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은 TV를 어떻게 바꿔놓았나

'웃으면 복이 와요'가 무대와 세트에 세워진 카메라가 포착하던 정통 코미디 시대를 상징한다면, '무한도전'은 일상 속으로 들어온 카메라가 잡아내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3월 부활을 꿈꾸며 새롭게 편제되었다가 6개 월여만에 조용히 사라져간 '웃으면 복이 와요'와, 그 즈음인 2005년 4월에 불쑥 등장한 '무모한 도전'이란 외계인의 등장은 이 변화해가는 시대를 징후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포크레인과 인간의 삽이 대결을 벌이고, 정준하가 '뜨거운 가락국수 빨리 먹기'로 달인의 경지에 오르는 이런 형식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일찍이 정보를 얻기 위해 각종 실험을 감행하는 다큐멘터리에서 시도되던 것들이다. 이른바 리얼리티쇼라는 형식은 사실상 다큐멘터리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다큐적인 아이템이 '도전'이라는 주제를 갖고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도됐다는 것이다.

'무한도전'이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을 거쳐 성장하며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우리 식의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가는 그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것은 카메라가 외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ENG카메라로 상징되던 방송카메라가 점점 소형화되고 고화질화되는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 기술의 발달만으로 어떤 문화가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무한도전'은 그 변화해가는 영상기술이 문화로 나아갈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했다. 그것도 웃음이라는 강력한 파괴력을 장전시킨 채.

무대만 바라보던 예능의 카메라들은 점점 무대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아예 전국을 떠돌거나 오지를 찾아다니는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프로그램도 만들어졌다. 카메라가 바깥으로 나오자 프로그램의 스토리텔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무대 안에서 대본을 축으로 주거니 받거니 합을 이루던 예능의 스토리텔링은, 이 야외라는 돌발사건의 지뢰밭에서 대본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던 예능의 스토리텔링은 이제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무한도전'의 카메라가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한쪽 방향이 아닌 어느 방향이든 비추기 시작하면서 대중들은 이제 카메라 뒤편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리얼리티TV의 신호탄이었다. TV의 한쪽에 세트로 세워진 말끔한 면은 이제 그 초라한 진면목을 드러냈다. 세트는 가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별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늘 카메라 바깥에서 카메라 안의 스토리를 조정하던 작가나 PD가 카메라 속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 TV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중들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 리얼리티TV는 형식과 장르 같은 프로그램의 겉면을 해체시키면서 그 경계를 지워내기 시작한다. 예능은 다큐와 만나고, 다큐는 예능의 형식을 끌어와 독특한 재미의 세계를 구축한다. 교양 프로그램은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허물어 놓은 형식들을 끌어다가 인포테인먼트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무한도전'의 끝없는 형식 실험이 없었던들, '스폰지'나 '자체발광' 같은 정보의 재미를 추구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나, '괜찮아U' 같은 재미와 교양을 엮은 프로그램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무대에서 일상으로, 가상에서 현실로 카메라가 빠져나오면서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프로그램이 프로그램 바깥에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무한도전'은 점점 성장하면서 실제 현실을 바꿔나가는 도전을 시도해왔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프로그램의 취지에 걸맞게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을 조명하고 격려해주었다. 우리 음식을 알리기 위해 뉴욕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서민경제를 살린다는 취지로 박명수는 음식점을 '기습공격(?)'하기도 했다. 매년 만드는 달력의 수익금은 전액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해오고 있고, 벼농사 특집으로 수확한 쌀도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하는 등 그 높아진 위상만큼 사회적 책무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공익적인 활동보다 더 큰 공익은 아마도 '무한도전'이 200회 내내 끝없는 노력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제공한 포복절도의 웃음일 것이지만.

작년에 했던 '무한도전TV' 특집 편에서 '무한도전'은 하루 종일 방영하는 거의 모든 형식의 프로그램의 패러디를 시도했다. 거기에는 뉴스에서부터 영화, 쇼, 교양 프로그램, 심지어 드라마까지 다양한 형식들이 '무한도전'식의 패러디로 바뀌어져 큰 웃음을 주었다. 물론 그것은 패러디였지만, 실제 '무한도전'이 TV프로그램에 준 변화는 패러디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아가 '무한도전'이 TV 바깥세상에 미친 영향 또한 마찬가지다.

가족드라마의 틀 속에 동성애도 있는 것

최근 보수적인 성향의 한국교회언론회는 "동성애 미화,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논평을 통해 '동성애를 미화하는 TV프로그램의 방영은 동성애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심각하게 비호하는 측면이 있다."는 논평을 냈다. 또 기도운동단체인 에스더 기도운동도 최근 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대로 TV드라마를 방치한다면 이 땅의 많은 청소년에게 동성애는 아름다운 것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시청거부운동을 촉구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프로그램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최근 종영한 드라마 '개인의 취향', 그리고 현재 방영되고 있는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동성애자를 지목한 것일 게다. 특히 그중에서도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동성애자 태섭(송창의)에 대한 시선은 극에서 극으로 옮겨졌다.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동성애자 태섭이란 존재에 대한 반감은 어느새 동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걸까.

그것은 커밍아웃을 통해서 비로소 태섭이 가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태섭이 차마 가족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철저히 타자였다. 드라마 속에서 가족과 섞이지 않는 태섭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이 땅의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그 시선 그대로였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외계인 같은 존재. 하지만 그가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양엄마인 민재(김해숙)에게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는 태섭을, 민재는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사실을 민재에게 전해들은 병태(김영철) 역시 태섭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준다.

외계인처럼 겉돌던 태섭은 그 부모인 민재와 병태가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바로 이 시점의 변화가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을 극에서 극으로 바꿔놓은 김수현 작가의 마법. 그 마법은 다름 아닌 가족애다. 타인으로만 바라보던 시청자들의 시점을 가족의 시점으로 바꿔놓자, 거기에 외계인이 아닌 우리네 가족 중 하나로서의 태섭이 서 있었다. 그 어떤 가족이 자신의 가족이 동성애자라고 해서 그저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민재가 태섭에게 '우리가 너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김수현 식으로 동성애에 대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가족드라마의 시선으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인 잣대나 사회적인 맥락 같은 것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은 가족 바깥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즉 가족의 눈높이에서 동성애는 윤리적인 문제도 사회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저 부모 자식사이에, 형제 남매 사이에 놓여진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인생은 아름다워'는 동성애 드라마라기보다는 김수현 특유의 가족드라마가 맞다. 다만 그 가족의 일원 중에 동성애자가 들어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양병태네 집안사람들이 저마다 문제들을 갖고 옥신각신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족애로 그것을 넘어서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드라마다. 거기에는 일부에서 제기하는 '동성애에 대한 미화'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자라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그 가족애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해묵은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접근보다, 훨씬 실질적이고 인간적인 접근방식인지도 모른다.

‘드래곤 길들이기’, 어른과 아이가 모두 공감하는 이유

왜 드래곤을 길들이려는 것일까. 마을을 쳐들어와 쑥대밭을 만드는 드래곤들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바이킹족의 마을. 아이들조차 드래곤을 죽여 진정한 바이킹 용사가 되길 원하는 그 곳에 싸우기보다는 드래곤과 공존하려는 히컵이라는 소년의 존재는 아이들의 눈높이에는 모험과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걸 보는 어른들에게도 꽤 많은 시사점을 발견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연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 하는 결코 작지 않은 환경적인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바타’에서 나비족들과 제이크 설리가 익룡을 닮은 이크란을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은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이 친구가 된 드래곤 투스리스(toothless 이빨이 없다는 뜻으로 히컵이 붙여준 이름)를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과 중첩된다. ‘아바타’의 제이크 설리가 차츰 판도라 행성의 생명체들과 교감하게 되면서 결국 이를 파괴하려는 인간들과 맞서게 되는 것처럼,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은 투스리스를 통해 드래곤들이 사실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들과의 공존을 모색한다. 이런 점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는 환경문제를 바탕에 깔고 있었던 ‘아바타’의 어린이 버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를 ‘아바타’로부터 차별화시키는 대목은 바로 그 투스리스라는 드래곤과 히컵이 어떻게 함께 하늘을 나느냐 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히컵이 쏜 그물에 맞고 떨어져 꼬리 날개를 찢긴 채 더 이상 제대로 날지 못하는 투스리스에게, 히컵은 인공적으로 날개를 만들어 붙여주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몸과 연결한다. 그리고 히컵과 투스리스는 마치 처음 그걸 해보는 것처럼 비행을 연습한다. 함께 나는 연습. 그 비행의 순간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이 애니메이션이 전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메시지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자연의 상징으로 내세워지는 판도라 행성에서 인간들을 지구로 내쫓는 방식으로 판도라 행성을 지켜내려 한다. 즉 ‘아바타’가 제시하는 환경문제의 해답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인간들을 자연 바깥으로 몰아내면 자연은 저 스스로 보존될 것인가. 많은 환경학자들은 이미 자연은 인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축출하기 보다는 인간과의 공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과 투스리스의 관계 설정은 이 ‘공존’의 시각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통해 자연의 두려움을 친근함으로 바꿔놓고, 그것을 개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공존해야할 대상(심지어 그래야 더 재미있는 세상이 펼쳐진다는)으로 그리는 이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의 열광을 넘어 어른들의 열광까지 불러일으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슈렉’과 ‘쿵푸 팬더’를 통해 그저 동화책 같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좀 더 세태에 현실적인 애니메이션의 추구를 통해 어른과 아이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작품들을 만들어온 드림웍스는 이번 작품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서도 역시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선보인 셈이다.

‘하녀’의 냉소, ‘시’의 관조, ‘하하하’의 유머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처럼,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몸부림을 하고 있을까. 칸느가 주목하고 있는 우리 영화 세 작품, 임상수 감독의 ‘하녀’, 이창동 감독의 ‘시’,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이 절망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하녀’가 5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견고한 시스템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면, ‘시’는 그 도저한 시간의 흐름 위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로 승화해냈고, ‘하하하’는 본래는 무의미한 절망적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의미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우리의 실존을 과거와 현재를 병치함으로써 홍상수 특유의 유머로 그려냈다.

김기영 감독이 ‘하녀’를 만들던 1960년도에서 50년이 지난 2010년,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녀’라는 텍스트가 50년을 넘어서도 그대로 다시 리메이크되는 현실은 그 질문에 답을 준다. 공장여직공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초상류층으로, 폐쇄공포증을 느낄 만큼의 좁은 저택에서 실제 공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판타지화된 대저택으로, 욕망의 화신에서 그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으로 바뀌어졌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이 ‘하녀’라는 계급이다. 자본의 시스템이 견고해진 현재에 ‘하녀’는 그 속에서 상류층에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하녀로 부속화한다. 자본의 하녀다. 그래서일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는 다른 처절한 절망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세상은 좀체 변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그 변하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이 삶의 본질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본질을 계속 쳐다보려는 노력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어딘가에서는 억울하게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세상은, 제 아무리 누군가의 죽음에 죽을 듯이 절망감을 느껴도 그저 아래로 흘러가기만 하는 강물을 닮았다. 즉 철저히 타인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은 그 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킨다. 따라서 그 아프고도 고통스러운 시를 쓰는 행위는 그 절망적인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이창동 감독은 말한다. 점점 시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 그 어떤 통렬한 비판보다 ‘시’가 우리를 울리는 것은 그 미사여구 없이 그대로 바라본 듯한 현실의 관조 덕분이다.

‘시’가 무심한 세상에 대한 의미화에서 시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를 발견해냈다면, ‘하하하’의 시는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농담 같은 의미화가 사실은 우리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해주는 소재다.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이 같은 시간대에 통영에서 겪었던 며칠을 그려내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이 두 사람의 막걸리 자리의 안주거리에 다름 아니다. 두 사람의 겪은 일들은 사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입장에서 각각의 이야기로 전한다. 즉 과거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삶을 한바탕 술자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제목처럼 하하하 웃게 만들지만 한편으론 허허로운 뒤끝을 남긴다. 홍상수 감독은 이제 삶의 절망감마저 유머로 승화시키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칸느에서 주목받은 이 세 작품은 모두 우리네 삶의 절망감을 다루고 있다. 그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절망감을 향해 누군가는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고, 누군가는 그 속에서 외면하지 않고 절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의 마음을 발견하며, 누군가는 그 절망감마저 하하하 막걸리 한 사발의 유머라고 달관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들 영화들이 우리는 물론이고 칸느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마치 절망이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허위들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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