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에서 배종옥과 박진희, 그리고 한효주까지

이윤기 감독의 카메라는 늘 여자와 그녀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것이 여자의 섬세한 감정을 포착해 켜켜이 쌓아놓는 것으로 영화적인 성취를 이루어내는 감독의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감독이 다룬 영화의 이야기가 여자 주인공들의 감정변화를 따라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윤기 감독은 지금까지 찍은 영화 세 편에서 모두 여자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잘 잡아냈고, 그것이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여자 주인공들의 계보는 ‘여자 정혜’의 김지수에서, ‘러브 토크’의 배종옥과 박진희로 이어져 이번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한효주로 이어진다.

그의 카메라에 잡히면 여성 캐릭터들은 전에 보지 못했던 혹은 숨겨져 있던 독특한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여자 정혜’에서 그전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김지수의 페르소나가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신비로운 식물’ 혹은 ‘깨질 듯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조각’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극중 여자 정혜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는 반짝거림과 동시에 외로움, 따뜻함을 숨겨놓은 차가움 같은 외면과 내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긴장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윤기의 카메라와 연출력 때문이다. 그의 카메라는 늘 주인공 옆에서 서성댄다. ‘여자 정혜’는 영화 전체를 핸드 핼드 카메라로 찍어 고정된 화면을 볼 수가 없다. 이 서성대는 시선이 관객들로 하여금 정혜라는 여자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 불안하지만 친근한 시선에 관객의 시선이 맞춰지는 순간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일상적인 소소함을 지루할 정도로 잡아내는 이윤기의 연출력은 영화 속 캐릭터인 여자 정혜의 내면은 물론이고 심지어 연기자 김지수 속에 존재하는 여자 정혜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윤기라는 감독이 연출한 ‘여자 정혜’라는 접신의 영화를 통해 김지수라는 연기자를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해외영화제 수상과 국내 언론들의 호평 등, ‘여자 정혜’가 얻은 뜻밖의 성과는 이윤기 감독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했을까. 한 인물 주변에서 배회하던 카메라는 ‘러브 토크’로 와서는 굳건히 땅에 정착한다. 이것은 핸드 핼드 카메라가 갖는 단편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적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카메라는 장르영화처럼 더 세련되게 움직이며 인물들을 포착한다(특히 자동차의 움직임과 그 속의 인물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세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전작의 흐름을 그대로 타고 있는데 그것은 그 시선 속에 역시 배종옥과 박진희라는 여성 연기자들의 감정선을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이들과 이들 주변의 남자친구 혹은 연인들에 대한 ‘러브 토크’로 이루어져 있지만 감독은 이 두 여자의 심리와 감정의 부딪힘 같은 것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자 정혜’가 개인의 아픔과 상처를 좀 폐쇄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면, ‘러브 토크’는 대화하는 두 여자를 통해 그 상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윤기 감독은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다시 예전의 서성이는 카메라로 돌아간다. 그 카메라 속으로 들어온 인물은 한효주다. 우리에게는 윤석호 PD의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 속에서의 박은영이란 인물로 익숙한 한효주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 속에 숨겨진 아픈 영혼과 접신한다. 한효주는 어느 날 우연히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하룻밤동안 죽어 가는 한 남자의 딸 역할을 하게 되는 한 여자, 보경을 연기한다. ‘여자 정혜’가 폐쇄적인 상황에 놓인 한 여자의 아픔을 그려냈다면 ‘아주 특별한 손님’의 보경은 그 아픔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따라서 보경을 연기한 한효주의 페르소나는 좀더 적극적이고 솔직하다.

아쉽게도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대중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고 저예산 영화의 성공작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여자 주인공들이 모두 성공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 정혜’로 데뷔한 김지수는 ‘가을로’에서 그 돋보이는 연기를 보여주었고, ‘러브 토크’에서의 박진희는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를 통해 섹시 발랄한 캐릭터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은 한효주는 또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인물 주변의 일상들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것으로 그 인물의 감정을 통해 영화를 끌어가는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화면의 움직임이 적고, 파격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존 장르 영화적 관성에 싫증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독특한 여행을 제공해줄 지도 모른다. 새벽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문득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여자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슬픔의 공감을 가질 지도 모른다. 거기서 우리는 한효주가 가진 감성의 속살을 살짝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장소는 달라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멘토들

요즘은 선생님, 스승이란 말 이외에 ‘멘토’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그것은 선생님이나 스승이란 말이 ‘먼저 나신 분’ 혹은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의 의미를 갖는 반면, ‘멘토’는 친구이자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부모 같은 포괄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지혜와 신뢰로 인생을 이끌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연장자란 의미도 아니고 학교에서 쓰이는 선생님의 의미 이상의 것이 들어 있기에 ‘멘토’는 보다 친근하며, 보다 삶에 밀착된 지혜를 가르쳐준다. 이러한 스승보다 더 가까워진 멘토는 영화나 TV 속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대의 멘토, 백윤식
무언가를 배우고 싶지만 그것은 금지된 어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가는 멘토가 있다. 바로 백윤식이다. ‘파랑새는 있다’와 ‘서울의 달’에서 새롭게 주목받은 이 배우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밉지 않은 사기꾼 역할을 해내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준 백윤식은 ‘범죄의 재구성’으로 과거 멘토 자리를 다시 꿰어찬다. 그는 사기꾼 역할을 맡았지만 사기꾼들로 득시글대는 영화 속에서 단연 한수 위의 모습을 보여주며 묘한 멘토의 냄새를 풍겼다(호칭마저도 김 선생이다).

그 후 그는 ‘싸움의 기술’에서 병태에게 싸움을 가르쳐주는 은둔 고수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면 그가 단지 싸움의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은둔 고수는 병태에게 인생을 가르친다. 사실 병태가 더욱 이 고수에게 빠져드는 건 사실 부재하기까지 한 아버지의 존재를 거기서 찾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백윤식은 또 한번 멘토 기질을 제대로 발휘한 셈이다. 그 후 그는 이제 자연스럽게 이 시대 멘토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가 있고, 멘토가 등장한다면 바로 백윤식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백윤식은 씨름감독으로 등장하지만 실상 씨름은 별로 가르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전지시가 화장실에서 이루어질 정도로 이 엉뚱한 씨름감독은 마돈나가 되기 위해 천하장사대회에 나가려는 오동구의 든든한 멘토 역할을 해준다.

아무래도 그가 맡은 가장 빛나는 멘토 역할은 ‘타짜’의 평경장 역할일 것이다. 그는 우스꽝스럽고 장난끼 많은 도박꾼처럼 보이나 사실 그는 도박이란 중독적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달은 현인에 가깝다. 우리네 삶의 축소판이 도박판이라는 지점에서 공감을 불러낸 이 영화 속에서 평경장은 바로 그 도박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멘토이다. 그가 고니에게 가르친 것은 단지 도박의 기술만이 아니다. 그는 살아가는 법과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백윤식은 확실히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호감을 살만하다. 그 가르침이 단지 기술이 아닌 인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황진이를 키워낸 멘토, 백무
드라마 ‘황진이’는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는 우회적 방법으로 이 시대의 멘토를 보여준다. 그 시대의 운명의 틀 속에서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방법을 인물들이 하나씩 황진이에게 가르쳐줌으로써 현대여성들의 마음 속에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 인물들은 황진이의 마음 속에 들어왔다가 하나씩 사랑과 상처를 남기고 감으로써 황진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의 길’에 진한 깨달음을 남긴다.

그 첫 번째 멘토는 바로 죽은 은호이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지내왔지만 도무지 현실적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을 깨닫게 해준 은호는 황진이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은호의 자리를 차지할 새로운 인물들이 준비하고 있다. 김정한(김재원 분)이 지금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나 이것은 또 어떤 인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황진이의 진짜 멘토는 바로 백무(김영애 분)이다.

백무는 황진이를 예인으로 키워내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경쟁자인 매향의 수제자로 보내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때론 자신을 적으로 세우고 자신을 넘어보라며 황진이를 도발하는 백무의 모습은 어찌 보면 더 강한 자식을 키워내기 위해 벼랑 아래로 새끼를 밀어내는 사자의 그것과 닮았다. 그녀는 때론 악의 구렁텅이에 황진이를 몰아넣는 악마처럼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부모 같은 안타까운 마음과 자애로움이 숨겨져 있다.

헐리우드에서 찾아낸 워킹우먼들의 멘토
악마처럼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지혜 같은 걸 깨닫게 해주는 인물을 우리는 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발견한다. 바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메릴 스트립분)가 그 멘토이다. 촌닭 같은 앤드리아에게 자신이 하는 이 패션 일이 우스꽝스럽고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미란다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넌 니가 꽤나 유식한 줄 알겠지만, 실상은 니가 뭘 입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미란다는 앤드리아가 입고 있는 옷의 색이 수많은 브랜드와 상점을 거쳐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단 한 번의 멘트로 그녀의 사고방식을 뒤집어놓는 것이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에게는 악마 같은 존재지만 그걸 통해 앤드리아는 일과 성취에 대한 값진 교훈을 얻는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의 양면성(욕망과 함께 지켜내고 싶은 순수)을 거침없이 공격한다. 자신의 성공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지기까지도 버리는 그녀에게서 앤드리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되지만 거기에 대해 미란다는 이렇게 말한다. “웃기지마. 누구나 다 이런 삶을 원해.” 이 말은 앤드리아뿐만 아니라 여기 이 땅의 워킹우먼들에게도 꽂히는 말이었을 것이다.

백윤식 같은 금지된 것의 멘토이든,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현재를 말해주는 백무같은 멘토이든, 저 바다 건너온 미란다 같은 멘토이든, 그들은 모두 이 시대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멘토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과거적 의미의 스승들보다 친근하고, 보다 솔직하며, 핵심을 찌르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질문을 해대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알게 해주는 이 시대의 멘토들이다.

달라진 방송환경과 붕괴되는 아나운서라는 직종

그들은 연예인인가, 아나운서인가. 혹은 아나운서 출신의 연예인인가, 혹은 연예인인 아나운서인가. 최근 들어 끊이지 않는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은 마치 겉으로 보기엔 아나운서 자신들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대부분 아나운서들의 연예활동(물론 그 영역을 어디까지 봐야할지 알 수 없지만)에 대해 그것이 적절하냐 아니냐에서 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력이라는 도덕적인 잣대만을 아나운서들에게 들이대는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다.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아나운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달라진 방송환경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
먼저 아나운서의 위치에 있어 과거와 비교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나운서를 뉴스진행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 활동영역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킨 착각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아나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쇼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교양프로그램에도 나왔으며,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오래도록 ‘가요무대’를 진행했던 김동건 아나운서, 오랜 세월 ‘아침마당’을 이끌어온 이상벽 아나운서, ‘명랑운동회’로 유명한 변웅전 아나운서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아나운서의 연예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최근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이미 과거부터 죽 진행되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달라진 것이 있다. 진행자로서의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력이 좁아졌다는 점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 전체를 장악하고 조정하는 역할보다는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진행자가 아닌 출연자로서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한다. 이 현상은 마치 아나운서들의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더 많은 분야에 투입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진행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들은 여기저기에서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미지가 과거 김동건이나 이상벽, 변웅전 만큼 명료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일관된 이미지 구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퓨전 프로그램으로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
그들이 전문 진행자가 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은 달라진 프로그램의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프로그램들이 융복합을 통해 다양한 퓨전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느낌표’는 연예오락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고 ‘비타민’은 교양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상상 플러스’의 ‘올드 앤 뉴’나 ‘말달리자’, ‘스펀지’, ‘도전 골든벨’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양과 오락의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고 어느 순간에는 오락쪽으로 어느 순간에는 교양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러한 인포테인먼트 경향의 프로그램들이 야기한 것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이며, 동시에 연예인들의 아나운서화이다. 이 중간지대는 이제 치열한 아나운서와 연예인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은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의 혼란이다. 과거 전문화된 아나운서들이 특유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장악했던 것에 비교하면 지금의 아나운서들은 연예인과 동격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과거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요무대’를 진행하던 모습과, 노현정 아나운서가 ‘올드 앤 뉴’를 진행하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연예인화된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방송사들은 분명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에 연예인과 같이 끼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끼가 있는 아나운서를 필요로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 말해주듯 이들 아나운서들은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외모와 지성과 교양을 두루두루 갖춘 이들은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시청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공신력 있는 아나운서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 같은 아나운서로 갈 것인가.

그 한 가운데 놓여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인기를 끌고는 일찌감치 줄에서 내려온 아나운서가 바로 노현정이다. 노현정은 과감하게도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라는 공신력을 잡아먹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연예인 같은 인기를 끌면서도, 끝끝내 아나운서의 줄을 놓지 않고 동시에 뉴스 프로그램도 진행한 아나운서다. 방송사는 그가 연예인이든 아나운서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최대한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보낼 의무(?)가 있으므로, 스타 골든벨에 유사한 방식으로 노현정을 출연시켰다. 노현정의 줄타기는 점점 더 위험해졌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인기는 더 높아갔다. 최정점에서 줄을 내려온 노현정은 시청자들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잘된 일이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어떻게 봐야 하나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행운아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공신력의 선을 넘어 연예인화 되어버린 아나운서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아나운서의 생명이 공신력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방송사에 소속되어 아나운서로서 계속 있어야할 명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나운서는 급격한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공신력을 바탕으로 좀더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연예인은 그 생명력이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강수정 아나운서나 임성민 아나운서의 프리 선언은 그들이 이제 아나운서의 길보다는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걸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을 아나운서로 부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다. 성경환 문화방송 아나운서국장의 말대로 그들은 ‘방송인’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의 전직 아나운서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이미지로서 연예인이 되어도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쇼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는 그들을 보며 “어 아나운서가 이젠 연예인 다 됐구만”하는 오해를 하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보고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 후배 아나운서들이다. 그들은 달라진 방송환경에 아나운서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시도를 추구한다. 문화방송 이정민, 한국방송 김경란, SBS 김지연 아나운서의 남성잡지 모델 출연이나, SBS 김주희 아나운서의 미스 유니버스대회 참가 등은 이렇게 달라진 아나운서들의 인식을 말해준다.

떨어지는 공신력, 생존경쟁의 시작
이것은 또한 아나운서들의 생존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는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말이 나오는 직종이다. 한 아나운서의 행동이 전체 아나운서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재는 연예인의 길을 걷는 이들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이로써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아나운서들의 공신력은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몇몇 뉴스 프로그램에 남은 아나운서들을 제외하고는 이제 연예인들과 똑같이 아나운서들도 생존경쟁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쇼 진행자가 되기도 하고, 교양 프로 진행자가 되기도 하며 때론 연예인이 되기도 하는 모습에서 아나운서의 길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아나운서라는 본래의 직업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개그맨이나 가수가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고, 아나운서가 연예인이 되는 상황은, 아나운서만의 고유영역이 가진 공신력이라는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나운서들은 이제 ‘좀더 넓어져 보이는 길 위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점점 아나운서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송환경, 기회처럼도 보이고 위기처럼도 보이는 이 달라진 방송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김래원표 액션 드라마,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말 그대로 딱 정해진 공식을 걸으며 조금치의 곁길을 넘보지 않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다. 과거에 엄청나게 악명 높았던, 그래서 감옥에 가야했던, 그리고 감옥에서 후회하고 나와서는 ‘술 마시지 않고, 싸우지 않고, 울지 않겠다’며 바보처럼 행세해야 했던, 그러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는 현실 속에서 다시 과거의 그 길을 걸어가야 했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 이 정도면 영화 ‘해바라기’에 대한 대충의 설명은 끝이다.

하지만 그런 뻔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거나, 어떤 뭉클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오로지 김래원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김래원은 정말 김래원표의 드라마와 김래원표의 액션을 섞어 공식적인 신파 속에서 어떤 반짝거림을 발견하게 만든다.

감옥에서 나와 옛 동네로 돌아온 오태식을 연기하는 김래원의 모습에서는 노틀담의 꼽추가 떠오른다. 엄청난 괴력과 악마성을 그 속에 품고 있으나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더 이상 상처받는 걸 원치 않는 내면. 자신 속으로 틀어박혀 누가 때리기라도 하면 그 속을 들킬까 더 움츠러드는 몸. 맞는 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이나 되는 듯 무덤덤해지는 얼굴. 그것들은 저 노틀담의 꼽추의 비극적인 존재를 닮았다.

김래원의 눈빛은 늘 초조하게 상대방의 시선을 바라보지 못하고 몸짓 또한 잔뜩 상처 입은 짐승 마냥 위축되어 있다. 그가 왜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지 영화가 설명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슬픔에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 동물적인 울림이지만 그것만으로 영화는 관객들을 그에게 이입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제 김래원이 사회에서 받는 굴욕과 아픔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며 마지막 숨겨졌던 괴물의 분노가 드러나는 그 순간까지 관객의 마음 속에서 감정은 켜켜이 쌓여간다.

영화는 특별히 오태식이라는 괴물의 탄생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인간이 되려하는 오태식이라는 괴물을 다시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자가 조판수라는 두목이라는 것이다. ‘부동산 활극’이라 불리는 ‘짝패’, ‘비열한 거리’의 조폭들처럼 조판수 역시 바로 그 재개발에 뛰어든 작자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밀어버리고 자신들의 건물을 올려 이권사업에 뛰어드는 그들이 최소한 오태식이란 괴물을 다시 불러낸 장본인이다.

‘해바라기 식당’과 그 식당 주변에 심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불도저에 사라져버린 해바라기들은 이 영화의 제목이 발원한 곳이기도 하고, 또한 영화가 말하려는 소박한 주제(사실 이 영화는 주제의식보다는 장르적 재미에 치중한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 속의 해바라기들은 단지 그런 배경만이 아니다. 바로 김래원과 그의 엄마를 자청하는 덕자씨(김해숙 분), 그리고 그녀의 딸인 희주(허이재 분)가 바로 해바라기들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해바라기들을 짓밟아버린 그들에게 오태식이 괴물로 돌아오는 장면은 설득력을 얻는다.

폭발적인 라스트신에서의 김래원의 모습은 따라서 그간 숨겨온 악마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지만, 또한 관객들이 마음 속에 쌓아온 감정이 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길을 뒤로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야차처럼 걸어가며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또 한번 보게 된다. 노틀담의 꼽추. 그 비극적인 몸을 가진 존재를.

김래원은 광기와 감성의 양면을 적절히 가진 배우다. 어떨 때는 한없이 소년 같다가도(청춘, ...ing, 어린 신부) 어느 순간에는 악마 같은 눈빛을 뿜어낸다(미스터 소크라테스). 이런 감성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 ‘해바라기’의 오태식이란 인물이다. 김래원은 소박한 일상이 어색하기만 한 상처받은 짐승이 작은 행복을 찾았을 때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얼굴(심지어는 바보 같은)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의 야수성을 연기한다. 아마도 김래원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투사부일체>의 각본을 쓴 강석범 감독이 찾던 바로 그 인물이었을 것이다. 두 작품이 보여준 가족애를 찾는 드라마성과 액션물이 모두 가능한 그 인물.

다소 장르 관습적인 장면들의 과다와, 신파적 구도, 몰입을 방해하는 장르의 혼선 등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 영화는 김래원의 그 굵직한 연기를 통해 액션 너머의 드라마성과 드라마 이상의 강렬한 액션을 보여준다. 언뜻 보이는 김래원의 쓸쓸한 얼굴 속에서는 심지어 ‘희망노트’에 작은 소망을 적어가며 살아가는 소박한 우리네 서민들의 신산함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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