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세트 논란, 극 집중도 저하가 원인

대하사극 연개소문의 세트 논란이 거세다. 이밀(최재성 분), 양현감(이진우 분), 이화(손태영 분) 등이 왕빈, 연개소문 일행과 함께 사냥을 떠나는 장면에 노출된 성문 배경이 조잡하게 만들어진 세트의 티가 너무 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이 나온 다음날 지적의 효과였는지 배경의 세트는 이화와 연개소문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에 너무도 명확하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 세트의 문제가 논란으로까지 비화된 것은 단지 세트를 너무 조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400억 짜리 드라마에 합판 배경이냐”는 질책 속에는 400억이나 들여서 그것밖에 못 만드냐는 비아냥이 섞여있다. 세트 논란은 이 드라마의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져 이제는 서서히 그 증상이 나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가 보이지 않는 연개소문
집중도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은 드라마 전개에 있어서의 상투성이다. 현재 연개소문에서는 극중의 갈등, 즉 드라마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처한 상황을 가만히 보면 그저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는 유유자적만 있을 뿐, ‘대조영’만큼의 자기 출생에 대한 강렬한 욕구도 보이지 않고, ‘주몽’ 만큼의 고구려에 대한 희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청년의 치기는 없고 오히려 중년의 느긋함이 엿보인다.

지금 연개소문은 처음의 무리한 설정(신라와 수나라, 그리고 고구려로 분할되어 전개되던 드라마)을 봉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한 장소와 인물로 집중시켜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나누어진 이야기 전개는 시청자의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있던 신라쪽의 이야기 전개보다, 수나라의 양제 이야기가 갖는 무게감이 더해지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연개소문이 수나라로 들어가면서 그나마 극의 집중도가 높아질 거라 예감했지만 여전히 연개소문이 머무는 왕빈의 집과 수나라는 따로 놀고 있다.

이렇게 되니 드라마가 생길 수가 없다. 드라마라고 해봐야 연개소문과 이화와의 멜로인데, 이것 역시 극적인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연개소문이 나타나자 수많은 혼처를 거부하던 이화가 단박에 그에게 빠져든다는 설정만으로 어떻게 극적인 멜로의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현대적 어법을 찾지 못한 상투적 대사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현대적 어법을 찾지 못하는 상투적인 대사들이다. “-사옵니다” 말투가 주는 어색함에다 의도가 뻔한 질문들과 자로 잰 듯 정확히 나오는 상투적 대사들은 극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차원을 넘어서 실소를 자아내게까지 한다. 이화가 연개소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너무나 설명적이고 구태의연해 마치 70년대 멜로 영화 속의 대사를 반복하는 느낌이다. 잠시 그 대사들을 되새겨보자.

연개소문이 포산공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밖에 나와 그의 심복인 생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화가 나타난다. “어떻습니까. 소녀와 함께 말이라도 달려보시는 것이. 달빛이 아주 좋지 않사옵니까.”그리고 그들은 갈대 숲에 당도해 걷기 시작한다. “달빛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낭자.” 그리고 이어지는 신라의 보희와의 일을 얘기하는 연개소문. 그 끝에 “외람된 이야기입니다만 소녀가 잠시 그 자리를 메꾸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낭자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많은 혼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부다운 장부를 본적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처음이십니다. 이제 이유가 되겠습니까.” “낭자..” “다시 한 번 말을 달려 보시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오기까지 드라마 상으로 연개소문과 이화간에 벌어진 사건은 거의 없다. 그저 가끔 눈빛이 오고갔을 뿐이다. 물론 진짜 연애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나 이것은 드라마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연애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만한 사건이나 이야기가 존재해야 한다. 사건 없이 바로 이어지는 너무 직설적인 대사의 전개는 보는 이들을 낯간지럽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이 장면들에는 필요 없는 대사들이 너무 많다. 멜로를 사건이 아닌 대사로서 설명하고 만들려는 것이다. 이로써 대사에 설명이 너무 장황해지는 드라마 작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게 된다.

연령대로 나눠지는 대사의 층위
그러나 모든 대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사극으로서 진짜 힘을 발휘하는 정치적인 대사들과 전개는 나무랄 데가 없다. 수양제의 캐릭터가 힘을 받는 것은 그걸 연기하는 김갑수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런 대사를 적재적소에 잘 넣는 작가의 힘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연개소문’에서는 이 잘 맞아떨어지는 대사와 그렇지 못한 대사의 층위가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확히 연령대로 잘라진다. 중년 이상의 캐릭터들은 대사가 연기와 잘 맞아떨어지지만, 청년 캐릭터들은 영 겉돌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멜로보다는 정치적인 상황의 사극에 더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 요즘 젊은 감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시청자대가 중ㆍ장년층이라 하더라도 젊은 캐릭터에 노회한 목소리를 넣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이제 드라마에서 배경은 그 드라마의 완성도를 말해주는 좋은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논란이 된 배경은 그다지 중요한 상황에서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를 밖에서 찾게 만든다. 캐릭터에 한참 집중해야할 상황에(연개소문과 이화가 연애감정을 보여주는 장면) 시선을 배경으로 빼앗겼다는 점이 이 논란의 핵심이 될 것이다.

주몽이 처한 딜레마

요즘 시청률로 가장 성공한 TV 컨텐츠는 단연 MBC 월화 사극, ‘주몽’이다. ‘고구려사극 전성시대’라 할 만큼 연이어 경쟁작으로 등장한 ‘연개소문’, ‘대조영’에도 불구하고 시종 43%대에 이르는 독보적인 시청률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시청률은 드라마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유용한 잣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청률이 높은 것과 드라마적인 성공은 다른 차원이다. 다시 말해 ‘주몽’의 시청률이 높은 것으로 드라마 ‘주몽’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거대한 고구려, 영웅, 사랑은 어디 갔나
모든 드라마에는 저마다의 목표 혹은 기획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기획의도는 의도일뿐, 실제적인 목표는 시청률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각종 연예관련 기사들이 만들어낸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폐단이다. 드라마는 드라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그것이 잘 전달되어 호응을 얻을 때 좋은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몽’이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주몽’의 기획의도를 보면 그 키워드는 ‘거대함’이다. ‘거대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제목 아래, ‘오늘보다 거대한 고구려를 만난다’, ‘신화보다 거대한 영웅을 만난다’, ‘역사보다 거대한 사랑을 만난다’라는 소제목이 달려있다. 이 소제목들에서 방점은 ‘고구려’와 ‘영웅’그리고 ‘사랑’에 있다. 물론 기획의도라는 것이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방점 찍힌 키워드들은 드라마의 커다란 방향성을 지시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막 40회를 넘기고 60부까지 20회를 남긴 드라마 ‘주몽’ 그 목표점들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을까.

고구려의 실종 - 역사를 버리자 고구려도 사라지다
먼저 ‘고구려’라는 역사적 방점은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부터 실종되기 시작했다. 사료가 없어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퓨전사극’이라는 타이틀이 모든 걸 덮어주는 마법의 지팡이가 될 수는 없다. 기왕에 고구려를 내세웠다면 기본적인 사료는 따라야 마땅하다. 철기의 문제는 드라마의 재미로 치더라도, 당대 한사군이 있던 위치를 한반도 내로 지정하는 등의 문제는 심각한 식민사관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기본적인 사료를 버리고 확고한 사관 또한 없이 역사극을 만들려했다면 그것이 ‘퓨전사극’이라 하더라도 ‘고구려’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어야 마땅하다.

역사적인 인식의 문제를 떼놓고 보더라도 지금의 ‘주몽’에는 고구려가 실종된 지 오래다. 한민족이라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고구려라는 국가의 탄생을 그리면서 드라마의 3분의 2가 지나간 현 시점까지 주몽이 고작 하고 있는 것은 권력투쟁과 연애이다. 물론 연애야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지만 고구려의 탄생을 같은 민족끼리의 권력투쟁의 소산으로 보여지게 만든 것은 어딘지 잘못된 일인 것 같다. 국가 탄생의 또 한 축이 될 수 있는 ‘고조선’이라는 대의명분과 유민들을 규합해가는 이야기가 ‘주몽’에는 잘 보여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주몽’은 굳이 ‘고구려’나 ‘주몽’이라는 타이틀을 떼내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그러자 거대함은 사라지고 아기자기한 잔재미들만 잔뜩 이어진다. 잇따른 납치와 탈출, 구출의 연속, 국가 간의 부딪침에 전쟁은 없고 소소한 전투들만 이어지는 것 등은 바로 그런 결과들이다. 심지어는 전쟁에 있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규모의 병력이 등장하는 스케일의 문제가 불거진다. 작가와 연출자는 매회 쫓기듯 찍어야만 하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적 풍토로 변명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드라마는 마치 대충 몇 명의 전투 제스처를 하고 나서는 나머지는 시청자들이 상상해서 전쟁으로 채워 넣으라는 것만 같다. 현재 같이 진행되고 있는 타 사극들이 사전제작을 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 역시 이 드라마가 애초부터 그 정도의 계획도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다.

영웅의 실종 - 캐릭터들의 구조조정 시작되다
‘주몽’의 힘은 캐릭터 주몽에서 나올까. 한번쯤 의심해볼 만한 부분이다.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점점 성장해간다. 그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차츰 감정이입이 되고 그러면서 드라마의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캐릭터 자신이 아닌 주변 캐릭터에 의해 주인공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런 부류에 속한다. ‘하늘이시여’에서 왕모와 자경이 관심을 받은 것은 자신들 캐릭터의 힘이라기보다는 악역들에 의한 부분이 많다. ‘소문난 칠공주’에서 불쌍한 칠공주들이 조명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대책 없는 캐릭터와 합쳐져 그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의 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양상은 주몽에 있어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처음 주몽이 캐릭터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해모수’와 ‘유화부인’이라는 굵직한 캐릭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주몽의 성장에 있어서 또 한 축을 차지하는 ‘소서노와 연타발’, 그리고 ‘마리, 협보, 오이 삼인방’, 게다가 모팔모, 여미을, 심지어는 금와왕까지 주몽을 돕는다. 이유는? 그가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아들, 주몽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드라마상에서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몽은 그다지 소위 말하는 캐릭터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악역을 맡고 있는 대소, 영포, 도치 일당 등은 드라마의 진짜 재미를 주는 인물들이다. “드라마 제목을 주몽이 아닌 대소로 바꿔라”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주몽이 실종되었던 2회분 동안 대소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영포와 도치 일당은 ‘주몽’이란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가장 독특한 재미를 가진 캐릭터들이다. 이들 ‘귀여운 악당들’은 사실상 지금까지 드라마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주몽의 성장은 바로 이들의 패배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그만큼 어리숙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응까지 받고 있다. 악당들 이외에도 소서노와 연타발이란 캐릭터는 주몽 이상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사실상 드라마 상에서 주몽은 초창기에는 유화부인 품속에서 중반부에는 소서노의 품속에서 노는 아이 정도로 비춰진다).

이렇게 주몽의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물들이 불쑥불쑥 제 자신의 힘을 드러내자 문제가 생긴다. 드라마의 애초 목표, ‘고구려와 주몽의 탄생’이라는 갈 길은 멀기만 한데 자꾸 그들 캐릭터 사이에서 맴을 돌게 되는 것이다. 마치 초기에 부영의 캐릭터가 전혀 드라마 흐름에 도움이 되지 못하자 사라져버린 것처럼, 최근 ‘주몽’에는 캐릭터들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금와는 침상에 눕게 되고, 유화부인 역시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 이상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소서노는 우태와 결혼한 후, 매력을 잃게 되고, 연타발은 비류군장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예상밖에 호응을 얻고 있는 영포와 도치일당은 아직 정해지진 않았으나 ‘영포의 난’을 실패로 어떤 상황이 될지 알 수 없다. 반면 예소야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주몽의 힘은 바로 이런 주변인물들에 의해 나온 것이었는데, 그들을 놔두자니 드라마의 진행이 문제가 되고, 그렇다고 없애자니 드라마의 재미가 사라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랑의 실종 - 소서노, 울기 시작하다
‘주몽’의 가장 큰 인기의 힘은 바로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오가는 멜로가 한 축을 차지한다. 이것은 타 사극에 비해 ‘주몽’만이 가진 힘이다. 남성적인 전쟁과 전투, 권력다툼의 문제 속에 ‘주몽’은 여성적인 멜로 라인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거기에 일등공신은 당연 소서노라는 캐릭터다. 그녀가 힘을 발휘한 이유는 단 하나, ‘강인하고 당찬 여성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저 한 사람에 목이 매어 기다리기만 하는 캐릭터였다면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주몽을 구해내기 위해 산적들에게 스스로 들어가 거래를 할 정도의 강단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실종된 주몽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소의 협박에 휘둘리면서 우태와 혼사를 치러버린다. 왜 작가는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이것은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소서노가 차지하는 비중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가, 뒤늦게 역사적 사료에 충실하고자(사료에서는 소서노가 유부녀로 주몽이 유부남으로 만난다) 했던가, 앞으로 진행될 예소야와의 멜로 경쟁(경쟁이 되려면 힘이 균형이 되야 하는데 소서노가 너무 강하므로)을 만들려던 데서 비롯된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되자 소서노는 그 유리같이 냉랭하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잃어버리고 울기 시작한다. 소서노의 매력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반면 예소야는 참신하지 못한 등장으로 처음부터 힘을 얻지 못했다. ‘주몽’에서의 멜로라인은 대개 ‘영웅의 위기 - 위기에서 구해준 여인 - 위기에 처한 여인 - 여인을 구해준 영웅’이라는 구조로 등장하는데, 예소야 역시 드라마 초기의 해모수의 등장과 거의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녀에게서는 소서노와 같은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일부종사 하듯 주몽을 바라보며 어찌 보면 짐만 되는 캐릭터에서 매력적인 구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소서노의 힘도 약화되고 예소야도 힘을 발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멜로 라인이 구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주몽이 살 수 있는 길
최근 ‘주몽’의 흐름은 앞에서 지적한 기획의도와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시청률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아무리 주몽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주인공을 2회분이나 드라마에서 뺀 것이라든지, 몇몇 예고편으로 주목을 끌어놓고 실제 보면 별 것 아닌 스토리로 일관한다든지, 심지어는 방영시간을 마음대로 늘린다거나, 상식을 무시한 채 무리한 편성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시청률 편향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다. 만일 ‘주몽’의 목표가 애초부터 시청률에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한 시기에 그것도 국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주몽이라는 소재를 갖고 시청률에만 올인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이러한 ‘주몽’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시청률에 경도되지 않고 끊임없이 애정을 갖고 ‘주몽’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몽’은 이제 작가 스스로도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며 몇몇 실패사례에 대해 인정했을 정도가 되었다. 드라마 비판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드라마 초기에 방점을 찍은 키워드들이 실종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를 비롯하여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여전히 애정과 관심을 보이며 비판을 해주고 있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라디오 스타’ 변방에서 중심을 치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이 시대를 갖고 걸판지게 한 마당을 놀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이준익 감독은 이제 한물 간 스타를 매개로 이 시대의 주변인들을 끌어 모아 라디오라는 마당 위에 펼쳐놓는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이 저 왕궁이라는 본진으로 들어가 스스로 민중의 입이 되어주었다면, ‘라디오 스타’의 최곤(박중훈 분)은 영월이라는 변방으로 날아가 DJ의 마이크를 고단한 민중들에게 넘긴다. 한 예술인의 삶으로서 장생과 공길이 왕 앞에서도 거침없이 사설을 늘어놓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은 라디오 방송이라는 규범적 공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엮어낸다. 그리고 ‘왕의 남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라디오 스타’ 역시 변방의 민중들을 끌어안는다. 조금은 구닥다리 같은 영화, ‘라디오 스타’가 주는 어찌할 수 없는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88년 가수왕 최곤, 그가 가진 유일한 것
그는 ‘왕년에’ 가수왕이었다. 지금은? ‘왕년에 가수왕’이었다는 사실을 팔며 살아가는 소위 말하는 한물 간 가수다. 그러니 그를 가수왕으로 대접해주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대마초 사건과 폭행 사건으로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등장한 그의 존재를 간신히 기억할 뿐이다. 모든 걸 잃은 그이지만 그를 진짜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가수왕 대접해주는 사람이 있다. 20여 년 간 일편단심으로 그의 매니저를 해온 박민수(안성기 분)다. 박민수는 여전히 최곤의 담배를 챙기고 불을 붙여준다.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어찌 보면 주종관계 같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박민수는 최곤을 “담배 하나도 혼자 피우질 못하는” 인간으로, 그래서 자기가 보살펴줘야만 하는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며, “우리 같이 물에 확 빠져죽자”고 하는 박민수의 말에 “그러면 우리 둘이 사귀는 줄 알어”라고 말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밀착되어 있다.

주종관계에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가 숨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공동운명체이며 현재의 어려움을 겨우겨우 버틸 수 있는 힘은, 최곤이 안간힘을 쓰며 지키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관계를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기대 사람 인(人)자를 만들며 그 균형으로 겨우 서 있는 그들이 절박하다는 반증이다. 그들은 ‘88년 가수왕’이라는 이제는 허울뿐인 과거의 영광에라도 기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다.

변방에서 중심을 치다
그래서 그들이 흘러흘러 밀려난 곳은 강원도 영월 동강이다. “동강은 동쪽에서 흘러서 동강일까? 아니면 동쪽으로 흘러서 동강일까”라고 박민수는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변방인지 중심인지를 묻는다. 서울이라는, 가수왕이라는, 전국방송라디오라는 중심은 최곤과 박민수를 영월이라는, 라디오DJ라는, 지방방송라디오라는 변방으로 몰아낸다.

그런데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같은 처지의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스포트라이트를 주지 않았던 영월의 주민들이다. 최곤과 그들의 만남은 예고된 것이다. 첫방송에서부터 시작되는 방송사고. 하지만 그 방송사고는 이제 노골적인 최곤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방송의 권위를 없애고 마이크를 저 낮은 곳으로, 변방으로 넘겨준 것.

최곤에 의해 마당에 멍석이 깔리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다방 여종업원 김양의 멘트는 이 영화가 보듬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처음에는 “차 마시고 달아놓은 돈 갚으라”는 멘트로 김양에 대한 우리네 선입견을 드러내더니, 잠시 후에는 김양의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며 그런 우리의 선입견을 부수어버린다. 그 순간 김양은 우리의 이미지 속에 있던 다방레지가 아닌,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한 인간으로 부각된다.

최곤은 사랑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꽃집 청년을 위해 주민들에게 꽃을 그녀에게 배달해달라고 하고, 집나간 아비를 향해 울먹이는 한 소년을 대신해 최곤은 “당장 돌아오라”고 욕을 해댄다. 라디오 방송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아무런 기획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사로까지 파고든다. 백수아저씨의 취직상담을 해주고, 하다 못해 화투를 치며 ‘막판 쌍피’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할머니들에게 ‘판정’을 해주기도 한다. 이들이 목소리를 내자 방송은 사람들의 주관심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그저 우연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최곤식의 저항이며, 이준익 감독이 담고자 한 변방의 목소리들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맹렬한 질타
그런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 여기에는 많은 은유와 해석이 가능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심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심의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일까. 최곤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음악에 대한 것이다. ‘제대로 음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며, ‘음악은 이제 상품처럼 기획되어 팔린다’는 것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며 사라진 음악과 기획사들의 대거출연은 우연이 아니다. 당장의 시류에 맞는 음악의 기획생산과 여기에 맞물린 비디오 시대의 도래는 음악인을 죽이고(Video kill the radio star), 상품으로 판매되는 음악인의 이미지들만 만들어냈다. 현 우리 가요계가 처한 문제들(음반시장의 위축, 가수들의 탤런트화)은 자본주의가 음악이라는 예술을 쥐게 되면서 생겨난 문제들이다(과거에는 예술을 하면 돈이 뒤따랐는데, 요즘은 돈을 벌려고 예술을 한다). 강석영PD(최정윤 분)가 술에 취해 “내가 왜 청취율에 목매는데... 당신들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야”라고 하는 말은 자본주의가 주는 공포(중심에서 밀려나면 끝이라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되자 본 상품은 사라지고 상품의 이미지, 즉 껍데기만 난무하는 세상이 열린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가요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현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 즉 생산의 주체와 소비의 주체 간의 괴리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이 영화는 이러한 괴리로 인해 늘 노동의 현장에 있으나 가난하게 살아가는 농민들, 도시빈민노동자들, 샐러리맨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만들어내는 노동은 본래 예술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여기에 돈의 논리가 개입되자 처절한 현실로 돌변한다. 그리고 이것은 최곤이 지금 시대에 소외된 이유이기도 하다. 돈을 벌어야 하는 시점에 예술 운운하며 가난하지만 고집스레 살아가는 것이 그의 죄다.

영화는 바로 그 점을 끄집어내 최곤과 박민수 사이에 기획사 사장을 끼워 넣는다. 돈의 논리로 무장한 기획사 사장은 박민수에게 “지금까지 매니저로서 해준 게 뭐가 있냐”며 떠날 것을 요구한다. 박민수가 “해준 게 없어 떠난다”며 돌아간 자리는 아내가 혼자 버텨내고 있는 노동의 현장(김밥장사)이다. 사람 인(人)자에 한 획이 떠나가니 나머지 한 획은 홀로 설 수가 없다. 사실 박민수는 그의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랬듯, 최곤의 현실을 대신 버텨준 인물이다. 최곤이 벌인 사건들을 해결하려 밖으로 뛰어다니고, 안으로는 최곤의 종이 되어 그의 자존심을 지켜준 박민수는 그저 매니저라는 직함보다는 형이 더 어울린다.

별은 혼자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최곤은 가수로서의 재기를 얘기하는 기획사 사장에게 분노한다. 기획사 사장이 한 짓,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형에 대한 무례에 분개한다. 형과 동생의 관계를 하루아침에 돈의 관계로 전락시켜버린 기획사 사장의 논리에 분개한다. 자신을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준 진정한 음악인이라는 자존심을 뭉개고 기획된 가수라는 상품으로 그를 짜 맞추려는 기획사 사장의 의도에 분개한다. “다시 가수하고 싶어질까봐” 선선히 무대에 서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음악에 대한 모독에 분개한다.

그는 ‘중심의 논리’에 구토를 느끼며 변방에 남기로 한다. 그리고 박민수를 향해 라디오 메시지를 날린다. “형이 그랬잖아. 별은 혼자 빛나는 게 아니라고. 얼른 와서 나 좀 빛내줘. 같이 반짝반짝 빛나 보자구.” 최곤은 이제 알게되었다.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을 빛나게 해준 것인지를. 저 변방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노동의 현장에서 삶을 버텨내고 있는, 자신의 옆에서 늘 자신을 지켜봐 주는 그들이 자신에게 빛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빛날 수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상황은 다시 역전되어 이제 최곤의 빛은 박민수에게 날아간다. 다시 돌아온 박민수에게, 숨기듯 고개를 돌리고는 감동에 겨워 미소를 날리는 최곤에게 강한 동감을 느낄 즈음, 우리네 가슴속에도 자신을 빛내주었던 많은 주변의 빛들이 별처럼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측은지심의 드라마, ‘내 사랑 못난이’

‘내 사랑 못난이’에서 신동주(박상민 분)는 잠깐동안의 인연을 맺고 헤어진(쫓아냈다는 말이 맞겠다) 진차연(김지영 분)이 자꾸 신경 쓰인다.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넌 평생 그렇게 남 뒷바라지나 하며 살거다”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건 아직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신동주의 동생, 신동현(경준 분)은 레지던트다. 그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최은우(박다안 분)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녀의 병은 전부가 아니면 오히려 고통만을 겪을 뿐이라는 걸 잘 아는 신동현은, 그녀와 헤어지려 하지만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녀를 어쩌지 못한다.

사랑 없이 신동주와 결혼했다 이혼해 엔터테인먼트 사장으로 변신한 정승혜(왕빛나 분). 그녀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결국 이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인 진차연을 미워해야 할 것이지만 왠지 그녀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도저히 되지도 않는 진차연을 가수로 만들려한다. 그녀는 진차연을 저 가난과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고픈 욕구를 어쩔 수 없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드라마
그들은 어찌 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혹은 없어진) 이들에게 왜 그리도 신경을 쓰는 걸까. 물론 여기서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관심 있다”, “사랑한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 요즘식으로 하면 쿨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물론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사랑얘기임에 틀림없다. 잘 나가는 남자와 지지리 복도 없는 아줌마의 사랑, 로맨스, 환타지는 이 드라마의 주된 골격이다. 그것은 금요드라마의 전통과 잘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지 이 드라마가 갖는 힘을 사랑타령으로만 볼 수 있을까. 과거의 여타 금요드라마들처럼 자극적인 상황이나 불륜 코드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30대 이상 아줌마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젊은층까지 끌어 모으는 이 드라마 속에는 혹시 아줌마의 사랑,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는 건 아닐까. 그저 그런 사랑얘기일거야 하면서도 시청자들을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연애드라마치고는 수상한 구조
이 드라마는 먼저 잘난 이들과 못난이들을 나누어놓는다. 잘난 이들의 대표주자가 신동주, 정승혜 같은 인물이고 못난이들의 대표주자가 진차연이다. 그들은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동주와 진차연이 계약결혼을 하면서부터 이 전혀 다른 세상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둘 엮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신데렐라의 아줌마 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던 캐릭터들의 부딪침이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들 두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진차연으로 대표되는 ‘못난이들’의 현실은 각박하고 눈물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신동주, 정승혜처럼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유한 사회적으로 ‘잘난 이들’은 놀랍게도 가난한 ‘못난이들’의 행복에 끌린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성공의 꼭대기에 올라오면서 잃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대척점의 맨 앞을 신동주와 진차연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 맨 뒤쪽은 진차연의 아들 두리와 신동주의 할머니, 조옥자(여운계 분)가 차지한다. 그 둘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인물들이다. 어찌 보면 가장 약자로 보이는 이들은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 주인공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진차연을 비롯한 ‘못난이들’은 두리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때론 비굴하기도 하고 때론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두리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한편 신동주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는 인물은 치매를 앓고 있는 조옥자다. 그는 결혼의 조건에서조차 상대가 조옥자를 위해 헌신할 인물인가를 먼저 살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조옥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진차연만을 찾는다는 것이다. “진가년이 뭐가 그리 좋냐”는 신동주의 물음에 조옥자는 말한다. “그년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고.

사람냄새 나는 드라마
이 할머니의 한 마디는 이 드라마의 구조를 빈부나 ‘잘난 이와 못난이’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놓는다. 신동주는 이제 알아차린다. 왜 자신이 자꾸 진차연이 신경 쓰이는지.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서 나는 사람냄새다. 그가 할머니에게 이끌리던 그 묘한 힘을 진차연에게서도 똑같이 느낀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진차연과 신동주간의 얘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동생 신동현와 최은우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신동현은 우리가 흔히 현실에서 보는 이성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전부가 될 수 있는가’하고 그는 의문을 갖는다. 반면 최은우는 물론 병으로 포장되어있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전부의 사랑’을 하는 인물로 극단화되어 있다. 신동현은 이성이니 사랑이니 하는 허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반면, 최은우는 온몸을 던져(해줄 수 있는 게 안보는 거라면 그거라도 해주겠다는 식의) 사랑을 해나간다. 병자이지만 우리에게 보다 인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정승혜는 진차연과 그의 단짝 친구인 이호태를 만나면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한다. 그녀는 진차연에게 어떤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예의를 발견하는 한편, 이호태를 통해 자신의 삶이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인간적인 삶과 행복’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드라마
작가는 아마도 양끝에 자리한 두 약자(두리와 조옥자)를 세워놓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들은 막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픈 사람을 보며 자신도 아파하는 것,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 즉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을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경험한다.

물론 이 드라마는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쉽게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고는, 사랑이란 허울로 해결하려 한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하지만 드라마에서 그걸 다룬다면 시청률 제로에 도전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세상에 쓰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맞장을 뜨는 진차연의 ‘인간적인 모습’이 소중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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