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 삼국지 정착이 가져온 개그맨의 어려움

‘개그 콘서트’의 간판 프로그램,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다.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다. 있는 스토리라고는 고작 ‘그 이마를 치는 동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에 대한 항변 정도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실에 공감을 느낄 이들이 있다. 바로 개그맨 자신들이다.

정착 단계에 들어간 공개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로 촉발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의 변화는 이제 방송 3사가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 형식이 이 시대의 대세임을 증명했다. ,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들, 끊임없는 경쟁체제... 이 파고를 넘어 이제 이러한 형식의 개그 프로그램은 정착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KBS ‘개그콘서트’에 도전장을 내밀며 등장한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양대 산맥으로 가르던 개그전쟁에 뒤늦게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MBC의 ‘개그야’가 등장해 ‘개그 삼국지’의 안정적인 형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개 방송류의 개그 프로그램들의 끝없는 경쟁와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은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짧은 개그만큼 짧아지는 개그맨의 수명
‘개그 삼국지’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이제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 하나의 시스템을 온전히 갖추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시스템은 우리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기 힘든 이 사회의 경쟁 시스템과 유사하다. 제작자들에 의해 걸러진 개그가 바로 TV에 담기던 과거 가족 경영식의 개그시대는 지났다. 한번 방송사에 소속되면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요순시절은 갔다. 이제 그들은 밀폐된 세트를 빠져나와 무대 위에 올려지고 그 즉시 관객들에게 판정을 받는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자동 퇴출 된다. 편집에 의해 TV에 담기지 조차 못하는 것이다. 개그는 독해졌고 처절해졌다.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그들의 개그는 분명 촌철살인의 번뜩임과 아이디어로 충만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웃음의 파장은 짧아졌다. 그들은 그 짧은 웃음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부속화된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처절한 개그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편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한없이 무너뜨렸다. 갈갈이는 무를 갈았고, 옥동자는 바보짓을 했으며, 세바스찬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생존하려 했지만 지금 그들의 형편이 나아졌을까. 여전히 갈갈이는 괴상한 복장의 옷을 입고 나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옥동자는 마빡이로 등장해 시종일관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세바스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생존하거나 퇴출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시스템 밖으로 나온 개그맨들은 나을까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난 개그맨들은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같은 예능프로그램으로 편입되었다. 몇몇 개그맨들은 그 프로그램의 MC로서 자리잡았으나 게스트도 아니고 MC도 아닌 장기출연자들(그들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고정출연자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의 상황은 저 시스템 속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프리랜서의 어려움은 그것이 안정적이지 않으며, 자칫 소속 밖에서 섭외가 안 들어오는 고립의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 자체가 가진 ‘출연자 중심의 방송’ 특성상 개그맨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출연자를 띄워주면서 쇼를 재밌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무너지기 개그’의 기본 전제를 깔아준다. 초기 상상플러스 고정출연자들의 ‘바보놀음(?)’이나, 각종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의 무너지기 설정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유재석의 성공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프로그램의 특성과 자신의 개그스타일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것은 진화에 진화를 거쳐 ‘무한도전’까지 오게 되는데 이 상황이 되면 이제는 시청자와 출연자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누가 더 심하게 무너지며, 심지어 굴욕을 느끼는가’의 재미를 추구한다.

이렇게 점점 제 살을 깎아야 타인을 웃길 수 있는 상황에 몰리는 개그맨들에게, 그들 보다 더 웃기는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들의 출연은 심지어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만든다. 쇼 프로그램의 특성이 그들 출연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개그맨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 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좁혀진 입지 속에서 저 시스템 밖으로 나와 쇼 프로그램에 편입된 개그맨들은 똑같은 시스템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오는 짧은 순간 순간의 촌철살인의 순발력이 없다면 역시 마찬가지의 편집이란 칼에 난자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차마 쳐다보기 민망한 처절함
가끔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 보기가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은 그 처절함을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들은 슬프다.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그것이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아닌 오직 한 가지 길일 때 비극이 발생한다. ‘개그콘서트’와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개그야’의 정착은 프로그램 제작자나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나, 개그맨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예고한다. 개그 코너와 개그 프로그램은 남아도 개그맨은 남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그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강화되면 개인들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마빡이의 고단함이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처럼 느껴지는 요즘의 개그계에,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처절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개그맨들을 안정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요구된다. 그것은 또한 신인 개그맨의 발굴보다 이미 발굴된 개그맨의 보다 효과적인 활용이 경제적이라는 측면에서도 방송사에 결국 유리한 길이 될 것이다.

드라마 '주몽'의 연장 논란에 대하여

50%대 최고의 시청률을 바라보고 있는 MBC 창사특집드라마, ‘주몽’이 방송연장을 놓고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MBC측은 일찌감치 연장발표를 해놓고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을 설득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발언이 불거져 나왔고 정형수 작가 단독체제로의 결론이 도출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몽 역을 맡은 송일국이 거부의사를 들고 나왔다. 뉴스에 의하면 MBC 부사장이 송일국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이번 상황은 MBC측의 성급한 결정과 발표에 먼저 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잘 되는 드라마의 연장방영에 쉽게 동조를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MBC측은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한 셈이다.

연장방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시청자
일방적인 연장방영이 가져오는 폐해는 제작진과 출연진은 물론이고 시청자들까지 그 파장이 크다.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은 우리네 드라마 제작현실의 특성상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계속 강행군을 해야하는 부담이 있다. 실제로 송일국은 쉴 틈 없는 촬영으로 인해 이미 심신이 피폐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이유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들 제작진과 출연진들은 이미 세워진 차기 프로젝트의 진행에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시청자들에게 보다 밀도 높은 드라마의 완결성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총 제작비 300억 원대에 60회나 되는 이 드라마는 기획하면서 분명 나름대로의 60회 분량의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85회로 늘려진다고 해서 늘어나는 횟수만큼의 새로운 스토리가 추가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51회를 맞고 있는 ‘주몽’이 걸어온 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현재 주몽은 전체적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의 스토리 진행을 하고있다. 굳이 그 사례를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고 최근의 것만 끄집어내도 그 증거는 쉽게 드러난다. 드라마 ‘주몽’은 갑자기 소서노가 보낸 비밀지도로 인해 한 회가 온전히 궁에 들어가 예소야를 만나는 에피소드로 흘러갔다. 소서노가 가진 비밀지도에 대한 아무런 복선이 없었다는 점과 굳이 어머니와 아내를 구하러 들어간 주몽이 그냥 혼자 돌아오는 점은 이 드라마가 앞으로도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걸 정확히 말해준다.

60회에 못한 완성도, 85회라고 가능할까
이러한 질질 끄는 스토리 진행을 볼 때, ‘주몽’의 연장방영은 아무런 명분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명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현재 ‘주몽’의 고구려 건국 상황이, 지금 방영된 51회 같은 내용이 아닌, 본래 60회 분량에서의 51회 내용처럼(물론 그런 것들이 사전에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긴박하고 숨가쁘게 돌아갈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본래의 목적대로의 60회 이야기를 다 끝내고도 더 할 이야기가 남았다는 것으로 연장은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MBC 부사장이 말하는 것처럼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한 연장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많다. 오히려 60회 분량에 완성도를 채워 넣지 못한(혹은 그걸 방조한) 자신들의 잘못을 시청자들에게 전가하는 측면이 강하다.

문제는 이러한 연장방영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그 이외의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현재 51회까지 방영한 상황의 ‘주몽’이 60회에 끝나게 되면 남은 9회 안에 고구려 건국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까지 봐와서 알겠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드라마의 전개상 급격한 결론은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주몽’이 처한 딜레마이다. 연장으로 가자니 무리가 따르고 종전대로 끝내자니 전개가 어려워진 것이다.

주몽의 딜레마가 말해주는 것
이 딜레마가 말해주는 건 여러 가지다. 먼저 그간 ‘주몽’이 시청률에 기대어 방만한 태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시청률이 30%를 넘어서면서 벌써부터 ‘주몽’은 연장을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을까. 또한 미봉책이나마 연장을 생각해야 드라마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으로 볼 때,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말해주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전체적 흐름을 타고 가는 완성도 위주의 드라마가 아닌 에피소드 중심의 드라마를 애초부터 생각했다면 왜 시즌제 드라마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시즌제 드라마라는 것이 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생각은 지금에나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에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까. 그나마 매력 있는 캐릭터에 훌륭한 소재, 게다가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능한 이 드라마를 시즌 드라마로 할 수는 없는 걸까. 많은 문제점들을 보강한 ‘주몽 시즌2’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건 ‘주몽’이란 좋은 소재가 이런 식으로 묻혀지고 끝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누나’, ‘환상의 커플’, ‘눈의 여왕’의 여성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여성 캐릭터들의 변신이 눈에 띈다. 그 중 주목을 받는 캐릭터는 이른바 ‘싸가지 귀족녀’들이다. 도대체 돈 걱정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이들은 온갖 명품들을 마치 아바타 놀이하듯 줄줄이 입고 나와, 돈 자랑을 해댄다. 게다가 그녀들은 주변인물들을 하인 다루듯 하며 뭐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려는 싸가지를 보인다. 재미있는 건 이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분노마저 일으킬 캐릭터들이 TV속으로 들어오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도 그들을 꿈꾼다
MBC 주말연속극 ‘누나’의 승주(송윤아 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귀족의 삶을 살았다. 온갖 명품들로 치장된 옷을 입고 리조트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함께 공식행사에 돌아가신 어머니 역할을 해내는 그녀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작은 아버지, 작은 엄마를 마치 하녀처럼 대하면서도 당당했다.

한편‘환상의 커플’의 안나조(한예슬 분)는 기억상실을 당하기 전까지 뭐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 오죽 했으면 그녀의 입에 붙은 말이 “꼬라지하고는”과 “맘에 안 들어”일까. 그녀의 한 마디에 그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녀를 위해 바뀌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눈의 여왕’의 김보라(성유리 분) 역시 도도함을 지나쳐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하인처럼 고순자(장정희 분)와 그녀의 딸 박득남(정지안 분)을 대한다. 자기 몰래 득남이 자기 명품 스카프를 했다고 그 자리에서 가위로 잘라버린다. 하지만 이런 그녀들의 싸가지 없는 행동들에 대해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왜? 부자니까.

사실 누군가 욕을 한다 해도 명품을 입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좋은 집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고 싶은 건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이 아닌가. 이 싸가지는 없지만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캐릭터에 잠시 감정이입을 하면서 그 욕망을 대리충족하는 것이 무에 이상하다고 할 것인가.

신데렐라 벗어나기
중요한 것은 과거 트렌디 드라마에서 단골악역으로 등장했던 이 캐릭터들이 이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트렌디 드라마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평범한 여성들이 왕자 같은 남자들을 만났다면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것은 이제 시청자들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인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사회 속에서, 부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난 왕자님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오히려 세습되는 것이며, 변할 수 없는 운명의 벽처럼 쉽게 편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인식 속에서 TV 드라마는 어떤 방식으로 여성들의 욕구를 풀어주고 또한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평범한 캐릭터의 신데렐라 되기가 아니라 거꾸로 부자들의 보통사람 되기가 될 것이다.

부자들의 보통사람 되기
삶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던 그녀들은 어떤 계기를 만나게 된다. ‘누나’의 승주는 졸지에 가난이라는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거기서 그녀를 지켜주는 평범한 남자 건우(김성수 분)를 만난다. ‘환상의 커플’의 안나 조는 기억상실을 통해 장철수(오지호 분)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된다. ‘눈의 여왕’에서 김보라는 어린 시절 만났던 한태웅(현빈 분)을 만나면서 얼음의 궁전 속에서 지내며 얼음처럼 차가워졌던 마음을 녹이게 된다.

이 그녀들의 하향곡선은 시청자들의 TV 속 환상과 TV 밖 현실 간의 미묘한 타협으로 인하여 공감의 틀로 만들어진다. 드라마를 통해 현실에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귀족적 삶을 꿈꾸면서도 또한 TV를 끄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을 줄 수 있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란 인식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은 화려한 세계일지 모르나 이들 드라마가 하려는 얘기는 그러한 부가 인간의 행복에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부자 길들이기 혹은 현실
부자들이 이렇게 부의 세계에서 현실로 내려올 때, 발생하는 것은 그네들보다 우리가 현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그들이 먹어보지 않았던 자장면과 막걸리에 대해서, 그들이 살아보지 않았던 단칸방에 대해서, 그들이 경험해보지 않은 저잣거리의 재미에 대해서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들 문제 있는 캐릭터들에게 바로 이 작은 현실의 행복감을 보여주고 변화를 촉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현실은 가난에 다름 아니다. 현실은 더 팍팍하고 각박하다. 드라마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사회는 부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싸가지 귀족녀들의 보통사람 되기가 갖고 있는 재미는 저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또 다른 환타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우리가 저네들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란 우리 스스로의 위안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시적 환상이라도 해도 그 위안이 그토록 간절한 것을.

연애시대에 이은 또 다른 사랑의 해석, ‘썸데이’

‘연애시대’로 명품 드라마 시대를 연 옐로우 필름의 ‘썸데이’는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들고 시청자를 찾았다. 어찌 보면 이것은 흔하디 흔한 질문, 수많은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주제가 아니던가. 만일 그래서 “또 사랑타령인가”하고 넌덜머리를 치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를 볼 자격이 있다. ‘썸데이’는 자극적이고 관습화된 사랑 이야기로 가득한 드라마들의 먹구름 속에 한 조각 떨어지는 햇살과 같은 드라마다.

사랑 따윈 없어! - 야마구치 하나
드라마는 시작부터 ‘사랑 따윈 없다!’는 화두를 던진다. 사랑은 호르몬의 장난이며 모든 이에게 상처와 배반감만을 안겨준다는 야마구치 하나(배두나 분). ‘멜로의 해부학자’란 별명이 말해주듯 그녀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 이 드라마의 전체를 장악하는 힘이다. 이것은 아마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야마구치 하나가 앞으로 걸어갈 길과, 그 길 위에서 만날 사람들과, 그들과의 사랑, 이별 등이 어찌 남의 일 같을까.

그러니 이 드라마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야마구치 하나가 믿지 못하던 사랑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길의 끝이 정해져 있지만, 그 길을 가는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듯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 도정에 있지 끝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멜로의 해부학자’는 과연 어떤 감정의 화학변화 속에 빠져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이 드라마라는 유기체가 중추로 세우고 있는 뼈대이다.

그 사랑이 궁금하다 - 고진표
그 사랑이라는 실험실을 잔뜩 호기심을 갖고 기웃거리는 남자가 고진표(김민준 분)다. 그의 호기심은 자신이 좋아하던 만화가, 야마구치 하나가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가 그녀의 만화의 광팬이란 점은 ‘사랑 따윈 없다’는 그 사랑관에 스스로도 동조하고 있었다는 걸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가 만화를 그리지 않게 됐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어떤 변화를 요구한다.

최소한 그녀에게 도움을 주어 계속 만화를 그리게 하는 어떤 것. 그 간섭에서부터 그의 사랑은 시작된다. 그 자신이 그녀의 사랑관을 바꾸고 싶게 되는 것이다. 그의 직업이 의사, 그것도 정신과 의사라는 점은 그가 가진 캐릭터의 양면성을 잘 말해준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그 일과 사람에 대한 관심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그는 마치 의사처럼 하나에게 접근하지만, 쉽게 그 경계를 넘어서 버리며 그런 자신을 또한 그 스스로 알아차린다.

사람, 혹은 사랑을 찾는다 - 임석만
고진표가 그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라면 임석만은 거침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이 드라마의 큰 줄기는 야마구치 하나가 한국에 와서 구미코의 행방을 쫓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석만의 직업은 드라마의 또 한 축이 된다. 그는 흥신소라고는 하나 사람을 찾아주는 일을 한다. 사람을 찾는 일은 때론 사랑을 찾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과거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에는.

그는 터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다. 그는 늘 길 위에 서 있고 그 길에서 사람들을 찾는다. 임석만이라는 캐릭터의 삶은 자못 상징적이다. 인생이란 길을 걸으며 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의미를 찾는 건 우리네 삶을 그대로 상징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그의 상황은 그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사랑을 찾아다녀야 하는 인간의 운명적 순환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 그 길 위로 야마구치 하나가 동행하게 된다.

삼각, 사각, 시한부, 출생의 비밀 따윈 버려! - 윤해영
이 길 위에 또 한 명의 인물이 서성댄다. 그 인물은 어찌 보면 야마구치 하나와 유사하다. 사랑을 주제로 만화를 그리는(물론 사랑은 없다는 주제이지만) 야마구치 하나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PD인 윤해영은 사랑을 주제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하나가 ‘사랑은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윤해영은 ‘사랑 이야기’가 갖는 상투성을 혐오한다. 삼각관계, 사각관계, 시한부 인생, 출생의 비밀 따윈 집어치라는 그녀의 말 속엔 저 하나가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다니며 병원에 입원까지 한 사장이 ‘연애는 본래 그런 것’이라며 그녀에게 말할 때, 그녀는 그 상투성에 고개를 젓는다. 그런 그녀에게 위안을 주는 인물은 고진표다. ‘사랑은 없다’는 쿨한 모습으로 상투성을 벗어 던진 그의 몸에 밴 호기심과 배려는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상투적인 사랑보다는 쿨한 배려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석만의 출연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애니메이션이든 그녀의 삶이든 분석적인 사랑의 접근을 해오던 그녀가 맞닥뜨리는 것은 살아있는 사랑의 이야기다.

실재하는 운명적 사랑의 이야기
고진표라는 캐릭터를 빼놓고,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잘 대변한다. 드라마는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의 혐오에서 비롯되고 그 사랑의 실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이끄는 것은 영길과 구미코의 운명적 사랑이다. 야마구치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골목처럼 스산한 마음에 들려오는 빗자루 소리를 듣게되고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새벽에 그 운명적 사랑과 조우한다.

길을 떠나는 네 사람.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은 결국 이 운명적 사랑 이야기의 커다란 강물 위에 흘러가고 녹아버린다. 드라마 상으로 그것이 단지 이야기 속이 아닌 실재라는 측면에서 이 드라마는 관습적이며 자극적으로만 그려져 왔던 사랑이라는 소재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맨살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자극 없는 정제된 화면과 스토리를 끌어가는 것이 아닌 감정의 흐름을 담담히 밀고 나가는 듯한 연출은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기존의 자극에 길들여진 분이라면 조금은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극이 지겨워진 분이거나, 그 자극으로부터 무언가 정화되길 원하는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는 한 사발의 정화수가 기꺼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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