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없고 환타지만 키우는 경제 프로그램

말 그대로 건강에 관한 비타민 같은 정보를 알려주던 ‘비타민’에서 파생된 ‘경제비타민’은 건강만큼 관심이 많은 돈버는 정보를 알려줘 전 국민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기획의도에서부터 ‘대한민국 대국민 부자 만들기 프로젝트’라 붙일 정도로 이 코너는 돈에 당당하다.

과거라면 돈이나 부자라는 말에 어떤 잘못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어 꺼려하던 연예인들도 이제는 당당히 부자라고 자신을 밝힌다. 이렇게 달라진 돈과 경제에 대한 시각은 그만큼 현실경제가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사는 데 꼭 필요한 경제관념을 갖게 해준다는데 분명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하지만 문제는 이 경제프로그램이 말하는 ‘부자 되기’가 진짜 서민들의 비타민이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혹 ‘부자 만들기’라는 슬로건 뒤의 진짜 얼굴에는 대박에 대한 시청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선정성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방미의 부동산, 투자인가 투기인가
물론 경제프로그램의 모든 내용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자들도 이 시청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아이템의 유혹을 견뎌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경제비타민-보물상자’의 ‘200억 부동산 투자 여왕 방미’편은 숨겨졌던 그 욕망이 얼굴을 드러낸 경우이다. ‘200억 부동산 투자’라는 제목의 문구에서부터 그 선정성은 예고되었다.

제목이야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붙여다 치더라도 내용에서 방미가 부동산으로 돈을 번 것이 투자라기보다는 투기에 가깝다는 사실은 이 아이템의 선정이유를 다시금 의심케 한다. 은행대출로 집을 한 채 사고 그 집을 담보 삼아 또 대출을 해서 집을 두 채로 늘리고 또 대출을 받아 세 채로 늘리는 방식을 재테크 혹은 투자의 범주로 말할 수 있을까. 이 전형적인 부동산투기 수법에 대해 출연한 전문가 역시 ‘교과서적인 방법을 실천’한 경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식이 월 평균 소득 340만원 선인 도시근로자나, 월 평균 수익이 400만원 미만인 맞벌이 직장인들에게 얼마나 현실성이 있느냐는 점이다. 그것을 투자라고 본다 하더라도 그런 투자(?)가 가능하려면 적어도 상당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재력이 없는 과도한 투자는 투자가 아닌 투기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부자 연예인들이라는 특정집단이 투자라 부르는 것이 서민들에게는 투기가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위화감은 여기서 생겨난다.

이것은 비단 방미의 경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비타민’은 이전에도 ‘10억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김생민, 조영구, 윤정수, 이혁재 등의 연예인들이 부자가 된 사연을 소개하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왜 서민들이 봐야 하느냐는 거센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10억 만들기는커녕 1억 만들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서민들이, 어느 정도 돈을 벌어 재테크의 종자돈이 충분한 잘 나가는 연예인들의 이야기에 극도의 위화감을 갖게 된 것이다.

정보 없는 인포테인먼트, 재미는 있었나
정보를 좀더 쉽게 풀어 재미있게 알려주겠다는 이른바 인포테인먼트(인포메이션+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경제 프로그램들은 현재 정보의 신뢰성에 의심을 받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투자의 성공이라는 것이 개개인에 따라 상당히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른바 ‘성공 포인트 10’같은 형태로 일반화하는 것은 정보의 신뢰성에 금이 가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것은 특정한 그들의 방식이지 누구나의 방식이 될 순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를 가지고 제대로 놀기는 했을까. 연예인들의 부자 스토리에 재미를 느꼈다면 그 재미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들 경제 프로그램들은 전면에 부자 만들기, 10억 만들기 등 선정적인 문구로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그 방송을 보면 부자가 되고 10억을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목을 끌기 위해 조장된 환상에 불과하다. 혹자들은 이런 내용이 희망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에 있어 희망이란 실현 가능성이 있을 때 얘기지, 불가능한 희망은 대박에 대한 욕망 혹은 절망만 키울 뿐이다.

여기에 연예인들은 그 이미지를 부여한다. 부자 연예인의 이미지는 소위 ‘잘 나간다’는 이미지와 등가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된 사연에 당당하다. 여기에 어려운 시절 이야기까지 끌어들이면 인간적인 이미지까지 얻게 된다. 그러니 그들의 출연은 당연한 것. 문제는 이들의 이미지를 끌어다 재미의 요소를 만드는 제작진들이 이른바 정보와 재미가 전도되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연예인들과 경제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재미는 시청자들의 부자에 대한 선망과 환타지를 끄집어내 연예인이라는 이미지에 넣어줌으로써 대리충족을 시키는 효과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것이 환타지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시청자들은 분노하게 된다. 방미의 경우를 포함해 몇 가지 물의를 촉발한 코너들이 바로 그 환타지가 노골적인 프로그램에 의해 깨졌던 지점이다.

부자 연예인들을 보는 서민들의 마음은 환타지 속에 있을 때는 선망이 되지만, 그 환타지가 깨질 때는 분노가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정보를 주어야 하는 프로그램이 왜 환타지를 만들고 있느냐는 점이다. 진짜 서민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경제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은 불가능한 걸까. 기왕지사 ‘경제비타민’이란 타이틀을 붙였을 바엔 서민들에게 진정한 비타민이 될 수 있는 정보가 가득한 프로그램이 되길 바란다.

‘개와 늑대의 시간’, 전문직 장르 드라마 살릴까

이준기가 출연한다는 점만 갖고도 충분히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드라마는 이점을 갖고 출발한다. ‘왕의 남자’와 ‘마이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는 ‘플라이 대디’로 주춤했지만 최근 들어 ‘화려한 휴가’로 연기의 진폭이 달라졌다는 걸 보여줬다. 연기자 이준기의 연기는 과거보다 좀 묵직해지고 날이 서 있다.

첫 회 시작부분에 강렬한 추격 신에서 보여준 이수현(이준기)의 모습은 2회에서의 번듯하게 자란 모습과 대비를 이루면서 드라마가 진행될 그 중간 변화의 과정에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독특한 제목 또한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제목을 이렇게 달 때부터 이 드라마는 분명한 선악구도보다는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지는 인물들에 더 집중될 것이라는 걸 기대하게 한다.

스토리는 복수극의 구도를 따라가되 거기에 제목에서 암시한대로 상당히 많은 갈등 요소들을 포함시킬 것이 예상된다. 지금의 캐릭터를 그 스토리 라인에 잘만 풀어놓으면 꽤 괜찮은 복수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초반 설정에서 이 드라마는 상당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 셈.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어딘지 위태롭게 보이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히트’나 ‘에어시티’에서 보였던 액션과 멜로 라인의 부조화가 염려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드라마의 첫 회 도입부에 등장했던 추격 신은 ‘히트’의 도입을 연상케 하고, 2회에 등장한 공항 신은 ‘에어시티’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수현, 서지우(남상미) 그리고 강민기(정경호)의 멜로 라인은 2회를 넘긴 지금 이미 설정되어 있다.

지난 드라마들에서 장르 드라마가 갖는 긴장감을 여지없이 느슨하게 만든 장본인이 멜로였다는 점은, 액션과 멜로의 조화가 이 드라마의 성패를 갈라놓을 수도 있을 거라는 걸 말해준다. 다행스러운 건 이수현이란 캐릭터가 ‘에어시티’의 김지성(이정재)이나, ‘히트’의 차수경(고현정)처럼 애인이나 동료의 복수가 아닌 부모의 복수를 꾀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절실하고 강렬한 욕망을 가진 캐릭터이기에 느슨한 멜로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현재 드라마에 쏟아지는 엇갈린 반응들은 이 장르 드라마가 아직까지는 어설픈 느낌을 주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그 비교대상은 홍콩 느와르로 대변되는 세련된 액션이다. 앞으로 전개될 이수현이 청방의 언더커버로 들어갈 것이란 점은 애석하게도 이 드라마를 저 ‘무간도’와 비교하게 만든다. 하지만 같은 내용에도 전개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의 영화로 탄생한 ‘티파티드’를 볼 때, 비슷한 설정에도 중요한 것은 그 장르를 제대로 살려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장르를 제대로 살려내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큰 위험성은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그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제목에서 비롯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제목에서 드러난 이수현과 서지우(남상미)의 상황이 너무 일찍 구도를 잡은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만일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의미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가 원수라는 상황을 말하는 거라면 이야기는 너무 일찍 단서를 제공한 셈이다. 다행히 여기에 이수현과 강민기의 관계가 변수로 작용한다. 어쩌면 남녀 관계에 우정 관계를 접목하는 부분에서 드라마는 좀더 힘을 얻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건 2회가 끝난 지금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지금 상황은 말 그대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에 가정과 제언을 붙이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지금 현재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겪은 어려운 길을 걷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저 해가 땅 끝에 붙어 있는 사물을 분별하기 어려운 시각에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이 드라마가 개가 될지 늑대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느 것이든 장르에 충실한 드라마가 나오길 기대한다.

혁명과 사랑이 섞인 그 오묘한 맛, ‘경성스캔들’

시대가 달라지면서 입맛도 달라지듯 드라마의 맛도 다양해지고 있다. 비빔밥하면 고추장에 나물, 참기름, 계란프라이를 떠올리던 건 과거지사다. 이제 비빔밥은 새싹, 한치, 날치알 등등 넣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넣어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드라마도 마찬가지. 역사라는 용기에는 퓨전된 상큼한 맛의 현대적 멜로가 복고풍의 아릿한 향수와 섞이고, 감칠맛 나는 설정과 캐릭터 대사들이 양념으로 들어가 독특한 맛을 낸다. 그 정점에 있는 드라마라는 음식은 바로 ‘경성스캔들’이다. 만일 퓨전이 뭔지 알고 싶다면 이 드라마의 맛을 살짝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네가 혁명을 가르쳐 줘 난 사랑을 가르쳐 줄께
“네가 나한테 혁명이 뭔지 가르쳐 줘. 그럼 내가 너한테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줄께.” 급기야 바람둥이 선우완(강지환)이 나여경(한지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들어 있는 단어들이 예사롭지 않다. 혁명과 사랑이라니.

과거라면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았을 일제시대라는 배경에 멜로 라인을 퓨전한 이 독특한 비빔밥은 의외로 참 맛이 좋다. 그것이 그냥 새로운 맛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달라진 시청자들의 입맛을 정확하게 맞춰 이뤄낸 퓨전이기에 그 맛이 좋다는 것이다.

혁명과 사랑이 동떨어진 단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상주의가 가진 낭만주의의 속성은 이 두 단어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밀착되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럼에도 여기에 간극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일제시대를 다루던 여타의 작품들 속의 사랑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이다. 시대의 무게감을 버텨내지 못해 사랑보다는 혁명이 더 앞서있었던 것.

하지만 ‘경성스캔들’은 다르다. 사랑을 다루되 가볍게 건드린다. 그리자 혁명과 사랑은 선우완의 대사처럼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등가의 힘을 갖는다. 마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두 가지 버전처럼 진행된, ‘조마자(조선마지막여자) 모던걸 만들기’와 ‘바람둥이 혁명남 만들기’같은 이 드라마의 핵심 재미 요소는 이런 힘 배분으로 인해 가능했던 시퀀스들이다.

과거의 가치와 현재의 가치를 버무리다
이러한 ‘경성스캔들’의 시도는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시대상을 너무 가볍게 건드려 공감은커녕 반발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이 드라마는 신구세대 시청자들이 함께 앉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드라마가 된다.

일제시대가 주는 과거적 배경에 대한 향수는, 경쾌한 댄스홀의 음악들과 중절모로 대변되는 멋쟁이 신사들, 구어체적인 연극적 대사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유교적 가치를 지닌 캐릭터들이 버무려지면서 만들어진다. 무엇보다도 그 향수의 정수가 되는 것은 이념이다. 지금 같은 이념 없는 시대에, 무언가에 대항할 수 있는 이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적 감각의 가벼운 멜로는 만화 같은 장르적 장치들을 활용하면서 젊은 세대들의 감성에 조우한다. 댄스홀이라는 공간에서의 집단댄스 장면은 마치 뮤지컬 같은 기분을 자아내게 만들며, 선우완이 근무하는 지라시 출판사의 세 남자 김탁구(강남길), 신세기(허정민), 왕골(고명환)은 마치 고대희극의 유쾌한 코러스 같은 역할처럼 활용된다.

그리고 이 과거와 현재는 선우완과 나여경이라는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멜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즉 선우완은 현재적 가치를, 나여경은 과거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그 두 가치들은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며, 그러기에 그 둘은 서로에게 그 가치를 일깨우는 중이다.

일제시대라는 무거움과 무채색으로 상징되던 시대에, 가벼움과 화려함으로 부활한 혁명과 사랑은 그렇게 이 한 드라마에서 만나게 되었다. 과거를 다루었으되 현재의 가치가 번득이고, 그럼에도 과거의 가치를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이어가는 ‘경성스캔들’. 그 퓨전의 맛이 오묘한 이유다.

서글픈 치맛바람, ‘강남엄마 따라잡기’

SBS 월화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왜 굳이 ‘강남엄마’라고 구체적으로 지칭했을까. 제목이 선정적이긴 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 강남에 사는 엄마들은 그저 좀 부유한 엄마들이었지 이 드라마가 만들어낸 신조어처럼 ‘강남엄마’라는 테두리로 구획되진 않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강남의 엄마들이 다 드라마가 묘사하는 것처럼 자식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휘날리진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실재 강남의 엄마들이 그렇지 않다면 전혀 현실성 없는 이 드라마에 요지부동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할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왠지 마음 한 구석을 울리는 데가 있다. 왜 그럴까.

그녀가 강남엄마가 되려한 까닭
그것은 ‘강남엄마’라는 지칭이 그럭저럭 이해되는 현 교육의 문제와 여기에 미묘하게 얽혀있는 빈부격차의 문제가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강남이란 지명의 의미는 그저 지시적인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8학군으로 상징되는 교육열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동산 과열현상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그저 강남의 문제만이 아니고 강북 혹은 지방에서도 소위 명문이라는 학교들 주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니 ‘강남엄마’는 그런 비뚤어진 교육열과 부동산으로 대변되는 소위 부유층의 특권의식을 가진 엄마들을 표상할 뿐 실제 강남의 엄마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의 ‘강남엄마’가 되기 위해서 현민주(하희라)는 “자식을 위해 미친 년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원조강남엄마’인 윤수미(임성민)의 도발적인 말 때문이다.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란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민주를 더 눈 뒤집히게 만드는 것은 윤수미와 시댁식구들이 보이는 강남으로 대변되는 소위 가진 자의 특권의식이다. “지들이 무슨 수로 여길 와”하는 그녀들의 태도는 현민주로 하여금 진짜 ‘미친 년’처럼 자존심도 뭉개고 수모를 참아가며 강남으로 이사가고 말겠다는 오기를 만든다.

엄마 vs 학습매니저
하지만 이렇게 오기가 생기면서부터 그것은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의 욕망이 되어버린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소위 강남엄마들은 엄마라기보다는 ‘학습매니저’다. 아이들의 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그 일정에 맞춰 차로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매니저들. 그래서일까. 드라마 속 아이들은 왠지 엄마들의 도움을 받는다기보다는 엄마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질투에서 비롯됐고, 그러다 차츰 남의 자식과 비교하기 시작했으며, 상대방을 욕하다가 결국 따라하게 됐고, 점점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현민주가 겪는 욕망의 역전은 이 시대 엄마들이 엄청난 사교육의 부담 속에서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현민주가 말한 ‘자식을 위해서’라는 변명 속에는, 실은 자신은 돈이 없어 못한 공부 자식은 원 없이 시키겠다는 자신의 욕망이 숨어 있다. 진우의 좋은 엄마였던 현민주는 점점 학습매니저가 되어간다. 현민주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 원조강남엄마라는 윤수미의 상황은 더 비극적이다. 현재 그녀의 존재는 오로지 아이들의 학습매니저로서만 증명된다. 바람 피는 남편조차 아랑곳 않고, 아버지 생일에 아이의 특강을 고집하는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다. 그녀는 한 남자의 여자도 아니고 아이들의 엄마도 아니다.

무엇이 엄마이길 포기하게 만드나
학부모의 이야기와 함께 드라마 한 축의 이야기를 차지하는 서상원(유준상)으로 대변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이 교육과 부의 문제가 구조적이라는 걸 증명해준다. 명문대 나와서 사립중학교의 선생님 혹은 유명 학원강사가 되어 돈을 벌겠다는 꿈을 꾸는 서상원이란 캐릭터는 결국 강남으로 표상되는 부유층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히 자가 발전되는 이 사회의 구조를 보여준다. 교육이 부를 낳고 부는 똑같은 교육조건을 강요하는 순환구조가 반복된다. 이것은 마치 명문이 부동산 과열을 낳고 그 부동산 과열로 인한 부가 다시 교육열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 속에서 윤수미 같은 ‘강남엄마’이든 현민주 같은 ‘강남엄마’를 따라잡고 싶은 엄마이든, 아니면 그 가족들이든 모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가 엄마이길 포기하고 학습매너저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아이들이 아이들이길 포기하고 학습기계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강남의 엄마들도 그저 엄마라 불리지 않고 굳이 ‘강남엄마’라 불리는 이 사회는 불행하다. 그래서일까. ‘강남엄마 따라잡기’를 보면서 가끔씩 그 치맛바람의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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