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현대물, SBS 사회극, KBS 사극

TV 콘텐츠에서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져만 간다. 그러니 방송사들의 드라마에 거는 기대 또한 높아질 수밖에. 시쳇말로 잘 빠진 드라마 한 편은 방송사들을 웃게도 만들고 울게도 만드는 상황이다. 작년 내내 MBC를 웃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주몽’이었다. 최고시청률을 연일 갱신하며 월화의 밤을 장악해버린 이 퓨전사극으로 인해 타 지상파의 월화 드라마들은 연일 최저시청률을 경신하는 눈물의 밤을 보내야 했다.

세련된 현대극으로 승부하는 MBC
하지만 그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일까. ‘주몽’이 종영한 이후, MBC의 드라마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케세라세라’, ‘히트’, ‘메리 대구 공방전’, ‘에어시티’ 등 기대작들은 기대한 만큼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주목할만한 드라마로 ‘하얀거탑’과 ‘고맙습니다’ 정도가 완성도와 시청률 양쪽을 어느 정도 가져간 드라마로 기억될 뿐이다. 여기에 애초에 방영되기로 했던 ‘태왕사신기’가 계속 늦춰지면서 그 여파를 고스란히 다른 드라마들이 겪게 되었다.

MBC가 주도했던 ‘포스트 주몽’으로서 ‘태왕사신기’의 방영이 연기되고, ‘포스트 하얀거탑’으로 만들어낸 ‘히트’나 ‘에어시티’같은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이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자 MBC가 갖고 있던 ‘드라마 왕국’의 이미지는 많이 희석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본래 MBC가 가졌던 강점인 현대물들로 그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기대작은 ‘커피 프린스 1호점’, ‘개와 늑대의 시간’ 같은 작품들이다.

MBC 드라마의 특징은 세련된 현대물이란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시청률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케세라세라’, ‘히트’, ‘에어시티’, ‘메리 대구 공방전’을 비롯해, 현재 좋은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모두 세련된 현대물이란 특징이 있다. 또한 드라마의 영상연출에 있어서도 이들 드라마들은 탁월한 감각적 화면을 잡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영상시도는 젊은 층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하지만 좀더 현실적인 느낌을 드라마를 통해 받길 원하는 40대 이상 시청자들에는 조금 낯선 것이 사실이다.

사회극으로 현실의 이슈화를 노리는 SBS
MBC가 내놓은 빈자리를 채운 것은 SBS. SBS 드라마는 그 시청자들에게 낯선 것보다는 좀더 현실적인 것을 보여주면서 사회적인 파장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SBS의 CP들은 최근 들어 오히려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것을 기획한 다음, 그것을 드라마로 제작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을 통해 이 시대의 달라진 남녀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 호평을 받은 것에 이어, ‘쩐의 전쟁’은 사채업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사회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어 현재 방영되고 있는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교육문제를 좀더 사회적 시각으로 접근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강남과 강북의 문제가 드라마를 통해 전면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것. 이 정도 되면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쩐의 전쟁’ 방영 후 그것이 실제 대부업체들의 이미지 전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듯이, ‘강남엄마 따라잡기’ 역시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드라마가 그려내는 모습들에 대한 뜨거운 찬반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SBS 드라마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자체의 힘에 외부적인 힘, 즉 현실의 힘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현실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이들 드라마들은 충분한 함의를 가진다. 드라마를 보면서 자꾸만 현실을 반추하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인터넷이란 매체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 속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식이 될 수 있다. 

KBS, 사극으로 부활을 노린다
MBC와 SBS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장 힘겨운 시간을 가졌던 것은 KBS. 공영방송이라는 무거운 옷을 입고 있어, 상대적으로 MBC가 했던 새로운 시도나 SBS가 했던 현실의 이슈화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던 KBS는 결과적으로 이 두 방송사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은 격이 됐다. 전통적으로 강점을 갖고 있는 일일드라마와 사극을 빼고는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참패를 면치 못했다. ‘꽃 찾으러 왔단다’, ‘마왕’, ‘헬로 애기씨’ 같은 드라마들은 완성도를 떠나서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사극은 KBS였다. 사극의 특성상 많은 노하우와 세트 등을 보유한 KBS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극에서는 계속 강세를 유지했다. ‘황진이’가 호평과 함께 성공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대조영’ 역시 꾸준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시작해 호평을 받고 있는 ‘경성스캔들’ 은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끌어들였고 월화극으로 새로이 시작한 ‘한성별곡’ 역시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사극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법. 최근 KBS는 자체적으로 드라마 기획팀을 만드는 등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다.

방송사별로 드라마들이 이렇게 제 각각의 색깔을 내는 데는 공영방송으로서의 KBS와 그걸 깨기 위해 새로운 시도로 맞서는 MBC,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약간의 논란까지 감수하며 기꺼이 경쟁에 끼어 든 SBS, 이 방송3사의 입장이 깔려 있다. 게다가 거의 극에 이른 드라마 시청률 경쟁은 이제 남을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끈다. 어찌 됐건 골라보는 재미를 가지게된 시청자들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세 방송사가 천편일률적인 색깔을 보여준다면 그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군용헬기의 프로펠러가 팽팽 돌아가고, 군인들의 군화발이 절도 있게 움직인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폭약이 터지고 이건 마치 전쟁영화의 도입부분 같다. 그런데 이건 전쟁영화가 아니다. ‘그 평범한 날’ 벌어진 납득되지 않는 일일뿐이다. 택시를 몰며 사는 강민우(김상경)가 그가 사랑하는 박신애(이요원)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코미디 영화를 본다. 그 장면은 마치 멜로 영화의 시작 같다. 그런데 이건 멜로 영화가 아니다. 잠시 후 그들의 몸은 피로 적셔진다. 등장인물들은 마치 전원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정겹기 그지없다. 그건 마치 휴먼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에는 총이 매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든 총알이 날아와 그들의 머리에 꽂힐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화려한 휴가’는 이 모든 일상의 장르적인 그림들을 뒤집어버린 ‘그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날’이란 단어가 마치 보통명사처럼 특정한 날을 지칭하던 80년대, 군화발과 총검이 평화롭던 일상을 난자하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먼저 이런 일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주인공인 강민우의 시선을 통해 보여짐으로써 이념적인 코드를 배제하고 대신 인물들에 집중한다.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실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살아있다. 인물들이 쏟아내는 촌철살인의 대사들과 웃음을 절로 나게 만드는 상황들, 그러면서도 깊게 느껴지는 진심들이 어우러지면서 모든 장르를 뒤집어버린 영화는 여느 장르영화보다 훨씬 재미있어진다.

그리고 따뜻하고 생생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앞에 관객들은 이들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마치 당시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가졌을 폭력에 저항하던 시민들을 지켜주고 싶은 심정처럼. 이렇게 시간여행을 통해 80년대 광주의 한 시민이 되어버린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놀라운 친밀감과 안타까움, 공포, 연민, 분노를 느끼게된다. 이 즈음 영화가 하는 말은 ‘보라’는 것이다. 당신이 한 짓을, 혹은 당신이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그것은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러니 이 시대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끝나지 않고 여전히 진행형인 셈이다.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답게 저항하기 위해 죽어나간다. 차마 도청에 사람들을 남겨놓고 떠나지 못해서, 헛된 인생 한번이라도 사람을 느끼며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은 폭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하나하나 생의 선을 넘어갈 때, 지프차 위에서 박신애는 소리친다. “광주시민여러분,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영화 속 80년대 외쳐진 그 소리는 영화 스크린을 타고  27년이란 세월을 넘어 현재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귓속을 파고든다. 차마 보기 싫었던 차마 기억하기 싫었던 ‘그 날들’의 장면들은 이렇게 현재를 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그 날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갑작스레 군화발이 치고 들어오는 영화관이 아닌 곳에서 지금 당신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자유가 어떻게 얻어진 거라는 걸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시간 시청률이 마니아 드라마 만든다

‘마왕’, ‘케세라세라’, ‘경성스캔들’, ‘메리 대구 공방전’,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시청률은 낮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드라마만큼의 호평을 받는 드라마라는 것이다. 만일 시청률이 의미하는 것이 그만큼 호평을 받는다는 것이라면 이 ‘시청률 낮은 호평 받는 드라마’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래서 이상한 타이틀이 붙었다. 소위 ‘마니아 드라마’, ‘폐인 드라마’라는 것이다.

이 호칭이 붙는 순간, 그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마니아(심지어는 폐인?)가 되어버린다. 소수 취향에 특별한 광기(본래 마니아는 그리스어로 광기란 뜻)를 지닌 사람의 축에 끼게 되는 것. 하지만 진짜 그럴까. 그저 시청률에 의해 재단된 것은 아닐까. 만일 지금의 방식으로 산정되는 시청률이 현재 변화된 환경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떨까. 마니아 드라마는 진짜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세대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공감도
나이가 지긋하신 장년층 시청자분들은 ‘메리 대구 공방전’을 보면서 “도대체 저게 뭐 하는 것들이냐?”고 말한다. 등장인물들이 어려서가 아니라 그 독특한 스타일이 소위 말해 적응이 안 되는 것이다. ‘마왕’같은 작품은 아예 이해불가를 넘어서 고문에 가깝게 느껴진다. 작품 자체가 시청자들의 머리를 끝없이 추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소위 호평 받는 프로그램들 대부분에 대한 반응도 비슷하다. ‘무한도전’같은 프로그램은 “지들끼리 나와 떠드는 걸 뭐하러 보냐”고 하기 일쑤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어느 정도 학습이 필요하다. ‘메리 대구 공방전’을 재미있게 보려면 적어도 인터넷 소설이 주는 만화처럼 톡톡 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왕’이 재미있으려면 적극적으로 추리를 해보겠다는 약간의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무한도전’이 재미있으려면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TV 속에서 보여지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를 던져주지 못한다.

이것은 과거, 일방향적인 TV의 시청 행태로는 지금 같이 쌍방향적인 TV 프로그램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래서 장년층들은 채널을 돌린다. 이해할 수 있고 코드에도 맞으며 자신들에게 재미있는 프로그램에 고정시킨다. 일일가족드라마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나 현재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반면 똑같은 일일가족드라마라 해도 ‘거침없이 하이킥’처럼 어느 정도의 학습(적어도 이순재가 왜 야동순재로 떴는지는 알아야 한다)이 필요한 프로그램은 다르다. 시트콤이란 형식이 시청률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20% 전후의 시청률에 머무르는 건 바로 그런 이유다.

TV와 컴퓨터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TV란 그저 정보와 재미를 ‘전달’해주는 매체를 넘어서 그 전달된 정보를 통해 새로운 재미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다. 인터넷이란 의견의 장은 그 재미를 무한히 증폭시켜준다. 그러니 그들은 기성세대들이 원하는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을 찾게된다.

여기에 인터넷 다운로드 방식은 빠르게 젊은 세대들의 시청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TV로 방영되는 시간에 맞춰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다운로드 받은 드라마 파일을 컴퓨터나 PMP 같은 뉴미디어를 이용해 아무 때나 보는 게 더 편하다. 심지어는 여러 편을 한꺼번에 보는 몰아보기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TV가 기성세대의 매체가 되고 있는 반면, 젊은 세대의 매체로 뉴미디어들이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간의 시청형태는 TV와 컴퓨터로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IPTV가 그것이다. 실시간으로 다운로드를 받아 프로그램을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이 마법의 장치는 인터넷과 TV가 만나는 지점에서 나온 것으로 과거 TV의 개념을 바꾸고 있다. 그 중 가장 첨예한 것은 실시간 시청이란 TV의 개념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것은 엄밀히 말해 TV이기에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들조차 편리한 도구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더 파괴적이다.

물론 이것은 이제 막 태동하는 TV의 진화이기에 그 변화의 양상이 피부에 아직까지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진화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시청형태의 변화는 곧 이루어질 거라는 점이다. 문제는 지금의 실시간 TV 중심으로 이뤄지는 시청률 산정이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거나 최소한 준비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마니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마니아가 아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시청률은 낮지만 소위 말하는 대박 드라마만큼의 호평을 받는 드라마’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지금의 시청률 산정의 문제를 드러내는 게 아닐까. 그 호평은 특정 기관이 주는 것도 아니고, 몇몇 평론가들이 주는 것도 아닌 바로 시청자들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호평을 받으면 시청률이 높고, 그렇지 못하면 시청률이 낮아야 당연한 것이다. 이 비례적인 등식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청률이라면 그다지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그깟 시청률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보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처럼 산정된 시청률이 광고라는 힘을 등에 업고 드라마를 제작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자칫 잘못하면 현재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청률 산정으로 인해 드라마 제작이 기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미래의 시청자들을 지금부터 버리는 행위가 된다.

엄밀히 말해서 마니아 드라마는 없다. 오히려 마니아 드라마의 존재는 지금의 시청률 산정이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 마니아 드라마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청률 잣대로 인해 소외될 수 있는 세대들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것이 마니아 드라마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마니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마니아가 아니다.

참 잘한 ‘쩐의 전쟁’, 끝이 아쉬운 이유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에 대한 욕망과 그 헛됨을 드라마를 빌어 함부로 얘기하는 건 참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허망한 자기부정이 되거나 혹은 진부한 건전 드라마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쩐의 전쟁’은 다양한 장치(?)로 그 어려운 줄타기를 해낸 드라마다.

참 잘한 돈에 대한 풍자적인 접근
돈이란 소재가 얼마나 뜨끔한 것인가는 이미 이 드라마로 인해 촉발된 현실의 변화들에서 충분히 감지된 바 있다. 그러니 적당한 장치가 필요할 밖에. 이 드라마가 가진 만화적 연출과 스타일은 보다 극적인 상황을 만들면서 동시에 드라마와 시청자가 적당한 거리를 갖게 해준다. 만일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게 보여주었다면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논란의 거미줄에 잡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만화 같잖아’하며 심각한 상황이 넘어가는 순간, 거기에는 묘한 풍자의 힘이 생긴다. 풍자는 자기부정을 통해 비틀린 세태를 함께 비웃으면서 새로운 자기 인식을 일깨우는 장치이다.

‘사채업자들에 의해 모든 걸 잃은 금나라(박신양)가 스스로 사채업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가 인간이 아닌 돈 중심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의 드러내기 싫은 속살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글자로 표현될 때만 아이러니하게 보일 뿐, 실제 현실은 당연한 것이니까. 이 사회에서 돈을 받아쓰다가 돈을 벌게 되는 상황이 시작되는 것은 금나라와 같은 상실을 실제 겪거나 혹은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길 때이다. 그 때부터 금나라처럼 돈을 좇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러니 사채업자로 변한 금나라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잠재적 욕망을 대리해주는 통쾌함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시청자가 보기에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결국 돈에 혈안이 된 인간(어쩌면 거기서 새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일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함께, 캐릭터 설정을 통해 금나라의 변신을 용인하게 만든다.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인물이 있다. 하나는 금나라의 스승인 독고철(신구)이고 또 하나는 서주희(박진희)다.

독고철과 서주희가 말하는 ‘참 잘했어요’
독고철은 이 드라마 상에서 돈이라는 욕망이 또한 좋은 욕망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인물이다. 그러니 금나라가 돈 귀신의 구렁텅이에서 개처럼 구르며 마음껏 욕망을 탕진하는 상황에서 그를 구원해주는 인물은 독고철이 될 수밖에 없다. 독고철과 금나라와의 수직적인 관계는 마치 사회에서 간도 쓸개도 빼며 하루를 살아낸 샐러리맨이 집으로 돌아와 이미 그 같은 경험을 하고 탈속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독고철은 금나라가 무언가 일을 제대로 할 때 돈으로 보상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장을 찍어준다. 우리네 아버지들처럼 ‘참 잘했어요’하고 등을 두드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집 안에서의 위안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돈 귀신에 슬쩍 슬쩍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속출한다. 그래서 필요한 캐릭터가 수평적인 관계로서의 서주희다. 금나라가 서주희네 집의 빚을 해결해주고 그녀를 담보 삼는 순간, 그것은 금나라에게는 현실의 진창에서 구르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잠시 서주희에게 담보해주는 셈이 된다. 양심을 맡긴 채권자인 금나라는 흔들릴 때마다 담보인 서주희에게 달려와 맡겨둔 양심을 꺼내본다. 그가 아버지 같은 존재인 독고철에게서 배운 ‘참 잘했어요’라는 문구를 그녀의 채무노트에 찍어주는 순간, 스스로 ‘참 잘했다’는 위안을 받는다.

이 수직적인 관계로서의 독고철과 수평적인 관계로서의 서주희라는 캐릭터로 인해 금나라라는 돈에 대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은 두 가지를 얻게 된다. 첫째는 그의 욕망에 기꺼이 시청자들이 이입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상반되어 보이는 욕망으로부터의 탈주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선 도통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박신양의 연기가 돋보이는 건, 이런 실현 불가능한 현실을 넘어선 이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도 한몫을 차지한다.

엔딩이 참 잘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
이것은 또한 ‘쩐의 전쟁’이란 드라마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중적 잣대(욕망 추구와 그 헛됨)를 어느 정도는 성공적으로 그려낸 요인이 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차츰 드라마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애초에 독고철과 서주희라는 캐릭터를 설정하면서부터 예기된 결과이다. 사실 드라마의 힘은 욕망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 바, 돈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던 금나라가 최초에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한 독고철과 서주희라는 인물에 집중하면서 그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금나라의 욕망을 무너뜨리는 인물들이다.

드라마가 섣부른 해피엔딩으로 달려가지 않고 금나라를 정점에서 쓰러뜨리는 것은 장태유 PD 특유의 풍자의 칼날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지만 시청자들이 용납하기엔 어려운 설정이다. 독고철과 서주희라는 캐릭터를 설정했을 때부터, 장태유 PD는 금나라의 욕망을 끌어내리겠다는 생각을 한 셈이지만 그것이 꼭 그의 죽음으로 갔어야 했을까.

마동포가 원수라는 걸 알게된 금나라가 방황할 때, 독고철이 한 말이 있다. “너의 아버지를 죽인 건, 마동포가 아니라 돈”이라고. 결말은 금나라를 버리기보다는 돈을 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환타지적인 결론이라도 끄집어내는 게 안전했다. 이런 환타지가 싫다면 애초부터 독고철이나 서주희라는 캐릭터는 더 이상 금나라와 지금 같은 관계로 이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쩐의 전쟁’의 엔딩은 지금까지 금나라를 통해 욕망의 무한질주를 즐겨오다가, 차츰 그 욕망이 사라지자 아쉬워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그리워하는 작은 기대마저 부서뜨리는 힘이 있다. ‘쩐의 전쟁’은 그것마저 부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그것은 아쉽게도 지금까지 ‘쩐의 전쟁’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드라마의 결말은 작가가 내고 싶어서 마음대로 내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납득할 수 있는 끝을 보여주는 것이다.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졌다가 또 그 어수룩한 캐릭터들에 관조적인 입장이 되어 웃다가, 어느 순간 뜨끔한 기분을 느꼈던 시청자들은 이런 도장을 찍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어려운 줄타기 “참 잘했어요”라고.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마지막 엔딩이 나온 후로 이 도장에는 반어적인 뉘앙스가 하나 더 붙게 되었다. 그것은 아쉽게도 비꼬는 투의 “참 잘했어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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