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vs 사람, 누가 이길까

돈 앞에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신문을 펼치기만 하면 어느 면에서나 그 글자들 이면에 흐르는 돈 냄새를 맡게 되는 시대, 돈에 웃고 돈에 우는 물신화된 세태를 사채업자라는 직업을 통해 극화한 ‘쩐의 전쟁’은 이제 이 본격적인 질문에 근접해가고 있다. ‘쩐의 전쟁’이란 제목은 표면적으로 보면 금나라(박신양)로 대변되는 ‘착한 쩐’과 하우성(신동욱)으로 대변되는 ‘악한 쩐’의 전쟁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돈과 사람의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칼바람이 도는 드라마 속에서 탈속한 듯한 인물로 그려지는 독고철(신구)마저, “사람은 돈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돈의 위력은 사람으로서는 넘어서지 못할 산처럼 보인다. 주인공 금나라 역시 마찬가지. 마동포의 지하금고에 숨겨진 돈 보물을 얻게되자 보이지 않는 돈의 욕망이 그를 잠식해 들어간다. ‘제일 무서운 것이 돈 중독’이라는 독고철의 말처럼, 금나라 역시 저 스스로의 돈 중독이란 무덤을 파고 들어간 마동포의 욕망을 느낀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 ‘돈의 노예’가 되느냐 ‘돈의 주인’이 되느냐를 두고 갈등한다. 금나라의 든든한 ‘담보(?)’인 서주희(박진희) 또한 거액의 돈 앞에 양심을 버릴 결심까지 하게 된다(물론 무위에 끝났지만). 금나라의 친구인 철수는 가족을 위해서라는 핑계 앞에 우정을 저버린다(이것도 역시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돈에 대해 아쉬울 게 없이 자란 이차연(김정화) 역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불량채권 해결을 위해 악명 높은 불량처리반(?)을 부른다.

이야기는 천사리 마을로 장소를 옮기면서 좀더 대결구도를 본격화시킨다. 독고철이 어려운 사람들의 일수를 받아 살 터전을 마련한, 천사리 마을은 독고철의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적인 사랑이 좀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화된 공간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하우성이 내놓는 돈의 유혹 앞에 쉽게 흔들린다. “난 실패한 부자다.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어도 사랑은 안 그렇거든.” 천사리 마을과 그 마을에 살던 독고철의 옛사랑 이야기와 오버랩되면서 드라마는 금나라와 서주희의 사랑을 엮어낸다.

초반부 욕망의 질주에서 드라마는 이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꿈틀대는 돈에 대한 욕망 대신 멜로 구도가 본격화되고, 천사리라는 환타지적인 공간이 등장하면서 조금은 도식적이고 교훈적인 결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초반부의 긴장감을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마동포(이원종)는 병원신세를 지고 있어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독고철의 격언 같은 문구들은 초창기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초반부의 경구들에는 ‘돈 벌기’에 대한 노하우를 담고 있었지만 이젠 ‘돈 제대로 쓰기’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내가 부자가 된 건 많은 가난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진실을 말하는 독고철의 이야기가 어딘지 나와는 동떨어진 교훈적인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혹 우리의 관심은 ‘부자’나 ‘돈 벌기’에 있었지 ‘가난한 사람’이나 ‘돈 제대로 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돈도 있어야 가난한 사람도 돌아보고, 제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돈이 먼저인가, 아니면 돈에 대한 곧은 생각이 먼저인가 하는 고민 앞에서 우리 역시 돈과 사람이 대결하는 ‘쩐의 전쟁’의 한가운데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너무 웃겨서 슬픈 ‘메리 대구 공방전’

먼지 가득하고 어두침침한 만화가게에서 대낮부터 무협지나 만화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 청춘은 속도 그렇게 유쾌할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메리 대구 공방전’이 그려내는 청년실업의 풍경이 그렇다. 겉으로 보면 시종일관 키득거리게 만들지만 한 꺼풀만 벗겨내 보면 그 처절한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느낌의 청춘풍경.

무협작가를 꿈꾸는 강대구(지현우)와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황메리(이하나). 하지만 그들이 가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그들은 고개 숙여 눈물이나 흘리는 찌질한 청춘들이 아니다. 이유는 하나. 꿈이 있으니까. 꿈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까. 이것이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사회문제를 다룬 이 드라마가 한없이 가볍게 다뤄질 수 있는 근거다.

그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꿈이라는 진통제이자 자양강장제이며 때론 젊음만이 갖는 치유제를 맞으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모두들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라 하지만 그들에게 꿈은 영혼이다. 그러니 강대구가 이소란(왕빛나)의 집에서 보디가드에 자서전 작가로 일하는 것에, 혹은 황메리가 돈을 받고 지방 무대(사실은 사기꾼들이었지만)에 서려는 것에, 그들은 서로 “영혼을 팔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꿈꾸는 걸 가로막는 건 돈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이다. 번듯한 직장과 번듯한 집, 빳빳한 지폐가 가득한 지갑,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그리고 심지어는 돈으로 만들어내는 외모까지, 돈 없는 그들 앞에 놓여진 현실은 암담한 것이다. 피자 한 판을 공짜로 먹으려 동네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쿠폰을 모으고, 공짜로 고기를 먹기 위해 뽀뽀를 하며, 동네 구멍가게 아르바이트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들은 처절하다.

“내 꿈은 충치야. 품고 있어도 아프고 빼도 아프다.” 황메리의 이 말은 꿈의 달콤함과 현실의 처절함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그것도 지금 같은 현실에서는 더더욱) 청춘들의 고통을 말해준다. 그런 꿈을 먹고사는 상처투성이 천연기념물 청춘들이 서로 만났으니 어찌 통하지 않을까. 강대구에게 영감을 주는 그녀나, 꿈을 포기하려는 황메리에게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게 싫어진 거야”라고 말하는 그는,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동료의식은 사랑으로 커나간다.

한편 ‘메리 대구 공방전’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윗세대들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캐릭터는 꿈을 버리고 돈을 좇는 이세도(이기열)라는 인물. 돈이면 뭐든 된다고 믿는 황금만능주의의 표상처럼 보이는 이세도는 그러나 자기만의 공간에 향수처럼 삐에로 복장을 놓아두는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 설정은 꿈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하는 메리와 대구에게 마치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는 효과를 준다. 꿈을 버려 얻은 돈으로 꿈을 꾸지 못하는 신세가 된 이세도를 통해, 드라마는 현실만을 좇는 세태와 그렇게 청춘들을 몰아가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건드린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 모든 메시지가 철저한 반어법으로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모두 애써 웃고 씩씩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겁고 질척해지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위장전술이다. 그저 쿡쿡 웃으며 가볍게 귀여운 캐릭터들의 툭탁거림을 보고 있다보면 아주 가끔씩 보이는 캐릭터들의 속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취해지고 있는 만화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취하고 있는 이런 태도는, 실제 현실의 청춘들이 갑갑한 사회 현실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도대체 이제 막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청춘들에게 그 대가로 꿈을 버리라고 하는 사회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애써 자학하지 않고 꿋꿋이 웃으면서 “그래도 난 꿈이 있어!”하고 당당하게 외치는 방법 외에 말이다.

시종일관 명랑 쾌활해 보이던 메리와 대구는 문득 상대방에게 눈물을 보였을 때, 그래서 속마음을 들켰을 때, 그것을 무마해주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오늘밤에 웃으면 당신 끝장이야!” 그 명랑하면서도 상대방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말은 또한 웃다가 울게 만드는 이 드라마에 공감하는 시청자들에게 드라마가 던지는 격려처럼 들린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이 시대의 부자와 가난한 자

물론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현실이라는 기본 전제가 없는 한, 드라마가 가진 공감의 틀은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자를 동경한다거나 좋은 배경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진 현실의 한 측면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드라마들이 잡아내는 현실은 과거와 같은 그런 막연한 현실, 혹은 천편일률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구체적인 현실이다. 마치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질 만한 사회적 이슈를 담은 소재들이 드라마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쩐의 전쟁’, 개인부채 문제를 건드리다
우리 사회가 가진 개인부채와 파산의 문제를 사채업자라는 구체적인 직업을 통해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는 ‘쩐의 전쟁’, 겉으로 보기엔 백수들의 희망가처럼 보이지만 밑바닥에 청년실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메리 대구 공방전’, 그리고 우리의 암담한 교육현실은 물론 천민자본주의가 가진 천박한 현실 등 가장 첨예한 지역불균형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강남엄마 따라잡기’가 그것이다.

‘쩐의 전쟁’은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사채 대부업의 폐해에 직격탄을 날린다. 돈에 웃고 돈에 우는 세상을 정작 드라마는 만화처럼 그려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현실의 반응은 뜨겁다. 연예인들의 잇따른 대부업체 광고 중단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급격히 떨어진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금리인하까지 고려하게 된 대부업체들의 상황은 이 드라마가 건드린 현실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메리 대구 공방전’, 청년실업문제를 다루다
‘메리 대구 공방전’은 장기화되고 있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다룬다. 3번 정도 회사의 문을 두드리면 입사할 수 있었던 70년대의 상황은 이제 아련한 향수가 됐다. 지금은 심지어 300번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 앞에 청년들은 절망하고 있는 상황이다. 메리(이하나)와 대구(지현우)는 바로 그들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좀더 우회적으로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메리와 대구가 처한 사회현실은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보다 드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는 꿈과 희망’의 이야기로 발전시킨다. 이것은 드라마적으로만 보면 좀더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시도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다루는 현실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시청률 상승 같은 즉각적인 반응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강남엄마 따라잡기’, 교육 불평등 문제를 다루다
새로 시작한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이 모든 사회문제의 총체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천민자본주의가 가진 경박한 세태는 물론이고, 강남강북으로 나누어진 지역 불균형의 문제, 입시위주 교육정책이 양산하는 사회문제가 들어 있다. 청년실업과 사채업의 문제가 이 교육문제, 경제적 불균형의 문제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고 그 지역에서 공부한 결과가 성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성공과 실패가 이렇게 부의 세습과 직결된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세 드라마가 결국 다루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돈의 문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 물론 부자는 모두 잘못됐고 가난한자는 모두 옳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 드라마가 그려내는 부자들의 모습이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 제대로 쓰는 이가 없기에 비판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가난한 자라는 점이고, 그들이 이런 사회적 문제 앞에 취하는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힘겹게 만든 이 돈을 마치 경멸하는 것처럼 대하지만 결국 그 욕망 앞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만큼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물림의 틀이 견고하다는 방증이며, 그만큼 우리에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그 견고함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것이 이들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평면적이기보다는 강력한 욕망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이유이며, 또한 이들 돈의 현실을 다루는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은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공간에 대한 공포영화다. 그 공간은 전준오(황정민)가 다니는 회사의 칸막이로 둘러쳐진 자신만의 책상이기도 하고, 애인 장미나(김서형)와 함께 편안한 저녁을 보내는 집이기도 하며, 건널목이 고장난 철길이기도 하고, 목욕탕을 개조해 살아가는 박충배(강신일)와 신이화(유선)의 검은집이기도 하다.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그 프레임 안에 유령보다 더 무서운 칼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어 있을 때 더 공포를 느끼게 한다. 반면 무차별적인 살인마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 긴장감과 공포감은 줄어들고 대신 그 감정은 긴박감으로 전이된다.

어둠으로 가려진 빈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공간에 남겨진 누군가(그것이 사람이든 유령이든)의 흔적이고, 또 하나는 그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객 스스로 빈 공간에 채워 넣은 두려운 상상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생각하기 싫은 그래서 의식 저편으로 넘겨버리고픈 끔찍한 그 무엇을 눈앞에서 목도할 것이란 예감. ‘검은집’은 그렇게 빈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겨둔 어두운 공간(검은집)을 끄집어낸다.

보험사정원 전준오에게도 바로 그 어두운 공간이 있다. 어린 시절, 자살한 자신의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다. 그가 “자살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 어두운 공간은 적어도 꿈이라는 무의식의 틀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상담자 개인의 정보를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근무 매뉴얼을 어기게 되는 순간, 끔찍한 무의식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죄책감이라는 검은집은, 박충배의 집에서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밖으로 빠져나온다.

어린 시절의 악몽은 박충배의 집에서 목격한 아이의 죽음으로 꿈이 아닌 현실이 되며, 그 현실로 드러난 무의식에 대항해 전준오의 의식은 싸움을 시작한다. 빈 공간은 이제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 추악함을 드러낸다. 전준오의 의식처럼 정돈되어 있던 그의 집은 이 마음 없는 살인자에 의해 난도질된다. 그리고 결국 전준오는 그토록 보고싶지 않던 무의식을 닮은 검은집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린다.

그런데 전준오가 그냥 지나쳤으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뛰어든 것은 그의 입버릇처럼 나오는 ‘인간의 마음’이나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용서받고 싶었다”는 전준오의 말은 그것이 죄책감을 벗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사투의 와중에 “이쯤 되면 사람 다 똑같다”는 살인자의 말은, 마음이라는 의식의 허울로 어두운 무의식을 가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섬뜩하게 응시한다.

이처럼 ‘검은집’이 가진 이야기는 소재나 내용, 그리고 지적인 재미의 측면에서 기존 우리네 공포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넓힌 공이 크다. 그럼에도 관습적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신체절단 같은 충격적 장면들이 오히려 영화의 공포감을 떨어뜨리는 것은 왜일까. 구체적인 장면들보다는 좀더 많은 여백을 넣었더라면 그 빈 공간이 주는 공포감이 더 컸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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