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환상의 커플’, ‘눈의 여왕’의 여성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여성 캐릭터들의 변신이 눈에 띈다. 그 중 주목을 받는 캐릭터는 이른바 ‘싸가지 귀족녀’들이다. 도대체 돈 걱정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이들은 온갖 명품들을 마치 아바타 놀이하듯 줄줄이 입고 나와, 돈 자랑을 해댄다. 게다가 그녀들은 주변인물들을 하인 다루듯 하며 뭐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려는 싸가지를 보인다. 재미있는 건 이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분노마저 일으킬 캐릭터들이 TV속으로 들어오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도 그들을 꿈꾼다
MBC 주말연속극 ‘누나’의 승주(송윤아 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귀족의 삶을 살았다. 온갖 명품들로 치장된 옷을 입고 리조트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함께 공식행사에 돌아가신 어머니 역할을 해내는 그녀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작은 아버지, 작은 엄마를 마치 하녀처럼 대하면서도 당당했다.

한편‘환상의 커플’의 안나조(한예슬 분)는 기억상실을 당하기 전까지 뭐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 오죽 했으면 그녀의 입에 붙은 말이 “꼬라지하고는”과 “맘에 안 들어”일까. 그녀의 한 마디에 그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녀를 위해 바뀌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눈의 여왕’의 김보라(성유리 분) 역시 도도함을 지나쳐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하인처럼 고순자(장정희 분)와 그녀의 딸 박득남(정지안 분)을 대한다. 자기 몰래 득남이 자기 명품 스카프를 했다고 그 자리에서 가위로 잘라버린다. 하지만 이런 그녀들의 싸가지 없는 행동들에 대해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왜? 부자니까.

사실 누군가 욕을 한다 해도 명품을 입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좋은 집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고 싶은 건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이 아닌가. 이 싸가지는 없지만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캐릭터에 잠시 감정이입을 하면서 그 욕망을 대리충족하는 것이 무에 이상하다고 할 것인가.

신데렐라 벗어나기
중요한 것은 과거 트렌디 드라마에서 단골악역으로 등장했던 이 캐릭터들이 이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트렌디 드라마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평범한 여성들이 왕자 같은 남자들을 만났다면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것은 이제 시청자들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인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사회 속에서, 부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난 왕자님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오히려 세습되는 것이며, 변할 수 없는 운명의 벽처럼 쉽게 편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인식 속에서 TV 드라마는 어떤 방식으로 여성들의 욕구를 풀어주고 또한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평범한 캐릭터의 신데렐라 되기가 아니라 거꾸로 부자들의 보통사람 되기가 될 것이다.

부자들의 보통사람 되기
삶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던 그녀들은 어떤 계기를 만나게 된다. ‘누나’의 승주는 졸지에 가난이라는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거기서 그녀를 지켜주는 평범한 남자 건우(김성수 분)를 만난다. ‘환상의 커플’의 안나 조는 기억상실을 통해 장철수(오지호 분)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된다. ‘눈의 여왕’에서 김보라는 어린 시절 만났던 한태웅(현빈 분)을 만나면서 얼음의 궁전 속에서 지내며 얼음처럼 차가워졌던 마음을 녹이게 된다.

이 그녀들의 하향곡선은 시청자들의 TV 속 환상과 TV 밖 현실 간의 미묘한 타협으로 인하여 공감의 틀로 만들어진다. 드라마를 통해 현실에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귀족적 삶을 꿈꾸면서도 또한 TV를 끄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을 줄 수 있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란 인식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은 화려한 세계일지 모르나 이들 드라마가 하려는 얘기는 그러한 부가 인간의 행복에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부자 길들이기 혹은 현실
부자들이 이렇게 부의 세계에서 현실로 내려올 때, 발생하는 것은 그네들보다 우리가 현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그들이 먹어보지 않았던 자장면과 막걸리에 대해서, 그들이 살아보지 않았던 단칸방에 대해서, 그들이 경험해보지 않은 저잣거리의 재미에 대해서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들 문제 있는 캐릭터들에게 바로 이 작은 현실의 행복감을 보여주고 변화를 촉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현실은 가난에 다름 아니다. 현실은 더 팍팍하고 각박하다. 드라마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사회는 부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싸가지 귀족녀들의 보통사람 되기가 갖고 있는 재미는 저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또 다른 환타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우리가 저네들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란 우리 스스로의 위안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시적 환상이라도 해도 그 위안이 그토록 간절한 것을.

연애시대에 이은 또 다른 사랑의 해석, ‘썸데이’

‘연애시대’로 명품 드라마 시대를 연 옐로우 필름의 ‘썸데이’는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들고 시청자를 찾았다. 어찌 보면 이것은 흔하디 흔한 질문, 수많은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주제가 아니던가. 만일 그래서 “또 사랑타령인가”하고 넌덜머리를 치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를 볼 자격이 있다. ‘썸데이’는 자극적이고 관습화된 사랑 이야기로 가득한 드라마들의 먹구름 속에 한 조각 떨어지는 햇살과 같은 드라마다.

사랑 따윈 없어! - 야마구치 하나
드라마는 시작부터 ‘사랑 따윈 없다!’는 화두를 던진다. 사랑은 호르몬의 장난이며 모든 이에게 상처와 배반감만을 안겨준다는 야마구치 하나(배두나 분). ‘멜로의 해부학자’란 별명이 말해주듯 그녀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 이 드라마의 전체를 장악하는 힘이다. 이것은 아마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야마구치 하나가 앞으로 걸어갈 길과, 그 길 위에서 만날 사람들과, 그들과의 사랑, 이별 등이 어찌 남의 일 같을까.

그러니 이 드라마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야마구치 하나가 믿지 못하던 사랑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길의 끝이 정해져 있지만, 그 길을 가는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듯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 도정에 있지 끝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멜로의 해부학자’는 과연 어떤 감정의 화학변화 속에 빠져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이 드라마라는 유기체가 중추로 세우고 있는 뼈대이다.

그 사랑이 궁금하다 - 고진표
그 사랑이라는 실험실을 잔뜩 호기심을 갖고 기웃거리는 남자가 고진표(김민준 분)다. 그의 호기심은 자신이 좋아하던 만화가, 야마구치 하나가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가 그녀의 만화의 광팬이란 점은 ‘사랑 따윈 없다’는 그 사랑관에 스스로도 동조하고 있었다는 걸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가 만화를 그리지 않게 됐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어떤 변화를 요구한다.

최소한 그녀에게 도움을 주어 계속 만화를 그리게 하는 어떤 것. 그 간섭에서부터 그의 사랑은 시작된다. 그 자신이 그녀의 사랑관을 바꾸고 싶게 되는 것이다. 그의 직업이 의사, 그것도 정신과 의사라는 점은 그가 가진 캐릭터의 양면성을 잘 말해준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그 일과 사람에 대한 관심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그는 마치 의사처럼 하나에게 접근하지만, 쉽게 그 경계를 넘어서 버리며 그런 자신을 또한 그 스스로 알아차린다.

사람, 혹은 사랑을 찾는다 - 임석만
고진표가 그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라면 임석만은 거침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이 드라마의 큰 줄기는 야마구치 하나가 한국에 와서 구미코의 행방을 쫓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석만의 직업은 드라마의 또 한 축이 된다. 그는 흥신소라고는 하나 사람을 찾아주는 일을 한다. 사람을 찾는 일은 때론 사랑을 찾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과거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에는.

그는 터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다. 그는 늘 길 위에 서 있고 그 길에서 사람들을 찾는다. 임석만이라는 캐릭터의 삶은 자못 상징적이다. 인생이란 길을 걸으며 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의미를 찾는 건 우리네 삶을 그대로 상징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그의 상황은 그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사랑을 찾아다녀야 하는 인간의 운명적 순환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 그 길 위로 야마구치 하나가 동행하게 된다.

삼각, 사각, 시한부, 출생의 비밀 따윈 버려! - 윤해영
이 길 위에 또 한 명의 인물이 서성댄다. 그 인물은 어찌 보면 야마구치 하나와 유사하다. 사랑을 주제로 만화를 그리는(물론 사랑은 없다는 주제이지만) 야마구치 하나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PD인 윤해영은 사랑을 주제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하나가 ‘사랑은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윤해영은 ‘사랑 이야기’가 갖는 상투성을 혐오한다. 삼각관계, 사각관계, 시한부 인생, 출생의 비밀 따윈 집어치라는 그녀의 말 속엔 저 하나가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다니며 병원에 입원까지 한 사장이 ‘연애는 본래 그런 것’이라며 그녀에게 말할 때, 그녀는 그 상투성에 고개를 젓는다. 그런 그녀에게 위안을 주는 인물은 고진표다. ‘사랑은 없다’는 쿨한 모습으로 상투성을 벗어 던진 그의 몸에 밴 호기심과 배려는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상투적인 사랑보다는 쿨한 배려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석만의 출연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애니메이션이든 그녀의 삶이든 분석적인 사랑의 접근을 해오던 그녀가 맞닥뜨리는 것은 살아있는 사랑의 이야기다.

실재하는 운명적 사랑의 이야기
고진표라는 캐릭터를 빼놓고,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잘 대변한다. 드라마는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의 혐오에서 비롯되고 그 사랑의 실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이끄는 것은 영길과 구미코의 운명적 사랑이다. 야마구치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골목처럼 스산한 마음에 들려오는 빗자루 소리를 듣게되고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새벽에 그 운명적 사랑과 조우한다.

길을 떠나는 네 사람.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은 결국 이 운명적 사랑 이야기의 커다란 강물 위에 흘러가고 녹아버린다. 드라마 상으로 그것이 단지 이야기 속이 아닌 실재라는 측면에서 이 드라마는 관습적이며 자극적으로만 그려져 왔던 사랑이라는 소재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맨살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자극 없는 정제된 화면과 스토리를 끌어가는 것이 아닌 감정의 흐름을 담담히 밀고 나가는 듯한 연출은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기존의 자극에 길들여진 분이라면 조금은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극이 지겨워진 분이거나, 그 자극으로부터 무언가 정화되길 원하는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는 한 사발의 정화수가 기꺼이 되어줄 것이다.

악마와 프라다 사이에 선 현대여성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뉴욕 자체도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그것은 뉴욕이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면서, 또한 뉴요커로 대변되는 패션과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중심이 주는 화려함과 귀족적인 분위기의 기저에는 그것에 대한 욕망이 자리한다. 우리는 그런 삶을 욕망한다. 엄청난 고가에 사치일 뿐이라고 욕을 한다 해도 누구나 프라다를 입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사실 프라다를 입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걸 얻기 위해서는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다른 가치들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악마와의 거래다. 이것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드리아가 처한 입장이자 커리어 우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네 현대여성들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이 처한 입장이다. 그녀는 악마와 거래를 한 후 프라다를 입게 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옷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리고는 결국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영화 속 미란다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대로 이 영화는 ‘그것이 다(That's all!)’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아닌 뉴욕의 이야기에, 단순해 보이는 스토리의 이 영화가 국내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한다는 사실은 영화 밖에서 그 흥행의 이유를 찾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이역만리 떨어진 이 곳과 뉴욕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관객들을 이 영화에 열광하게 하고 있는 걸까.

아바타 놀이 재미있으셨나요
앤드리아는 저널리스트의 꿈을 갖고 있지만, 패션으로 보면 전형적인 시골출신의 촌닭이다. 그러니 그런 촌닭이 세계 최고의 패션지, ‘런웨이’에 입성하는 것 자체에 관객들은 욕망에 마음을 내주게 된다. 그녀가 주인공인 까닭에 관객들은 그녀에게 자신을 감정이입시키고 앞으로 온갖 명품으로 변신할 그녀를(자신을)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이 간교하여, 처음에는 자신과 너무 다른 세상에 있는 욕망을 거부한다. 자신을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란 굳건한 성으로 방어하면서 오히려 그 닿을 수 없는 욕망을 폄하한다. 영화는 이러한 관객들의 심리적 반응까지 고려해가며 극을 진행시킨다. 그러면서 그 욕망을 정당화해줄 계기를 기다린다. 그 계기를 주는 사람은 바로 나이젤이다. 그는 패션계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의 직장생활에서도 통용되는 단어를 끄집어낸다. 바로 ‘프로의식’이란 단어다. ‘당신은 프로가 아니야. 그러니 그런 걸 비판할 자격도 없어.’

이러한 질책은 기다렸다는 듯이 억압해온 욕망을 풀어내는 구실로 작용한다. 또한 이 곳은 패션잡지사이기에 이것은 단지 구실이 아닌 진짜 프로가 되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변신은 폭발적이다. 화면은 몇 초 간격으로 그녀의 옷을 바꿔 입혀준다. 구찌, 돌체&가바나, 로베르토 카발리,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칼 라거펠트, 제이 멘델, 베르사체... 여성들이라면 꿈꿔왔을 명품들로 말이다. 앤드리아로 분신한 관객들은 이 장면들이 주는 아바타 놀이에 푹 빠져버린다.

뉴욕에서 우리나라까지의 거리만큼 큰 환타지
이 아바타 놀이에 중요한 것은 그 배경이 뉴욕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뉴요커의 입장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미국 개봉시 이 영화에 내려진 호평들은 주로 메릴 스트립의 명연기와 패션업계를 제대로 조명한 그 리얼함에 이유를 두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리얼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 관객들이 몇이나 될까. 물론 패션업계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본 이 영화는 ‘리얼함’보다는 ‘환타지’쪽에 더 무게를 두는데, 거기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바로 뉴욕이라는 공간이다. 잘 생기고 부유하며 매너 있고 지성적인 남자들과 성공한 커리어 우먼들의 로맨스가 이루어지는 곳. 그 환타지의 실체를 우리는 이미 저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목격한 바 있다.

그 뉴욕이 가진 환타지의 기저에 또 한 가지를 포함시키자면 그건 우리가 사는 이 공간과의 거리가 될 것이다. 만일 이 공간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잔치였다면 그것이 ‘섹스 앤 더 시티’의 자유로운 성 담론이든, 이 영화의 명품에 대한 욕망이든 어느 것이나 현실이 개입했을 것이다. 그런 무거운 현실 속에서 환타지는 잘 생기지 않는다. 대신 뉴욕은 어떤가. 그 먼 거리에 있는 곳에서의 환타지는 마치 해외여행에서 보다 대담해지는 사람들의 편안한 공기가 있다. 남의 나라 얘기면서 잠깐 내 얘기로 차용하는 것. 여기에 뉴욕이라는 공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주는 환타지의 힘이 있다.

보편적 정서로의 회귀
그런데 이러한 명품을 갖고 하는 아바타 놀이와 뉴욕이라는 공간이 주는 환타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에는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것은 환타지의 진원지인 패션이라는 코드를 이 영화에서 뚝 떼어놓고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에게 리얼한 것은 패션이 아니라 직장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미란다 같은 악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메릴 스트립이라는 대배우의 열연에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많은 대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습관적으로 하는 몇몇 동작들과 시시때때 바뀌는 의상들을 소화하는 것만으로 영화의 한 축을 만들어버린다. 악마 같지만, 성공한 상사, 자신을 온통 구렁텅이로 빠뜨릴 것 같지만, 때론 그것을 통해 사회생활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만드는 상사, 어떤 때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다가도, 금세 다시 악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런 상사의 모습을 굳이 뉴욕이 아닌 곳의 사람이라도 공감하게 만들 정도로 리얼하게 연기해낸다.

이로 인해 우리는 환타지의 한 축에서 공감이라는 다른 축을 얻게 된다. 이러자 그저 환타지를 즐긴 후 극장을 빠져나가면 됐을 관객들은 공감의 틀 속에서 앤드리아의 선택(환타지와 현실, 여기서 환타지는 미란다며 현실은 미란다의 화려한 삶의 정반대축에 있는 앤드리아의 애인 요리사 네이트가 된다)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 삶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로써 앤드리아의 한바탕 환타지는 면죄부를 받게 되고, 거기에 동참한 관객들 역시 극장을 벗어나면서 느끼게 될 현실의 허탈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화는 경쾌해진다!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건 그만큼 욕망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려야한다는 걸 말한다. 성공하려면 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네 이 독한 현실 속에서 매일 악마와 직면해야 하는 현대여성들, 그들이 한 두 시간쯤 편안하게 환타지에 빠져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이 귀여운 악마와 만나는 게 뭐가 대수일까.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그 유쾌함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여우들은 그래도 마음가는 사랑을 한다

‘여우야 뭐하니’는 고현정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과 함께 음지에 머물던 성을 드라마라는 장으로 끌어냈다는 데서 시작부터 호평과 비판이 잇따랐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를 우리는 요즘 세대의 성 담론을 담은 드라마 정도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드라마 종영에 와서 생각해보면 성 담론은 하나의 소재였을 뿐,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엉뚱한 곳에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요즘 3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33세 여성들의 고민
‘여자 서른, 자신있게 사랑하고 당당하게 결혼하라’의 저자이자, ‘노처녀 통신’ 운영자인 최재경씨는 현재 한국의 여성들은 노처녀의 연령대를 대체로 33세로 본다고 한다. 여성들이 결혼보다는 사회생활을 통한 자아성취에 더 가치를 두면서 ‘결혼은 서른 너머’라 생각하는 만혼이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33세를 노처녀로 생각하는 걸 보면 서른을 넘으면서 나름대로 결혼에 대한 강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최재경씨에 의하면 이 나이의 문제는 ‘괜찮은 총각들이 하나 둘 어린 여자들과 결혼을 해버려 결혼할 상대는 점점 줄어드는걸 알면서도 여자는 전혀 눈이 낮아지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자아성취를 위해 노력과 시간을 들여 얻은 지위와 재력, 학력 등으로 웬만한 평범한 남자로는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우야 뭐하니’의 33살 고병희는 좀 ‘색다른’ 노처녀이다. 33살이지만 뭐 하나 이룬 것도 없고, 연애라는 걸 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처럼 현실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전작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그 ‘평범한’ 혹은 ‘평범 이하인’ 캐릭터가 가진 로망의 힘이 더 공감을 주고 설득력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김삼순의 문제가 ‘뚱뚱함’과 ‘촌스러운 이름’에 있었다면, 고병희의 문제는 ‘나이’와 ‘현실적인 능력, 지위 따위’에 있다. 왜 작가는 하필이면 보통(?)의 노처녀가 아닌 이런 경쟁력 떨어지는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세운 걸까.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는 33살이란 나이는 보통 여자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른 모양이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 드라마가 마치 성 담론을 다루는 드라마처럼 보인 것은 나이에 늘 육체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몸도 늙기 마련이고 이것은 결혼이라는 문제에 봉착하면 더 구체화된다. 나이 차로 인해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그 숫자 때문이 아닌 ‘몸의 다름’ 때문이다. 직원인 오필교(박병선 분)가 어깨에 손을 얹자 ‘어머 주책이야’라고 조순남(윤여정 분)이 화들짝 놀라는 이유는 가장 큰 것이 외모에서 드러나는 나이 차에 대한 외부의 시선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구도는 고병희와 박철수(천정명 분), 배희명(조연우 분)의 삼각관계와, 고준희(김은주 분)와 박병각(손현주 분)의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나이와 그 나이에 대한 주변의 시선들이다.

그러나 주책이라고 여기던 고병희가 드라마 중반 이후부터 박철수를 향해 ‘마음가는 대로하자’고 말하는 대목부터 드라마는 육체에서 마음으로 선회하며,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고준희와 박병각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상으로는 실제로 결혼과 같은 구체적인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 드라마는 분명 나이가 아닌 마음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작가는 이들 캐릭터들의 몸의 나이와 마음의 나이가 다르다는 것을 통해 마음가는 대로해야 하는 확고한 이유를 보여준다. 고병희는 숫자로서의 나이가 주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있을 뿐, 그 마음은 여전히 풋풋한 소녀이며, 박병각 역시 소년 같은 면모를 불쑥불쑥 보여준다. 심지어는 고병희의 엄마인 조순남은 아직도 오드리 햅번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현실 따위도 중요치 않아
아무리 소녀의 마음을 갖고 있어도 나이에서 오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그래서 배희명이라는 캐릭터는 이 불안한 마음을 파고드는 ‘현실과 안정’을 상징한다. 고병희가 처한 상황은 어찌 보면 ‘배부른 노처녀의 갈등’같지만, 거기서 그녀가 안정된 현실을 선택하기보다는 불안하지만 마음이 가는 사랑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부분에서 ‘여우야 뭐하니’라는 생뚱 맞은 이 드라마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33세 살 먹은 노처녀들을 여우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고병희처럼 용기 있게 마음가는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사실은 나이, 현실, 조건 사람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 숫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먼저 스스로 나이가 주는 강박을 버리고, 마음을 직시하라고 한다. 그들에게 ‘여우야 뭐하니’하고 묻는 것이다.

사랑과 마음을 선택해야한다는 이 당연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긴장감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작가가 구축한 탄탄한 캐릭터와, 어디선가 보았던 인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해낸 주연에서부터 조연까지의 출연진들 몫일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공감의 이유는 이 당연한 질문에 당연하지 않게 살아가게 되는 우리사회의 나이에 대한 편견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 아닐까. 이 드라마는 나이, 현실, 조건을 자꾸 따지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여우들에게 용기를 내라며 등을 토닥여주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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