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말해주는 우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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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 감독의 '격정소나타'

'그 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어째서 이렇게 예의바르게 마지막 쪽지를 남겼을까.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녀는 왜 오히려 창피하다고까지 말하며 쪽지를 남겼을까. 왜 그냥 밥도 아니고 남는 밥이라도 달라고 했을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은 사람이 어쩌면 이다지도 반듯할 수 있었을까.

지난달 말 경기 안양시 월세방에서 지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급기야 운명을 달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남긴 마지막 쪽지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21세기에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나리오 작가라면 그래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도대체 지금은 어떤 일들이 벌어지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걸까. 이것은 과연 시나리오 작가군에 한정된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땅에 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통용되는 이야기일까. 어쩌면 앞뒤 꽉 막힌 삶을 버텨내야 하는 88만원 세대 전체의 비극일까. 비정규직으로 통칭되는 이 사회의 부조리일까. 혹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가려져왔던 비극은 아닐까. 이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고 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화조차 내지 못하고 간 최고은씨처럼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영화판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게 영화판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가를. 1년 내내 시나리오를 붙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작업을 하고 고작 300만원이란다. 그런데 실제 영화판 얘기를 들어보면 그나마 300만원이라도 받는 건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받는다는 얘기다. 뭐 하나 명함 내밀 것 없이 영화가 좋아 이 판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그런 용돈(?)조차 없다고 한다. "한 번 해봐"하고 부추기고, 곶감 빼먹듯이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모조리 빼서 투자자들에게 던져놓고는 잘 안되면 "네 실력 탓"이라고 말하는 게 부지기수란다.

상황이 이러니 영화판에서 오로지 시나리오만을 쓰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래서 입봉이 걸려있는 연출 파트쪽에서 일을 하는 감독 지망생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계약금이라는 것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달에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를 착수금조로 몇 달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다 영화화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야무야되기 마련이다. 그나마 나은 편이 감독인지라, 시나리오 작가는 물론이고 스텝들도 대부분 감독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딱히 감독이 꿈이어서가 아니라, 감독이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판에 비일비재한 부조리한 일처리 방식들은 악명 높기 이를 데 없다. 마치 대단한 거라도 주는 것처럼 취업에 목마른 영화 지망생들을 꼬드겨 아이디어만 쏙 빼먹고 버린다거나, 3개월 찍고 제작비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6개월이고 1년이고 계속 찍으며 다 찍어야 돈을 준다고 한다거나, 마치 금방이라도 영화화 될 것처럼 시나리오 작가를 부추기고는 몇 년 동안 작가를 오도 가도 못하게 묶어놓는다거나... 이것은 시스템이 부조리하다기보다는 아예 시스템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다. 그래서 업계에 있는 젊은이들은 차라리 회사 같은 시스템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봉이 적더라도 어떤 룰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진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막혀있는 건, 단지 영화판만의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종 공모에서 당선되었다고 해도 드라마판에서 이런 신예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신진들이 그나마 숨통을 틜 수 있었던 단편 드라마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무엇보다 새로운 신인들에 투자를 하기보다는 이미 뜬 기성작가들에만 몰려드는 제작 분위기는 큰 문제로 지목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이런 투자 개념 없이 대박만을 노리는 상황을 "비겁한 짓"이라고 꼬집는다.

실제로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들 속에서 신예 작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기획안들이 편성을 잡아내기 위해 방송사로 속속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이미 검증된 작가들만이 겨우 그 바늘구멍을 뚫기 마련이다. 이건 작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톱 배우들은 여기저기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바쁘지만 신인 배우들은 새롭게 자리를 차고 들어갈 여지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가요계의 불공정 계약 문제 역시 이런 신인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돌이 되려는 가수 지망생들은 넘쳐나고 그들을 키워내는 기획사의 문은 좁기 때문에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해도 일단 채용만 되면 이를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 대형기획사들은 그래도 그나마 과거보다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는 편이다. 팬들이나 대중들의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이 기획사 시스템에까지도 넓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기획사의 생리상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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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

하지만 가요계 전체를 들여다보면 기획사 중심의 가요판에 가려진 그림자가 암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그토록 깊었던 것은 우리 사회 청춘들 앞에 놓여진 장벽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굳이 88만원 세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작금의 청춘들은 기성사회로의 진입로가 막혀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문화 전반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된 이유로 사회가 자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돈을 쥔 자본주들이 신인을 키워내기보다는 이미 진출한 기성인(기성작가, 기성배우, 기획사 가수, 경력자들)들에게 몰두하고 그러다보니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젊은 피들이 고갈되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문화계까지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게임이 된 상황 속에서, 심지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젊은 희생을 담보로 굴러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당장에는 한류다 OECD다 하면서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사회가 신인들의 사회 진입 없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은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청년 실업 같은 작금의 청춘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대체 언제까지 젊은 희생을 담보로 갈 것인가. 최고은씨가 남긴 쪽지가 가슴 아프고 심지어 화가 나는 건, 그 죽음 앞에서까지 여전히 그 고통을 내면화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여주는 반듯함 때문이다. 왜 그녀는 화라도 내지 않았던가. 아니 어떤 현실이 그녀를 화조차 내지 못하고 마치 자기 잘못처럼 여기게 만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이대로 놔두면 장차 벌어질 대중문화의 죽음을, 또 나아가 사회의 죽음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사도 즐거워지는 토크쇼,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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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사진출처:tvN)

막돼먹은 영애 김현숙씨의 폭탄발언(?). "저 채식을 더 많이 해요. 사람들이 안 믿어줘서 그렇지." '육(肉), 욕(欲), 역(疫)'이라는 독특한 제목으로 고기에 대한 불편한 진실에서부터 그 욕망과 나아가 그것이 만들어내는 구제역 같은 대재앙까지를 다루는 '열광'이라는 시사토크쇼의 첫 멘트는 여타의 시사 대담프로그램과는 이토록 다르다. 믿지 못하겠다는 다른 패널들의 반응에 이어지는 영애씨의 발언이 좌중을 쓰러지게 한다. "육식공룡보다 초식공룡이 더 커요."

그러자 잡학박사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특유의 엉뚱한 입담을 시작한다. "전에 절에 갔더니 스님들이 엄청 뚱뚱하시더라구요. 풀만 드셔도 살이 찌나 봐요." 문화평론가 탁현민이 불쑥 끼어든다. "풀만 먹는다는 것도 편견일 수 있어요.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원문화(?)를 그렇게 좋아하잖아요. 여기저기 가든이 그렇게 많은 걸 보면." 그러자 이 엉뚱발랄한 시사토크쇼의 중심을 잡아주는 김정운 교수가 촌철살인의 화룡점정을 한다. "우리는 가든에서 먹고 파크에서 자죠."

개인적인 잡담처럼 시작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대중들이 보다 쉽게 시사에 접근하기 위해 밑밥을 던지는 것이다. 차츰 토크쇼가 진행될수록 어떤 진지한 얘기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국내 사육시설이 점점 대형화되고 있고 돼지 한 마리당 면적이 한 평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김정운 교수가 화두처럼 꺼내면 호란은 대부분의 돼지들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꺼낸다.

하지만 토크쇼는 그렇게 진지하게 깊이를 향해 달려가지는 않는다. 불쑥 탁현민이 자신과 김태훈을 소에 비유해 얘기를 꺼내면서 분위기는 시사의 무거움을 털어낸다. "집단사육이 계속되는 이유는 입맛하고도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김태훈씨가 소라면 저 같이 운동 안하고 회사라는 틀에서 사육되는 소의 육질이 김태훈씨 육질보다 훨씬 맛이 있을 겁니다." 분명 시사적인 이슈를 던졌지만 웃음이 빵빵 터지는 이 순간. 이것이 바로 시사랭크쇼 '열광'만이 가진 독특한 토크의 결이다.

왜 토크쇼 하면 늘 연예인들만 나와서 하는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들어야만 할까. 시사 대담프로그램은 왜 그렇게 늘 딱딱할까. 상대방 얘기는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하는 그런 대담 프로그램을 왜 보고 있어야 할까. '열광'은 분명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바로 이런 기존 예능 토크쇼와 시사 대담프로그램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시사를 좀더 쉽게 접근시키고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그래서 신변잡기 같은 각자의 고기 경험이 먼저 얘기되고 그러면서 차츰 차츰 욕망에 대한 이야기, 사회적인 문제들, 그래서 구제역 같은 재앙까지 이야기가 넓혀져 나간다.

'열광'에 열광하게 되는 포인트가 분명히 있다. 먼저 이 시사토크쇼는 시사를 다루면서도 뭔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이론을 얘기하기 보다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담을 통해 시사에 접근하기 때문에 주장은 설득이 아니라 공감이 된다. 그래 그래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어 하고 수긍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시사가 그리 먼 세계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양념처럼 유머가 곁들여진다. 시사를 다루기 때문에 이 유머 역시 기존 예능의 웃음과는 사뭇 다르다. 한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지는 지적 유머는 '열광' 같은 프로그램이 아니라면 찾기가 쉽지 않다.

시사랭크쇼 '열광'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어떤 결론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김일중 작가는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깊어질 때면 다시 예능의 표면으로 되돌리려 노력한다. "웃음을 주어야죠. 물론 그 웃음의 결은 확실히 다르겠지만." 즉 예능과 시사 사이에 어떤 균형점을 잡아주는 것이 이 시사토크쇼의 관건이 된다. 너무 예능쪽으로 가면 알맹이가 사라지고, 너무 시사쪽으로 가면 재미가 반감된다. 그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엉뚱발랄 시사토크쇼만의 색깔이 나온다.

지적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기존 시사 대담 프로그램에 익숙한 분들에게 이런 질문은 부정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한번 '열광'을 보게 된다면 다른 생각을 할 지도 모른다. 그저 재밌게 웃으며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그 지적 유희에 열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싸인'의 그 많은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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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싸인'의 시청률이 드디어 20%를 넘어섰다. 초반 승승장구했지만 차츰 고개를 숙인 '마이 프린세스'와는 사뭇 다른 행보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일련의 용두사미 드라마들, 즉 초반에 기선을 잡았다가 중반부터 힘이 달려 시청률이 떨어지던 드라마들 속에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싸인'의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빠져들게 하는 걸까.

무엇보다 '싸인'의 풍부한 스토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싸인'은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이어져 있지만, 에피소드가 병렬적으로 소개되는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어느 스타의 죽음을 다룬 후, 연쇄살인범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어느 기업에서 벌어지는 연쇄 의문사 사건이 이어지는 식이다.

연속극에 익숙한 우리나라 드라마 시청 패턴 상 병렬적인 스토리 구조를 가진 드라마는 한계를 가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싸인'은 예외적이다. 이유는 병렬적인 스토리들을 박신양과 김아중, 전광렬, 엄지원, 정겨운 같은 굵직한 배우들이 캐릭터를 통해 촘촘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벌어진 윤지훈(박신양)의 아버지와 정병도(송재호) 사이에 벌어진 소견 조작 사건은, 20년 후 윤지훈이 맞게 되는 연쇄 독살사건과 연결된다. 각각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주인공과 연결시킴으로써 전체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

연결이 끊기지 않는 병렬적인 스토리 구조는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바뀐다. 보다 풍부한 스토리를 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쟁작이라 할 수 있는 '마이 프린세스'와 대적할 수 있는 확실한 경쟁력을 만들어준다. 지지부진한 진행, 반복적인 스토리에 인물들 간의 멜로만 부각되는 '마이 프린세스'와, 멜로가 약하지만 매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싸인'은 확실히 대비된다.

게다가 '싸인'이 가져온 사건들이 현실에서 벌어졌던 실제 사건들을 계속해서 연상시킨다는 점도 시청률 상승의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다. 가수 고 김성재군의 의문사 사건이라든지, 화성 연쇄살인사건, 그리고 최근에는 매 값 논란을 일으켰던 사건들까지 이 드라마는 화제로 끌어들인다. 물론 직접적으로 그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뉘앙스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현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정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 어떤 대리만족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멜로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과거 멜로는 '싸인' 같은 전문직을 다루는 드라마의 독이 되는 경향이 짙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여기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사건과 그 속에 잘 어우러지는 멜로의 조화는 오히려 드라마의 몰입도를 더 끌어올릴 수 있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전문직의 사건들만으로 20% 이상의 시청률을 계속 끌고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멜로가 적절히 이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멜로에 빠져 사건이 지지부진해진다면 오히려 독이 되겠지만.

'싸인'은 기존 드라마 관행 속에서 여러 약점들, 예를 들면 병렬적인 스토리 구조나 멜로의 부재 같은 것들을 갖고 시작했지만 그것을 거꾸로 강점을 잘 바꿔놓은 드라마다. 무엇보다 박신양과 전광렬의 팽팽한 연기대결, 그리고 송재호의 관록과 김아중의 발랄함이 잘 어우러져 있는 점도 시청자들을 끄는 요인이다.

다양성을 담은 ‘종결자’, 표현은 획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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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송승헌'(사진출처:OSEN, MBC)

이른바 ‘종결자’ 시대다. 인터넷을 열거나 TV를 켜면 어디서든 ‘종결자’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종류도 가지가지다. 아이유처럼 고음 종결자가 있는 반면, 송승헌 같은 복근 종결자도 있고, ‘시크릿 가든’의 김사랑에서부터 패션모델 장윤주까지 무수히 많은 몸매 종결자들도 있다. 물론 투기 종결자라거나 정치개그 종결자처럼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

사실 너무 많은 종결자들이 넘쳐나다 보니 이제 누가 진짜 종결자인지는 잘 모르는 지경이다. 하지만 그래도 ‘종결자’라는 표현 자체가 강하다보니 일단 그런 제목이 붙어 있으면 들춰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 이렇게 보면 이 단어는 이 시대 최고의 ‘낚시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종결자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최고’라는 뜻이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말미에 종결자라고 붙여놓으면 그 분야에서 더 이상은 넘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즉 누가 낫고 누가 덜하다고 말들이 많은데, 그런 말들을 ‘종결’시킬만한 존재라는 얘기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왜 ‘종결자’라는 단어가 이처럼 횡행하는지가 보인다.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저마다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현실이 ‘종결자’ 속에는 배경으로 깔려 있다. 즉 현실은 정반대로 어느 하나가 최고로 군림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종결자’라는 말은 ‘최고’ 혹은 ‘1위’ 같은 단어가 가진 구체적인 이유가 삭제된 경우가 많다. 그저 감성적으로 느낌으로 ‘종결자’라 붙여지고 추앙되어지는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

언론이 이 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프로그램이나 연예인 띄워주기에서 이 만큼 강력한 ‘낚시’의 힘을 가진 단어가 없는데다가, 1위니 최고니 하는 말에 따라붙는 구체적인 책임 또한 없다. 종결자라는 단어에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면서도 시선 잡아끄는 데는 확고한 힘이 느껴진다. 수많은 정보들이 경쟁하듯 서야하는 인터넷이나 방송 같은 공간 속에서 ‘종결자’는 말 그대로 표현의 종결자다.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 특별한 분야의 ‘종결자’라고 주장한 후에 말 뜻 그대로라면 더 이상 없어야 할 그 분야의 ‘종결자’가 계속 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금의 정보들이 가진 유희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엄밀하고 진지한 정보들보다는 휘발성 강한 유희적인 정보들이 난립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 자체는 점점 놀이화되고 있는 작금의 매체 환경 속에서 지극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무수한 ‘종결자들’의 홍수 속에 진정한 고수들이 묻히고 있다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서로 ‘종결자’라 소리치는 상황은 때론 공해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한 때의 유행어라 해도 너무 획일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종결자’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많은 다양성을 밑그림으로 갖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종결자라는 이 다양성의 주장은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 ‘종결자’라는 말은 유행처럼 번지며 그 다양성을 해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다양한 최고들만큼, 최고를 표현하는 다연한 말들이 나타나기는 어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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