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돼먹은 세상, 여자로 산다는 것

그녀는 이름이 이영애(김현숙)다. 하지만 그녀는 이 예쁜 이름이 싫다.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거나, 남자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름과 매칭이 되지 않는 얼굴과 몸매를 본 사람들의 불쾌한 반응이 싫기 때문. 사람들은 이영애란 이름에서 “저로 인해 모든 것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하고 묻는 장금이를 떠올리며 기꺼이 “얼마를 더 다짐받으셔야 나와 함께 떠나시겠습니까?”하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를 보는 순간, 그들은 입을 삐죽거린다. 영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중이다. “너나 잘 하세요!”

‘막돼먹은 영애씨(금요일 밤 11시 tvN방영)’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 드라마는 막돼먹은 세상을 그린다. 영애씨가 대면하는 세상은 버스 치한이 오히려 “당신 같은 사람 엉덩이를 미쳤다고 만져!”하며 소리치는 세상이고, 멀쩡한 이름이 있지만 늘 ‘덩어리’라 부르며, 여직원이 앞에 있는데도 포르노를 보면서 “같이 볼래? 배워둬야 하잖아”하는 성폭력과 성희롱이 일상화된 회사이다. 이런 막돼먹은 세상을 그려내는데(그려낸다기보다는 고발하는데) 필요한 것은 나긋나긋한 드라마라는 안전한 틀이 아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다큐 드라마라는 새로운 형식을 빌어 영애가 대면한 세상 속으로 시청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형식은 tvN이라는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케이블 채널 속의 르뽀 프로그램을 보는 듯 하다. 시작부터 모자이크 처리된 영애씨가 음성변조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은 ‘리얼스토리 묘’의 한 장면 같고, 영애씨의 동생 영채(정다혜)가 배신한 남자친구를 좇아 비디오방을 급습하는 장면은 ‘독고영재의 현장르뽀 스캔들’을 보는 것 같다. 곳곳에 ‘인간극장’을 연상케 삽입되는 내레이션은 드라마라는 환타지로 들어가려는 시청자들의 발목을 잡아 다시 현실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다큐 드라마는 기존 드라마들이 해온 관습적인 장면들을 해체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그런 드라마들은 돈 많은 남자와 잘빠진 여자가 만나 아옹다옹 대는 모습들을 보여줘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를 유포한 혐의가 짙지 않은가. 그러니 이 다큐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거침없이 늘어진 뱃살을 보여주고, 인정사정 없이 음식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런 비현실적 이미지를 만들어놓은 트렌디 드라마들에 대한 공격이아닐 수 없다. 사실 드라마 속 주인공들도 집으로 돌아오면 맨 얼굴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화장실에서는 자연인이 된다.

이 드라마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어글리 베티’ 같은 드라마와 같은 류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막돼먹은 영애씨’는 ‘못난 여자의 성공기나 연애담’같은 환타지를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리얼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환타지를 깨는 지점에서 드라마는 가치를 발한다. 영애씨의 고군분투가 안타까우면서도 힘을 주고 싶은 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저 트렌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욕망하는 왕자님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삶이며, 기본적인 예의라는 점 때문이다. 막돼먹은 건 영애씨가 아니라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세상이다.

해체된 가족이 보여준 새로운 가족의 희망

오랜만에 실컷 웃어보았고 오랜만에 실컷 감동을 받았다. 8개월 간 시청자들을 웃기고 울린 ‘거침없이 하이킥’에 쏟아지는 찬사들이다. 그 방영시간대가 좀체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일일드라마들이 떡 버티고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 드라마들과 거침없는 대결을 벌인 이 시트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일 가족드라마가 가진 관성적인 시청과는 차별화 된 ‘거침없이 하이킥’. 거침없는 그들이 하이킥한 것은 무엇일까.

캐릭터, 세대 간의 벽을 하이킥하다
이 시트콤의 주 시청층은 30대 이하의 젊은 층. 특히 10대 시청층은 5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일드라마가 가진 40대 이상의 시청층과는 사뭇 다른 구조인 셈이다. 일일드라마와 똑같이 가족을 다루고 있지만 이렇게 젊은 시청층을 TV앞에 끌어 모을 수 있었던 힘은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이 시트콤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이 시트콤이 처음부터 하이킥한 대상은 일일드라마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다.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집안의 최고 어르신의 이미지는 이 시트콤으로 들어와 ‘야동’, ‘굴욕’, ‘악플’, ‘애교’ 같은 젊은 세대의 기호들과 만나면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야동순재와 애교문희 같은 4자 캐릭터가 탄생하면서 어르신은 고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무언가 좀더 젊은 세대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캐릭터로 변신했다. 그 분들의 거침없는 무너짐을 보며 폭소를 터뜨리는 순간, 그 폭소의 반향이 다음날 인터넷을 통해 회자되는 순간, 두터워만 보였던 세대 간의 벽은 쉽게 허물어져 내렸다.

이것은 가부장적인 옛 가족의 형태가 무너지고 점점 수평적으로 파편화되어가는 현재의 가족상을 반영한다. 캐릭터들은 과거의 수직적 관계들을 모두 해체해 재구성해 놓는다. 고개 숙인 가장 식신준하(정준하), 거침없이 OK를 할 줄 아는 당당한 커리어우먼 OK해미(박해미)는 부부관계의 역전을, 동생이지만 형 같은 완소윤호(정일우)와 형이지만 동생 같은 카리스마 민호(김혜성)는 형제관계의 역전을, OK해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애교문희의 모습은 고부관계의 역전을 그려낸다. 이 역전을 통해 드라마는 거침없이 그간의 권력적이고 수직적인 가족관계를 해체한다.

거칠 것 없는 패러디, 탈 장르
달라진 가족관계를 좀더 효과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시트콤은 패러디와 탈 장르 같은 연출기법들을 사용했다. 패러디는 시트콤의 주요한 웃음의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거침없이 하이킥’이 사용하는 패러디의 소재나 대상은 거의 전방위적이라 할 만큼 광범위하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기존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광고, 심지어는 뉴스 속에 관습적이라 할 만큼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관습적 장면들을 거침없이 패러디한다.

예를 들어 ‘악플순재’로 유명해진 에피소드에서 악플 때문에 순재 대신 경찰서에 출두했다 나온 윤호를 맞는 장면에서, 마치 영화 ‘대부’에서 비롯되어 조폭 영화에서 흔히 관습적으로 나오는 장면을 패러디하는 것 같은 것이다. 검은 세단과 순재의 ‘수고했다’ 같은 대사는 심각한 영화 속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우스꽝스런 순재와 윤호, 준하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준하와 해미의 결혼기념일 에피소드에서 육교에서 노래를 부르고 과장된 몸짓으로 육교 위로 달려가 서로 안는 장면에서 마침 터져 오르는 축포 같은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또한 민호의 카리스마 에피소드에서는 코를 찡긋거리면서 하는 영화 ‘홀리데이’의 최민수의 연기를 고스란히 패러디해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이 같은 심각하지만 관습적으로 처리되는 장면들의 패러디를 통해 터져 나오는 웃음의 원천에는 반드시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인물들과 그 인물을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준하와 해미의 결혼기념일 과장된 사랑행위는 범이에게 목격된다. 범이의 어처구니없는 얼굴은 친절하게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장면의 희극성을 상기하게 만든다. 민호가 코를 찡긋거리면서 이것이 효과가 있다고 착각할 때, 그 모습을 흉내내는 가족들의 모습을 객관적 입장에서 보는 범이의 얼굴이 삽입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 시트콤이 패러디를 넘어 거침없이 탈 장르에까지 이른 것은 크나큰 성과라 할만하다. 슬랙스틱 코미디에 멜로 드라마적 구도와 스릴러적인 요소, 심지어는 SF까지(최초 우주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유는 이 장르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넘나들었다는 건, 이 시트콤이 얼마나 거침없이 패러디를 활용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민정과 최민용이 출연한 광고들이 모두 패러디 광고(“깎아주세요”를 “먹여주세요”로 바꾼 비빔면 광고나 드림걸즈를 연상케 하는 카드광고 등)라는 점은 이 힘이 고스란히 광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해체된 가족에서 희망을 보다
하지만 패러디를 통해 파편화되고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그 웃음이 그저 냉소에 머무르지 않은 점은 작가와 PD가 이들 가족 구성원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트콤에서 웃다가 갑자기 가슴 먹먹한 사연이 교차되는 것은 바로 그런 애정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이다.

고압적으로만 보이던 순재가 문희에게 사랑의 마음을 골세레머니를 통해 전하기 위해 죽어라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달라진 가족 관계 속에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끌어내 준다. 잘 나가는 아내와 모든 게 잘 풀리지 않는 남편인 해미와 준하의 관계가 그저 달라진 권력관계가 아니라 거의 닭살에 가까운 애정관계로 유지된다는 점도 그렇다. 이것은 툭탁대면서도 서로를 도와주고 존중하는 민호, 윤호 형제도 마찬가지며, 민민, 신민, 윤민 커플이 보여준 새로운 애정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은 여타의 일일드라마가 하듯 과거적 가치로 되돌아가는 가족의 모습보다는, 현재 파편화되고 있는 가족 그 자체의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새로운 희망을 예기하게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족들은 각자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족이란 틀 안에서의 정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거침없이 하이킥 한 것은 달라진 가족관계 속에서 과거의 가족관계만을 보여주는(심지어는 강요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습적 일일 가족드라마이다. 그 거침없는 하이킥은 그러나 비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해체된 가족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고마운 전언이다.

단막극이 주는 청량감, ‘그라운드 제로’

드라마는 꼭 길어야 맛이 아니다. 2부작 드라마 ‘그라운드 제로’는 짧아도 압축되고 잘 짜여진 스토리와 굵직한 메시지, 그리고 연기자들의 호연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가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라운드 제로’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진 원자폭탄의 피폭지점 혹은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를 뜻한다. 드라마가 이 용어를 제목으로 삼은 것은 삶의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온 불행과 그 불행 속에서 절망하고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의 ‘그라운드 제로’는 제각각 살아가던 세 남자가 부딪치게 되는 자동차 사고지점이다. 거기서 택시기사 유동선(박철민)은 갑자기 차로 달려든 김천수(김갑수)를 치게 된다. 그리고 그 택시에는 승객으로 이주현(김남진)이 있었다. 신문 사회면에서 봤다면 이 정도 기사는 단 몇 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드라마는 그들이 그라운드 제로에 오기까지의 사연을 파고든다.

세 남자는 모두 아픔을 갖고 있다. 유동선은 1년 안에 수술을 해야 하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내가 있고, 김천수는 뇌물수수라는 누명에 아내의 불륜사실까지 알게되면서 절망에 빠진다. 이주현은 911 테러로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다. 사고가 터지면서 이 각자의 아픔들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드라마는 눈물의 릴레이라 할 만큼 연달아 벌어지는 슬픔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감동해서 울고, 분노해서 울고, 미안해서 울고, 후회가 돼서 울며, 고마워서 운다. 그리고 그 눈물이 끝날 즈음, 그들은 깊은 상처 위에 돋아난 새 살을 발견하게 된다. 김천수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만 자신의 몸을 기증함으로써 타인의 삶으로 생을 이어준다. 그를 통해 다시 아내가 살게된 유동선은 그를 천사라고 부르며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오른다. 이주현은 연인에 대한 아픈 기억을 털어 내고 돌아온 김소영(황보라)과 새로운 관계를 엮어간다.

이 드라마가 이토록 눈물폭탄을 터뜨리고 있으면서도 신파가 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 속의 눈물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혼자 흘리는 눈물이기 때문이다. 즉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던 아픔과 일 대 일로 대면하면서 눈물이 솟아나기 때문에, 그것은 치유의 눈물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 눈물 연기를 해야하는 연기자들이다.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준 김갑수의 눈물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한 회한의 눈물연기를 보여준 김남진, 그리고 웃기다가 감동 주다가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박철민이란 연기자의 호연은 눈물연기의 거장들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조금 인기 있다 싶으면 연장을 해대고 인기가 없으면 조기 종영시켜 버리는 시청률 지상주의의 환경 속에서 ‘그라운드 제로’는 그 시청률 잣대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단막극들의 필요성을 웅변해준다. 짧기에 더 짜임새 있고 짧기에 더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는 단막극이야말로, 느슨한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하는 장편 드라마들 속에서 참신한 청량제 역할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란 커피의 중독성

커피. 카푸치노 에스프레소 정도는 되는 은은한 계피향이 섞인 커피, 아침이면 괜스레 한 잔 손에 들고 그 향을 음미하고 싶은. 와인. 깊은 맛의 보르도 클라렛이나 까다롭지만 우아한 부르고뉴 피노누아 정도 되는 와인, 시원스런 셔츠가 잘 어울리는 멋진 남자가 뒷짐에 숨겨 가져온.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바로 그런 커피와 와인 같은 공간을 그려낸 드라마다. 그것은 모든 청춘들이, 아니 청춘을 꿈꾸는 이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곳이다.

그 곳은 일터이면서 일터가 아닌 놀이공간이고, 호통을 치지만 연인 같은 사장이 있는 곳이며, 아옹다옹하면서도 오랜 지기 같은 친구들이 있는 곳이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을 한다. 스트레스는 일에서 온다기보다는 연인 같고 친구 같은 관계들의 비틀어짐에서 온다. 카페는 파리를 날려도 그들은 멋진 폼으로 농구를 하고 시원스런 분수대로 뛰어든다. 일? 놀다보면 다 된다. 그러니 걱정말고 마음껏 꿈을 꾸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현실? 그런 건 머리 싸매고 쥐고 있기보다는 “몰라 몰라 어떻게 되겠지”하며 넘겨 버리라 한다. 왜? 청춘이 있으니까.

게다가 주인공 고은찬(윤은혜)은 남장여자다.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이 중성적 느낌의 주인공은 섹시함의 화신처럼 고혹적인 한유주(채정안)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섹시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 남자 같은 털털한 모습 속에 가녀린 여성의 눈물을 숨기며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저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을 연상케 한다. 거기에는 묘한 신비주의가 섞인다. 윤은혜의 연기 논란을 잠재울만한 이 캐릭터는 지금 막 저 순정만화에서 빠져나온 듯 생생하다.

고은찬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두 남자 또한 갖고 싶은 꿈을(욕망이 아니라 꿈이다) 꾸게 하는 캐릭터다. 최한결(공유)은 어딘지 까칠하게 대하지만 순수한 느낌으로, 최한성(이선균)은 때론 날카로우면서 때론 편안한 어딘지 사는 맛을 알 것 같은 분위기로, 고은찬에 몰입된 시청자들을 꿈꾸게 한다. 최한결은 소년으로 최한성은 소녀로, 고은찬을 대한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얼마나 중성적인 매력이 주는 재미를 잘 알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중성을 꿈꾸는 것은 우정 같은 안전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때론 그 선을 넘나들며 사랑을 하고픈 ‘질척거림 제로’의 로맨스를 꿈꾸기 때문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그래서 현실에선 좀체 불가능한 꿈 같은 공간을 그려낸다. 그 곳에는 트렌디 드라마에서 늘 다루는 빈부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환타지는 보이지 않는다. 최한결은 말 그대로 왕자(프린스)지만 그렇다고 드라마는 그 왕자에 대한 신분상승의 욕망을 그려내진 않는다. 환타지가 끈적끈적한 욕망을 추구하는 대신,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누구나 선망하고픈 꿈을 꾸게 만든다. 청춘들은 그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이 아닌 편안한 흐뭇함을 느끼게 된다. 본래 이름이 ‘왕자다방’이었고 그 주인이 홍사장(김창완)이란 점은 이 드라마가 꾸는 꿈이 젊은 세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적어도 김창완이라면 30,40대의 중년이라도 기꺼이 젊은 시절의 꿈을 떠올리게 해줄 테니까.

이 모든 것들이 청춘을 꿈꾸게 하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커피 같은 드라마다. 그 커피는 젊은 나날의 다방커피일 수도 있고, 뉴요커처럼 아침 출근 시간에 한 잔씩 사들고 들어가는 카푸치노일 수도 있다. 칼로리는 있지만 에너지를 위해 마시는 것도 아니고, 물론 맛에 취해 찾는 이들이 많지만 주로 어떤 정서나 분위기가 더 앞서는 이 기호식품을 앞에 두고 누구나 한번씩은 설렘을 가졌을 것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그 젊음이란 불가항력 속에서 때론 달콤하고 때론 씁쓸했던 커피 같은 청춘을 생각하며 미소짓게 만드는 드라마다. 그것이 마실수록 빠져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이란 커피의 중독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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