼리티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뭘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닥터 진>이 이 조선시대까지 날아가서 하려는 이야기는 조선에 있지 않다. 바로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있다.

 

 

'닥터 진'(사진출처:MBC)

'이 여인은 말에 치였던 그 때 아들을 구하고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역사는 한번 정해지면 결코 변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일까. 하지만 저 사람들에게 역사니 운명이니 그런 거창한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나는 이 아픔을 치료해야 한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진혁의 이 내레이션은 이 드라마가 가진 생각을 잘 말해준다. 도성에서도 밀려나와 토막이라는 빈민촌에서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 진혁의 말처럼 이들에게 역사니 운명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해야 한다는 것. 드라마가 굳이 조선까지 가서 그렇게 누군가의 손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 판타지가 주는 감흥이 현재의 현실에도 그만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사는 게 더 두려운 토막촌 사람들, 저들끼리는 호의호식하면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펴주기는커녕 격리하고 급기야는 마을 전체를 불질러버리는 권력자들. 이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권력자들은 더 권력을 누리는 이야기적 정황은 작금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청춘들은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현실에 절망하고(이 드라마의 김경탁(김재중)이란 서출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에서 밀려난 우리네 가장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성 싶은 고통스런 삶 속에 내몰려 있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저들 살 궁리만 한다. 민생은 없고 권력욕만 있다.

 

이 드라마 속 진혁이란 인물은 그래서 이 암흑의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온 메시아 같은 판타지다. '상것들'이라 천대받으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벌레 같은 삶에 뛰어든 이 진혁이란 인물은 제 온 몸을 던져 그들을 살려내려 한다. 그러다 정작 자신이 괴질에 걸려 쓰러지자 그는 그들이 느낀 고통과 두려움을 실감한다. '이런 것이었어. 이것이 바로 콜레라였어. 그들이 느꼈던 고통, 두려움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무섭다. 미치도록 무섭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이런 공감은 진혁이 얼마나 인간적인 메시아인가를 드러낸다.

 

이 강한 현실에 대한 판타지는 이 드라마의 떨어지는 리얼리티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본래 판타지란 현실에 부재한 것을 꿈꾸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가진 자들이 호의호식하면서 말 한 마디로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 때, 그들을 돌보는 것은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천대받는 낮은 자들이다. 토막에 쌀가마니를 챙겨오는 기생들이나, 많은 약재들을 남모르게 갖다 놓는 홍영휘(진이한) 같은 혁명가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부터 밀려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량처럼 살아가는 이하응(이범수) 그리고 몰락한 양반집 규수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살아가는 홍영래(박민영)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 희망 없는 현실에 작은 촛불을 든다.

 

"민심은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라며 토막을 불태우라 명령하는 김병희(김응수)와, 다 타버린 집들을 내려다보며 "집들이 불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저 안(도성. 한양)에서는 아무 것도 뵈지도 들리지도 않는가 보이."하고 한탄하는 이하응의 대조적인 모습은 그래서 우리네 현실에도 울림이 적지 않다. 이것이 어디 조선시대의 이야기인가.

 

진혁이라는 가상의 판타지적인 인물이 조선까지 날아가 링거에 주사까지 만들어 서민들을 살리는 이 황당한 이야기가 왜 먹먹하게 느껴질까. 그것은 이 정도로 황당한 판타지를 꿈꾸게 하는 현실의 막막함 때문은 아닐까.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진혁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 정녕 판타지에 그치고야마는 그런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까. <닥터 진>이 주는 먹먹함의 실체는 그래서 이런 막막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두 시선, <무신> vs <닥터 진>

 

사극의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 걸까. MBC 주말극으로 나란히 방영되고 있는 <무신>과 <닥터 진>은 같은 사극이라도 역사를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무신>은 고려 무신 정권 속에서 노예로 전락했다가 후에는 최고의 위치에까지 오르는 김준이라는 역사 속 실존인물을 다루고 있다. 초반의 격구 에피소드에서는 '글래디에이터'류의 스토리가 들어가면서 퓨전사극적인 요소를 보이지만 이 사극은 지극히 정통 사극의 궤를 따라가고 있다.

 

 

'닥터 진'(사진출처:MBC)

실제 역사의 인물인데다 중간 중간에는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까지. 그래서 정통사극의 대가 이환경 작가는 "퓨전사극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만큼 역사적 고증에 철저하고 또한 역사적 사실에 기대는 바가 크다는 얘기다. <무신>은 이미 퓨전화 되어버린 사극의 흐름을 어쩌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역사로의 회귀.

 

반면 <닥터 진>은 <무신>과는 전혀 다른 역사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다. 사실 사극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이 작품은 타임리프라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이야기 설정이 들어가 있다. 현대를 살아가던 천재적인 신경외과의 진혁(송승헌)이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조선시대로 떨어지게 된다. 조악한 조선시대의 의료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민초들을 살려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진혁은 진정한 인술의 길을 가게 된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건 <닥터 진>에 실제 역사적 인물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범수)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진혁은 이하응에 의해 목숨을 빚지기도 하는데, 마침 이하응의 아들이 괴질에 걸려 쓰러지게 되자 진혁은 그를 구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훗날 즉위한 고종이다. 즉 이 작품은 현재의 주인공이 역사 바깥에서 그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허구가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

 

<무신>과 <닥터 진>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그 거리가 멀다. <무신>이 여전히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 붙잡혀 있다면, <닥터 진>은 그 벽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즉 타임리프가 적용된 <닥터 진> 같은 사극은 과거를 운명적으로 따르기보다는 현재적 시각으로 과거를 바꿔보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즉 현재로 넘어온 주인공이 과거의 문제를 현재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이거나(<옥탑방 왕세자>가 그렇다), 과거로 간 주인공이 거기서 겪는 일들을 통해 현재를 다시 보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역사란 알다시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다뤄졌다. 그 나라의 역사는 그 민족이 가진 저력과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점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위기는 국가나 민족 간의 문제보다 더 크다.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이란 얘기다. 이러한 글로벌한 문제의식은 로컬한 역사주의가 가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무신>을 보면서 몽골에 대항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모습에 자긍심을 느끼다가도 자칫 민족주의에 너무 매몰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퇴행적인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닥터 진> 같은 사극은 그런 점에서 역사주의라는 특수성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을 바라보는 보편성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은 각자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무신> 같은 실제 역사의 한 부분을 극화한 작품에서조차 역사 그 자체보다 보편성을 가진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묻어나는 건 현재 역사가 서 있는 위치를 잘 말해준다. 어쨌든 본래 역사를 다루던 사극이라는 장르가 역사주의를 넘어서 이젠 보편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변화다. <닥터 진>은 그 변화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사극이고 <무신>은 어쩌면 그 변화의 끝단에서 여전히 변화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한 사극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어떤 사극이 더 당신의 마음을 끄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면 자신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박>, 당장의 웃음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진짜 뭐하는 건지...' <1박2일>이 인제로 떠난 예능인 단합대회에서 코끼리코를 열 번 돌고 바늘에 실을 꿰는 예능올림픽(?)을 이수근이 할 때 깔리는 자막. '예능인 단합대회'라는 기치를 내건 것처럼, <1박2일>은 아예 대놓고 몸 개그로 웃음을 만들어보겠다 작정했다. '이게 뭐하는 건지' 하는 자막에는 웃음을 주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고 있다는 '노력'의 의미와, 이런 짓까지 해야 한다는 '자조'의 의미가 섞여 있다.

 

 

'1박2일'(사진출처:KBS)

실제로 이런 대놓고 하는 몸 개그가 웃기긴 하다. 뭐 그다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저 무너지는 출연자들을 보며 웃기만 하면 되니까. 어지럼증에 몸을 비틀대면서도 열심히 바늘을 꿰려는 이수근의 모습이나, 아예 바늘을 찾지 못하는 김종민의 모습은 우습다. 뒤로 삼단 뛰기, 손에 신발을 꿰고 손으로 제기를 차면서 발을 동시에 들어 올리는 예능 제기차기도 모두 재밌다. 하지만 어딘지 부족하다. 한참 웃긴 웃었는데 별로 남지가 않는다.

 

의미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 웃음이 맥락이 되어 그 날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스토리라인이 없다는 얘기고, 또 그런 스토리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캐릭터가 없다는 얘기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생기지 않는 게임은 반복되면 질릴 수밖에 없다. 당장의 웃음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앞으로의 지속적인 웃음 텃밭을 만드는 데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많은 게임의 덫에 걸려버린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이 바로 당장의 웃음의 허기를 채우려다 결국 무너져 내렸다. '패밀리가 떴다'는 그 형식의 특징 상 게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시즌1이 꽤 괜찮은 흐름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유재석이라는 발군의 캐릭터 발굴 MC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즌2에 와서 그 중심이 사라져버리자 캐릭터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러자 스토리 없는 게임만 반복됐다. 결국 종영되고 말았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괜찮은 소재의 리얼 버라이어티쇼였다. 초반 캐릭터가 잡혀나가는 단계는 그 어느 예능 프로그램보다 그 뛰어난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야구경기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스토리가 점점 사라졌다. 결국 예상보다 일찍 종영되었다. '청춘불패'는 시즌1에서 꽤 괜찮은 호응을 얻어냈다. 한 시골마을에 정착하면서 그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져가는 스토리가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2에 와서 점점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시골 이야기는 없고 시골 게임 버라이어티가 되어가는 중이다. 위험한 상황이다. '청춘불패' 시즌2는 재미뿐만 아니라 명분도 잃었다.

 

그렇다면 <1박2일> 시즌1의 게임은 뭐가 달랐을까. 먼저 시즌1은 게임을 하는 이유부터가 자연스러운 스토리 위에 놓여 지기 마련이었다. 그저 자 이제부터 게임합시다, 하고 모여 게임을 하는 인위적인 상황이 아니고, 먼저 게임을 하게 되는 동기를 만들어낸다. 강호동이 나영석 PD와 팽팽한 대결구도를 갖는 것은 이 스토리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함이다. 제작진의 압제(?)에 한번 이겨보자는 연기자들의 의기투합이 이어지고 나면 게임은 그 맥락 위에서 보이게 된다.

 

경기 자체나 결과가 뭐가 중요할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의 흐름에 따라 생겨나는 캐릭터와 이야기들이다. 족구 경기를 하나 해도(심지어 그게 저질이라도) 시즌1에서 더 주목도가 높았던 건 단지 복불복이란 설정 때문이 아니다. 그 게임을 하면서 계속 제작진과 연기자들 사이에 쌓여진 스토리가 전제되기 때문에 게임은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은 시즌2의 '예능인 단합대회'가 보여준 게임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게임 하나를 하더라도 인위적인 느낌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려면 누군가 이를 촉발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이른바 '악역'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1박2일> 시즌1에서는 강호동이 그 역할을 했고, 또 때로는 나영석 PD가 그 역할을 했다. 강호동이 짜증을 내고, 나영석 PD가 얄미울 정도로 "땡!"을 외칠 때, 게임은 그저 게임이 아니라 그 안에 스토리를 갖게 되었다.

 

결국 <1박2일> 시즌2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악역을 자처할 캐릭터다. 그것이 연기자들이든 아니면 제작진이든 누군가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미션 구조로 되어 있는 이 버라이어티쇼의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러워진다. 이게 없으면 그저 해야 하는 게임을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또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 자체의 결과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끊임없이 캐릭터를 뽑아내는 자세가 요구된다. 예능인 단합대회에서 연기자와 제작진이 한 족구대회가 밋밋했던 것은 이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족구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경기를 한 연기자나 제작진보다 오히려 본래 심판 캐릭터(?)를 갖고 있던 조명감독이었다.

 

<1박2일>은 시즌2에 들어와 안타깝게도 많은 외적인 악재를 겪었다. 그러면서 시청률도 뚝 떨어졌다. 최재형 PD는 인터뷰를 통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피력했다. 그간은 뭐든 시도하는데 주저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 하지만 뭐든 하는 것이 게임 같은 보다 편한 웃음 만들기가 돼서는 안 된다. <1박2일>만이 가진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가져올 수 있는 스토리를 발굴해야 되고, 게임에서도 게임 자체보다는 캐릭터에 몰두해야 한다. 당장의 웃음보다 장기적인 관점의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야 <1박2일>은 본래의 궤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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