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물에서 메디컬 에로까지 장르사극의 세계

과거 사극이라면 역사적 사료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사극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과거로서의 역사적 시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진 사극은 점점 상상력을 키워왔고 이제 장르와 몸을 섞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이제 환타지(태왕사신기)에서부터 수사물(별순검), 미스터리(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메디컬 에로(메디컬 기방 영화관)까지 다양해졌다.

환타지 사극을 주창한 ‘태왕사신기’는 저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실존인물을 환타지라는 장르 속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행했다. 쥬신의 운명을 타고난 태왕 담덕(배용준)이 사신(네 신물, 네 부족)을 취하는 과정을 그린 이 사극은 환타지라는 장르를 활용하고 있기에 그 자체를 리얼리티로 볼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은 환타지라는 장르 속에서 하나의 상징이나 메타포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마치 한 실제 인물을 하나의 신화로서 그려내는 것과 같다. 이 모험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어떤 영향을 줄 지는 알 수 없으나 드라마라는 허구의 장르가 이런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만 하다.

케이블 시청률의 마의 벽을 연일 깨고 있는 조선시대 버전 CSI인 ‘별순검’은 국내에서는 현대물에서조차도 시도되지 않은 ‘과학수사’를 기치로 내세운 수사물이다. 국내의 수사물들이 ‘현장수사’라는 발로 뛰는 액션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면 ‘별순검’은 조선시대의 ‘중수무원록’이라는 과학적인 법의학의 잣대를 내세워 본격적인 수사물의 장르를 세우고 있다. CSI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현대물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어려운 법의학이란 장르가 조선시대의 특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자 우리 드라마만의 독특한 소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무게를 벗어 던진 사극은 그 시점만 옮겨놓아도 장르물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은 영화 ‘영원한 제국’으로 일찍이 조선시대판 ‘장미의 이름’을 축조해냈던 박종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스텝들조차 영화인들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명실상부한 무비드라마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미스터리 사극이 될 것이다.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암살시도라든가, 원행에서 벌어지는 갖은 음모들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추리와 맞물려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실제 정조의 죽음에 대한 분분한 설들이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는 이 사극은 역시 조선시대라는 배경이 주는 독특함이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된다.

‘메디컬 기방 영화관’에 이르면 이제 사극의 장르와의 만남은 무한히 증폭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성과 의학을 접목시킨 이 사극은 그 안에 모든 장르들이 가진 코드들을 내포하고 있다. 에로물의 성격에다가 액션이 가미되고 거기에 메디컬 장르가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이 드라마는 그 각각으로 봤을 때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들이 그 그릇이 되는 사극이란 틀 속으로 오자 참신해진다.

사극의 장르화는 이미 영화에서 시도되었다. ‘음란서생’, ‘혈의 누’, ‘황산벌’ 같은 사극영화들은 이미 장르화된 현대물의 사극 버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진정한 사극의 전성시대는 드라마 사극과 장르가 맞닿는 부분에서 생겨나고 있다. 공중파에서 정통사극의 틀을 벗어 퓨전 사극이 새로운 사극 중흥의 불씨를 마련했다면, 케이블TV의 공격적인 자체방송 제작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공중파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한 표현들이 가능해지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자, 영화인들의 드라마 제작이 무비 드라마라는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류 속에서 드라마로서는 가장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는 사극이 체계화되면서 장르화도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 사극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는 게 사실이다. 현대물로서 성공했던 장르 드라마들은 고스란히 사극으로의 변용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로써 사극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현대물의 대척점에 설 수 있는 다양성을 확보하게 됐다. 장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공의 시스템으로서 제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한동안 사극전성시대는 지속될 것이 분명해졌다. 장르와 기왕에 몸을 섞은 사극이 다양한 얼굴과 개성을 가진 자손들을 퍼뜨리길 기대한다.

순수한 동심 vs 살벌한 어른들 세상

MBC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이산(이서진)은 어린 시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 어린 이산은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한 뒤주 앞에 와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살아남은 불씨가 된 이산은 끝없는 암살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겨운 일은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자신을 끝없이 시험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 시험에서 탈락하는 순간, 이산은 자신도 저 버려진 아버지의 운명이 될 거라는 점에 몸서리친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하는 암살자들이 바로 이산의 고모인 화완옹주(성현아)라는 사실은 절망감을 더 깊게 한다. 아직까지 이산에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음모의 몸통에는 영조의 계비이자 이산의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김여진)가 있다.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이 잔인한 가족사는 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만큼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살벌한 어른들 세상 속에서 이산은 생존하기 위해 강해지고 노련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이 원하던 것이 아니다. 이산은 늘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나 운명의 여인이 되어버린 성송연(한지민)과, 평생의 동무가 된 박대수(이종수)를 그리워한다. 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궁 속의 음모들 속에서 이 세 사람 즉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가 만나는 장면은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 현실이 아닌 어린 시절의 동무로 돌아간 그들은 실로 어린아이들처럼 말하고 웃고 수줍어한다.

이것은 동화의 세계이다. 동화가 가진 세계와의 대결의식은 늘 순수한 동심과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병치시킨다. 이산은 그 깊은 트라우마가 생기기 이전의 시간을 희구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어른들의 세계 속으로 그를 인도한다. 성송연과 박대수는 그 캐릭터 자체가 어린이에 머물러 있고 그것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는 이산이 늘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 어른과 어린이의 대결 속에서 홍국영(한상진)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묘하다. 홍국영은 어른들의 세계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인물. 그는 때론 어린이 같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가 이산의 옆에 자리하면서 드라마는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든다. 홍국영은 그 목적이 어떻든 이산과 그 동심을 지켜내는 파수꾼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이산’에 깊이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이 아이들의 세계를 가진 이산과 성송연, 박대수를 저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지켜주고 싶은 측은지심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무거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는 건 누구나의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니 이 한 가족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잔인한 동화의 세계는 동심에서 어른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일련의 성장과정을 내포한다. 때론 그것이 퇴행적으로 보이지만 그 어린 시절의 순수로 되돌아감이 현실과의 대결구도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산이 그리는 동화는 그 가치를 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산의 정치란 결국 이전투구의 진흙탕 정치세계를 넘어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그 곳에서 시작된다.

생계는 웃기면서도 슬프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웃음을 주어야 하는 코너에서 개그맨 김경민이 눈물을 흘린다. 항상 요상한 동물모양의 옷차림을 하고는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던 그. 대중들에 잊혀져 생활고에 힘겹게 살면서도 웃고 있어야 그 생계를 이을 수 있었던 그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보던 다른 개그맨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이도 잊고 후배개그맨들에게 면박을 받아가며 웃음을 주어야 생계를 해나갈 수 있다는 그 개그맨의 현실은 단지 김경민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혹 그걸 보다가 함께 울컥한 시청자분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개그맨의 눈물에서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네 눈물과 땀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민들 삶이 갈수록 힘들어져 웃음을 찾기가 힘들어져서일까. 아니면 개그맨이란 직업 자체가 우리네 서민의 삶을 고스란히 대변하기 때문일까. 개그맨들은 언제부터인가부터 재치 있는 입만 갖고는 먹고살기 힘든 무한경쟁 속에 떨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었던 안정적인 프로그램에서 쫓겨나 무대 위에 올려지거나 거리로 나서고,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도전을 해야하며, 야생에서 노숙에 가까운 밤을 지새야 한다. 때론 묘기 같은 몸 동작을 하거나 자신의 몸을 연실 때려야 하며,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몸이든 사생활이든 발가벗겨져야 한다.

짜놓고 하는 개그에 더 이상 웃음을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개그맨들은 진짜 자신의 모습을 끄집어내려는 리얼리티쇼라는 틀과 마주해야 한다. 리얼리티쇼는 수많은 카메라를 동원해 집요하게 개그맨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숨기려는 얼굴 이면의 맨 얼굴을 잡아내려 한다. 굴욕을 당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짓다가 한순간 무너지는 얼굴을 보였을 때,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진지하게 무언가를 해나가겠다는 결연한 얼굴을 보여주다 그것이 순식간에 깨졌을 때 웃음은 터져 나온다. 리얼리티쇼의 카메라는 그걸 잘 알고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 전성시대가 되면서 개그맨은 일상에서 승부해야 한다. 실제 개그맨이라는 선후배 관계가 확실한 직업 속에서 일상적인 라인의 삶은 이제 무대 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거기에는 설정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 설정은 실제 삶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라인업’이 생계형 리얼 버라이어티를 내세우는 것은 그것이 여타의 리얼리티쇼와 다르게 실제 일상과 살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경민은 바로 이 ‘라인업’이 보여주려는 개그의 진짜 맨 얼굴인 셈이다.

‘라인업’이 저 독한 개그맨의 삶 자체를 리얼리티쇼로 끌어들였다면, ‘1박2일’은 문명에 적응하고 있는 개그맨들을 야생에 풀어놓고 그 날 것의 모습을 가감 없이 끌어낸다. 혹한기에 야외에서 밥을 지어먹고 노숙에 가까운 잠을 자야 하는 그들이 그 살벌한 하룻밤을 놓고 단순한 게임으로 그 대상자를 선정하는 모습은 그 장난 같은 게임이 가져올 괴로운 결과에 웃음 짓게 만든다. 그 행동들은 하룻밤의 야생체험이라는 경쾌함을 갖고 있지만 그 계속되는 여정들을 놓고 보면 참 개그맨이라는 직업의 삶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리얼리티쇼가 가진 독한 개그의 세계는 한 때 무한경쟁의 틀 속에서 독하다 여겨졌던 무대개그 프로그램마저 더 독하게 만든다. 몇 초의 대사를 치기 위해 일주일간을 준비했다가 그마저 편집으로 날아가는 그네들의 상황은 그 자체가 생계의 절박함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무대라는 장치로 인해 가려진다. 무대 뒤편에서 어느 날 개그맨들이 소주 몇 병을 놓고 신세한탄을 하다가 누군가 불쑥 던진 한 마디에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리얼리티쇼는 무대를 거둬냄으로써 그 일상의 울음마저 웃음으로 전이시킨다. 개그맨 김대희가 실제 삭발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웃음이 터지면서도 마음이 뭉클한 것은 그 온몸으로 던지는 개그가 그 무대에서만 머물지 않고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 실체는 바로 생계다. 웃으면서 웃음을 주려는 그 얼굴의 이면에는 웃겨야 살 수 있다는 생계의 현실에서 흘려야 하는 그들의 눈물과 땀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눈물과 땀마저 고스란히 보여주는 리얼리티쇼 전성시대에 웃음은 때론 잔인하다. 생계를 건드렸을 때 웃음은 터지지만, 그래서 그 웃음은 때론 슬프다.

드라마를 이끄는 힘, 입체적 인물

MBC 사극 ‘이산’에서 위기에 빠진 이산(이서진)에게 홍국영(한상진)이 절실한 것처럼, 요즘 드라마들은 홍국영 같은 입체적 인물을 필요로 한다.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극적 상황 속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선악대결구도는 요즘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끌지 못한다. 현실이 더 이상 권선징악으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 가는 캐릭터는 오히려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누어지는 전형적 인물이 아닌 양측을 포괄하거나 그 선을 왔다갔다하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인물이 되었다. 중요해진 것은 선악이 아니라 인물을 움직이는 욕망, 혹은 인물의 목표이다.

홍국영에 쏟아지는 관심, 왜?
그런 점에서 홍국영에 쏟아지는 공감은 당연하다. ‘이산’이란 드라마는 오히려 선악구도가 너무나 명확한 드라마다. 이산을 중심으로 한 성송연(한지민), 박대수(이종수), 남사초(맹상훈) 같은 인물군들은 모두 선이며, 이산의 반대편에 선 정순왕후(김여진), 화완옹주(성현아) 같은 인물군들은 악이다. 모두 선악이 분명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기에 드라마가 생긴다. 하지만 이런 단순구도로는 이병훈 PD 특유의 미션 해결 구조의 드라마가 쉬 지루해질 수 있다. 그것은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해지는 인물이 선악으로 구분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이산’의 초반부에 이런 역할을 해온 인물은 영조(이순재)다. 그는 이산의 할아버지면서도 이산의 강력한 시험으로 자리잡았고, 그 힘은 대결구도의 단순함을 무마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영조가 이산의 손을 들어버렸고, 그의 시험이 좀더 강력한 군주의 탄생을 위한 조련과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즈음에서 홍국영이란 인물의 등장은 적확하면서도 효과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홍국영은 캐릭터로 보면 이산의 착한 인물들(?)을 대신해 손에 피를 묻히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의만을 내세워 이산 밑으로 오지 않았다. 정후겸(조연우)과 이산의 양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인 홍국영은 이산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정치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군주 이산의 현실적인 측면을 보강해준 것이다. 홍국영은 지금의 입장이 이산의 든든한 두뇌 역할이기 때문에 선의 한 측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후겸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냉철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나가는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단순히 홍국영을 야심가로서의 한 측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때론 ‘꼴통’이니 ‘개소리’같은 리얼리티쇼를 방불케 하는 거친 현실감이 넘치는 대사들을 쏟아내면서 서민적이고 서글서글한 모습까지 갖게된다. 홍국영의 출연은 대의 중심의 단순한 대결구도를 벗어나, 욕망 중심의 대결구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사실상 입장만 다를 뿐, 똑같이 욕망을 추구하는 홍국영과 정후겸의 두뇌게임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입체적 인물의 힘으로 굴러간다
이러한 드라마 속 입체적 인물들의 역할은 단지 ‘이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왕과 나’의 조치겸(전광렬),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문소리)는 물론이고 현대극 속에서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박희순)까지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먼저 ‘왕과 나’를 이끌어 가는 힘의 중심 축으로서 조치겸(전광렬)이 서 있는 이유는 그 복합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 때문이다. 조치겸은 ‘욕망 하는 내시’로서 희대의 역적처럼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군주와 백성 사이에 그 어떠한 사특한 무리들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대의를 가진 충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인 담덕(배용준)과 동생 수지니(이지아)와 맞서게되는 운명을 가진 복잡한 캐릭터다. 이 역시 담덕과 사신으로 대변되는 선과 연씨 집안으로 대변되는 악의 단순구도를 깨는데 일조한다. 시청자들은 서기하의 행동들을 이해하면서도 분노하게 되는 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한편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은 조폭이면서도 순간 희경(예지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인물이다. ‘치매를 갖고 있는 어머니’ 같은 개인적인 사연이 많은 그는 흥신소의 인물들과 부딪치면서도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드라마는 실로 주인공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조역들이 있어 주연이 힘을 발하는 것이며, 그 조역들의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복합적일 때 드라마는 더 깊은 재미를 주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입체적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 연기자들은 베테랑일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연기하기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왕과 나’의 전광렬이 그렇고 서기하 역의 문소리가 그렇다. 문소리는 캐스팅 논란이 일었지만 사실상 이런 어려운 심리묘사를 할 수 있는 연기자로 그녀 만한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최근 ‘세븐데이즈’로 영화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박희순은 바로 이러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타고난 연기자로 보인다.

드라마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이제 한번 보면 그 행동을 다 짐작할 수 있는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드라마에 설 자리는 좁아졌다. 대신 능동적인 욕망이 꿈틀대면서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입체적 인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 요즘 드라마는 때론 아이 같은 천진함을 가졌지만, 때론 욕망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전략가의 모습을 보이는 홍국영처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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