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에 의한, 태왕을 위한, 태왕의 드라마, ‘태왕사신기’

‘태왕사신기’에서 고우충(박정학)은 태왕 담덕(배용준)에게 전황을 브리핑한다. “나머지 3만은 두 개의 길로 남하하여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퇴치하는 중입니다.” 담덕이 “미적미적 싸우고 있으면 곤란해요. 빗자루로 쓸어내듯이 그렇게 내려가야 한다구.” 이렇게 말하자 고우충은 웃으며 이렇게 답변한다. “염려 마십시오. 흑개장군입니다.” 이 짤막한 대화를 통해 ‘태왕사신기’의 전쟁 신은 굳이 보여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고우충이 전황을 묘사하면서 ‘흑개장군(장항선)’이라는 인물을 거론한 점이다. 시청자는 흑개장군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용맹성과 앞뒤보지 않고 뛰어드는 과감성 같은 것을 통해 전쟁의 그림을 유추하게 된다. 구구절절이 전쟁상황을 보여주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캐릭터 하나를 통해서 그것이 설명되는 것. 이것이 ‘태왕사신기’가 가진 독특한 드라마의 색깔이자 힘이다.

수 없는 전쟁과 전투를 통해 영토 확장을 한 광개토대왕의 면면을 스펙터클로 보여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또한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영웅을 다루면서 그 핵심이 되는 전장의 사건들을 빼놓는다는 것 역시 납득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딜레마를 넘어서기 위해 ‘태왕사신기’가 선택한 것은 캐릭터다. 잘 구축한 캐릭터 한 명은 몇 백 명의 군사들보다 유용하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수만 명의 백제군이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처로(이필립)라는 일당백의 카리스마를 지닌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맞붙는 이 전쟁은 고구려를 대변하는 담덕과 백제를 대변하는 처로가 맞붙는 장면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담덕이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연호개(윤태영)의 군대와 맞서는데 있어서 전면전을 피하고 몇몇 별동대와 인물들만으로 충분한 것도 같은 이유다. 스스로도 일당백이라 자처하는 주무치(박성웅)는 실로 수백 명의 엑스트라를 대체하는 효과를 주는 캐릭터다.

즉 ‘태왕사신기’의 개개 인물들은 여러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광개토대왕의 영토 장악을 태왕이 사신을 얻는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태왕은 쥬신의 왕이란 상징을 갖고, 사신은 네 부족을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니 태왕이 사신을 얻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영토를 장악한다는 의미로서 전달된다. 여기에 사신이 가진 신물이라는 환타지적인 요소를 덧붙이면서 이 상징은 더 공고하게 구축된다. 네 부족은 각각의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 물(현고-현무), 쇠(주무치-백호), 나무(처로-청룡), 불(수지니, 기하-주작)로 설명된다. 즉 네 부족-사신-신물-네 상징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절대적인 악을 상징하는 화천회 대장로(최민수)는 화천회라는 조직을 실제 목도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해주는 캐릭터다. 담덕이 전쟁터에 나가는 동안 고구려의 모든 행정이 잘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연가려(박상원)라는 한 명의 캐릭터 덕분이다. 이처럼 ‘태왕사신기’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캐릭터들을 세움으로써 최소의 장면만으로도 최대의 효과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담덕, 배용준의 힘이다.

사실 이 믿기 어려울 수 있는 상징적 진술은 배용준이라는 아시아적 스타배우와 담덕이라는 역사적 영웅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능해진다. 따라서 담덕이란 캐릭터가 세워지는 그 힘을 통해서 주변의 캐릭터들도 구축된다. 담덕을 보위하는 사신들이 납득되는 것은 담덕이 쥬신의 왕이라는 설정 때문이며, 그 설정은 드라마 밖에서의 배용준이라는 배우의 힘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된다. 이 사극은 따라서 담덕이 사신을, 아시아적인 영토를 얻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배용준이 아시아권을 장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담덕의 적수로 세워졌던 연호개나 사신이 아닌 인간들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사극 자체가 담덕과 배용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극은 태왕에 의한, 태왕을 위한, 태왕의 드라마이며 그 태왕이라는 단어에 배용준으로 대치해도 무방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태왕사신기’가 우리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작품이 된 것은 첫 회부터 마지막까지를 관통하는 짜임새 있는 송지나 작가의 대본과, 그 대본을 시각화하는 김종학 PD의 잘 짜진 연출 위에 그 모든 것을 한 몸으로 지탱해나가는 배용준이라는 아시아적 스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담덕과 사신의 캐릭터만으로 아시아를 정복해가는 이야기가 구축될 수 있었던 것처럼 배용준이라는 배우 한 명의 힘은 그 어느 것 하나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우리 드라마의 현실을 보기 좋게 뛰어넘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 속에서 아시아를 아우르는 쥬신의 아들들이 그토록 희구하던 쥬신의 왕을 만나는 경험에 비견되는 것이 아닐까. 캐릭터의 힘은 위대하다.

영화, 음악... 진심이 닿지 않을 곳은 없다

제작비 1억4천만 원에 촬영기간은 고작 2주, 게다가 남녀 주연배우는 연기경험 전무의 뮤지션들로 만들어진 독립영화 ‘원스’. 작은 몸집(?) 때문에 미국에서도 2개관에서만 개봉됐던 이 영화는 80일 만에 140여 개 관에서 볼 수 있는 초대박 영화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 10개관에서 개봉했던 영화는 현재 16개관으로 늘어났고 지금까지 독립영화로서는 좀체 거두기 힘든 16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도대체 그 흥행의 이유는 무엇일까. 스토리? 캐릭터? 아니면 연출?

가난한 영화 ‘원스’가 성공한 이유
‘원스’는 거의 스토리가 없는 영화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남자와 그의 음악을 알아차린 여자가 만나고 서로 음악을 나누면서 사랑을 키우다가 이별한다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드라마틱한 인물들의 만남이나 구성도 없고 캐릭터를 살리기 위한 시퀀스나 극적 상황도 없다. 게다가 카메라는 어떠한 연출의 묘도 살리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이 두 남녀를 따라다니기만 한다. 이것을 극영화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영화의 진짜 흥행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깔린 음악을 지목한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듣다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란다. 영화를 봤던 이들이 서둘러 음반가게로 달려가 OST를 사는 바람에 이 영화의 음반은 지금까지 2만5천여 장에 달하는 유례 없는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영화의 주연남녀가 유명한 인디밴드 ‘더 프레임즈’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글렌 한사드와, 작사가이자 작곡가인 마르게타 이글로바라는 점은 분명 이 영화의 성공에 훌륭한 영화음악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영화를 보러간 관객들의 마음을 단지 음악 하나로 사로잡았다는 것은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원스’, 영화와 음악의 진심이 보이는 영화
‘원스’는 진심 하나로 승부한 영화다. 그 진심은 음악에 대한 진심이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진심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마음을 담아 노래하고 생활한다. 카메라는 연출이란 화장을 덕지덕지 하기보다는 그저 진정성 하나로 이들을 담아낸다. ‘원스’는 진정한 음악을 하는 가난한 예술가의 진심을 담는다.

상심으로 절망적인 남자는 거리에서 자신의 마음을 담아 노래하고, 여자는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 가난한 삶 속에서 음악은 그들에게 구원이자 유일한 행복이자 소통의 창이 된다. 가난한 여자가 가끔 들러 피아노를 치곤 하던 악기가게에서 남자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남자가 만든 곡에 가사를 붙이는 담담한 장면이 감동적인 것은 그네들의 진심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영화의 진심이기도 하다. 몇 백 억의 돈을 들여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가 수백 개의 극장을 잡고 상영되는 현실 속에서 가난한 영화의 선택은 화려한 연출이나 멋진 배우, 기상천외한 스토리가 아닌 영화에 대한 진심 하나였다. 따라서 가난하지만 영화에 대한 진지한 눈 하나로 통할 것이라는 믿음은 영화에 다큐멘터리 같은 성격을 갖게 만들었다.

‘원스’가 우리 가요계, 영화계에 시사하는 점
진심을 담아 성공을 거둔 ‘원스’는 불황의 늪에 빠진 작금의 우리 가요계와 영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요계는 불황의 원인으로 수많은 마케팅 분석 자료들을 쏟아내고 있다. 불법 다운로드되는 시장상황과, 디지털 음원을 갖고 있는 이동통신사, 유통사의 문제, 상업적으로만 무장한 기획사 등등 이 자료들의 분석은 틀린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케팅적인 분석들은 또한 ‘누구 탓’을 지목하기 위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정작 자신들은 음악에 대한 애정을 저 ‘원스’만큼 가지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작금의 가요계는 음악에 대한 애정과 절실함보다, 마케팅 분석에 따르면 기본을 할 수 있다는 상업적 성공에 더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대자본이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상황 속에서 정해진 안무에 맞춰 인형처럼 춤을 춰대는 상품화된 가수들만 양산되고, 설 무대가 없어진 노래하는 가수들은 급기야 개그를 해야하는 현실이 그걸 말해준다.

이것은 비단 가요계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영화계가 쏟아내는 엄청난 기획작품들이 감독의 진심을 전하기보다는 몇 백 개의 개봉관을 잡았는지, 또 몇 백만 명의 관객이 들었는지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가요계의 현실과 마찬가지다. 감독을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관객들과 나누는 작가로 보지 않고, 기획된 작품의 공장장으로 만들어버린 대자본이 오히려 영화계의 불황을 낳은 것은 아닐까.

음악이든 영화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 때, 그걸 향유하던 문화인들은 구매자로 전락한다. 문화를 향유하려는 대중을 구매자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속에서 대중들은 짜 맞춘 성공방정식 속의 기획상품들에 질려있다. 가요계와 영화계는 왜 저 ‘원스’의 성공이 보여주는 음악과 영화 자체가 가진 진심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든 음악이든 진심의 힘이 닿지 않을 곳은 없다는 것을.

카멜레온 같은 그들, 연기변신의 끝은 어디?

연기자의 연기변신은 놀라울 것 없는 의무사항이다. 한 가지 작품만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거나 배우가 아닌 스타만을 꿈꾸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자라는 말에 제대로 걸맞는 배우들이 있다. ‘포도밭 그 사나이’의 순박한 시골청년에서, ‘왕과 나’의 내시,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끔찍한 살인자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오만석, 늘 바른 이미지로만 보였지만 곽경택 감독의 ‘사랑’에서 소름끼치는 건달역으로 그리고 다시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번듯한 기자로 변신한 김민준, 그리고 ‘얼렁뚱땅 흥신소’의 마음 따뜻한 건달역에서 ‘세븐데이즈’의 껄렁한 비리형사로 변신한 박희순이 그들이다.

광기 어린 눈빛과 순박함 사이, 오만석
오만석이 ‘포도밭 그 사나이’의 그 사나이 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 이미 그는 연기 변신의 또 한 발을 내딛는 셈이었다. 그는 일찍이 ‘왕의 남자’의 원작이었던 연극 ‘이’에서 왕의 남자인 공길 역으로 알려져 있었고, 가끔은 연산 역할을 할 정도로 변신의 귀재였다. 조승우의 광기 어린 연기로 소문났던 뮤지컬 ‘헤드윅’에서 조승우 대신 헤드윅 역할을 맡아서 그만의 색깔을 덧입혀 ‘조드윅’에 이어 ‘오드윅’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의 시골청년 장택기는 그에게는 좀 심심한 역할이었다.

오만석의 연기 스펙트럼은 광기와 순박함을 오가는 그의 이미지에서 나온다. 그의 눈빛은 순박한 시골청년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강렬한 광기를 뿜어낸다. 그러니 순박한 청년과 내시로서의 광기를 보여줘야 하는 ‘왕과 나’의 김처선 역할은 정확히 그의 연기 스펙트럼과 맞아떨어진다. 이것은 최근 개봉한 영화 ‘우리동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가 맡은 경주는 살인자이면서도 어릴 적부터의 친구인 형사 재신(이선균)과 우정을 나누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이 극과 극을 오가는 눈빛은 그의 앞으로의 연기변신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반듯함 속에 숨겨진 막가는 열정, 김민준
곽경택 감독의 ‘사랑’을 다 보고서 엔딩 크레딧에 오르는 김민준이라는 이름을 본 많은 관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김민준이 어디에 나왔다는 거야 하고 생각할 즈음, 영화 속 소름끼치도록 악독했던 치권이란 건달이 그였다는 걸 알고 진짜 소름이 돋던 기억이 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이건욱이나, ‘썸데이’의 진표, ‘프라하의 연인’의 지영우 같은 댄디한 이미지를 가진 반듯함 속에 어디 그런 갈 데까지 가보는 막가는 열정이 숨겨져 있었는지 모두들 의아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찬히 떠올려보면 김민준은 늘 그렇게 반듯한 인물로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다모’에서 그가 맡았던 장성백이란 캐릭터는 그 밑바닥에 잡초 같은 질깃질깃한 근성을 숨겨둔 인물이었고 ‘강력3반’의 김홍주는 기막히게 범죄의 냄새를 맡는 초보형사로 반듯함과는 역시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반듯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이었지 그 자신은 아니었다. 현실은 그를 다시 ‘인순이는 예쁘다’의 유상우로 앉혔지만 ‘사랑’에서 보여준 풀어진 눈빛의 김민준은 반듯함 하나만으로는 아까운 배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타고난 복합 캐릭터의 연기자, 박희순
이윤기 감독의 ‘러브 토크’에서 박희순은 상처 입은 영혼의 소유자, 지석 역을 맡아 감정이 절제된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우수에 찬 듯한 타고난 눈빛은 그다지 연기를 하지 않아도 지석 그 자체가 될만했다. 하지만 그 뿐, 그것은 진짜 박희순의 진가가 아니었다. 그는 사실 초창기부터 조폭 같은 악역으로 주로 등장했다. 특히 영화 ‘가족’에서 보여준 연기는 건달의 이미지를 그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그의 진가는 이 두 이질적인 요소, 즉 악역과 우수의 눈빛이 만났던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났다. 흥신소 사람들과 대적관계에 서 있는 건달이지만 희경(예지원)을 사랑하고 치매를 앓는 노모를 가진 아픔을 동시에 보여주는 백민철이란 캐릭터는 그에게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100% 드러내게 해주었다.

그가 가끔씩 보여주는 우수에 찬 눈빛은 건달 특유의 건들거림과 부조화를 이뤄야 하지만 박희순은 이것을 하나로 잘 버무려 미워할 수 없는 건달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이 따뜻한 건달이라면, ‘세븐데이즈’의 김성열은 따뜻한 비리경찰인 식이다. 그 복합적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그 능력은 다름 아닌 오랜 연극과 뮤지컬 공연의 공력이다. 그는 극단 목화 출신으로 연출자 오태석 밑에서 바닥부터 기며 연극과 뮤지컬에서 잔뼈가 굵어온 연기자다. 뮤지컬 ‘그리스’나 ‘록키 호러 픽쳐쇼’는 그의 가능성을 입증시킨 작품들이다.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때론 소년 같은 느낌을 주는 이미지는 앞으로 더 복잡한 성격의 연기가 가능하리란 것을 예측하게 한다.

오만석, 김민준, 박희순의 연기변신에 대한 찬사는 이 시대 대중들이 연기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명확히 말해준다. 대중들은 카멜레온처럼 끝없는 연기변신을 시도하는 진정한 연기자를 원하지, 한 가지 굳어진 이미지로 스타가 되려는 연예인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인들의 복잡한 삶 속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들은, 이들의 다중적인 캐릭터에 공감하게 만든다. 어느 모로 보나 연기자들의 연기변신은 시대적인 요청이 되고 있는 셈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혹은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다양한 연기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그들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본 ‘불한당들’과 독립영화의 가능성

다음은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울독립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출품된 장훈 감독의 ‘불한당들’이란 영화의 장면들. 윤성호 감독(‘은하해방전선’의 그 윤성호 감독이다)은 안산공단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인터뷰한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카메라가 갑자기 이들을 도시의 한 주점으로 불러들이면서 이 페이크 다큐 형식의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월드컵의 열기로 가득한 그 곳에는 왠지 인종적인 편견이 담배연기처럼 자욱하고, 급기야 화장실에 간 한 베트남 노동자와 시비가 붙은 사내는 그걸 말리려는 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팔뚝을 물어뜯는다. 황당한 것은 사내를 비롯해 주점 안의 한국인들이 모두 좀비로 돌변하는 것.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 광기의 한국인 좀비들을 BB탄이 아닌 은단을 넣은 장난감 총을 쏘면서 탈출한다.

우리나라에 팽배한 집단적 광기를 월드컵의 이상 열기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서 포착하면서 좀비영화라는 참신한 틀로 가져온 이 영화는 재치 있는 위트와 유머가 잘 버무러진 수작. ‘서울독립영화제2007’의 ‘다른 영화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과 잘 어울리는 독립영화다.

모든 영화들이 저 월드컵 열기의 광기처럼 똑같은 영화의 틀 속에서 극장에 걸려질 때, 독립영화들은 안산공단 같은 좁은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꿈꾸며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처럼 가난을 자양분 삼아 반짝거려왔다. 가끔씩 “여기엔 왜 왔냐”는 틀에 박힌 질문들을 갖고 오는 다큐PD들처럼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느냐”는 생뚱맞은 질문을 받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기존 장르와 문법에 익숙해 좀체 ‘다른 피부색의 영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이 사실은 불한당인 셈이다. 몇 백 만이 들었다는 수치에 떼를 지어 다니며 그 숫자를 더해주고 있을 때, 저 한 구석에서는 이 좀비들을 피해 숨어 있던 ‘다른 영화’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피해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좀비들과 맞서는 존재다. 좀비들에게는 반대로 불한당 같은 존재다. 독립영화란 실로 ‘다른 영화’라는 BB탄으로 기존 영화문법에 익숙해져버린 두개골을 기분 좋게 날려버리는 영화가 아닐까.

월드컵 광기의 밤이 끝난 새벽. 겨우 살아남은 이 노동자들이 텅 빈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생계라는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독립영화라는 한 가지로 버텨온 감독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관객을 찾는 것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틀에 박혀 무언가 신선한 충격을 원한다면 기꺼이 저들이 쏘는 유쾌한 BB탄에 머리를 내줄 일이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이 달 30일까지 중앙시네마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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