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보다 말을 선택한 정치사극, ‘대왕 세종’

대중들에게 사극이란 어떤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정통사극은 그 중심이 대사에 있었다. 주로 편전에 모여 갑론을박을 하거나 누군가의 방에 모여 모의를 하고, 때로는 여인네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그 중심에는 늘 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하사극, 퓨전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말의 자리만큼 위상이 높아진 건 볼거리다. 이런 시점에 ‘대왕 세종’같은 칼보다는 말의 힘을 더 믿은 성군을 다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볼거리의 시대에 말의 사극이 갖는 한계
그렇지 않아도 현실에서의 정치는 마치 탁상공론처럼 허망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치인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정치사극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 오히려 정치사극을 표방하면서 정치에 대한 환타지를 심어주는 ‘이산’같은 선택이 성공 확률은 더 높을 것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현실에서 정치를 혐오하게 만드는 명명백백한 진실의 승리나 선한 선택의 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이 선택한 진짜 정치의 세계 속에서 이런 배려는 나약함과 동일시된다.

‘대왕 세종’에서 선악구도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취급된다. 세종(김상경)은 오히려 자신을 견제하라며 정적이었던 박은(박영지)을 집현전의 수장으로 세우고, 양녕대군(박상민)을 왕재로 세우려했던 황희(김갑수)를 최측근으로 끌어들인다. 때론 적으로 판단되었던 허조(김하균)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세종에게 유리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대왕 세종’이라는 드라마의 판은 칼 하나로 반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이 존재하면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갖는데 이 미묘한 입장 차가 정치사극의 묘미를 만들어낸다.

인물의 선악구도가 아닌 정치의 대결구도
이 사극의 진짜 재미는 그 독특한 구도에 있다. 주인공인 세종의 마음은 늘 민심을 향해 있으나 아군이든 적군이든 자신의 밑에서 실제적인 정치를 수행하는 신하들은 민심 자체보다는 정책의 명분에 더 휩싸인다. 조선만의 역법을 갖겠다는 세종의 마음은 그것이 민초들의 궁핍한 삶을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반면, 이를 반대하는 조말생(정동환)은 ‘조선의 하늘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그 발상이 중국의 반발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한다. 한편 세종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세종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현실적인 명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구도는 또한 르네상스맨으로서의 세종이 가진 과학에 근거한 민생정치와 신하들이 가진 비과학에 근거한 명분정치의 대결구도이기도 하다. ‘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천희)이 갖는 존재감은 바로 이 인물이 세종이 꿈꾸는 정치세계의 밑거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중세의 비이성의 어둠을 물리치는 이성의 빛이 되었던 것처럼, 세종은 물난리로 인한 자연재해를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보다는 과학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입장 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이 말을 ‘민심처럼 하늘마저 등을 돌렸다’고 결과론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세종은 바로 그 ‘민심을 잡기 위해 천심을 바꾸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내보인다.

‘대왕 세종’은 칼의 현란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말의 대결을 보여주는 정치사극이다. 이 사극이 그다지 시청률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대와 방송사를 옮겼다는 것에 이유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이 사극이 정치의 너무 적나라한 부분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현실 정치가 우리가 생각한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면 이 진창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치사극의 묘미는 더욱 깊었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현실 정치가 진창으로 비춰지고 있었기에 이 본격적인 정치사극은 그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든, 아니면 정치사극 속에서든 그 본질은 말(대사, 대화, 협상)이지 칼이 아니다.

‘1박2일’과 생방송과의 만남, 그 리얼의 힘

‘백두산 특집’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1박2일’의 선택은 ‘20만원으로 여름 휴가 보내기’ 컨셉트 같은 생활밀착형 소재다. 고유가와 불황의 여파로 알뜰한 휴가 시즌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저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농촌 살리기의 일환이 되기도 하는 ‘농촌체험여행’을 선택한 것. 이 선택은 ‘1박2일’이 지향하는 곳이 서민들의 일상이라는 걸 말해준다.

‘1박2일’ 출연진은 이 컨셉트에 맞게 4인 가족을 구성하고 나머지 두 명인 이승기와 이수근을 떼 놓고 출발한다. 이 과정에서 4인 가족은 자연스럽게 캐릭터별로 재구성된다. 아빠는 강호동이 되고 엄마는 김C가 되며 아들은 은지원, 딸은 MC몽이 되는 식이다. 음식점에서 MC몽이 음식을 더 시키려 하자 강호동이 “안 된다”고 아빠처럼 말하는 반면, 김C는 “먹고 싶어? 그럼 더 먹어!”하고 말하는 장면은 가족의 일상을 그대로 재연한다.

재미있는 것은 나머지 두 명이 자체적으로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자청하는 곳이 방송국이라는 점이다. ‘홍진경의 가요광장’이 이 불청객들에 의해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나는 ‘1박2일’팀과의 이원 생방송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라디오 생방송이라는 구체적인 라이브의 흔적이 ‘1박2일’과 만나서 만들어내는 것은 ‘리얼의 힘’이다.

‘1박2일’이 타 방송과 만나는 지점은 늘 화제를 불러 일으켜왔다. 그 첫 번째가 ‘전국노래자랑’이었다면 두 번째는 ‘충주대 게릴라 콘서트’에 이은 ‘생방송 뮤직뱅크’와의 만남이이었고 이제 ‘1박2일’이 만난 것은 ‘홍진경의 가요광장’이다. ‘홍진경의 가요광장’에서 방송을 하는 장면 바로 앞에 짧게 나마 ‘전국노래자랑’과 ‘충주대 게릴라 콘서트’의 장면이 깔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1박2일’의 특징인 일상성을 극대화하려는 편집이다.

라디오는 좀더 우리 일상과 가까운 매체다. TV가 일반인 출연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이 라디오를 따라오지는 못한다. 라디오라는 청각 중심의 매체는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전화기와 만나 언제 어디서건 즉각적으로 출연이 가능해지는 매체다. 또 사연 신청이라는 창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라디오를 일반인들의 일상 가까이 배치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수근과 이승기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할 때, 그 방송을 자동차 안에서 듣게되는 ‘1박2일’의 다른 출연진들과, 거기서 즉석으로 강호동과 전화로 다시 연결되는 가요광장 프로그램은 바로 이런 라디오의 일상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박2일’은 바로 이 라디오의 일상성을 끌어와 좀더 현실에 밀착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환타지를 갖게 만드는(방송출연은 어쨌든 일반인들에게는 환타지다)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전국노래자랑’이나 ‘게릴라콘서트’편에서 이미 그 효과를 확인한 바 있다. 그 형식은 방송이지만 일반인에게 방송출연의 기회가 열려져 있는 ‘전국노래자랑’이 그렇고, 어느 날 갑자기 일상 속으로 스타들이 뛰어드는 형식의 ‘게릴라콘서트’가 그렇다.

이렇듯 ‘1박2일’과 방송이 만나는 지점은 늘 서민적인 일상과 닿아있으면서도 그 서민들의 환타지가 개입하는 공간이다. “나도 방송출연하고 싶다”는 환타지와 함께 ‘방송 출연할 가능성이 높은’ 현실성을 갖춘 프로그램에 ‘1박2일’의 출연진들이 틈입함으로써 얻어지는 건 그 스타로서의 화려함과 배치되지 않는 서민적인 친근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으로 들어오고 점점 생활 밀착형이 되어가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전략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제 카메라가 어떻게 대중들의 생활 속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들어가는가 하는 점은 리얼리티가 생명인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가장 큰 숙제가 되고 있다.


현대여성의 두 로망, 연애냐 결혼이냐

이제 두 명의 여성 사이에서 남성이 한 명을 선택하던 시대는 갔다. 대중문화의 키워드로 ‘칙릿(Chick 젊은 여성+ Literature 문학)’이 떠오르는 것처럼 이제는 여성이 여러 남성들 중 하나를 선택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두 남자, 태오(지현우)와 영수(이선균)는 바로 그 여성들의 로망이 투영된 그 남성들로, 은수(최강희)는 그 사이에서 갈등한다.

연하지만 어른스러운 태오, 지현우
“예쁨 받는 거 말고 사랑 받고 싶어요. 귀여운 어린애가 아니라 남자로써.” 태오의 이 말에 은수는 마음이 저리다. 우연히 만난 첫날, 원나잇 스탠드를 하게 되면서 활활 타오르게 된 연하남 태오와의 사랑에 있어서 은수는 스스로의 벽을 세워둔다. 현실과 유리된 듯한 알콩달콩한 태오에게서 달콤함을 느끼지만 그 현실과의 거리감에서 늘 태오는 아이취급을 받는다. 태오는 31살 현실에 치일대로 치인 은수에게 여전히 달콤한 사랑을 꿈꾸게 만들지만 친구들에게 보이기에는 쑥스러운 존재다.

하지만 태오는 그렇게 철모르는 아이가 아니다. 늘 생활의 중심에 은수를 세우고 열정적으로 사랑하기에 그 순수함이 아이처럼 보일 뿐이다. 오히려 그를 아이로 만드는 건 이제 그런 열정을 보이기엔 스스로 나이 들었다 생각하는 은수다. 과음으로 늦잠 자는 은수를 위해 후배 여자에게 부탁해 대신 회사에 전화를 하게 할 정도로 태오의 배려는 깊다.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없어요’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태오는, 이제 직장생활을 통해 지극히 현실적이 되어버린, 그래서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기엔 너무 나이 들어버린 현대여성들의 로망을 보여준다.

연상이지만 소년 같은 영수, 이선균
“미안하지 않아도 돼요. 고맙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미안하다면 고마운 마음도 잊을께요. 미안한 마음 잊어요.” 그만 만나자는 은수의 말에 특유의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영수가 하는 이 말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세월처럼 묻어난다. 친환경 유기농 먹거리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영수는 서른 여섯의 훈남. 이 나이 많음이 오히려 편안함과 여유, 따뜻함으로 전화되어 여성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것은 그가 여전히 소년 같은 순수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난 첫날 관계를 가져버린 태오와는 상반되게, 영수는 은수의 손 한 번 잡지 못하는 존재다.

무언가 아픔이 많았던 인물이지만, 그래서일까 상대방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영수를 편안하게 만드는 현실적인 이유가 된다. “가끔씩 낮은 목소리로 얘기할 때 이 사람이 깊은 바닥의 이야기를 내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진지함과 순수함, 그리고 능력과 연륜, 게다가 꿈을 잃지 않은 영수는 이제 나이 들어가는 현대여성들에게 여전히 현실적으로 꿈꿀 수 있는 로망이 되어준다.

연애하고 싶은 남자, 결혼하고 싶은 남자
태오와 영수, 이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지현우와 이선균은 그 본래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라마에 투영한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를 통해 연하남으로서 여성들의 로망이 된 지현우는 특유의 순수하고 선한 웃음으로 오히려 연상인 여성을 배려해주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반면 이선균은 ‘커피 프린스 1호점’을 통해 그 훈남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그는 원숙하지만 소년 같은 순수함으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달콤시’가 보여주는 태오와 영수, 혹은 완소남 지현우와 훈남 이선균은 현대여성들의 로망으로서 이율배반적이지만 여전히 꿈꾸고 싶은 두 요소를 지닌 존재들이다. 연하에 순수하고 열정적이지만 어른스러운 태오가 연애하고 싶은 남자라면, 연상에 능력 있고 진중하지만 때론 소년 같은 영수는 결혼하고 싶은 남자다. ‘달콤시’가 전해주는 달콤함은 이들이 어느 쪽이든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환타지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랴. 힘겨운 현실 속에서 환타지라도 잠시 동안의 그 달콤함에 젖어보는 것이. 은수의 말처럼 늘 자신을 먹여 살려온 자신에게 “때론 칭찬해줘도 좋은 날”은 늘 있는 법이다.

스파게티 웨스턴, 만주 웨스턴, 김치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시공간적 배경은 일제시대 만주다. 일제시대에 만주라는 공간이 함유하는 의미는 말 그대로 의미심장하다. 당대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만주는 대륙으로의 진입로이자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일제시대라는 독특한 시간적 배경은 그 가능성의 공간 위에 이질적인 문화들을 공존시킨다.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는 물론, 호전적인 북방민족들과 러시아 그리고 각종 신기한 문물들을 들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인들까지 공존하는 일제시대의 만주는 요즘으로 치면 퓨전문화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법이나 규범보다는 총이 앞서는 무법천지로서의 만주는 오히려 국가 간의 분쟁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는 자유에 가까운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나라와 나라,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같은 경계지움의 시대에 만주는 그 경계를 탈주하는 공간으로서 민족주의를 넘어 개인적 자유를 희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스파게티 웨스턴, 미국 중심적 사고방식을 비웃다
경계를 탈주하는 공간으로서의 만주는 정통 웨스턴 무비를 비웃으며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스파게티 웨스턴의 멕시코라는 공간과 유사하다. 존 포드 감독과 존 웨인으로 상징되는 초창기 미국 정통 웨스턴들은 분명한 선악구도를 내세우면서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표제 아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거기에는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고, ‘좋은 놈’은 늘 멋지게 ‘나쁜 놈’을 해치웠다. 관객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물론 ‘나쁜 놈’을 선택하는 자는 없겠지만), 그 선택을 하는 순간 선택받지 못한 자는 철저히 응징되어야 하는 존재로 부지불식간에 구획되어진다.

정통 웨스턴이 가진 이러한 미국 중심적 사고방식과 흑백논리는 변방의 입장에서 보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 이태리에서 들고 나온 스파게티 웨스턴의 대표주자로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의 원제가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인 것은 이 이분법의 구도를 깨버리면서 정통 웨스턴 무비가 가진 이데올로기를 비웃는다.

‘쇠사슬을 끊어라’, 만주 웨스턴의 민족주의를 끊다
1960년대 이른바 ‘만주웨스턴’이 우리네 영화사 속에 자리매김했던 것은 물론 당대의 웨스턴 무비의 영향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내의 정치적 사정과 그 반작용이 맞물린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정통 웨스턴 무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만주웨스턴’은 대부분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영화들로 당대 친정치적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그 주제의식을 빼놓고 나면 만주라는 공간에서의 탈법적인 행위들을 통한 당대 답답한 현실의 대리충족 기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971년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는 정통 웨스턴의 국가주의적 색채를 저 스파게티 웨스턴이 잔뜩 비꼬았던 것처럼, 만주웨스턴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끊어놓는다. 즉 주인공들은 애국자인양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로 분하는 것이다.

김지운 감독 스스로 밝힌 것처럼 ‘놈놈놈’이 만주라는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도 바로 이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쇠사슬을 끊어라’의 연장선상에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입장이 다른 세 인물들이 서로 보물을 차지하려 싸울 뿐, 민족주의도 대의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쇠사슬을 끊어라’가 그랬던 것처럼 ‘놈놈놈’은 과연 어떤 경계로부터 탈주하려는 것일까.

우리 영화의 ‘이상한 놈’, 잘 만든 오락영화를 꿈꾸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에서 주인공은 분명 좋은 놈(클린트 이스트우드)이었지만 정통 웨스턴과 비교했을 때 주목해야할 캐릭터는 못생긴 놈이다. 이것은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이분되는 선악구도를 이도 저도 아닌 상황으로 만들어버리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에서 주목해야할 캐릭터도 이상한 놈(송강호)이다. 그리고 ‘놈놈놈’은 실제로 이 이상한 놈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장르영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 정형화되어 있다면 이와는 상반되게 이상한 놈은 독특한 캐릭터를 갖추고 있다. 이상한 놈이란 캐릭터 속에는 만주라는 공간과 일제시대 조선이라는 상황이 혼재되어 있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벗어나 지극히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미를 버리지 않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다. 액션이라고 하기보다는 몸 개그에 가까운 해학이 있으며, 그 웃음 이면에는 섬뜩한 부분도 숨겨져 있다.

이 도드라진 부분이 김지운 감독이 탈주하고픈 경계가 아닐까. ‘놈놈놈’이라는 김치 웨스턴이라는 이상한 장르영화는 바로 이 이상한 놈의 캐릭터처럼 도드라지고 기이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한국영화라는 지형에서 보면 ‘놈놈놈’은 이상한 놈이다. 흔히 “한국영화가 망하게 생겼다”는 상업적 가치를 가장 큰 위기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락영화를 백안시하는 우리 영화의 지형 속에서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말마따나 그 ‘오락영화에 혼신의 힘을 담은’ 이상한 영화다.

한국영화를 말할 때, 늘 발목에 꼬리표처럼 달리는 작품성이나 예술성 같은 것들은 오히려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 대중영화의 토대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영화라는 사실상의 무한 자유의 공간에 그어놓은 경계가 아닐 수 없다. 드러내놓고 “열심히 재미있게 만들었다”는 그 말에 박수가 쳐지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 오락영화에 대한 편견의 경계를 넘게 해주기 때문이다. ‘놈놈놈’이 만주까지 가게된 것은 그 정도까지 달려가서야 비로소 한국영화라는 족쇄를 풀어내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보기 드문 수작의 ‘오락영화’는 한국영화의 경계를 벗어나 스스로를 ‘이상한 놈’으로 자리매김하는 그 지점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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