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봉준호 ‘설국열차’

설국열차

꽁꽁 얼어붙은 지구.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무한궤도를 도는 설국열차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거기는 머리칸과 꼬리칸으로 나뉘는 계급체계가 존재한다. 꼬리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빈민가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머리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귀족처럼 호화롭게 살아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이 계급화된 설국열차 안에서, 머리칸으로 가려는 꼬리칸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설국열차’는 양극화되고 계급화된 세계를 은유하면서 그 대결이 과연 해법인가를 질문한다. 반란을 주도한 꼬리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전투를 치르며 앞칸으로 나아가 드디어 머리칸의 절대권력자 윌포드(애드 해리스)를 마주하지만 그가 하는 말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폐쇄된 설국열차에서 균형은 필수이고, 그 균형을 위해서는 학살, 폭동 같은 것들도 ‘과감한 해결책’이 된다는 것. 

 

꼬리칸의 해방을 외치며 앞칸으로 가는 문만을 향해 나아가는 커티스에게 남궁민수(송강호)는 말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이쪽 문을 여는 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이게 이제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그래서 이쪽 바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 얘기야.”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그랬지만 균형을 말하며 불평등한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윌포드와, 그 시스템을 깨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커티스의 대결은 대선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등장하는 양자대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양자택일만이 답일까. 남궁민수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문,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글:동아일보, 사진:영화'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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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진지함과 ‘아마존 활명수’의 발랄함을 넘나드는 배우

아마존 활명수

“저는 이번에 통역을 맡은 장 프리크손 빵게라입니다.” 영화 ‘아마존 활명수’에서 진선규 배우가 맡은 역할은 아마존에 있는 볼레도르라는 작은 나라에 양궁 감독으로 초빙받아 가게 된 진봉(류승룡)의 통역사다. 한국계 볼레드로인으로서 잘하진 않지만 한국어를 하는 이 인물은 그렇다고 볼레도르 언어 또한 능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진봉과, 그가 감독을 맡아 함께 하게 된 신이 내린 활솜씨의 아마존 전사 3인방 사이에서 엉뚱한 통역을 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그런데 이 이색적인 인물이 구사하는 볼레도르 언어가 예사롭지 않다. 그저 흉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짜 볼레도르 언어란다. 물론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볼레도르 언어보다 한국어로 연기하는 모습으로 대부분 채워졌지만, 진선규는 실제로 이 언어를 배우려 노력했고 촬영 당시에는 원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을 모두 연기했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인들이라면 잘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진선규는 왜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을까. 이것은 웃음에 초점이 맞춰진 코미디라고 해도 이 배우가 얼마나 연기에 진심을 담으려 하는 인물인가를 보여준다. 

 

사실 ‘아마존 활명수’는 기발하지만 엉뚱한 발상을 담은 코미디 영화다. 한때 양궁 국가대표 메달리스트로서 코리아 활명수(활을 잘 쏜다는 의미)로 불리던 진봉이, 이제는 구조조정 1순위의 회사원이 되어 그 위기를 벗어날 기회로 아마존에 있는 볼레도르의 양궁 감독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마존에 뚝 떨어진 진봉이 그 곳 원주민들과 벌이는 좌충우돌과 거기서 만난 아마존 전사 3인방을 양궁 선수들로 키워내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는 과정이 담겼다. 너무나 엉뚱한 이야기지만 한국과 아마존이라는 그 거리감을 단번에 좁혀줌으로써 허공에 붕 뜰 수 있는 이야기에 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얹어주는 인물이 통역사 빵식이다. 그러니 빵빵 터트리는 슬랩스틱류의 코미디 속에서도 양측 문화를 소통시키는 이 인물의 진정성이 필요해진다. 그가 굳이 볼레도르 언어까지 배워가며 연기를 준비한 이유다. 

 

진선규는 그 역할이 악역이든, 선역이든 혹은 지독한 비극이든 아니면 웃음 터지는 발랄한 코미디든 척척 제 몸에 맞는 옷처럼 입어버리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범죄도시’에서 빡빡 밀고 나와 위성락이라는 살벌한 악역으로 대중들의 눈도장을 찍었던 그가, ‘극한직업’에서 형사지만 잠복근무 하다 치킨집 요리사가 된 모습으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전해줬을 때 대중들은 전선규가 다채로우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배우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단독 주역을 맡은 건 작년에 개봉됐던 ‘카운트’에서가 처음이었지만, 다른 인물들과 함께 주연으로 나설 때마다 그는 자기만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국형 우주 배경의 SF 영화였던 ‘승리호’에서의 타이거 박이나, ‘공조2’에서 현빈과 대적하는 메인 악역 장명준, ‘외계+인2’에서의 능파 역할이나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전,란’에서 강동원의 스승으로 등장한 김자령 역할이 그 사례들이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남은 역할로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고, 범죄스릴러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통스러워도 범죄자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프로파일러 역할을 소화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갑자기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 안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생존게임을 다룬 ‘몸값’에서는 드라마 내내 팬티 한 장을 입고 하는 액션 코미디를 선보였으며, 오컬트 장르인 ‘악귀’에서는 민속학자 역할로 등장해 특별출연이었지만 마지막회까지 모습을 드러내며 사실상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극과 현대극, 스릴러와 코미디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모습이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하는 작품과 역할에 진심을 담는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은 진정성이 점점 중요해진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재작년 tvN에서 방영됐던 ‘텐트 밖은 유럽’은 사실상 이 프로그램을 이끄는 유해진과 여행 예능에 첫 출연한 진선규의 공조로 화제가 됐던 프로그램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영화 ‘공조2’에서 북한형사와 범죄조직 리더 장명주로 함께 출연해 치열한 대결을 벌인 바 있었다. 하지만 ‘텐트 밖은 유럽’에서 진선규는 너무도 선하고 순수한 소년미를 드러내면서, 서글서글하고 아재미 가득한 매력을 가진 유해진과 기막힌 형동생 케미를 선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달라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때 MC 유재석은 “어떤 게 진짜에요?”라고 물었는데, 그 때 진선규가 한 말이 걸작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며 ‘연기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이라고 했던 것. 그래서인지 최근 쿠팡플레이 ‘SNL코리아’에 출연한 진선규는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으로 큰 웃음을 줬다. 특히 개그우먼 이수지가 보이스피싱을 하는 린쟈오밍 역할로, 진선규가 위씅락 역할로 분한 ‘범죄도시의 사랑법’은 유튜브에도 소개되어 큰 화제가 됐다. ‘개그콘서트’에서 이수지가 했던 보이스피싱 개그와 ‘범죄도시’의 세계관을 엮어 기막힌 ‘격정 멜로’로 풀어낸 이 코미디 영상은 조회수가 160만을 넘기고 댓글이 900여개가 달리는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카멜레온 같은 완벽한 변신은 그냥 생겨난 결과가 아니다. 그는 작품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오는 배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몸값’을 찍을 때 그와 함께 연기했던 전종서는 촬영 2개월 전 리허설 때부터 진선규가 대사를 모두 암기해 와 깜짝 놀랐다고 인터뷰를 한 바 있다. 그만큼 어떤 역할이든 사전에 캐릭터를 분석하고 준비함으로써 남다른 자기만의 아우라를 갖게 됐지만, 진선규는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좋은 배우’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상태라고 자신을 낮춘다. 이번 ‘아마존 활명수’에서도 그에 대해 류승룡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런 캐릭터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그것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극찬했지만, 진선규는 오히려 “‘극한직업’ 이후로 다시 한 번 더 형 옆에서 코미디로 배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선악과 희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아우라를 그가 어떻게 갖게 됐는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낮은 자세로 진지하게 임하는 변함없는 진정성이 바로 그것이다. (글:국방일보, 사진:영화'아마존 활명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의심과 불안이 겹치자 생겨난 기막힌 심리 스릴러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정말로 엄마가 범인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너 때문이겠지. 엄만 너 볼 때마다 힘들었을 거야. 시신 묻은 게 떠올라서 괴로웠을 거고.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 그거 못견디겠어서 누구라도 죽이고 싶은 거잖아. 너. 장하빈. 엄마 그렇게 만든 건... 사람 때문 아니고... 의심이야.”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MBC 금토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대부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프로파일러인 아버지 장태수(한석규)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점점 그 현장에 딸 하빈(채원빈)의 흔적들이 나오자 불안해진다. 혹여나 딸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 될수록 사건의 실체가 아주 조금씩 드러난다. 하빈은 범인이 아니라 엄마를 죽게 만든 이들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출팸에 접근했다. 하빈의 친구였던 이수현(송지현)이 그 가출팸에 있었고, 무슨 일인지 엄마가 이수현의 사체를 땅에 묻은 사실을 알게 됐다. 하빈은 누군가의 협박으로 엄마가 죽게 됐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찾아 자기 손으로 복수하려 했다. 

 

하지만 장태수는 엄마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수현의 시신을 묻은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을 한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하빈 때문이었다. 하빈이 혹여나 이수현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이 이유였다. 그래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엄마가 대신 시체를 묻었다며 장태수는 그것이 ‘너 때문’이라고 딸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은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며 딸을 질책하는 말이 아니다. 엄마가 딸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의미다. 너무 사랑해서 조금 다른 아이이긴 하지만 보통 아이처럼 키우고 싶어했던 엄마였고, 그럼에도 이수현의 사체를 보고는 딸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걱정, 불안이 겹쳐지면서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거였다. 그 결과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파멸이었다. 장태수의 말처럼 하빈의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건 사람(하빈도 아니고 또 누군가의 협박 때문도 아닌) 때문이 아니고 의심(딸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때문이었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시청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미로 속에 빠뜨리는 이유는, 단순한 사건의 흐름과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밑에 깔려 있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누군가 범인처럼 보이고, 이상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런 행동을 하는 감정과 심리들이 숨겨져 있다. 가족이 범인일 수 있다는 데서 생겨나는 의심과 걱정이 뒤섞인 불안은 하빈의 엄마가 사체를 암매장하는 그런 일까지 벌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건 하빈의 가족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제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사건의 진실 속에서 또 한 축을 차지하는 박준태(유의태)와 그의 숨겨져 왔던 아버지 정두철(유오성) 그리고 박준태의 연인 김성희(최유화)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그것이다. 박준태가 술에 취한 채 잠든 후 깨어보니 옆자리에 죽어있던 송민아(한수아)를 보고 자신이 죽였다 착각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김성희에 의해 조작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 순간 등장한 김성희가 “차라리 술 때문”이라고 하라며 그의 아버지가 사람을 때려 죽였다는 사실을 꺼냄으로써 박준태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기막힌 건 그의 아버지 정두철이 이 일이 진짜 아들의 짓이라 부정하면서도 의심하며 자신이 송민아의 사체를 토막내 처리했다는 점이다. 저 하빈의 엄마가 이수현의 사체를 처리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다. 즉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그리려 하는 건, 가족에 대한 작은 의심, 불신이 얼마나 큰 뼈아픈 사건들로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자식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 부인하면서도, 혹여나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의심이 만들어내는 작은 틈. 그 틈으로 이 부모들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그저 벌어지는 사건의 끔찍함이나 그 범죄자를 잡아내는 순간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들을 담는 범죄스릴러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하나의 사건 위에서 여러 인물들이 이를 통해 갖게 되는 감정과 심리상태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촉발시키는 사건의 파장들을 따라간다. 

 

아마도 범인은 하빈도 박준태도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들보다는 김성희가 더욱 의심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든 그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보는 건 하빈과 박준태 같은 가족이 의심과 불안 사이의 틈에서 괴로워하며 겪게되는 고통스런 과정들이고, 그럼에도 그걸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만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장태수 같은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들을 표정 하나 말 하나로 표현해내는 한석규와 채원빈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호연과, 같은 대사라도 뉘앙스 차이에 의해 달리 들릴 수 있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한아영 작가의 섬세한 대본, 그리고 이 복잡해보이는 미로 같은 사건들을 길을 잃지 않게 연출해내면서 그 위에 인물의 심리까지 영상언어로 담아낸 송연화 감독의 삼박자가 합쳐져 실로 기막힌 심리 스릴러가 탄생했다. (사진:MBC)

콘텐츠와 결합해 시너지를 내는 힙해진 국악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드라마 ‘정년이’로 인해 여성 국극 나아가 국악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콘텐츠와 결합해 힙해지고 있는 국악의 세계. 그 시너지는 어떻게 생겨나고 있을까. 

정년이

여성 국극 1세대, 조영숙 명인의 한 마디

“죽을 때까지도 못 잊을 거예요. 내 나이가 벌써 90인데,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구멍은 성해요. 그래서 말은 잘하고 노래는 잘하는데... 춤도 움직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앞으로 더 남은 여생이라도 우리 여성 국극을 위해 힘쓰라는 말씀으로 알고 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겠습니다.” 지난 10월2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국악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조영숙 명인은 수상 소감에서 그렇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가 수상자가 된 건 ‘조 도깨비 영숙’이라는 작품에 서게 되면서다. 이 작품은 이날치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각종 영화, 드라마의 음악감독이기도 한 장영규와,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전통가곡을 노래하는 박민희가 여성 국극 1세대인 조영숙 명인의 삶과 예술을 조망한 하이브리드 무대다. ‘선화공주’의 전막을 올린 이 작품에서 조영숙 명인은 90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선화공주부터 철쇠까지 1인5역을 소화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잔뜩 굽은 등으로 운신도 쉽지 않지만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에서 젊은 시절의 여성 국극 배우가 떠오른다. 그건 다름 아닌 최근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정년이’에서 우리가 푹 빠져 있는 매란국극단 배우들의 모습이다.

 

조영숙 명인이 수상 소감에서 밝힌 것처럼 여성 국극은 사실 이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세종문화회관에 조영숙 명인에 대한 헌정을 담은 무대가 올라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었던 데는 드라마화된 ‘정년이’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미 웹툰으로도 레전드가 된 작품이지만, 드라마화되면서 당대의 여성국극이 얼마나 힙하고 멋진 것이었던가를 대중들에게 실제 무대를 통해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정년이’가 선보인 여성 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창극의 한 갈래로 소리만이 아니라 춤, 연기까지 모두 소화하는 종합공연예술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춘향전’이나 호동과 낙랑공주 같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자명고’ 같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졌다. 드라마 ‘정년이’는 이를 재연해내기 위해 1년 이상의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를 통해 재연되어 공개된 ‘춘향전’, ‘자명고’는 극 중 극으로 호평받으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정년이’가 촉발시킨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은 이제 그 창극 속에 담겨진 춤과 소리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장영규 음악감독의 진심이 느껴지는 음악

사실 드라마 ‘정년이’의 음악 감독은 저 조영숙 명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조 도깨비 영숙’에 참여한 장영규다.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장영규는 과거 어어부밴드 시절부터 국악 퓨전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고, 미국의 공영방송 라디오 NPR에 가발 쓰고 하이힐 신고 등장한 영상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이희문이라는 걸출한 신예 국악인을 스타덤으로 올려 놓았던 민요 록밴드 씽씽밴드(SsingSsing)에도 베이시스트로 참여했다. 또 판소리 수궁가를 재해석한 ‘범내려온다’의 이날치 밴드로도 활약하고 있다. 국악의 현재화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가 음악감독을 맡은 ‘정년이’는 우리의 소리가 얼마나 멋진가를 음악적으로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첫 회에 천재 소리꾼인 정년이의 엄마 채공선이 부르는 ‘심청가’의 한 대목인 ‘추월만정’은 물론이고 ‘춘향가’의 ‘광한루 추천가’, ‘사랑가’, 또 ‘자명고’에서 구슬아기 역할의 주란(우다비)이 부르는 ‘왕자마마’ 같은 곡들이 너무나 멋스럽게 들린다. 물론 그건 드라마가 스토리와 캐릭터를 더해 들려주는 것이라 생겨나는 효과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도 완성도 높게 구현된 결과여서 가능해진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화 하려는 국악, 한국무용

‘정년이’의 인기에는 그간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던 젊은 국악인들의 도전이 밑거름이 되어 왔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국악은 최근 10여 년 동안 현재와 호흡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 ‘팬텀싱어’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국악이 세계음악과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놀라운 무대들을 보여줬던 고영열이나, 홍대 클럽에서 시작해 전 세계를 ‘얼쑤’ 하는 추임새로 채워버린 이날치 밴드, 국악 오디션 프로그램 ‘풍류대장’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힙한 국악 밴드의 가능성을 보여준 서도밴드나 뮤지컬부터 창극까지 섭렵하며 방송에도 출연하는 젊은 소리꾼 김준수 같은 국악인들의 대표적이다. 특히 김준수와 고영열이 클래식을 베이스로 하는 퓨전밴드 두 번째달과 함께 2016년에 내놓은 ‘판소리 춘향가’는 국악의 현재적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은 명반이다. 여기서 고영열이 부른 ‘쑥대머리’는 한국적 정서가 물씬 배어난 발라드처럼 들리고, 김준수가 부른 ‘어사출두’는 엄청난 속도로 쏟아내는 가사들로 마치 한 편의 힙합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줬다. 또 ‘풍류대장’을 통해 새삼 정가의 매력을 전해주었던 해음도 빼놓을 수 없다. 해음은 정가를 하는 구민지, 가야금 하수연 그리고 거문고 황혜영으로 구성된 국악 그룹이다. 

 

‘정년이’로 인해 커진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도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도 한국무용을 현재화하려는 힙한 춤꾼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스테이지 파이터’는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을 전공한 무용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치열한 계급전쟁을 벌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유독 눈에 띠는 이들이 한국무용을 한 춤꾼들이다. 넘사벽의 테크닉과 표현력을 보여주는 최호종이나 그의 제자인 김규년, 치렁치렁한 머리로 야수 같은 춤사위로 시선을 잡아끄는 김시원, 절제와 균형미로 어떤 장르에도 자기 춤을 소화해내는 김효준 같은 춤꾼들이 그들이다. 한국무용이 가진 부드러운 춤선이 기반이 되어 있지만, 이들의 춤은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발레나 현대무용 무용수들조차 놀라게 만든다. 

 

서브컬처화된 국악의 반격

사실 국악은 우리 고유의 문화지만, 현재에 이르러 그 대중적 저변이 사라진 게 사실이다. 8,90년대까지만 해도 국악은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정규로 자리하고 있었고, 조상현 같은 스타 국악인이 존재했다. 또 가요라고 해도 국악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팝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하면서 전통을 고집하던 국악은 갈수록 설 자리가 사라져갔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아이러니하기는 해도 ‘서브컬처화’된 면이 있다. 메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화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어 메인과 서브컬처가 분리하는 그런 경계들이 무너지고 있다. 저마다의 취향으로 소비되는 문화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서브컬처를 좋아하며 마니아처럼 취급받던 이들이 주류로 떠오르는 흐름도 생겨나고 있다. 국악도 이 흐름을 타고 있다. 너무나 좋은 것이지만 많은 이들이 향유하지 않아 오히려 더더욱 응원하고픈 어떤 것으로서 국악이 주목되고 있고, ‘정년이’는 그걸 촉발시키고 있다. (글:시사저널,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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