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하녀'와 2010년 '하녀', 뭐가 달라졌을까

'하녀'라는 말은 이제 우리의 일상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아래 하(下)자와 계집 녀(女)자를 쓰는 이 단어는 다분히 계급적으로 읽힌다. 즉 신분제도가 있던 시대에 사용되었던 이 '하녀'라는 단어는 지금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동일한 제목의 원작 영화인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개봉되던 1960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대에 사용되던 말로 제목을 바꾼다면 '식모'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하녀'라는 단어가 1960년에도 또 50년이 지난 2010년에도 그대로 제목의 자리에 앉아있을까.

아마도 김기영 감독은 '하녀', 즉 새롭게 등장하는 식모라는 직업군(?)에서, 당대 산업사회의 태동기에 물질주의가 가져올 욕망의 표상을 발견했을 것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분명 그 속에 계급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질 자본주의의 욕망으로서의 의미다. 작은 집에서 이층집으로 이사한 후, 벌어지는 사건들은 바로 그 물질적 풍요가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걸 암시한다. 좁은 집에서(물질적 풍요가 없는 시점에서) 하녀는 없어도 되는 직업군이지만, 넓어진 집에서는 하녀라는 새로운 욕망이 탄생한다.

그 잉여의 욕망을 표상하는 하녀가 한 가족을 파탄내는 이야기는, 물질의 주인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속 삶에서, 바로 그 물질이 거꾸로 주인을 속박하고 파탄내는 그 현실을 하나의 섬뜩한 우화처럼 그려낸다. 재미있는 건 이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액자식으로 구성함으로써 한 사내의 내적인 욕망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정신분석적인 구성은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보인다.

50년이 지난 현재, 임상수 감독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하녀'가 50년 전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당대는 자본주의의 태동기였지만, 지금은 고도 자본주의의 중심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돈(물질)에 의해 탄생하는 자본주의의 하녀(계급) 역시 좀 더 견고해졌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공장에서 일하다 소박한 중산층의 이층집으로 들어오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저자거리의 왁자한 소음과 어떤 절망으로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소란 속에서 살아가다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초상류층의 이층집으로 들어온다. 양극화는 더욱 첨예해졌다.

계급의 첨예함은 이 2010년 '하녀'의 공간연출로 더 도드라진다. 카메라는 종종 부감에서 주인이 하녀를 내려다보듯 거기 서 있는 인간군상들을 내려다본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이층의 한 켠에 마련된 방에서 남자의 욕망의 손길을 기다렸다면,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아예 계급에 맞게 1층엔 하녀가 2층엔 주인이 산다. 주인은 늘 하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하녀는 주인을 올려다본다.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그 상황은 잠시 역전되지만 그 역전은 오르지 못할 공간을 점유한 자의 파국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이제는 하나의 시스템이 된 계급이 절대로 바뀌어지지 않을 견고함으로 절망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한 가정을 파탄내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하녀만 희생된다. 견고한 자본주의의 시스템 속에서 하녀란 돈이 있으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소모품 같은 존재다. 주인집 사람들은 모든 일이 마치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무표정하게 살아간다.

임상수 감독의 지독히도 냉소적인 시선은 철저히 판타지를 거부하면서 아프지만 섬뜩한 작금의 자본주의 상황을 그려낸다. 원작에는 없는 유일한 인물로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가 돋보이는 건, 그녀의 투정과 화풀이가 이 꽉 막힌 시스템을 펼쳐놓은 숨 막히는 영화 속에 유일한 숨 쉴 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시스템 앞에서 어찌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위안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마도 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살아가는 주인집 가족들의 그 무표정일 것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고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 역시 돈의 하녀이긴 마찬가지니까. '하녀'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늘 밑에 있었다. 저 위에 자본이란 주인을 세워두고.

진심과 진심 사이의 거리, '신데렐라 언니'

진심과 진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신데렐라 언니'의 인물들은 대부분 가까운 가족관계지만, 그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혹독한 삶을 살아온 송강숙(이미숙)은 진심을 믿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람이란 '뜯어먹을 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녀는 피붙이를 위해서 진심 따위는 사치라 여기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오열한다.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남편 구대성(김갑수)의 진심을 드디어 보게 됐기 때문이다. 다이어리에 적혀진 "내 인생이 그 사람 없이 계속 되는 것, 나는 그게 가장 두렵다"는 글귀는 꼭꼭 닫아뒀던 송강숙의 마음을 열었다.

이 닫혀진 마음을 여는 진심의 힘은 '신데렐라 언니'가 그토록 호소력이 있는 이유다. 이 드라마는 진심을 믿지 않는 송강숙, 그리고 그런 엄마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 은조(문근영)가 대성도가에 들어오면서 차츰 진심을 받아들이는 그 과정에 주목한다. 은조는 처음 기훈(천정명)을 통해 마음이 설레었고, 그가 사라지자 그 흔들리는 마음을 새아버지 대성이 잡아주었다. '뜯어먹을 게 있어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사랑하면 됐다"고 말하는 대성은 진심을 믿지 않고 외면하던 두 모녀의 단단한 껍질을 깨버린다.

대성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무조건적인 사랑은 남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열어놓는다. 대성과 똑같은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온 효선(서우)은 자신을 미워하고 밀어내는 송강숙과 은조를 자꾸 등 뒤에서 껴안는다. 그러면서 그 밀어내는 '서운한 감정' 또한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성의 말에서 유전된 그녀의 "내가 사랑하면 그걸로 됐다"는 말, "아파도 괜찮다"는 진심의 말은 은조의 딱딱한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이 과정, 진심을 믿지 않고 외면하는 이들이 마음을 여는 과정은 각박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굳건히 마음의 빗장을 채워둔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울린다. 아내 송강숙(이미숙)이 다른 남자를 만나도, 또 "뜯어먹을 게 있어" 자신을 좋아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믿었던 기훈(천정명)이 자신의 술도가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다는 사실로 쓰러져 죽기 직전에도 그저 "괜찮다"고 말하는 대성. 그는 진심이 버려진 세상에서 가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무장해제 시킨다. 은조와 송강숙의 뒤늦은 참회와 눈물은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눈물과 그렇게 맞닿아 있다.

'신데렐라 언니'는 진심의 드라마다. 우리가 흔히 알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그 언니의 입장에서 다시 보게 만든 것은, 본래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던 그네들의 진심을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드라마는 사건 전개에 급급하기 보다는 사건 사이에서 겪게 되는 인물들의 진심에 천착한다. 대사 속에서 혹은 내레이션을 통해서 전해지는 진심의 강도는 의외로 세다. 그토록 독한 계집애 은조가 그토록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지게 된 것은 그 껍질 이면의 진심을 우리가 바라봤기 때문이다. "봐도 괴롭고 안봐도 괴롭지만 그래도 보면서 괴로운 것이 낫겠다"는 사랑을 하는 그녀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는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깝게 보여도 그 사람들 속의 진심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멀다. '신데렐라 언니'는 그 먼 거리에 놓여진 진심을 조우하게 되는 감동을 선사한다. 각박하게 살아가며 없는 것처럼 치부했던 그 진심을.

'동이'의 유머가 만드는 사극의 새로움

숙종(지진희)이 뒤늦게 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동이(한효주)는 과거를 회상한다. 어설프게 칼을 휘두르며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하고 소리치는 숙종. 동이와 주식(이희도), 영달(이광수)과 함께 돼지껍데기에 술을 마시며 "내 특별히 어주를 하사하지"하고 너스레를 떠는 숙종. "그런데 전하께서 그리 미남자십니까?"하는 동이의 질문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그 말을 내 입으로 어떻게 하겠느냐"고 웃는 숙종. 그가 왕이란 걸 미처 깨닫지 못한 동이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자책하지만, 그 장면은 보는 이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 유쾌함은 '자나깨나 동이 걱정'을 하는 두 캐릭터, 주식과 영달이 그가 숙종이란 걸 깨닫고 이제 죽게 생겼다며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상상 신으로 그들에게 사약을 내리며 "한 번에 주욱 들이키거라"하고 풍을 치듯 말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전통적인 사극이 가진 무거움은 쉬 해체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숙종은 동이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왕이 아니라 예전처럼 대해달라며 "이건 어명"이라고 말한다. 저마다 정치적 이득만을 노리는 중신들 앞에서는 엄하디 엄한 왕이지만, 선한 낮은 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그들의 허례 없는 삶을 오히려 부러워하기도 하는 왕. '동이'의 왕은 기존 사극의 왕과 이처럼 다르다.

사극의 힘은 물론 주인공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사극 전체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그 왕에서 비롯된다. 왕이 어떤 성정을 가지느냐에 따라 사극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대장금'에서 중종(임호)은 엄격하지만 자애로운 모습으로 음식을 즐겼고, '이산'에서 영조(이순재)는 사사로운 감정을 숨긴 권위의 왕을, 정조(이서진)는 한없이 정이 깊은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왕의 성정에 따라 사극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동이'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유머러스한 왕의 면모를 과시한다. 그러자 사극은 유쾌함을 입기 시작했다.

이 특유의 명랑함과 유쾌함은 '동이'가 초반의 소소함을 벗어내고 차츰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게 만든 저력의 원천이다. 초반의 무거움은 성인 동이 역할을 연기하는 한효주로 넘어오면서 발랄해졌다. 한없이 즐거워지고 웃게 만드는 그 밝음은 '동이'만의 매력을 만들었다. 바로 유머의 힘이다. '동이'의 초반부에 제기된 '대장금'의 아류, 혹은 뻔한 여성사극이라는 혹평이 사라지게 된 것은 이 유머가 깃든 사극이 '동이'만의 독특한 영역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장드라마를 입은 여성사극으로서의 '동이'는 그 위에 탐정극의 묘미를 덧붙였다. 궁궐에 들어온 동이는 끊임없이 조정의 사건에 연루되는데, 그 사건들을 저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풍산 동이'의 그 끈질김은 모두가 포기하는 시점에서도 포기할 줄을 모르고 사건으로 한 걸음 더 발을 딛는다. 탐정극 특유의 의문부호를 만드는 연출구성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시청자들의 눈을 붙잡는다. 무엇보다 보는 이를 유쾌하게 만드는 동이라는 아이가 곤경에 처하고 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그 지점은 시청자들을 더욱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극적인 순간에 사건을 해결하는 동이는 어찌 보면 '소년탐정 김전일'을 사극으로 보는 것만 같은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살인이 벌어지는 사건은 자칫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 수 있고, 이 미스테리들은 자칫 사극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여기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다시 유머의 힘이다. 긍정적인 캐릭터들의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던져지는 유쾌한 유머들은 극을 다시 발랄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게다가 주식과 영달 같은 순수한 아이 같은 눈높이의 캐릭터들은 복잡해질 수 있는 사건을 보다 쉽게 풀어 전해주는 역할도 해준다.

사건이 해결되고 나면 주인공에게 확실한 포상을 주는 것도 사극 전체를 명랑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첫 번째 문제를 해결했을 때 동이는 어식을 하사받고, 두 번째 문제를 해결했을 때 감찰궁녀가 된다. 세 번째 문제를 해결하자 동이는 이제 숙종의 마음을 조금씩 얻기 시작한다. 이 일련의 위기와 그 극복을 통한 충분한 포상의 과정은 주인공의 성장과정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된 시청자들을 흐뭇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초반의 부진을 쉬 깨버린 '동이'의 저력은 그 명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유머에 있다. 서민들을 다루는 사극 속에서 이 유머는 그네들의 해학적인 삶을 통해 익히 보여진 바 있으나, 아직껏 왕이 그 유머의 중심에 선 적은 없었다. 이것이 바로 '동이'이라는 사극이 보여주는 새로움이며, 그 새로움이 만들어내는 저력의 이유다.

MBC 파업과 ‘무한도전’ 결방, 왜 지지받을까

토요일 저녁, 우리는 ‘무한도전’이라는 세상에서 웃고 울었다. 그 세상에서는 어딘지 평균 이하인 인물들이,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낮은 위치를 확보하자, 그 눈높이는 서민들에 맞춰졌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모습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무해주기도 했고, 때론 공감의 눈물을 흘리게 했고, 때론 희망을 갖게도 만들었다. TV 속 오락 프로그램은 그렇게 현실 바깥으로까지 손을 뻗었다. 그들의 세상은 언제부턴가 리얼이 되었고, 따라서 그 ‘무한도전’에서 도전하는 그들의 모습은 세상을 바꾸어가는 작은 힘이 되었다.

그 도전들을, 그 작은 힘을, 희망의 작은 상징을, 벌써 6주째 못보고 있다. 파업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계속된 결방으로 시청자들이 주말의 즐거움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무한도전’ 결방에 대해 지지를 표하고 있다. ‘무한도전’의 결방이, 아니 MBC의 파업이 정당하며, 그 파업이야말로 시청자들의 진정한 볼 권리를 얻게 해줄 수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이미 타협을 통해 통제 속에서 만들어지는 ‘무한도전’은 더 이상 진정한 ‘무한도전’이 아니라는데 합의하고 있다. 그러니 ‘무한도전’의 결방은 진짜 ‘무한도전’을 위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약속을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 작은 권력을 이용해 약속을 깨버리는(게다가 거기엔 늘 외압의 흔적이 존재한다) 80년대식 이미 식상한 트렌디 드라마 같은 이야기. 왜 파업이 결정되었고, 왜 그다지도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가는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이야기일 것이고, 관심을 아직 갖지 못한 분들에게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 정도로 낯선 이야기일 것이다. 관심과 무관심 사이의 거리는 그만큼 멀다. 지금 MBC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제대로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공영방송사가 한 달 넘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 걸까.

처음에는 천안함 사태로 묻혀 졌고, 이대로 가다보면 곧 있을 지방선거와 월드컵으로 또 묻혀질 가능성도 높다. 그러니 MBC의 파업은 이슈화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정부가 바라는 바가 될 거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지방선거 같은 중요한 사안에 MBC의 공백은 실로 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일련의 상황들을 늘어놓고, MBC에서 벌어진 일들을 끼워 맞춰보면 마치 잘 짜여진 대본을 보는 것만 같다.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MBC 노조측이 파업의 잠정 중단을 고민하는 이유는 이처럼 잘 짜여진 대본의 흐름대로 흘러가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무한도전’이 작금의 MBC 파업에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철저히 입을 다물고 있는 언론들 속에서, 대중들이 MBC 파업을 실감할 수 있는 것으로 ‘무한도전’의 공백만큼 큰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한도전’이 지금껏 해왔던 정신들, 즉 불가능해보여도, 끝까지 도전하고, 최고가 아니어도 최선을 다하는 그 정신은, 현 MBC 파업 속에 깃든 정신과 맞닿아 있다. 누군가의 통제 속에서 과연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방영되고 또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파업의 와중에도 ‘검사와 스폰서’라는 민감한 사안을 방영한 ‘PD수첩’에서, ‘무한도전’의 그 도전정신을 보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잘 짜여진 대본, 낙관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상황.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 본래 ‘무한도전’은 그 짜여진 대본 바깥으로 나와 도전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만들었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최고가 아니어도 최선을 다했기에 지금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무한도전’의 정신은 지금껏 MBC를 버티게 해준 그 힘을 그대로 닮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파업으로 ‘무한도전’은 결방되고 있어도, MBC의 ‘무한도전’은 끝나지 않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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