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2’, 한국형 시즌제 드라마의 이정표 세울까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시즌2로 돌아왔다. 사실 시즌1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병원을 둘러싼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이 변함없음이 이 시즌제 드라마의 최대 강점으로 부각됐다. 무엇이 이런 결과로 이어진 걸까.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 그대로... 그래서 더 빠져드는

작년 3월 시작했던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 첫 회를 6.3%(닐슨 코리아)의 시청률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가 12회 14.1%의 최고시청률로 시즌1을 마무리 지었다. 엄청난 상승곡선을 그린 건 아니지만, 아주 천천히 하지만 조금씩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며 마음을 사로잡았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훈훈하고 잔잔한 감동과 설렘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던 드라마였다. 특히 피가 흐르고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자극적 상황들을 그리곤 하던 의학드라마의 흐름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그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의학드라마라기보다는(그렇다고 전문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휴먼드라마이자 멜로드라마처럼 시청자들에게 다가온 면이 있었다. 

 

매주 2회가 아닌 1회 방송을 한 점과, 보통의 미니시리즈가 16부작으로 구성되는 데 반해 12회로 마무리 지은 점도 남달랐다. 매주 2회의 16부작 미니시리즈는 그 편성의 특성만으로도 벌써 공격적이다. 전쟁을 치르듯 시간에 쫓기는 촬영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2회 연속이 갖는 스피드와 자극으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는 이런 기존의 관행을 거부했다. 대신 한 회 한 회 따뜻한 에피소드들을 정성껏 채워 넣었고, 사랑스런 캐릭터들의 매력을 자극 대신 시청자들에게 어필했다. 결과는 고무적일 정도로 대성공이다. 아예 처음부터 시즌제를 겨냥하고 만들었고, 그래서 시즌1에 모든 걸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가도 황소걸음으로 가는 방식을 택했다. 시청자들은 시즌1이 끝나자 바로 시즌2를 기다렸다. 

 

본래는 연말에 시즌2가 계획되었지만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거세지면서 촬영과 방영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6월 시즌2 첫 회를 내놨다. 기다림이 만든 효과일까. 첫 회 시청률이 10%로 시즌1의 첫 회부터 훌쩍 뛰었고, 시청자들의 여지없는 호평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호평의 이유가 흥미롭다. 보통 시즌제 드라마라고 하면 시즌이 거듭되면서 색다른 반전이 이어지거나 혹은 자극이 더해지는 방식을 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2>는 시즌1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따뜻한 의사들과 환자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고, 코믹한 상황들이 주는 웃음과 더불어 한 회마다 병원 동기 5인방이 모여 노래를 연주하고 부르는 틀도 달라진 게 없었다. 게다가 시즌1에서 만들어진 멜로 라인은 더욱 깊어져 시청자들을 애틋하게 만들었다. 달라진 게 없어서 더 빠져든다는 이례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자극 콘텐츠 시대, <슬기로운 의사생활2>는 뭐가 달랐나

최근 들어 시즌제 드라마는 이제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는 않게 됐다. 최근에 시즌제로 돌아온 드라마들만 봐도 이런 변화는 쉽게 읽혀진다. 시즌3로 돌아온 SBS <펜트하우스>는 물론이고 시즌2로 돌아온 TV조선 <결혼작사 이혼작곡> 그리고 무려 시즌4로 돌아온 tvN <보이스>가 그 사례들이다. 그런데 이들 시즌제 드라마들을 보면 시즌을 거듭하면서 얼마나 자극의 강도가 높아져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펜트하우스3>는 시즌2에 감옥에 갔던 헤라팰리스 사람들이 감옥에서 겪는 갖가지 폭력과 기행들로 시작하고, 심지어 감옥에 수감 중이던 주단태(엄기준)가 감옥 밖으로 나와 로건 리(박은석)를 폭탄으로 살해한다. 그런데 갑자기 로건 리의 형이라고 하는 알렉스(박은석)가 또 등장한다. 이미 시즌2에서도 시즌1에 죽었다고 끝을 맺었던 심수련(이지아)이 사실은 쌍둥이 나애교였다는 식으로 처리된 바 있어, 로건 리 역시 알렉스라는 인물로 다시 부활하는 이 대목에서 시청자들은 반전의 쾌감이 아닌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데 이런 무리수가 나오게 된 건 다름 아닌 시즌제에서 더 강한 이야기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자극의 강박 때문이다. 

 

<결혼작사 이혼작곡2>는 시즌1이 그렸던 ‘내로남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역시 어딘가 좀 더 센 이야기에 대한 강박이 엿보인다. 그 단적인 사례가 시즌1에서 사망한 신기림(노주현) 원장이 귀신이 되어 자신의 집에 출몰하는 장면이다. 물론 임성한 작가가 워낙 좋아하는 무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껏 로맨스와 불륜 사이를 오가던 이야기에 갑작스런 귀신의 등장은 어딘가 ‘자극을 위한 자극’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보이스>는 본래 OCN 시리즈로 나왔을 때부터 거의 ‘공포’ 수준에 가까운 스릴러를 무기로 내세운 장르물이었다. 사이코패스가 무고한 이들을 뒤쫓아 살해하는 장면들은 그래서 마치 공포영화 속 괴물에게 쫓기는 상황들을 연상케 하곤 했다. 시즌4는 서커스맨이라 불리는 일당이 등장해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드라마들은 이제 19금이 익숙해졌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심지어 다시 부활해 복수를 하는 자극이 드라마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이런 드라마들의 범람은 당연히 반대급부를 불러온다. <슬기로운 의사생활2>나 SBS <라켓소년단> 같은 드라마들이 최근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은 건 그래서다. 자극과는 정반대로 따뜻한 힐링과 인간애가 느껴지는 드라마에 마음이 가게 된 것이다. 

 

애초 기획대로 시즌제 드라마의 이정표 세울까

본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해외의 <프렌즈> 같은 시즌제 드라마를 목표로 기획된 작품이다. 신원호 PD는 지난해 시즌1의 제작발표회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한국판 <프렌즈>가 되길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애초에 캐스팅을 하면서 배우들에게 시즌3까지는 가지 않을까 하고 얘기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즌2의 시작을 보니 이 말이 그냥 내놓은 허언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미 시즌1에 매력을 전했던 인물들은 더 선명해졌고, 관계들은 깊어지면서 변주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의학드라마로서 빼놓을 수 없는 환자들과 의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도 여전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화수분처럼 피어나 서로 관계를 맺어가고, 매 회 병원에서 벌어지는 소박해 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촘촘히 구성되는 방식은 시즌3가 아니라 더 오래 지속돼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구조다.

 

게다가 매주 1회 방영되는 12부작 시즌제라는 새로운 드라마 편성의 틀은 어쩌면 향후 우리네 시즌제 드라마의 좋은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보다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인데다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보다 행복한 노동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를 갖게 되는 건 신원호 PD가 <응답하라> 시리즈로 우리네 드라마 제작방식에 일대 전환을 불러 일으켰던 전적이 있어서다. 우리네 드라마 제작이라고 하면 대부분 작가를 맨 꼭대기로 세우고 그 밑으로 PD와 배우, 스텝들이 서는 수직적 위계구조로 이뤄져 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예능 방식으로 집단 창작을 시도하면서 신원호 PD는 훨씬 수평적 협업을 통한 드라마 제작이라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내놨다. 지금은 이러한 협업 방식이 드라마 제작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신원호 PD는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드라마 편성 방식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인 제작방식의 고민은 고스란히 따뜻한 인간 냄새가 나는 드라마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글:매일신문, 사진:tvN)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멸망’과 ‘간동거’의 평행이론

 

로맨틱 코미디의 남녀 주인공은 당대의 대중들이 가진 욕망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와 <간 떨어지는 동거>는 유사한 지점이 있다. 초현실적 존재와의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고 있어서다.

어느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이젠 ‘멸망’과 밀당하는 판타지 멜로의 시대

사귀던 남자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고, 뇌종양까지 발견되어 100일 시한부 판정을 받은 탁동경(박보영)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외친다. “세상 다 망해라! 다 멸망해버려!” 그런데 그 날 새벽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보니 웬 잘 생긴 남자가 서있다. 그는 불러서 왔다며 자신을 ‘멸망’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는 멸망(서인국)과 탁동경의 밀당 판타지 멜로가 시작된다. 

 

사실 초현실적인 존재와의 사랑이야기는 완전히 색다른 건 아니다. 이미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를 통해 우리는 도깨비 김신(공유)은 물론이고 저승사자(이동욱)의 매력에 푹 빠져본 경험이 있다. <멸망>은 이 작품을 쓴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였던 임메아리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도깨비>를 닮았다. 잘 생긴 초현실적인 존재의 갑작스런 등장과 그와 얽히는 판타지 멜로 그리고 과거사의 비극까지, <멸망>의 세계관은 유사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도깨비’가 초현실적인 존재이긴 해도 최소한 설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형상이 있는 반면, ‘멸망’은 말 그대로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 추상적 관념을 그려낸 실재 인물과 만나고 사랑하고 아파하며 아마도 헤어질 그 과정들은, 그래서 탁동경이라는 절망에 빠진 인물이 그 절망(아마도 멸망 같은)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극복하는가의 과정처럼 그려지는 면이 있다. 예컨대 이 드라마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멸망이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탁동경은 그 멸망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걸 선택한다.

 

바로 이런 ‘추상’과의 판타지 멜로가 만들어내는 철학적인 세계관은 그래서 이 평이한 로맨틱 코미디를 차별적으로 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사실 이러한 세계관을 빼놓고 보면 <멸망>은 지극히 평범한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다. 함께 동거를 하고 계약서를 쓰고 밀고 당기는 관계를 보이다가 사랑하게 되는 드라마. 하지만 탁동경이 사랑하게 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이유’인 멸망이라는 사실은 이 평이한 로맨틱 코미디에 무게감을 만들고 나아가 운명적인 비극의 향기까지 드리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즉 그 추상적 존재와의 관계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려는 시청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흥미를 주지만, 그것이 너무 복잡하거나 낯설게 느껴지는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뻔하고 틀에 박힌 멜로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한 가지 지평만은 넓힌 공적이 있다. 그건 이제 멜로가 ‘멸망’ 같은 추상적 존재와의 밀당 정도는 다뤄야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다. 

간 떨어지는 동거

‘멸망’과 다른 듯 닮은 ‘간동거’의 판타지 멜로

tvN 수목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는 그 이야기의 소재를 구미호 설화에서 가져왔다.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최근 <구미호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재해석과 진화를 거듭해온 설화의 주인공이다. <간 떨어지는 동거>가 특이한 건 신우여(장기용)라는 구미호가 무려 999살을 산 존재라는 점이다. 고려 현종 때 태어난 이 인물은 그래서 조선시대를 거쳐 구한말을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어딘가 <별에서 온 그대>의 외계인 도민준(김수현)을 닮았다.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골동품들이 가득 채워진 집의 풍경이 그렇고, 남다른 능력(도술)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 그렇다. <간 떨어지는 동거>의 구미호 신우여는 그 긴 세월을 살며 인간에게는 정을 주지 못하는 ‘어르신’이지만, 어쩌다 우연히 그의 구슬을 삼키게 된 이담(혜리)을 그는 조금씩 마음에 담기 시작한다. 구슬을 빼내는 건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담의 기억이 모두 지워지고 그렇다고 그대로 놔두면 구슬에 정기를 빼앗겨 이담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우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멸망>과 <간 떨어지는 동거>는 언뜻 보기에는 확연히 다른 작품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비슷한 요소들이 적지 않다. 즉 멸망이나 구미호 같은 초현실적 존재가 등장하고, 그와의 밀당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며, 이들은 결국 동거를 하게 되고 함께 사는 동안의 계약서를 쓴다는 점도 유사하다. 또한 이 멜로가 순간순간을 웃음으로 채워 넣는 코미디라는 장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과, 쉽게 이뤄질 수 없는 비극을 담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인간과 초현실적인 존재 간의 사랑이니 어찌 쉽게 이뤄질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유사한 지점들이 많은 건, 이 두 드라마가 전형적인 ‘청춘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들을 따라가고 있어서다. 즉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그대로 두 작품이 모두 쓰고 있지만, 거기에 ‘멸망’이나 ‘구미호’ 같은 초현실적 존재를 더함으로서 색다른 관전 포인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멜로라는 장르의 안간힘이 느껴지는 이유

우리네 드라마에서 한때 멜로는 중심적인 장르였다. 그것은 최근 등장한 장르 드라마들보다 훨씬 더 ‘맨 파워’에 의해 힘을 발휘하는 장르가 바로 멜로이기 때문이다. 액션이나 화려한 CG 혹은 판타지적 세계를 세트나 의상 등을 통해 구현해내곤 해야 하는 장르드라마들은 더 큰 제작규모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담는 멜로드라마들은 잘 만든 대본과 연기자들의 감정 연기 등으로 가성비 높은 몰입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남녀 간의 사랑을 담는 멜로만큼 본능적인 소재도 없다. 그래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기까지 트렌디 멜로 드라마들은 우리네 드라마를 대표하는 장르였다. 2002년 만들어졌던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첫 한류의 불씨를 지폈던 것도 그 동력은 바로 멜로였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그 후 20년 간 급격히 변화했다. 너무 많이 나온 멜로드라마들은 이제 시청자들이 그 공식을 꿰고 있을 만큼 익숙한 문법이 되어버렸고, 2010년대까지도 그토록 쏟아져 나온 신데렐라 판타지의 멜로드라마들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대중들의 ‘성인지 감수성’ 때문에 변화를 요구했다. 김은숙 작가가 2000년대 초반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연인> 3부작으로 멜로 장인에 등극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신데렐라 스토리 덕분이었지만, 이 작가는 2016년부터 <태양의 후예>,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의 대작 3부작을 통해 변신했다. 장르와 더해진 멜로의 퓨전을 성공적으로 실험한 것. 

 

<멸망>이나 <간 떨어지는 동거> 같은 초현실적 존재를 등장시켜 만들어가는 판타지 멜로는 그래서 이 흐름 안에서 보면 너무 익숙해져 위기에 빠진 멜로의 안간힘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그 문법은 익숙하지만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새로움을 시도하려는 안간힘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간힘을 성공했을까. 두 작품은 모두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소재와 장르를 더해 새롭게 만들려 한 시도는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지만, 그 껍질을 벗기고 나면 여전히 같은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어쨌든 멜로는 남녀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에서는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시대적 변주와 창조적 변화가 요구될 뿐.(글:매일신문, 사진: tvN)

‘라켓소년단’, 변방으로 가 중심 강박을 털어버리다

라켓소년단

“저는 내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국제대회에 나간 한세윤(이재인)은 코치에게 다음 날 경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는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일일이 조언을 해주는 코치가 단식대회에 나가는 한세윤에게는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아서다. 그러자 코치는 말한다. “하던 대로. 그냥 너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물론 이런 말은 코치가 한세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늘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이기는 선수. 그래서 이기는 게 ‘당연한’ 선수이기 때문에 뭐라 코치를 해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코치의 말에 한세윤은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이다. 그 ‘당연한 우승’에 대한 기대가 만만찮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 전 잠도 못자고 두통으로 시달리던 선수였다. 

 

친구부터 코치, 동네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영상으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그것이 기쁘면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그에게 의외의 영상 메시지 하나가 온다. 윤해강(탕준상)이 보낸 메시지다. “내 생각에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어. 지금도 충분히 충분하고 대단히 대단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져도 돼. 한세윤.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그동안 고생했다.”

 

SBS 월화드라마 <라켓소년단>은 배드민턴이라는 스포츠의 세계를 다룬다. 뭐든 1등을 해야 알아주고 승자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우리네 경쟁사회에서 스포츠의 세계만큼 ‘승자독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도 없다. 인기 종목이야 그나마 더 여지가 열려 있지만, 비인기 종목으로 국제대회에서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끝나고 나면 잊히기 마련인 비인기종목은 더더욱 그렇다. 국내 1위가 아니라 세계 1위가 되어도 주목받지 못하는 종목도 있으니.

 

<라켓소년단>은 스포츠의 세계를 가져와 승자 독식 강박에 빠져있는 우리네 현실을 에둘러 끄집어낸다. 선수들은 저마다 배드민턴이 즐거워서 하다가도 우승하지 못하면 계속 그 운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늘 이겨서 우승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선수는 한 번 지면 그 충격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러니 우승은커녕 소년 체전을 앞두고 같은 팀에서 나갈 3명을 뽑기 위해 한 명의 탈락자를 뽑는 평가전마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운동은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나우찬(최현욱)은 늘 배드민턴을 하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 때문에 힘겨웠지만, 갑자기 “잘 해보라”는 말에 불안감을 느낀다. 스스로도 팀 내에서 자신이 가장 뒤쳐진다 여기고 있는데다, 그 잘 해보라는 아버지의 달라진 태도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의 불안감은 그리고 사실 그대로다. 아버지는 이제 곧 고1이 될 아들이 더 이상 배드민턴에 길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기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네 승자 독식 사회의 풍경이다. 

 

<라켓소년단>이 굳이 도시가 아닌 땅끝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소외된 ‘변방’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세워두고, 마치 그 곳으로 입성해야 ‘승자’가 되는 사회, 그 곳에서 어느 곳에 몇 평짜리 아파트를 가져야 성공으로 여기는 사회, 그런 지표들이 그는 물론이고 그 자녀들의 삶에까지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회에서 변방의 소외는 폭력적이다. 하나의 중심을 세우면 그 주변이 모두 소외된다는 점에서, 승자로 돈으로 지위로 중심이 세워지는 사회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라켓소년단>을 그래서 그 땅끝마을로 간 소년이(그것도 하고 싶은 야구를 잠시 접어두고) 그 곳에서 팀원이 없어 팀 자체가 와해될 위기에 놓여 있는 배드민턴부에 들어가 함께 소년 체전을 향해 가는 이야기 속에, ‘승자 독식 강박’과는 정반대의 ‘망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는다. 윤해강은 만만찮은 승부욕의 소유자지만, 그렇다고 승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한세윤에게 “져도 돼”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대단하다 말한다. 

 

그 누구도 우리 사회에서는 “져도 돼”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꼭 이기고 합격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 승자 독식의 강박 속에서 우리는 좀체 즐겁게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 이겨야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사회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긴다면 누군가는 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꼭짓점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승자는 더 많은 패자들을 낳는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윤해강이 툭 던지는 “져도 돼”라는 말을 듣고는 어딘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그래서 저 경기를 앞두고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한세윤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매일 한세윤이 마주한 그런 경기를 앞두고 살아가는 처지가 아닌가. 져도 망해도 그 과정의 최선을 누군가 알아봐주고 기꺼이 박수 쳐주는 그런 사회에 대한 열망이 이 땅끝마을로 간 소년소녀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사진:SBS)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 청춘 멜로로 그려낸 5.18 광주

 

청춘 멜로와 5.18 광주.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풋풋한 청춘들이 어떻게 그 시대의 아픔 앞에 고통 받았는가를 멜로의 틀로 그려낸다. 그간 5.18을 담았던 콘텐츠들과 이 드라마는 어떤 차별점을 갖고 있을까.

오월의 청춘

<오월의 청춘>, 80년 광주라는 시공간이 만든 무게감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부모가 강제로 시키려는 정략결혼 앞에 헤어질 수밖에 없는 청춘 남녀...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그 액면만 보면 전형적인 청춘 멜로, 아니 다소 상투적으로까지 보이는 옛날 멜로처럼 보인다.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부터가 그렇다. 누구나 선망할만한 서울대 의대 졸업반이지만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있는 황희태(이도현)는 어딘지 반항기가 있어 보이는 현대판 왕자님 같은 캐릭터다. 신군부와 줄을 대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보안부대 대공수사과 과장 황기남(오만석)의 혼외자식인 그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집안의 아들이지만 어딘지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겨 엇나가는 남자 주인공이다. 반면 고등학교 때 절친 이수련(금새록)과 학교 재단의 비리에 맞섰다가 아버지의 알 수 없는 강권으로 자퇴서를 낸 후 홀로 노력해 간호사가 된 김명희(고민시)는 현대판 신데렐라 같다. 그는 그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간호사가 됐고, 이제 유학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알고 보면 황기남과 김명희의 아버지 김현철(김원해)은 과거 악연을 가진 인물들이다. 김현철의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황기남이 그를 연좌제로 몰아 지금껏 핍박해온 것. 그러니 원수지간인 아버지들 사이에 선 황희태와 김명희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만찮은 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다소 익숙하고 심지어 옛날 멜로처럼 보이는 남녀 관계의 설정을 갖고 있지만 <오월의 청춘>은 그 시공간을 80년 광주로 삼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 모든 설정들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해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아픈 시대적 비극들이 이 뻔해 보이는 청춘 멜로에 어떤 ‘절박한 정서’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들은 너무나 풋풋하게 만나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이들 앞에 닥칠 거대한 비극이 눈에 밟힌다. 황기남은 마치 당시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은 신군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황희태를 김명희로부터 갈라놓고 대신 이수련과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는 모습이나, 이를 통해 사실상 이수련 아버지가 운영해온 사업체를 강탈하려는 이야기는 신군부가 당시 저질렀던 폭력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래서 이 뻔해 보이는 청춘 멜로는 80년 5월 광주라는 시공간을 가져옴으로써 시대적 비극이라는 무게감을 얻게 된다. 굳이 전면적으로 당시 신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들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 청춘들이 겪는 아픔 속에 시대성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5.18 민주화운동을 멜로로도 다룰 수 있게 된 건

<오월의 청춘>에 대해서 송민엽 PD는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당시 젊은이들이 사랑하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보편적인 감정을 그린 드라마”라며 “특정한 사건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봐 달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5.18 민주화운동을 전면적으로 다룬 시대극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남녀의 멜로에 더 집중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5.18 민주화운동의 이야기를 피하고 있는 드라마도 아니다. 황희태가 의대생이고 김명희가 간호사라는 설정이나, 황희태의 대학친구로 계엄군이 되어 광주로 투입될 김경수(권영찬) 같은 인물 그리고 김명희의 절친인 이수련 역시 독재 타도를 외치는 대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이야기가 80년 광주의 아픔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당시 시대상을 청춘남녀의 아픈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낸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지점은 이제 우리가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훨씬 유연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사실 5.18 민주화운동이 지상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건 1995년부터다. 당시 SBS에서 방영되어 ‘귀가시계’로 불리기도 했던 <모래시계>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당시까지만 해도 금기시 됐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제 영상들을 드라마 속에 그대로 담아 전해주었다. 최고시청률 65.7%를 기록했던 이 드라마는 SBS의 창사특집으로 방영되며 이 방송사의 위상을 단번에 높였고, 그 해의 백상예술대상은 TV부문 대상을 비롯해 작품상, 연출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극본상, 남자 신인연기상을 모두 <모래시계>에 안겼다. 1995년 <모래시계>가 이런 파격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1993년 들어선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이 추구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로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이 법정에 서게 된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모래시계> 이후,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꽃잎(1996)>, <박하사탕(1999)>, <화려한 휴가(2007)>, <26년(2012)>, <택시운전사(2017)> 같은 작품들이 그 사례다. <오월의 청춘> 같은 드라마가 이제 청춘 멜로라는 장르로 80년 광주를 다룰 정도로 유연해질 수 있게 된 건, 이처럼 시대 변화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이를 투영한 많은 콘텐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 이제는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기 시작하다

사실 90년대는 물론이고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치열함은 그 시대적 비극을 엄밀한 시대극의 틀 이외의 다양한 장르가 품을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오월의 청춘>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이 민주화 운동의 풍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지난해 방영됐던 tvN <화양연화>는 단적인 사례다. 최루탄에 의해 뿌연 연기가 퍼지고 깨진 돌들이 흩뿌려진 80년대 대학가의 익숙한 풍경으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딩대 민주화 투쟁을 했던 청춘들이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고 그 때의 순수했던 열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멜로로 그려냈다. 놀라운 건 당대에는 죽고 사는 절박한 문제였던 민주화 운동의 살풍경이, 2020년에 되돌아보는 시점에 의해 아련한 ‘추억’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로 보여 진다는 점이다. 물론 상처의 깊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시대적 아픔조차 한참을 지나 돌아보면 아련한 그리움으로 채색되기 마련인 기억의 마법이 작용한 탓이다. 복고는 이렇게 민주화 운동까지 하나의 향수 가득한 광경으로 품어낸다. <오월의 청춘>이 80년대라는 아날로그적인 시공간을 복고로 담아내듯이. 

 

현재 방영되고 있는 JTBC 금토드라마 <언더커버> 역시 민주화운동을 청춘 멜로와 스릴러 장르로 담아낸다. 이 드라마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대학생을 검거하기 위해 프락치로 접근했다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안기부요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여인과 가족을 꾸려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아내가 공수처장이 되면서 그를 막으려는 국정원의 공작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서 위기에 처한 한 남자의 고군분투가 그 내용이다. 흥미로운 건 <언더커버>가 BBC 원작 드라마라는 점이다. 즉 리메이크 과정에서 우리 식의 이야기로 풀어내기 위해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선택은 이 작품이 리메이크작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로컬 정서를 담아내는데 효과적이었다.

 

<오월의 청춘>은 이처럼 민주화운동이 보다 유연하게 다양한 장르들과 결합하기 시작한 지금의 달라진 시대 정서를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청춘 멜로로 풀어내고 있지만, 이들의 순수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앞으로 닥쳐올 5.18의 비극성이 더해진다. 물론 너무 익숙한 청춘멜로의 틀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시대성이 이 흔한 멜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글:매일신문,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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