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본 ‘불한당들’과 독립영화의 가능성

다음은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울독립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출품된 장훈 감독의 ‘불한당들’이란 영화의 장면들. 윤성호 감독(‘은하해방전선’의 그 윤성호 감독이다)은 안산공단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인터뷰한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카메라가 갑자기 이들을 도시의 한 주점으로 불러들이면서 이 페이크 다큐 형식의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월드컵의 열기로 가득한 그 곳에는 왠지 인종적인 편견이 담배연기처럼 자욱하고, 급기야 화장실에 간 한 베트남 노동자와 시비가 붙은 사내는 그걸 말리려는 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팔뚝을 물어뜯는다. 황당한 것은 사내를 비롯해 주점 안의 한국인들이 모두 좀비로 돌변하는 것.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 광기의 한국인 좀비들을 BB탄이 아닌 은단을 넣은 장난감 총을 쏘면서 탈출한다.

우리나라에 팽배한 집단적 광기를 월드컵의 이상 열기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서 포착하면서 좀비영화라는 참신한 틀로 가져온 이 영화는 재치 있는 위트와 유머가 잘 버무러진 수작. ‘서울독립영화제2007’의 ‘다른 영화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과 잘 어울리는 독립영화다.

모든 영화들이 저 월드컵 열기의 광기처럼 똑같은 영화의 틀 속에서 극장에 걸려질 때, 독립영화들은 안산공단 같은 좁은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꿈꾸며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처럼 가난을 자양분 삼아 반짝거려왔다. 가끔씩 “여기엔 왜 왔냐”는 틀에 박힌 질문들을 갖고 오는 다큐PD들처럼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느냐”는 생뚱맞은 질문을 받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기존 장르와 문법에 익숙해 좀체 ‘다른 피부색의 영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이 사실은 불한당인 셈이다. 몇 백 만이 들었다는 수치에 떼를 지어 다니며 그 숫자를 더해주고 있을 때, 저 한 구석에서는 이 좀비들을 피해 숨어 있던 ‘다른 영화’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피해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좀비들과 맞서는 존재다. 좀비들에게는 반대로 불한당 같은 존재다. 독립영화란 실로 ‘다른 영화’라는 BB탄으로 기존 영화문법에 익숙해져버린 두개골을 기분 좋게 날려버리는 영화가 아닐까.

월드컵 광기의 밤이 끝난 새벽. 겨우 살아남은 이 노동자들이 텅 빈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생계라는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독립영화라는 한 가지로 버텨온 감독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관객을 찾는 것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틀에 박혀 무언가 신선한 충격을 원한다면 기꺼이 저들이 쏘는 유쾌한 BB탄에 머리를 내줄 일이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이 달 30일까지 중앙시네마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예술적인 이유

‘야한 것’과 ‘예술적인 것’은 상반된 것일까. 왜 똑같이 적나라한 성기 노출을 해도 어떤 것은 포르노가 되고 어떤 것은 예술이 될까. 그것은 ‘노출을 위한 노출’인가 아니면 ‘작품의 통일성 속에서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노출’인가의 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안 감독의 ‘색, 계’와 ‘실낙원’의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사랑의 유형지’는 분명 야하긴 하지만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정말 야하다. 예술적으로.

‘색, 계’의 노출, 합일될 수 없는 육체의 경계를 그리다
아무리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에 빛난다 해도, 또한 이안 감독의 작품이라 해도, ‘색, 계’의 무삭제 개봉은 지금까지의 우리네 상황을 두고볼 때 파격적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가위질 없이 제대로 볼 수 있게된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색, 계’는 노출 신을 잘라내면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살과 살의 부딪침만으로 가장 적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 교접의 욕망을 나타내는 ‘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계’를 그리고 있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경계들’이다. 그것은 크게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나라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고, 홍콩이라는 동서양 문화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 배경으로 제시되는 경계 속에서 왕치아즈(탕웨이)와 이(양조위)는 스파이와 스파이가 제거해야할 남자로서 마주 서게 된다. 왕치아즈는 그 남자와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자신 속의 경계를 넘어선다. 정조를 버리고 막부인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경계를 넘은 왕치아즈는 자꾸만 이에게 빠져들면서 자기존재의 경계에서 서성댄다. 그러니 이 경계의 최전선은 왕치아즈와 이가 교접하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살의 경계이다. 이로써 ‘색, 계’의 노출은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가장 주제를 압축하는 예술로 승화된다.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  사회적 규범을 넘는 사랑을 그리다
‘사랑의 유형지’는 여러 모로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을 닮았다. 사회적 규범을 넘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드는 불륜남녀는 급기야 사랑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날 사랑한다면 날 죽여줘요”라고 말하는 후유카(테라지마 시노부)는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키쿠지(토요카와 에츠시)의 손에 웃으며 죽음을 맞게된다. 영화는 이미 사회적 규범을 넘어 저질러진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과 그것을 법이라는 잣대로 난자해버리는 현실을 병치시킨다. 살인자로 기소된 소설가인 키쿠지는 후유카와의 불꽃같은 사랑을 문학적인 틀로 설명하지만 법은 끔찍할 정도로 그 사랑을 더러운 불륜과 살인으로 몰고 간다.

이미 벌어진 살인사건 후 키쿠지의 조서와 회고담으로 구성된 영화는 사회적 규범은 물론이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사랑의 힘을 그린다. 따라서 사회적 잣대와 치열한 대결구도를 갖는 영화는 그 반대급부로서 거침없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두 남녀를 세운다. 이들의 안타까운 살들의 부딪침은 결국 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끝이 죽음임을 암시한다. 결국 죽음으로서 사랑을 얻은 후유카는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위대한 사랑을 그려낸다. ‘사랑의 유형지’의 정사 신은 절정과 죽음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조건을 상징적으로 담는다.

노출은 그것이 예술적인 맥락 속에서 보여질 때 가장 파격적이면서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란 그저 생식과 정욕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한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된 인간의 안타까운 존재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노출된 맨살이라 해도 어떤 경우 절망적이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몸이라는 유한한 틀이 가진 비극성 때문이다. 몸은 슬프고 그 안에 대부분의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이 ‘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야하면서도 예술적인 이유다.

드라마 속, 알파걸을 밀어주는 알파보이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최한결(공유)은 알파보이다. 재벌집 아들에, 다 허물어져 가는 왕자다방을 커피 프린스로 둔갑시킬 만큼 능력 있고, 잘 생긴데다가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다. 그런 알파보이가 소녀가장으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을 할 정도로 가난한 데다, 선머슴처럼 생긴 외모에 털털하기 그지없는 성격으로 남자로 오인 받는 고은찬(윤은혜)을 사랑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알파보이가 고은찬이란 여자의 숨은 재능을 키워내 알파걸이 되게 적극 밀어준다는 점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인기요인 중 한몫을 차지한 것은 바로 이 일하는 여성들이 갖는 환타지이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외국유학의 시간동안 묵묵히 기다리며 그녀의 성공을 빌어주는 남자는 아직까지는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은찬은 물론이고 한유주(채정안)-최한성(이선균) 커플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이미 둘 다 알파걸, 알파보이인 이 둘은 일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그 둘 다를 가지는 워킹우먼들의 환타지이다.

이런 알파걸을 밀어주는 알파보이는 현대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극 속으로 들어온 알파보이 이산(이서진)은 장차 알파걸이 될 성송연(한지민)을 적극 밀어준다. 그는 성송연에게 “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살려 화원이 되려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조선시대라는 역사적 시점에 그것도 왕이라는 신분까지 감안한다면 이 제안은 실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라 할만하다. 지금 시대에도 하기 어려운 것을 남녀차별이 일상화되었던 조선시대에 한 셈이니 말이다.

그것은 단지 사탕발림의 말만이 아니다. 이산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 일에 뛰어든다.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회, 즉 다모가 화원이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단지 성송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당대 모든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밀어주기 위한 본보기로서 이 일을 벌인 이산은 어찌 보면 진정한 현대적 시각을 갖춘 남성이라 할만하다. 반면 대부분의 현대남성들이 그러하듯이 편견에 가득한 남정네들은 성송연과의 경합에서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저편에서 성송연의 사회진출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미소짓는 남자, 그녀의 알파보이 이산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여성의 사회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드라마 속 남성들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당연하다. 그만큼 현실의 남성들이 가진 편견과 싸우면서 당당히 사회 속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알파걸들이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또 다른 양태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남성들이 제시하는 것이 물질적인 부나 지위가 아니라 그녀들이 진정으로 잘 하고, 또 하고싶어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는 남성이 일방적으로 여성을 신데렐라로 만드는 이야기가 여성들에게 더 이상 매력이 없어질 정도의 세상이 되었다. 현대여성들은 종속적인 신분상승이 아닌 자아성취를 지지해주는 남성과의 동등한 만남을 원한다. 그것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사극 속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현실여성들의 환타지가 스며든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는 또한 남성 캐릭터들의 변화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여성들은 자신을 알파걸로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알파보이를 원한다.

엉뚱한 상상력은 때론 진실에 근접한다

‘얼렁뚱땅 흥신소’는 아마도 우리 드라마 사상 거의 최초로 시도된 도시모험 드라마가 아닐까. 모든 드라마가 리얼리티에 발목이 잡혀 있을 때, ‘얼렁뚱땅 흥신소’는 말 그대로 얼렁뚱땅 상상력의 끝까지 달려갔다. ‘황금을 찾는 모험’이라는 엉뚱하지만 참신한 소재에 머뭇거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얼렁뚱땅 흥신소’가 뛰어든 모험은 수많은 황금을 찾는 블록버스터 모험극들과는 달랐고, 또 달라야만 했다. 그것은 우리네 현실을 어떻게 하면 신나는 모험의 세계와 연결짓느냐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비현실적 상황을 드라마적 현실 속에서 이해시키기 위해 드라마는 만화적 상상력과 연출을 그 장치로서 활용한다.

캐릭터의 면면에서부터 수없이 진지한 분위기를 깨는 인물들의 엉뚱한 대사들이 맞물리면서 드라마는 리얼리티보다는 만화적 상상력의 허용을 이끌어낸다. 말 그대로 ‘얼렁뚱땅’ 흥신소 일에 뛰어들게 된 인물들은 실제 현실이라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을 고종이 숨겨둔 황금을 찾는 모험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황금을 찾는 이야기는 점점 캐릭터들의 가슴 속에 황금처럼 묻어두었던 가족과 얽힌 소중한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만든다. 물질적인 황금의 이야기는 그 도정에 선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마음 속 황금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슬그머니 빠져든다. 그것은 가족이다.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있는 사별하거나 헤어진 가족들의 이야기가 차츰 풀어지면서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과거와 화해하고 현재 자기 주변에 서 있는 이들에게서 유사가족의 끈끈함 느끼게 된다. 그들은 중명전에 황금을 찾기 위해 들어가기 전 이미 소중한 자신들만의 황금을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지하에 갇히게 된 그들이 밖으로 가져와야 할 것은 고종이 숨겨두었던 황금만이 아니다. 이미 서로에게 황금이 되어버린 그들 자신을 저 밖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 생존하기 위해 땅을 파내고 절망적으로 마지막까지 막힌 벽을 향해 피 터진 주먹을 날리는 무열(이민기)의 행동은 진짜 간절히 원했던 황금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벽을 뚫고 빠져나온 그들에게 지루하기만 했던 일상은 달라져 있다. 그저 숨쉴 수 있는 대기와 그 하늘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발이 마치 황금처럼 그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저마다 음미하듯 깊은숨을 마음껏 들이쉬는 그들은 또한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자신들이 황금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엉뚱한 상상력으로 얼렁뚱땅 시작한 드라마는 이 즈음에 다다르면 꽤 진실에 근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아 나섰던 파랑새가 사실은 자기 집에 있던 비둘기였던 것처럼 비루하게만 느껴지는 삶의 희망은 그리 먼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드라마는 모험을 방불케 하는 꽤 먼 길을 우회해 보여주었다. 그러니 일상의 나른함 속에서 모험의 길을 함께 떠났던 시청자라면 그 끝에서 뜻밖의 꽤 괜찮은 보물을 발견했을 것이 틀림없다. 또 다른 보물을 찾아 떠나는 세 여자의 모습으로 끝나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우리에게 ‘당신도 당신만의 보물을 찾아 떠나라’고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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