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라는 블록버스터의 재미는 어디서 오나

주로 게임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난 우리네 CG기술은 주로 해외 게임업체들의 하도급 형태로 공력을 쌓아왔다. 해외 게임업체들이 우리나라 CG 샘플을 보고 놀라는 것은 ‘그 정도의 제작비로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CG를 만들어내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당시의 CG 기술들은 이후 게임업체들에 의해 활용되면서 지금의 우리네 게임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커다란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영화 쪽에서의 CG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폭파장면 같은 특수효과쪽에 활용은 되었지만, 전략적으로 CG를 활용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전 세계를 공략하는 할리우드 같은 시도는 별로 없었다. 그만한 제작여건도 거의 전무인 상태인데다 투자는 어불성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형래 감독이 들고 나온 ‘용가리’는 사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총체적인 부실로 드러났다. 스토리는 둘째치고 CG는 실감나지 않았고 출연한 인물들조차 연기력 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당시 CG가 실감나지 않은 것은 캐릭터를 모델링하는 능력이나 동작을 구현하는 애니메이션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할리우드가 가진 CG와 실사를 합성하는 기술과 노하우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절치부심한 심형래 감독이 ‘디워’의 어떤 부분에 모든 정력을 쏟았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실제 결실로 나타났다. ‘디워’가 보여준 CG와 실사의 합성 노하우는 아직까지 우리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마도 CG에 관심이 있거나 같은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먼저 그 압도적인 CG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지만 시사회 이후 ‘디워’에 계속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스토리다.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스토리가 엉성한 점을 아쉬움으로 꼽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심형래 감독조차 인정한 바이다. 그의 논지는 ‘스파이더맨’이나 ‘트랜스포머’, ‘킹콩’, ‘쥬라기공원’, ‘인디펜던스데이’를 예로 들어 그 영화들의 스토리 역시 별 것 아니며, 블록버스터는 스토리와 상관없이 볼거리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지는 지금 인터넷에서 ‘디워’를 두고 벌어지는 설전의 중심에 서 있다.

실제로 최근 할리우드에서 개봉했던 일련의 블록버스터들, ‘스파이더맨3’, ‘캐리비안의 해적3’는 물론이고 ‘트랜스포머’까지 시나리오의 스토리로 보면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심형래 감독이 얘기하듯이 블록버스터(아마도 SF나 환타지 블록버스터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의 재미가 인물이나 뒤통수를 치게 만드는 기발한 스토리 전개 같은데 있는 게 아니라 실상은 볼거리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할리우드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형 CG에 엄청난 물량을 투여하고 그 위험부담을 맥도날드 같은 다국적기업과 나누며, 전 세계 배급망을 확보해 개봉 1,2주차에 모든 마케팅비용을 쏟아 부어 투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올리는 과정 속에서, 저변을 되도록 넓히기 위해 스토리는 절대로 복잡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스토리에 대신 영화는 철저히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재미에 집중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블록버스터가 지향하고 있는 지점은 흔히 예술영화나 극영화가 제시하는 삶의 비의 같은 것이 아니다. 재미에 집중된 이 영화들의 지향점은 영화의 또 한 가지 갈래가 될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실제 지금 극장들은 이 방향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자잘한 캐릭터의 디테일이나 대사의 집중도보다는 블록버스터가 보여주는 볼거리의 참신함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을 또다시 돈을 내고 본다는 것은 어딘지 아까운 일이다. 심형래 감독이 언급한 스토리가 그저 그런 ‘스파이더맨’의 재미는 거미인간이 뉴욕의 도심을 휙휙 날아다닌다는 점이며, ‘인디펜던스데이’의 재미는 외계인이 도시를 때려부순다는 그 설정에 있고, ‘트랜스포머’의 재미는 변신로봇 자체가 주는 유아적 욕망이 눈앞에서 실현된다는 점에 있다. ‘킹콩’의 재미는 이 거대한 생물체가 도시라는 정글을 마구 때려부수는 장면들의 재미이며, ‘쥬라기공원’은 공룡을 실제로 본다는 그 자체가 재미이다. 이 블록버스터들은 모두 볼거리의 참신함에 있어서 훌륭한 CG와 만나면서 충분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렇다면 ‘디워’가 가진 볼거리의 참신함은 어떨까. 먼저 용이 되어야 한다는 이무기라는 소재, 조선시대에 도성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관군들과 이무기 군단들과의 전쟁 설정 같은 것들은 참신하다. 게다가 후반 40분 동안 폭풍처럼 몰아치는 LA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무기와 헬기, 탱크, 비행기들의 액션 장면들은 ‘디워’라는 롤러코스터가 가진 볼거리라는 측면의 가능성을 충분히 담보하고도 남는다. 여기에 CG의 디테일을 감안해서 본다면 볼거리의 재미는 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들이 있다. 우리의 관객이나 외국의 관객 모두에게 특별한 볼거리가 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장면들이 특수촬영으로 이루어지면서 어딘지 CG의 힘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최고의 CG 실사 합성 능력을 보여준 LA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장면들은 기존 블록버스터의 전통에 충실한 맛은 있지만 아쉽게도 ‘디워’만의 차별성을 찾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한 평론가는 “차라리 LA가 아니라 남산타워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부수는 이무기였다면 더 볼거리가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 일부 공감하게 되는 것은 영화 속에서 관습적으로 괴수나 적의 공격을 받는 LA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너무 많이 봐온 탓은 아닐까.

아리랑을 영화음악으로 삽입할 정도로 한국적인 걸 강조하는 심형래 감독도 미국시장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타협해야될 부분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적인 정서를 강조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시장 속 블록버스터 공식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안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블록버스터에 있어서 우리 것을 조금 더 고집하는 것이 위험성은 있겠지만 결국 새로운 볼거리라는 측면에서 미국시장과 우리시장을 다 노릴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장기록 병원’에서 본 인간의 위대함

온 몸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전신 85%의 화상을 입은 14살 소년은 또래 소년들이 그렇듯이 아파서 칭얼대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일반병실로 옮기고 싶다는 소년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불길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구해낸 아버지가 잘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충격을 받을까봐 쉬쉬하다가 아버지는 일반병실로 옮겨갔다고 한 가족들의 거짓말을 믿고 있는 소년.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소년, 불길 속에서 아버지를 구하다-그 후’편에서 수종이의 투병기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현장기록 병원’은 말 그대로 병원이란 현장의 생생한 기록을 담아내는 프로그램이다. 특별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놓은 연출도 없고 그저 무미건조하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뿐인 이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왜일까. 거기에는 여기저기 주사바늘이 꽂힌 채 그저 누워 있는 환자들의 모습과 그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려고 노력하는 의사,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볼 뿐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환자가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수종의 누나들과 함께 찾아간 소년이 아버지를 구한 전남 여수의 집은 당시의 끔찍함의 흔적을 여전히 남기고 있다. 도움을 청하러 들어간 옆집 대문에는 아직도 수종의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고 그 집 대청마루에는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 잔해 속에서 수종의 누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낸다. 정작 구해내려던 아버지는 사망해 흑백사진 속에서만 웃고 있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아버지의 무사를 기원하는 소년의 독백은 짧은 순간, 잊고 있던 인간의 위대함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의 힘이 소년에게 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기원이 간절했던 것인지, 소년의 몸은 몰라보게 좋아진다. 혼자 밥을 떠먹고, 혼자 걸어다니는 인생의 걸음마를 다시 시작하는 소년에게 어머니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린다. “빨리 일어나서 엄마랑 살자”하는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아들도 그저 멍하니 눈물만 흘린다.

‘현장기록 병원’이란 프로그램이 힘을 발하는 것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죽음 앞에 내몰린 사람들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이다. 거기에는 소년의 속을 알 수 없는 고통과 투지 속에 숨겨진 어쩔 수 없이 가녀린 소년의 마음이 있고, 그런 아들 앞에서 강한 척 하지만 결국 아들의 무릎에 고개를 숙이고 마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으며, 그런 그들에게 좀더 아프지 않고 좋은 치료를 해주지 못해 인간적인 고뇌에 빠지는 의사들의 마음이 있다. 병원은 이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굳이 연출하지 않아도 그런 위대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맨 얼굴의 위대한 인간들을 발견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자신 속의 위대함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 될 것이다.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와 남녀관계는 진화 중

언제부턴가 여성 캐릭터가 ‘여성스럽다’는 표현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닌 것이 되었다. 차라리 ‘섹시하다’거나 ‘도발적이다’라는 도전적인 이미지는 나은 편. ‘여성스럽다’는 이미지는 이제 ‘예쁜 척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일까. 여성 캐릭터들은 ‘예쁘고 청순 가련한’ 모습을 버리고, 한껏 ‘씩씩한’ 이미지로 변신 중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윤은혜)은 이러한 트렌드의 정점에 있는 캐릭터. 남장여자라는 설정 속에 부정적인 의미로 보여지는 ‘여성스러움’은 철저히 가려진다. 그녀의 드러난 모습들은 술 취한 남자 하나 정도는 거뜬히 업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고, 불량배들 몇은 두드려 팰 수 있을 정도로 싸움을 잘 하며, 앉은자리에서 자장면 다섯 그릇을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식욕을 가졌다는 것이다.

말투는 물론이고, 걸어다니는 모습이나 다리를 쫙 벌리고 앉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남자의 그것을 보여주는 은찬이란 캐릭터는 그러나 분명 여자다. 그러니 남자대 남자(?)로서 사장과 직원이 된 한결(공유)과 은찬에게서 사랑의 감정이 솟아날 즈음, 드라마는 재미를 갖게 된다. 시청자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남장여자에게 끌리는 남자로서의 한결이 우스우면서도 귀엽고, 그런 한결에게 끌리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남장여자 은찬의 사랑이 애틋해진다.

여기저기 드라마마다 넘쳐나는 도식적인 사랑이 식상하게 느껴질 때, 이들의 사랑은 우정이나 의리의 탈을 쓰고 나타나 그 사랑을 교란한다. 한결이 은찬을 끌고 가 “한번만 안아보자 미치겠다”고 말하며 안을 때나, 은찬이 한결에게 갑자기 기습키스를 하고 변명을 해댈 때, 그리고 의형제를 빙자하면서 서로 곁에 두려는 마음을 전할 때, 사랑은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뒤로 숨는다. 그러니 이들의 관계는 만나면 서로 까칠하고 헤어져 혼자 있을 땐 애틋해진다.

이러한 씩씩한 여성 캐릭터와 남자가 엮어 가는 사랑의 방식은 처음부터 남녀의 관계로 시작되지 않는다. 종영한 ‘메리 대구 공방전’에서 가진 것 없어도 꿈 하나로 씩씩한 메리와 대구가 사랑으로 발전하기 전까지 그들은 동료의식으로 가까워졌다. 입만 열면 ‘배신’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은 같은 길을 어렵게 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동료애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보다는 우정이나 의리에 가까운 관계이다.

이러한 남녀간의 관계는 ‘9회말 2아웃’에 가서는 30년 지기란 설정으로 제시된다. 늘 서로를 까칠하게 대하는 난희(수애)와 형태(이정진)도 서로의 어려움을 봤을 때는 그 우정이 발동해서 마음이 가지만, 그것은 딱 거기까지만이다. 사랑은 아직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이들은 착각한다. 그 착각이 주는 재미는 이들의 우정을 빙자한 사랑 얘기에 힘을 실어준다.

이런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와 이로 인한 남녀관계의 변화는 현 사회상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결과다. 그만큼 여성들은 드라마 속 남녀 관계에 있어서(그것이 연애문제든 사회 속에서의 성별문제든) 남자라는 성에 귀속되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 이것은 과거 남성 중심적인 멜로드라마에서 여성 중심적인 멜로드라마로 진화한 결과다. 그 속에는 질척하지 않고 상큼 발랄한 순정만화 톤의 사랑을 꿈꾸는 여성들의 로망이 들어있다.

이들 드라마는 과거의 멜로드라마들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대신 “어이 친구! 우리 연애나 해볼까.”하고 묻는다. 그 엉뚱함에 쿡쿡 웃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이것이 달라진 이들 드라마들의 연애방식이 주는 매력이다.

‘다이하드 4.0’에서 아버지가 떠오른 이유

‘다이하드’시리즈가 여타의 액션영화와 다른 점은 형사라는 노동의 피곤함을 액션에 녹여낸다는 점이다. 일상의 피곤함에 절어있는 귀차니스트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에게 가족과 얽힌(남 일이었다면 이렇게 죽어라 뛰어다녔을까) 테러사건이 벌어진다. 그러자 이 나른해만 보이던 남자는 가부장으로서의 놀라울 정도의 끈질긴 근성을 발휘해 테러를 진압하고 가족을 구해낸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이 설정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액션에 스며들어 있는 아이디어와 유머이다. ‘다이하드’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액션을 선보인다. 1편이 빌딩이고 2편이 공항이며 3편은 뉴욕시가 됐다. 제한된 공간이라는 점은 그 공간이 가진 특성을 활용하는 액션이 가능하다는 역설적 기능을 한다. 빌딩은 고층에서 뛰어내리고 창으로 뛰어들고 하는 액션들이 묘미를 주고, 공항은 연료통을 열어놓고 떨어진 맥클레인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 비행기를 날려버리는 유머 섞인 액션이 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이니 4편의 배경을 어디로 할 것인가가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다이하드 4.0’은 한때 카리브해의 유람선을 배경으로 계획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의 선택은 사이버라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절묘한 것은 지금까지의 존 맥클레인이 보여준 액션이 말 그대로 생노동에 가까운 아날로그의 첨단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디지털 세상이 가진 위악과 허망함을 모두 액션에 넣어 풍자할 수 있는 데다가, 20년 간 유지해온 캐릭터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은 ‘다이하드 4.0’의 최적공간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 테러로 보여지는 디지털 세상이란 컴퓨터 하나로 미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는 위악을 가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주먹 한 방으로 부숴 버림으로써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허망한 공간이다. 맥클레인이란 아날로그 형사는 자판을 두드리는 세상에도 여전히 주먹이 더 쓸모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컴맹인 맥클레인을 위해 매튜 페럴(저스틴 롱)이란 해커가 붙는다. 그런데 이 매튜란 캐릭터와 맥클레인의 조합 또한 절묘하다. ‘다이하드’시리즈에서 맥클레인의 노동(?)이 가족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공식 속에 매튜와 맥클레인의 관계는 유사가족을 형성한다(물론 딸이 등장하기는 한다).

마치 컴퓨터에 능통한 아들이 컴맹인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가 해야만 하는 엄청난 일을 해내는 것처럼 이 영화는 영리하게도 둘의 관계를 밀착시켜 놓았다. 여기에는 또한 디지털 세상에 살아가는 관객의 대리인으로서의 매튜라는 캐릭터도 존재한다. 관객들은 매튜 같은 일상 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사건 속에 휘말리고 맥클레인이라는 아날로그 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이하드 4.0’이라는 모험의 터널을 함께 통과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또한 디지털 영상으로 가득한 작금의 액션 영화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턴트로 하는 땀내 나는 액션들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여기에 쫓아오는 헬기를 향해 총알처럼 날아가 꽂히는 자동차나, 터널 속에서 디지털로 조작된 신호에 의해 양방향에서 몰려오는 차들의 충돌 장면 같은 것들은 정말 다이하드적이라 할 수 있는 액션의 유머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퀀스들이다.

이 블록버스터에서 어딘지 정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절묘한 공간의 설정과 노동을 끌어들인 액션 히어로, 디지털 세상의 아날로그 형사라는 기막힌 스토리 설정, 매튜 같은 현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만한 캐릭터의 설정,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아날로그적 액션들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버전업된 내용들이 ‘다이하드 4’가 아닌 ‘다이하드 4.0’이라 붙인 이유다.

세월이 19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다이하드’라는 제목에 관객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이 ‘다이하드’한 액션이 어느 때 보아도 ‘다이하드’한 사회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절어 귀차니스트가 된 존 맥클레인은 이 시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거의 졸다시피 하던 귀차니스트가 가족이란 이름에 벌떡 일어나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노동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지금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다이하드 4.0’이 제시한 디지털 테러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네 아버지들 앞에 던져진 재난을 말하는 것만 같다. 형사라는 ‘다이하드’한 직업이 일상이 된다는 것은 퍽이나 슬픈 일이다. 그만큼 그의 삶이 거칠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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