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버라이어티 쇼가 보여주는 가수들의 현실

음정 박자 틀려도 막춤에 열창을 해대는 사람, 그리고 그 맥을 끊는 땡!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웃음. 28년 장수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의 트레이드마크다. 암기한 가사를 조심조심 부르는 출연자들, 토씨 하나가 틀리자 갑자기 머리로 떨어지는 쟁반과 함께 터져 나오는 웃음. 바로 ‘쟁반노래방’만의 진풍경이다. 유난히 노래와 춤을 즐기는 국민성 때문일까. TV는 오래 전부터 춤과 노래를 웃음으로 전달해왔다. 그것은 시대가 지나도 마찬가지. 버라이어티쇼라 해서 연예인들이 모일라 치면, 어김없이 노래와 춤이 등장한다. 거기에는 멋진 춤과 노래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프로그램이 주목하는 것은 노래와 부조화되어 무너지는 몸과 음이 유발하는 웃음이다. 그래서일까. 이들 프로그램들을 보다보면 정작 노래를 해야할 가수들이 몸 개그를 하고 있는 상황을 엿보게 된다.

‘불후의 명곡’, 웃기는 가수들의 이상한 세계
과연 여기 올려진 음악들이 ‘불후의 명곡’이냐고 질문해보면 그 답변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10만장 음반 팔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요즘의 상황을 비추어 다시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다. 우리 가요사의 중흥기라 할만한 8,90년대에는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불후의 명곡’이란 제목에는 이 시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어려있다.

명곡의 주인공인 가수와 신정환, 탁재훈이 주축이 되고 김성은이 감초가 되는 이 프로그램은 명곡의 ‘노래와 춤 배우기’가 형식이지만 실제는 음치, 몸치, 박치들의 웃음주기가 주요 컨셉트다. 따라서 안 되는 몸으로 당대의 유행했던 춤을 막춤으로 만들어버리거나(탁재훈), 태생부터 음치에 박치인 김성은이 전혀 다른 노래를 편곡(?) 해버리거나, 과장된 목소리와 몸 동작으로 음악을 패로디하는(신정환) 것이 이 코너의 진면목이다.

재미있는 것은 개그맨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재담꾼들인 신정환, 탁재훈이 가수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컨셉트라 해도 가수인 그들이 스스로를 음치, 몸치, 박치로 내세우며 노래를 배우는 상황은 이색적이라 할만하다. 이 상황을 희석시키는 것은 김성은이라는 원초 음치 학생이 있기 때문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불후의 명곡의 주인공인 가수조차 자신의 노래를 웃음의 대가로 쉬 내놓는다. 그러니 ‘불후의 명곡’이 보여주는 상황은 과거의 전설을 그리워하며, 현재는 명곡조차 웃음으로 팔아야 하는 가수들의 현실이다. 생존을 위해 노래보다는 웃음을 주는 웃기는 가수들의 이상한 세계, 그것이 ‘불후의 명곡’이다.

‘도전 암기송’, 노래와 몸 개그의 만남
‘불후의 명곡’이 무너지는 가수들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도전 암기송’은 그 확장판이다. 개그맨들이야 그것이 직업이라 할 것이지만, 여기에는 가수는 물론이고 아나운서, 배우들까지 등장해 열심히 무너진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듯, 프로그램은 이들은 뜨거운 사우나 속에 몰아넣고 노래를 시킨다. 배경이 목욕탕인 것은 적나라하게 이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방향이 몸 개그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안 외워지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이들은 성대모사나 춤동작을 따라하는 여유까지 보인다. SES 출신 가수 유진과 슈가 나온 코너에서 유진이 마빡이로 변신해서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정종철이 성대모사를 하고, 이정민 아나운서가 노래를 부르는 풍경은 뜨거운 사우나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조금은 가학적이란 생각마저 들지만 어쨌든 큰 웃음을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본래 개그맨들의 일상이었지만 이제는 그 영역이 가수와 아나운서, 배우들까지 넓어진 것뿐이다. 분명 과거보다 이들의 삶은 더 절실해졌다. 가수들은 자신들이 정작 서야할 무대가 사라진 현실 앞에서 웃음을 주는 개그맨으로의 전향을 꿈꾸기도 하며, 아나운서들은 보도의 기능보다 오락의 기능에 더 충실해진 TV환경 속에서 몸 개그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고, 배우들은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한없이 무너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입장이어서 자신의 본래 직업에 플러스 알파로서 부가수익을 내고 있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연예인들이 이들처럼 달라진 환경에 적응한 것은 아니며 분명 한 가지만 해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었던 시대보다는 더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버라이어티 쇼를 구성하는 멤버들이 점점 가수들로 채워지는 현상은 이런 상황을 잘 말해준다(대표적으로 ‘1박2일’은 이수근과 강호동을 빼고는 전부 가수이다). 음악은 늘 우리에게 큰 웃음을 전달해주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어떤 비장함을 느끼게 만든다. 버라이어티 쇼에서 웃기는 가수들을 보며 그저 웃기만 할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2007년 마니아 드라마가 말해주는 방송사별 특색

2007년 한 해의 드라마를 특징짓는 한 현상은 시청률은 낮은데 호평 받았던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일 것이다. ‘마왕’, ‘경성스캔들’, ‘한성별곡’, ‘얼렁뚱땅 흥신소’까지 가장 많은 마니아 드라마를 양산한 곳은 KBS. 여기에 MBC의 ‘메리대구 공방전’ 정도가 그 범주에 들어간다 할 수 있다. 희한한 일이지만 SBS는 단 한 편도 마니아 드라마라 꼽을 만한 것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마니아 드라마를 등장하게 했고, 그 양태가 방송사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화 같은 드라마에 웃고 울고
마니아 드라마의 한 특징은 그것이 만화를 닮았다는 점이다. 만일 만화로 친다면 ‘마왕’은 사이코 메트리가 등장하는 본격 스릴러가 될 것이며, ‘경성스캔들’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순정만화가 될 것이다. ‘한성별곡’이 정조시대를 다룬 본격 역사만화가 된다면, ‘얼렁뚱땅 흥신소’는 도심 속의 보물찾기라는 코믹 모험 만화가 될 것이며, ‘메리대구 공방전’은 코믹한 청춘 멜로를 그린 순정만화가 될 것이다.

이 드라마들의 만화 같은 특징이 만화의 세계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보통은 20대에서 30대 중반까지)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가져왔으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경성스캔들’, ‘얼렁뚱땅 흥신소’, ‘메리대구 공방전’같은 드라마는 아예 영상 구성 자체를 만화적인 컷으로 하는 실험성까지 보였다. 톡톡 튀는 재미와 심각한 주제마저도 가볍게 끌어가는 연출은 이들 마니아 드라마가 호평을 이끌어낸 원천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은 기존 드라마 시청층(30대 후반부터 60대까지)으로부터 외면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보통의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층은 일단 만화적인 상상력이 엉뚱하다는 것 이상으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스토리텔링의 촘촘함이 무기인 이들 작품들은 한 회 정도 걸렀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찾아보는데 익숙하지 않은 이 시청층은 늘 봐야 이해할 수 있는 낮선 드라마보다는 아무 때고 봐도 이해될 수 있는 조금은 느슨하고 편안한 드라마를 찾았다. 그러니 이들 드라마들의 본방 시청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니아 드라마가 될 뻔했던 드라마들
하지만 만화적인 상상력을 동원했다 해서 모두가 마니아 드라마가 됐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들이 ‘쩐의 전쟁’이나 ‘개와 늑대의 시간’, ‘히트’, ‘커피프린스 1호점’같은 드라마들이다. ‘쩐의 전쟁’은 아예 원작이 만화였으며, ‘개와 늑대의 시간’은 국내 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느와르의 세계를 만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히트’ 역시 전형적인 연쇄살인범을 좇는 형사물로 인기를 끌었고, ‘커피프린스 1호점’은 순정만화 톤의 드라마연출로 각광을 받았다.

어째서 이들 드라마들은 시청자들이 외면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이들 드라마들이 완전히 낯선 만화적 세계를 그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현실성이나 익숙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쩐의 전쟁’은 사채업자라는 낯선 세계를 소재로 삼았지만, 그 사채라는 소재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도가 그만큼 높았으며, ‘히트’와 ‘개와 늑대의 시간’은 장르의 익숙함과 멜로적인 인간관계의 구성으로 그 벽을 넘어섰다. ‘커피프린스 1호점’은 꼼꼼한 연출력과 캐릭터의 힘, 게다가 트렌디에 바탕하면서도 그걸 넘어서는 스토리 전개로 호평과 시청률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즉 2007년도를 특징짓는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들의 탄생은 바로 그 낯선 세계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만화적인 낯설음이기도 하고 젊은 세대의 감성에 대한 낯설음이기도 하다. 젊은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등식은 허용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 젊은 세대가 앞으로 미래의 시청자가 된다는 점에서 이들 마니아 드라마들은 과거의 답습보다는 미래의 드라마에 도전한 드라마로 볼 수 있다.

마니아 드라마가 말해주는 2007 방송사별 드라마 특색
마니아 드라마가 생기는 이유로서, TV 본방 시청보다 인터넷이나 IPTV 등의 다운로드형 시청 패턴이 젊은 층을 통해 늘고 있다는 것은 또한 현재의 시청률 집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방송사의 고민은 현재의 시청률 집계 속에서 시청률을 잡기 위해 나이든 시청층에 맞는 익숙한 드라마를 내보내야할 것이지만, 또한 달라지고 있는 미래의 시청자들의 눈높이도 도외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러한 고민이 깃든 방송사들에서 저마다 마니아 드라마의 양태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올 한 해 방송사별 드라마의 특색을 가장 잘 말해주기도 한다.

가장 많이 마니아 드라마를 양산한 KBS는 완성도만을 고려한 정통적인 드라마 기획을 한 점은 높이 살만하나, 결과적으로 현실적인 변화의 흐름을 포착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단 한 개의 마니아 드라마도 양산하지 않은 SBS의 경우는 그만큼 올 한 해의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들은 실제로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MBC는 어찌 보면 이를 가장 잘 조화시킨 경우가 될 것이다. 도전적인 시도를 하면서도 완전히 낯선 세계가 아닌 익숙한 세계를 끼워넣는 노력을 보였다.

그 성과가 어떻든 방송사들의 마니아 드라마 양산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고민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결과에 상관없이 박수 받을 만한 것이다. 문제는 지나친 마니아 드라마만의 양산은 자칫 방송사의 방만함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반면 마니아 드라마가 한편도 없다는 것은 방송사 자체의 도전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던 마니아 드라마들은 따라서 올 한 해의 방송사별 드라마 특색을 말해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2007년 한 해, 마니아 드라마가 있어서 우리는 행복했다.

천근같은 입, 백성을 자식처럼 보는 마음

MBC 월화 사극 ‘이산’에서 앞으로 정조가 될 세손 이산(이서진)은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준 전권을 갖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간 호시탐탐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들과 싸워왔던 이산으로서는 그 갑작스런 전권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겠지만 절치부심 칼날을 집어든다. 제일 먼저 칼을 대는 곳은 시전상인들이 틀어쥐고 있는 경제다. 

정치란 사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말만 무성하고 실제 백성은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만큼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그들과 부패한 신하들의 정경유착은 난전상인들과 같은 백성들의 상업을 뿌리째 흔들어왔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가야할 경제적 혜택이 부패한 신하들에게 가면서 그렇게 얻어진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이니 이산으로서는 이것이 일거양득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명분도 확실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산에게 기울어진 상황, 그러나 그 속에서 영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영조는 이미 이산이 시도하는 개혁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산은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태워버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매점매석 해버리자 난항에 빠진다. 경제가 돌지 않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다고 했던 일은 백성을 더욱 곤궁에 빠뜨리고 결국 이산은 모든 전권을 영조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그 때 영조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자신도 시전상인들이 깡패 같은 자들이라는 걸 잘 알지만, 정치란 무릇 백성을 자식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러니 그 깡패 같은 자들도 또한 자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자식도 저마다의 능력은 갖고 있는데 그 나쁜 짓을 나무란다고 능력까지 빼앗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조의 시전상인들이 가진 금난전권 혁파 시도와 실패 그리고 거기에 대한 영조의 대사는 작금의 정치가 보여준 개혁이라는 명분과 현실과의 괴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무수히 많은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과 염원이 있었지만 실상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으며,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들의 곤궁함을 풀어주었던가. 혹 못 가진 자들을 위한 개혁의 대의명분이 앞서 가진 자들의 숨통만 조였던 것은 아닌가. 대선을 치르는 현재, 가지고 못 가지고를 떠나 모든 이들의 입에서 경제를 제일 우선으로 내세우게 된 것은 그 여파가 국민 모두에게 미쳤음을 방증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연출된 데는 개혁을 하려는 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 만만찮은 반대가 있었고, 그것은 ‘이산’에서 보이듯이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산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이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대결구도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정작 있어야할 국민의 자리는 사라지고 당의 이익만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 ‘찬성을 위한 찬성’으로만 점철된 ‘저들만의 리그’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영조는 늘 백성들을 그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정치를 펴나간다. 신하들의 감언이설에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백성이 상전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면 어느 쪽이든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는 말 그대로 ‘깡패 같은 아들까지 보듬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섣불리 가볍게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명령하기보다는 신하들이 스스로 얘기하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영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정치적 행보가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다. ‘임금이란 참으로 무서운 자리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수많은 백성들이 사지로 몰릴 수 있으니.’ 이 말은 지금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누가 당선되든 국민들을 진정 자식처럼 여길 수 있는 영조 같은 정치인이 되길 기대한다.

귀로 보는 영화 ‘원스’

“때론 ‘음악’이 ‘말’보다 더 큰 감동을 전할 수 있다.”
지난 9월 10개관으로 개봉했던 ‘원스’는 13주차가 되면서 20개관으로 확대 개봉되었고 20만 명의 흥행에 육박하고 있다. 제작비가 1억4천만 원에 불과한 독립영화로 보면 이 영화의 흥행은, 더 많은 물량이 투여되는 기획영화들이 거둔 약 500만 명의 흥행에 버금가는 성공을 이룬 셈이다. 그 성공의 이유는 바로 존 카니 감독의 말과 다르지 않다. ‘원스’는 음악이 우리 인생에 주는 최고의 선물들을, 그 순간들을 86분 짜리 영상에 담아 전하는 음악에 관한, 음악에 의한, 음악의 영화다.

음악의 기적1. 노래의 진심이 다른 마음에 닿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잘 아는 사람도 아닌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전하는 마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그 마음이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그 순간은 음악이 기적을 만드는 지점이다. ‘원스’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남자는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절규하듯 노래한다. 노래란 본디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기 위안과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그 노래는 누군가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 혼자 마음을 다독이던 그 순간, 그 마음의 노래를 알아듣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것은 음악이 우리에게 전하는 기적적인 순간이면서 우리네 인생에서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사랑의 메타포이기도 하다.(OST. Say it to Me Now)

음악의 기적2. 음악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간
그렇게 만난 그들은 한 악기점에서 피아노와 기타 선율 속에 노래를 담아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길거리에서 기타 하나 들고 절규하는 가난한 남자와, 피아노가 없어 맘씨 좋은 악기점에 잠깐 들러 피아노로 마음을 위안하던 가난한 여자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음악만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고단한 삶 속에서 그 고단함을 버티게 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음악이며 악기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지 않아도 서로의 목소리와 악기의 선율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영화 속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 노래와 연주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기 때문이다. 이 기적적인 순간은 음악이 아니라면 영화 한 편을 통해서도 설명되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까. 눈이 아닌 귀로 보는 영화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OST. Falling slowly)

음악의 기적3. 음악으로 마음을 전하다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주고 여자가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이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곡을 내준다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영화 속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곡을 건넨다. 자신은 도저히 가사를 붙일 수 없을 것 같다며. 하루가 끝나고 다들 잠든 시간에 어두운 불빛에 의지해, 남자가 주고 간 CD플레이어를 들으며 여자는 곡에 가사를 붙인다. 그리고 CD플레이어에 소모된 건전지를 다시 사기 위해 딸의 소중한 저금통을 털고 파자마 차림으로 가게를 찾는 장면은, 그녀의 남편에 대한 마음과 그 마음을 담는 것을 허락한 남자가 주고간 곡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OST. If you want me)

음악의 기적4. 함께 노래하다
남자와 여자가 길거리의 음악가들을 모아 녹음실을 빌려 노래를 CD에 담는 장면은 이제 둘 사이에 흐르는 공감대와 사랑의 노래를 이제 세상을 향해 들려주겠다는 실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큰둥하던 엔지니어의 귀를 활짝 열게 만들고, 시간이 돈인 녹음실에서의 밤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그들의 음악은, 영화 속을 빠져나와 현실에 선 관객들의 마음마저 움직이게 한다. 밤샘 끝에 남자와 여자의 손에 쥐어진 CD는 몇 개에 불과하지만 그 CD에 담겨진 노래는 그들이 함께 노래했던 기적 같은 순간들과 마음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에도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이로써 그들은 서로 헤어지지만 영원히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된다. 이미 마음이 정해졌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언제든 부르면 달려갈 것이라 노래하는 남자처럼. (OST. When Your Mind's Made Up)

현실 속에서 음악이란 때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도 찾으면 그 마음을 보듬어주는 우리네 삶의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돈도 아니고, 화려한 영상도 아니며, 놀라운 스토리도 아닌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공평한 음악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가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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