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는 사회적인 멜로

멜로 영화가 달라졌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시작된 멜로의 변신은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로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멜로 드라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와 자살시도를 해온 여교수의 사랑을 그린 ‘우행시’. 이 멜로드라마는 그 기저에 ‘사형제도’폐지 논란의 불씨를 심어두었다. ‘가을로’ 역시 마찬가지. 이 영화는 잃어버린 사랑과 상처, 그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끌어안았다. 이 사회극과 멜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멜로 드라마라는 전통적인 장치에다 사회적 공감까지 얻어내려는 시도일까. 혹은 사회극의 무거움을 멜로 드라마의 감상으로 중화시키려는 의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 개인적 차원의 멜로가 사회적 코드 안에서 읽히는 확장된 멜로의 결과일까.

멜로+사회적 공감, 두 마리 토끼 잡기
‘우행시’의 절묘함은 그것이 사회적 코드를 끝까지 쥐고 가면서 동시에 신파라는 전통적 코드 또한 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이 사회적 공감 때문인지, 신파 때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즉 ‘우행시’에서 흐르는 눈물에는 여러 층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멜로와 사회극은 웬만해서는 한 몸이 되기가 어렵다. 멜로로 흐르다보면 자칫 감정 과잉이 되기 쉽고, 사회극으로 흐르다보면 너무 이성적으로 되기 쉽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 잡기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행시’는 보기 좋게 그 성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사실 그 눈물이 관습적 장면이 만들어낸 신파로 강요된 것이라 하더라도, 영화가 제시한 사회적 공감의 틀 안에서 용서해주었다.

‘우행시’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멜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가을로’는 사회극쪽에 더 무게를 준다. 대부분의 영화평이나 영화 소개는 이 영화가 이번 가을의 대표적 멜로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멜로와는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 아픔과 상처를 이겨내는 그것은 멜로로 읽히지만 영화의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느 날 갑자기 그들 앞에 벌어진 재난이다. 만일 이 재난이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예를 들면 불치병 같은)이었다면 이 영화는 온전히 멜로의 틀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천재가 아니고 인재인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이다.

한 인간의 죽음을 대하면서 겪을 수 있는 반응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 분노, 죄의식, 공포와 불안, 피해의식 등을 꼽는데, 살아남은 최현우(유지태 분)는 분노의 반응을, 윤세진(엄지원 분)은 공포의 반응을 보인다. 정상적인 멜로의 상황이라면 죽음을 겪은 주인공은 이러한 반응들을 거처 결국에는 긍정의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상황에 그들은 여전히 분노와 공포 속에 놓여있다.

본래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분노
감독이 영화 시사회에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듯이 이 영화는 분노, 즉 하루아침에 수많은 삶을 앗아가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정부와 사회를 통틀어 벌어지는 총체적인 불감증에 대한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다큐멘터리나 시사고발 프로그램이지 영화가 할 일은 아니다. 김대승 감독은 이 사회적인 부조리와 거기서 발생하는 분노 끝에 멜로를 붙여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되자 멜로와 사회극의 경계가 절묘하게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최현우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가 서민주(김지수 분)를 잃었던 그 상처의 치유과정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깊은 심연 속에 묻어두었던 분노를 끄집어내고, 그 분노를 다시 삭이며 치유하게 된다(그것이 미완의 치유일지라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멜로
영화 ‘가을로’는 개인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멜로의 일반적인 틀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영화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사회적 멜로’라고나 할까. 이 사회적 멜로는 저 ‘우행시’에서 먼저 선을 보인 바 있고, ‘가을로’에서 더 깊어졌다. ‘우행시’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서 멜로의 코드를 과용해 무언가 화장기가 가득했다면, ‘가을로’는 화장기 없앤 보다 다큐적인 접근을 한 본격 사회적 멜로가 될 것이다. 이 이른바 사회적 멜로가 갖는 힘은 바로 연애감정에서 오는 감정적 발로의 차원에 머물던 개인적 멜로에서, ‘사회적 공감’의 차원으로 보다 확장된 멜로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그것은 멜로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감정적 해결의 문제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까지는 긍정적 역할을 해내지만, 그것의 해결에 있어서 너무나 미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을, ‘가을로’라는 영화의 시도가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오래도록 빠져있어 도저히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사회적 불감증을 다시 환기시켜주는데 어쨌든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을로’는 마치 너무나 끔찍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멜로라는 틀을 빌려 부드럽게 끄집어내고 있다. 만일 영화를 보면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장면에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동안 스스로 묻어버린 분노의 한 조각을 찾아냈다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TV가 추구하는 바는 ‘욕망’이 되었다. 즉각적이고 직설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면 시청률 경쟁에서 밀려나는 작금의 매체 환경이 부추긴 결과이다. 물론 TV라는 매체 자체가 인간 본연의 욕망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드러나는 양태는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것은 앞뒤 정황, 혹은 인과관계 없이 순간적인 장면 장면의 자극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하드 코어적이다.

너무나 노골적인 식욕
TV의 하드코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른바‘식욕자극 프로그램’들이다. 주말 점심시간 직전을 장악하고 있는 SBS의 ‘결정! 맛대맛’과 ‘찾아라! 맛있는 TV’는 그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과거의 ‘식욕자극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는 ‘6시 내 고향’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저녁 6시라는 식욕의 최고점에 방영된다는 이점을 갖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그 본질에 있어서 최근의 식욕자극 프로그램과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 같은 것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 본태적인 육체의 욕망인 식욕과 ‘시장을 살린다’거나 ‘농촌을 살린다’는 취지를 결합시켜 어느 정도 수위를 조절한다. 그들 역시 음식을 소개하지만, 그 이면에는 음식의 재료인 농촌에서 나는 농작물의 소개가 기반이 되어 있다. 즉 음식 소개의 진짜 목적은 그 자체의 자극보다는 다른 취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식욕자극 프로그램’들에서 그런 취지는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말 그대로 식욕을 어떻게 하면 자극시킬까하는데 프로그램의 목적이 있다. 색색으로 치장하고 시청자를 유혹하는 음식들, 음식을 먹는 장면에 대한 극단적인 클로즈업, 그 장면을 보며 침을 삼키는 출연자들은 이 프로그램의 공식이다. 이 장면들은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때론 하드 코어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하지만 ‘식욕자극 프로그램’은 그다지 사회적인 문제(비만이나 될까)를 양산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없는 식욕을 만들어준다거나 먹거리를 발굴하는 순기능도 한다는 점에서 하드코어적 접근은 방송의 최근 경향을 보여줄 뿐 그다지 비판적 소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타 프로그램들의 자극적인 경향은 관대하게 보아줄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점점 더 노골화되는 도둑촬영
몰래카메라는 이제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 르뽀 프로그램의 사회 고발 수단으로서 활용되다가, 연예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장치가 되었고, 최근 이 수위는 이제 일반 개인들의 사생활까지 넘보고 있다.

‘몰래카메라’라는 공전의 히트상품을 스스로 접었던 개그맨 이경규씨가 다시 ‘몰래카메라’를 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시청자들의 시선을 끈다는 데 있다. 과거의 사생활 침해 비판은 몰래카메라를 접게 만들었지만, ‘튀지 않으면 사장되는’ 논란 마케팅의 중심에 서 있는 지금의 연예계는 이를 용인하다 못해 오히려 만들어내는 상황이다.

여기에 케이블TV에서 앞다투어 만들어내는 유사 프로그램들은 모두 그 기반을 ‘도촬(도둑촬영)’에 두고 있다. ‘리얼스캔들-러브캠프(코미디TV)’, ‘아찔한 소개팅(Mnet)’, ‘연애불변의 법칙(올리브 네트워크)’, ‘러브액션WXY(수퍼액션), ‘달콤살벌한 대결(XTM)’등의 프로그램이 말해주는 것은 이제 도촬의 대상이 일반인에게까지 넓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시청자들이 도촬의 자극에 그만큼 익숙하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도촬 영역의 확대는 사회고발프로그램에서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다. SBS의 ‘긴급출동 SOS24’가 그 선두주자다. 이 프로그램이 그런 자극적인 도촬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시청층의 비판과 함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프로그램 자체의 시도에 대한 박수라기보다는, 사회와 국가가 하지 못한 것을 TV가 이런 식으로라도 음지에서 양지로 끄집어냈다는 부분에 있다. 즉 이 프로그램의 공감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사회에 대한 시청자들의 분노와, 그걸 자극적으로 끌어내는(이성적인 접근이 아니다) 프로그램의 수위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자극만을 쫓는 드라마들
“이제 이런 설정이 지긋지긋하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듣고 있는 KBS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는 드라마에도 이제는 이러한 하드 코어가 하나의 ‘시청률 올리기 수단’으로 쓰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래 구성 자체가 얽히고 설키는 긴밀한 상황전개에 있지 않은 이 드라마는 그 느슨한 상황 속에 자극적인 장면과 구도를 연속적으로 늘어놓는다. 이것을 드라마로 봐야 할지 아니면 ‘사회 고발 프로그램’으로 봐야 할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이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그 특유의 자극적인 낚시질 때문이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딱 걸리게 되면 그 답답함과 분노로 인해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채널을 돌리기가 어렵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채널 고정의 원인이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얘기하려는 내용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하드 코어가 언제고 어느 순간에 보아도 자극적인 것처럼, 단지 에피소드적인 순간적 설정이 주는 아찔함에 눈이 가는 것뿐이다. 이런 드라마들의 역기능은 시청자들의 입맛을 강한 자극으로만 반응하게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이렇게되면 우리의 드라마를 보는 미각은 단맛, 쓴맛, 신맛 같은 걸 다 제쳐두고 오로지 자극적인 매운 맛에만 길들여지게 된다.

경쟁이 불러온 하드코어, 그 끝은?
이렇게 하드코어가 난립하게 된 것은 과도한 경쟁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사간의 경쟁에 케이블의 도전장이 던져지고, 여기에 외주제작사들의 경쟁까지 겹쳐지면서,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이다.

이 속에서 연예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 하드코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심지어는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쌩얼 전략’의 등장은, 신체적, 정신적 굴욕의어가 이제 TV를 장악했다는 걸 말해준다. 이것은 또한 좋은 캐릭터, 좋은 이미지보다는 튀는 캐릭터와 이미지가 더 우선하는 작금의 연예계 상황을 보여준다.

끊임없는 자극, 그것은 어찌 보면 시대의 흐름이고 본래 TV의 존재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함이 남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시청자들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는데 있다. 하드코어의 끝에 남는 것은 카타르시스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허탈함과 더 큰 자극에의 희원뿐이라는 데 있다.

영화를 통해 보는 우리시대 아파트의 실체

최근 삼풍백화점 붕괴를 소재로 한 영화 ‘가을로’의 주연을 맡은 유지태씨의 ‘삼풍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그가 한 말의 골자는 “백화점이 무너진 자리에 고가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며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 자리에 위령탑 하나 없을 수 있나”, 그것이 “한탄스럽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같은 소재의 영화 주연을 맡은 연기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꼭 자신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들렸던 모양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같은 유지태씨의 발언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이다. 그 중 “그 비싼 땅을 왜 놀리냐”는 댓글에는 유지태씨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다. 유지태씨는 “자기도 할말은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별 것 아닌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던 유지태씨의 발언이 일으킨 일련의 파장은 좀 비상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유지태씨의 담담한 발언에 대한 반응들이 어딘가 오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혹시 유지태씨와 네티즌, 혹은 아파트 거주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 저 밑바닥에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괴물의 존재가 있는 건 아닐까.

아파트라는 괴물의 힘
그 괴물의 이름은 아파트다. 이명박 전 시장이 28살의 나이에 이사가 되어 앞날을 보고 뛰어들었다는 그 아파트. 평당 몇 천만 원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가치로 팔려나가는 아파트. 그럼에도 분양하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밤잠 안자고 줄을 서는 아파트. 분양권 당첨이 마치 로또 복권 당첨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을 그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아파트.

바로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다. 강풀의 만화를 영화화한 ‘아파트’가 그 촬영장소로 사용됐던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재개발 지역의 플래카드가 토지공사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각각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받았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영화가 현실의 한 부분을 건드리면서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며 그 중심에는 모두 아파트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아파트에 어떤 유령이 깃들었길래 이런 논란을 만들었던 것일까.

아파트 아래 묻혀진 피의 기억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는 영화 ‘짝패’와 ‘비열한 거리’ 그리고 ‘아파트’를 분석하는 글(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에서 폭력, 공포 영화 속에 부동산 담론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짝패’와 ‘비열한 거리’에 등장하는 폭력과, ‘아파트’에서의 공포 그 밑바닥에는 아파트라는 욕망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물론 아파트라는 사회적인 괴물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을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거의 동시대에 그 배경으로서 아파트가 등장했다는 것은(그것도 폭력과 공포의 대상으로서), 여러모로 의미를 되새겨볼 만한 문제가 된다.

여기서 폭력과 공포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피의 기억’이 될 것이다. 아파트는 ‘피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아파트가 세워지기 위해 누군가는 그 동네를 떠나야했거나 쫓겨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거의 생존을 두고 피를 흘렸던 것이다. 여기서 조폭은 부동산에 대한 환상을 갖고 부동산을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 소유하지 못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짝패’의 필호(이범수 분)는 부동산을 위해 자신의 친구를 죽이고, 와 ‘비열한 거리’의 병두(조인성 분)는 철거로 쫓겨날 처지에 있는 자신이 타지역의 재개발에 앞장선다. 그들은 결국 그렇게 소원하던 아파트 한 채 얻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으로 이 부동산 사업이 끝나지 않는다는 예고다. 그들은 희생되지만 그 뒤에 있는 진짜 부동산 대부들은 살아남는다(짝패의 조사장과 비열한 거리의 황회장). 그러면 그들은 그 후에 어떻게 했을까. 새로운 제2, 제3의 필호와 병두를 기용해 이 돈 되는 아파트 사업을 하지 않았을까.

살아남은 것은 아파트뿐
부동산의 측면에서 볼 때, ‘짝패’와 ‘비열한 거리’가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까지의 상황을 그렸다면 ‘아파트’는 그런 피를 기반으로 세워진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아파트의 이미지는 그것이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신분증과 결탁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가 아파트를 갖는 순간, 그 아파트는 입주자의 신분증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아파트라는 욕망과 그 안의 주인이 되어야할 입주자의 관계는 역전된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니고, 어디에 있는 몇 평, 시가 몇 억 원짜리의 아파트에 우리가 사는 것이다. 우리가 아파트를 소유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아파트에 종속된다. 아파트를 얻고 길게는 30년 동안 그 아파트의 원금과 이자를 내기 위해 뼈빠지게 일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멀쩡해 보이는 아파트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공포라는 장르는 늘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목적으로 탄생한다. 누군가 그 아파트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그 욕망의 분출을 정당화한다. 아파트가 가진 이 두 얼굴(화려한 욕망과 이면의 추악함)에 관객들은 동화되면서 공포로서 자신 속에 있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결국 세진(고소영 분)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세 편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게 있다. 바로 아파트라는 괴물이다.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을까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그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강남의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모든 이들의 욕망이 모이는 그 곳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연일 TV에 순식간에 생매장된 사람들의 아비규환을 비추었지만 거기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비평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삼풍이 무너진 것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반복에 무덤덤해졌다고나 할까.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파트라는 괴물을 쳐다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는 재개발 문제로 인해 죽은 여러 사람들에 주목하던 것이 차츰 피의 기억을 잊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여전히 아파트가 들어선다. 이러한 무덤덤함, 분노하지 않음이 가져온 결과는 실로 참담하다. 희생은 당연한 것이 되고 이제는 그것이 새로 세워질 건물에 대한 기대감쪽으로 채워진다.

유지태씨와 아파트 거주자, 그리고 네티즌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말들은 그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징후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아파트에 민감한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우리는 모두 아파트를 소유하려 하지만 그 기저에 있는 것은 이 괴물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곳에 입성하지 못하면 저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없다는 것. 자본주의의 신분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그 공포심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적극적인 아파트 공화국에의 참여다. 이것은 마치 공포정치가 대중들을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처럼도 읽힌다. 분노해야할 일에 분노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어떤 폭력의 시스템에 침묵하는 꼴이 된다. 침묵은 적극적인 참여의 예고편이다. “분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영화 ‘가을로’가 우리 가슴속에 침묵하고 있던 피끓는 분노를 끄집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수의 드라마 진출이 말해주는 것

요즘 드라마는 단연 중견연기자들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줌마 연기자들의 컴백과 그 성공이다. ‘투명인간 최장수’에서 연기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던 ‘채시라’, ‘발칙한 여자들’에서 발랄깜찍한 역을 소화해낸 ‘유호정’,‘주몽’에서 특유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는 오연수, 이들은 연륜에 걸 맞는 연기내공을 보여주며 새로운 아줌마 연기자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황진이’의 김영애는 중견연기자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여우야 뭐하니’로 복귀한 고현정은 새로운 연기변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중견 남성 연기자들의 두각은 사극에서 빛을 발한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그 각축전이라 할만하다. 먼저 드라마 ‘주몽’을 보면 주몽의 든든한 후견자로 드라마의 뼈대역할을 해주고 있는 전광렬,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계인이 대표적이며 ‘연개소문’에서는 단연 김갑수가 돋보인다. ‘대조영’은 실로 중견 남성 연기자들의 종합선물세트를 보는 듯 하다. 87년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데뷔한 이래 연기내공 20년 세월을 거친 최수종은 시청자들의 혼을 빼는 연기력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연개소문 역의 김진태, 양만춘의 임동진, 대중상의 임혁은 ‘대조영 포스 3인방’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여기에 적으로 등장하는 이덕화와 정보석의 연기가 더해지면서 드라마는 점점 팽팽한 긴장감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중견 연기자들의 두각이 말해주는 것은 뭘까. 물론 어떠한 역할이든 100% 소화해내는 연기 9단이라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드라마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인 연기자들은 보이지 않고 가수들만 보이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혹 진정한 신인 연기자들의 실종이 불러온 공백을 우리네 든든한 중견 연기자들이 버텨주고 있는 건 아닐까.

가수가 드라마에 진출하게 된 사연
과거에 가수의 드라마 출연은 파격적인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산울림의 김창완이 될 것이다. 베스트 극장 등을 통해 얼굴을 내민 김창완은 이제 중견 연기자라 할 만큼 다양한 드라마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한 이현우는 ‘옥탑방 고양이’를 시작으로 최근 ‘독신천하’까지 총 6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하지만 이들은 드라마에서 주연이라기보다는 조연에 가까운 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수의 드라마 진출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어딘지 어색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주연급으로 발탁되고 있는 가수들은 얘기가 다르다. 비, 강타, 에릭, 환희, 세븐, 윤은혜, 정려원 등은 이제 가수들도 본격적인 드라마 진출의 포문을 열었다는 걸 말해준다. 최근의 ‘궁2’ 캐스팅 논란은 이러한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이 가져온 공채연기자들의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시청자들도 검증 받지 않은 가수들의 연기 진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은 그 이유가 명백하다. 음반시장의 불황이 가수로 투자해 키워놓고 특별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기획사 측면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홍보하는 데 있어 드라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한 가수들 스스로도 이제 노래 이외에 이미지를 가져야 성공하는 시대라는 걸 알고 있다. 최근의 TV 가요 프로그램의 퇴조로 가수들이 얼굴을 들이밀 공간이 없어졌으며 이로 인해 이제는 TV 프로그램(그것이 오락이든 드라마든) 속으로 직접 뛰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드라마 제작사와 방송사들의 이해가 공조한 면이 있다. 외주 제작이 많아진 현실은 방송사에서 뽑은 공채 연기자보다는 인지도 있는 가수가 보다 쉽게 드라마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제작사 입장에서도 가수가 신인 연기자보다 드라마를 홍보하기가 더 쉽다.

그들은 연기자인가 가수인가
그런데 이렇게 드라마에 진출한 가수들을 우리는 가수로 봐야 하나 연기자로 봐야 하나. 투잡시대에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할 수 있겠지만 드라마의 질을 두고 볼 때 이 부분은 중요하다. 드라마는 아마추어의 장이 아니며 철저한 프로의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안 되는 대사, 표정연기, 동작은 단 한 순간이라도 극의 집중도를 여지없이 떨어뜨려 놓는다.

그렇다면 가수의 드라마 진출의 준거로 종종 활용되는 성공사례는 어떨까. 그들은 진정으로 연기자로 변신했던 것일까. 드라마의 성공은 대본과 연출, 연기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들 가수들이 등장해 성공한 드라마를 그들 연기력의 성공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것은 오히려 캐스팅의 성공이 될 것이다. 캐스팅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 연기자는 연기를 해야한다는 부담을 덜게 된다. 이런 드라마는 가수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극으로 가져와 활용할 뿐, 연기를 강요하지는 않는 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가수 캐스팅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 황인뢰 감독의 모 매체와의 인터뷰하면서 ‘궁2’의 캐스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에 대해 “일종의 ‘이미지 캐스팅’이라 할 수 있는데 연기하게 될 캐릭터와 어떤 배우가 가장 잘 어울릴 것인지 고민했다. 연기경험이 있는 사람이든 신인이든 이미지가 우선한다고 생각하고 극중 이미지와 가장 흡사한 사람을 뽑는데 최우선의 포인트를 두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이제 드라마가 연기자의 연기력보다는 극중 캐릭터와 딱 맞아떨어지는 이미지의 배우를 발굴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신입은 없고 경력만 있다
가수의 드라마 진출이 말해주는 것은 드라마 제작사들의 배우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그 변화가 가져온 상황은 실로 심각하다 할 수 있다. 외주제작 비율이 60%를 넘어서고 드라마 외주제작사들간의 무한 경쟁이 불러온 것은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망령이다. 이 속에서 연기자와 제작사간에는 과거와 같은 ‘질책하면서 키워주고 함께 가는’ 가족 같은 개념이 사라졌다. 이것은 마치 현 취업시장을 보는 듯 하다. 키워줄 여력은 안되고 당장 써먹어야 하니 신입은 없고 경력만 있는 꼴이다(물론 이건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된 이미지의 신입 경력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 위험한 것은 연기자들 스스로 이런 시류에 굴복한다는 점이다. 진정한 연기자의 길보다는 보다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연기만 하게 되며 그것은 결국 연기자의 단명을 가져온다. 연기자란 자기 성격에 맞는 캐릭터를 찾아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떠한 역이라도 자기 스스로 소화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연기자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최불암씨는 ‘나를 작품에 맞추는 배우’와 ‘작품을 나에게 맞추는 배우’로 나누어 쓴 소리를 했다. 요즘은 후자에 머무는 배우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앞으로 10년, 아니 5년 후에는 한국 드라마의 허리를 든든히 맡아줄 중견배우들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지금의 중견 배우자들이 과거 끝없는 자기변신을 통해 쌓아온 내공이 이제 빛을 발하듯이, 앞으로 중견 배우자가 될 신인 연기자들의 발굴과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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