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에 이어 직진하는 사회 복수극, <추적자>

 

"힘 있는 자와 타협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위를 바라보지 않고 아래를 살피겠습니다. 가난이 자식들한테 대물림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서민들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한민국을 저 강동윤이 여러분과 함께 만들겠습니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는 강동윤(김상중)의 이 연설 내용은 지겨울 정도로 전형적이다. 누구나 한번쯤 TV를 통해 봤을 법한 장면.

 

 

'추적자'(사진출처:SBS)

하지만 그 장면이 흘러나오는 TV 옆으로 억울하게 딸을 잃은 백홍석(손현주)이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걸어 나오는 모습은 이 지극히 전형적이어서 이제는 따분하기까지 한 연설 내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강동윤은 연설 내용과는 정반대로 아내 서지수(김성령)가 저지른 살인사건을 이용해 힘 있는 자인 장인 서회장(박근형)에게 압력을 가하고, 백홍석의 친구인 의사 윤창민(최준용)을 사주해 살아난 친구의 딸을 다시 죽게 만든다.

 

딸의 죽음 앞에서 백홍석의 아내 송미연(김도연)은 살아생전, 돈이 없어 딸에게 못해준 스마트폰이며 생일잔치, 학원 등록을 못해준 일들을 후회한다. 강력계 형사의 박봉에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억울한 딸의 죽음이다. 그것도 한 정치인의 야망에 의해 가차 없이 유린당한. 이런 세상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강동윤이 말하듯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는 애초부터 요령부득인 셈이다.

 

<추적자>는 첫 회에 이 모든 사회적인 분노의 지점을 찾아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장르적 관점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추격전의 코스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이런 장르의 드라마는 굳이 새로움을 위해 장르 실험이나 뜻밖의 반전 포인트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오로지 대중들이 기대했던 코스를 제대로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 박진감과 속도감이 긴장감과 통쾌함으로 이어진다면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반복적일 수 있는 장르의 흐름에 대중들이 공분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을 제대로 얹어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백홍석이 당한 그 고통과 억울함이 대중들에게 공감되고, 백홍석의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PK준(이용우)이나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강동윤, 그리고 그의 사주를 받은 친구 윤창민의 행각에 공분을 갖게 되는 건, 그것이 안타깝게도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적자>를 통해, 외면되는 정의와 진실에 대해 질깃질깃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었던 <적도의 남자>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이 두 드라마는 모두 돈과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복수극의 형태로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적도의 남자>는 좌우의 우회길을 살피지 않고 '직진하는 드라마'로서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미 첫 회부터 거두절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툭 던져놓고는 그 안에 백홍석을 달리게 하는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적도의 남자>의 직구 승부를 닮은 점이 있다.

 

과연 <추적자>는 <적도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차츰 시동을 걸어 점점 깊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만들어낼 것인가. <추적자> 첫 회의 마지막 장면, 즉 백홍석이 복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TV 화면으로 버젓이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그 위에 올라선 강동윤의 연설 장면이 오버랩 되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작품의 제대로 된 착화점이 되는 셈이다. <추격자>는 <적도의 남자>가 보여준 그 통쾌하면서도 아픈 사회극이자 복수극의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

전광렬을 보면 '빛그림'이 보인다

 

이제 누가 누구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게 되었다. '빛과 그림자'의 캐릭터들은 언제든 어제의 적이었지만 오늘의 동지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 모양이다. 이 전형적인 복수극의 근본적인 대립구도는 강기태(안재욱)와 그 가족을 몰락하게 만든 장철환(전광렬)과 조명국(이종원) 그리고 차수혁(이필모)이다. 하지만 이 초반의 관계는 중반을 거쳐 종반에 이르면서 끊임없이 변화했다. 복마전도 이런 복마전이 없는 셈이다.

 

 

'빛과 그림자'(사진출처:MBC)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장철환이다. 장철환은 정장군(염동현)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를 세운 차수혁, 조명국과 대립하게 되고, 새롭게 돌아온 강기태와도 손을 잡는다. 장철환은 그러나 정장군의 신임을 다시 얻어 차수혁을 추락시키고 조명국을 다시 끌어들인다. 이제 다시 그는 강기태와 각을 세운다.

 

이 끝없는 변화의 과정에서 장철환이라는 캐릭터는 조금은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특유의 야비한 표정과 말투는 화제가 될 정도.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욕을 하고 분노를 터트리고 책상 앞에 있는 것은 뭐든 집어던지는 그의 모습은 심지어 묘한 중독성까지 갖게 만든다. 왜 그렇지 않을까. 일관성을 찾기 힘든 이 욕망의 노예가 된 인물이 진중함을 유지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때는 이쪽 편에 있었는데 다른 순간에는 정 반대편에 서는 이런 배신과 변심의 연속은 '빛과 그림자'의 마지막 남은 동력인 모양이다. 처음 장철환과 손을 잡았다가 강기태와 함께 해외 도피 생활을 하고 돌아온 조태수는 강기태와 함께 복수를 꿈꾸다가 다시 장철환과 손을 잡는다. 차수혁은 장철환과 초기에 같은 권력에 있었지만 정장군(염동현)을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세우면서 대립하는 관계가 된다. 조명국은 차수혁과 함께 장철환과 대립하는 관계였지만 후에 다시 장철환과 손을 잡는다. 강기태의 적이었던 노상택(안길강) 단장 역시 후에는 강기태의 빛나라 기획에서 일하게 된다.

 

사실 더 자잘한 것들까지 일일이 열거하면 캐릭터들의 변심은 끝이 없다. 양태성(김희원)은 이정혜를 돕고자 강기태와 함께 일을 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모시는 이현수가 장철환과의 관계를 희망하자 어쩔 수 없이 변심하는 인물이다. 강기태의 애인인 이정혜(남상미) 역시 강기태가 해외로 도피한 사이 차수혁과 관계를 유지해오다 강기태가 돌아오자 그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강기태와 이정혜의 관계 역시 단순하지 않다. 이정혜의 친 아버지인 이현수(독고영재)는 강기태가 아버지처럼 모시는 김풍길(백일섭)과 일본에서 악연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끝없는 대립구조는 드라마의 추진력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의 캐릭터 놀이(?)는 조금 지나치다 싶다. 제 아무리 욕망에 의해 의리도 없는 복마전의 세계라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논리는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캐릭터들은 점점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빛과 그림자'의 전광렬이 하는 연기에 대한 열광은 그래서 그 안에 빈약한 스토리와 억지스러운 캐릭터 변화에 대한 일종의 조소가 섞여 있다. 역시 전광렬은 어떤 상황에서든 120%의 연기력으로 그 우스움을 승화해내는 연기자임에 분명하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어떤 일관성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꾸로 이 드라마가 전광렬이라는 연기자의 거의 모든 것을 우려내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끝없는 도돌이표 드라마의 한계는 연장 방송의 폐해이기도 하다. 단 몇 회면 끝날 이야기가 수회에 걸쳐 반복되고,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져야 할 캐릭터들은 이리 저리 휘둘린다. 스토리라인도 거의 비슷해서 마치 아이들의 놀이처럼 보일 때가 많다. 적이 나타나서 아군을 괴롭히고 그것을 물리치는 이 단순한 스토리라인의 무한 반복인 셈이다.

 

'빛과 그림자'가 기획단계에서부터 관심을 끌어 모았던 것은 그간 잘 다뤄지지 않았던 우리네 쇼 비즈니스와 시대극을 절묘하게 엮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연예계와 그 뒤안길을 따라가면 거기서 발견하는 시대의 어둠. '빛과 그림자'는 이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드라마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이제 종반을 향해 치닫는 이 드라마의 실체는 어떤가. 과연 이 드라마는 그 기획의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을까. 의문이다.

<돈의 맛>, 어떤 맛일까

 

"이 맛에 우리가 이거 하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었는데, 돈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이 맛'이란 다름 아닌 '돈의 맛'이다. 도대체 이 '돈의 맛'이란 어떤 맛일까. 물론 돈에 맛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뉘앙스에서 우리가 느끼는 맛은 분명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탐하게 되는(혹은 탐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맛이다.

 

 

사진출처: 돈의 맛

온통 지폐다발로 쌓여진 방에 윤회장(백윤식)과 그의 비서인 영작(김강우)이 들어오는, 영화 <돈의 맛>의 첫 장면에는 사실 이 영화가 맛보여주려는 '돈의 맛'의 대부분이 들어 있다. 그저 종잇조각의 더미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영작은 이 돈 더미에 압도된다. 튼실한 가방에 누군가에게 뇌물로 전해줄 돈을 챙겨 넣는 영작에게 윤회장은 농담하듯 몇 다발 챙기라고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짓이라고.

 

이미 윤회장은 그 때부터 이미 돈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셈이다. 왜 그렇지 않을까. 여기저기 정관계에 돈을 찔러주면 그것으로 죄도 사라져버리는 그런 세상, 돈이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그래도 더 많은 돈에 대한 탐욕이 끝이 없는 사람들, 돈이면 뭐든 다 되는 것을 목도한 후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욕망으로 바라보는 그 멘탈 붕괴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섬뜩한 느낌. 윤회장은 이런 '돈의 맛'을 '모욕적인 맛'으로 느낀다.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도 돈을 챙기는 그 맛에 만족하는 인간이란 모욕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짐멜이 모더니티 분석을 통해 돈이 가진 이중성을 말한 것처럼, 돈이란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해 이른바 평준화된 삶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각각의 개인들이 갖고 있는 고유의 개성이나 자질 역시 돈이라는 양적인 기준에 의해 그 가치를 잃게 만든다. 결국 "이 맛에 우리가 이거 하는 거예요"라는 말은, 노동조차 그 일이 주는 고유의 맛(보람, 즐거움 같은)이 아니라 돈의 맛(양적인 수치)으로 치러지는 우리네 삶을 말해준다. 하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해치는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무슨 보람을 얻겠는가. 이는 뒤집어 말하면 돈이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일들이다.

 

이 초재벌그룹의 가족들이 유령가족처럼 느껴지는 건 그 관계가 가족지간이라는 본래의 가치를 벗어나 돈의 관계라는 교환가치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공간은 서민들이 보기에는 이질적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늘 말끔하고 단정하게 치워져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 사는 공간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 말끔함은 무슨 얘기를 하건, 무슨 사건이 벌어지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이들 가족들의 표정과 닮아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놓는다. 물론 대화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 생각한다. 다만 그 파장에 자신이 피해를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돈의 맛>이 주는 충격은 그 겉으론 말끔하게 생긴 재벌가 사람들의 때론 동물의 왕국 같은 질퍽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저 첫 장면에서 영작이 돈 더미가 쌓인 방에서 느꼈던 그 압도적인 돈의 마력을 깨닫게 되는 데서 생겨난다. 돈에 대한 욕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 돈에 대한 욕망의 끝단은 결국 멘탈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 영화는 우리 앞에 불편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심지어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편안한 안식을 취해야할 관 속에까지 그 놈의 돈은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다.

 

이제 그 질문은 우리에게 되돌려진다. 우리는 과연 무슨 맛에 사는걸까. 그 멘탈 붕괴의 크기는 다르지만 여전히 그들과 같은 '돈의 맛'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래도 삶의 다른 가치들을 찾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돈의 맛>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저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들의 삶에 그 질문을 되돌리는 영화다.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한류의 딜레마

 

한류를 얘기하면서 이제는 일본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그만큼 한류의 주 소비국으로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것. 실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발표 자료에 의하면 2010년 K팝 수출액의 99%가 아시아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현재 한류의 소비는 결국 아시아에 편중되어 있는데, 그것도 일본 비중이 너무 크다. 일본이 이 중 전체의 81%를 차지한다고 한다.

 

 

'각시탈'(사진출처:KBS)

이렇게 되면 일본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는 순간, 한류는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또 이런 과도한 일본 편중은 한류라는 문화 콘텐츠를 기형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한류 콘텐츠가 양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일본인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콘텐츠 생산이 차질을 빚는 기현상도 나올 수 있다.

 

최근 벌어진 '각시탈' 캐스팅 논란은 이 징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각시탈'의 제작발표회에서 윤성식 PD는 "한류스타들이 출연을 꺼려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허영만 화백의 만화 원작인 '각시탈'은 어찌 보면 한국판 조로 같은 작품인데 반일 감정이 다분히 들어가 있다. 그러다보니 몇몇 한류스타들은 일본에서의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까 캐스팅을 고사했다는 얘기다.

 

또 일본의 소비력이 막강하다 보니 그네들의 입맛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도 나오고 있다. '겨울연가'로 한참 드라마 한류에 불이 붙었을 때, 몇몇 한류 스타들을 캐스팅해서 만들어진 드라마들 역시 따지고 보면 이런 일본의 입맛을 염두에 둔 작품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일본의 입맛에 맞춰 그들이 원하는 배우들을 집어넣는 조건으로 투자를 받고 제작된 드라마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물론 요즘은 이런 식으로 제작되는 드라마는 거의 없다. 다만 일본의 소비력이 지대하다 보니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이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분명하다. 국내에서의 시청률 5%에 머물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방영 전에 이미 90억 원대의 선판매가 이뤄진 '사랑비'는 현재의 한류가 가진 딜레마를 잘 말해준다. 한류 콘텐츠에 대한 국내의 정서와 일본의 정서가 그만큼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 판매로 90억 원이라면 어쨌든 수익을 내려는 제작자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이는 회당 무려 4억5천만 원에 이르는 수치로 국내 최고 기록이다. 여기에는 다분히 장근석 파워가 들어가 있다. 일본에 불고 있는 근짱 열풍이 한 몫을 했다는 것. 물론 한류 1세대를 이끈 '겨울연가'의 윤석호 PD도, 또 소녀시대의 윤아가 들어 있다는 것도 큰 이슈가 되었다.

 

물론 '사랑비' 제작진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작품이 애초부터 그런 한류를 겨냥하고 만든 작품은 아니라고 한다. 그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사랑 이야기를 하나쯤 하고 싶었다는 것. 실제로 장근석이 이 드라마를 통해서 얻으려 했던 것은 해외의 수익이라기보다는 국내의 인기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상황은 거꾸로 되어 버렸다. 시청률은 5%에 머물러 버린 반면, 해외에서의 판매는 호조를 띄고 있다. 의도는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한류를 겨냥한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사실 국내 드라마 현실을 보면 일본의 소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입맛에 맞추는 건 문제가 있다. 한류의 정체성은 결국 우리나라에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사라진다면 결국 한류의 존재기반도 사라지는 것이다. 일본의 입맛에 맞추다 보면 자칫 일본에서 생산하는 콘텐츠를 마치 우리나라가 하청하는 입장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한류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일류가 된다.

 

또한 이렇게 일본 입맛에 지나치게 맞춘 콘텐츠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장담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류란 그들과는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어야 진짜 소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저들이 만든 기무치는 절대로 김치가 될 수는 없다. 결국 그들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소개하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지속가능한 한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방향으로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접근을 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지구촌화되고 글로벌화 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나치게 민족주의에 얽매이다가는 자칫 배타주의나 국수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구한말 일제 강점기는 콘텐츠적으로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대를 다룬 콘텐츠들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시각만을 부여했기 때문에 좀 왜곡된 부분들도 더러 있다.

 

이제는 이런 민족적인 사안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각시탈' 같은 옛 만화의 현재적 시점에서의 드라마화에서 성패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다. 좀 더 현재의 글로벌한 시각에 맞는 콘텐츠적인 변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류는 결국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갖춰야 성공할 수 있는 콘텐츠다. 즉 특수성이란 우리만이 가진 특수한 정서들, 예를 들면 정의 문화라든가, 다이내믹한 성향 같은 것들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는 세계의 소비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또한 갖춰야 한다는 것. 즉 해외의 소비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우리 것들 중에 보편성을 가진 것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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