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아내>, 불륜 넘어 공감 얻는 까닭

 

결혼 17년 차,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지만 아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남자 안선규(김유석). 그는 커리어우먼으로 집안일에는 영 신경을 쓰지 않는 아내 채송하(염정아)보다 앞집으로 이사 온 주부9단 홍경주(신은경)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요리 솜씨가 일품인데다가 아이들과 남편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드센(?) 아내와는 비교되기 때문이다.

 

'네 이웃의 아내(사진출처:JTBC)'

한편 홍경주의 남편 민상식(정준호)은 사회생활을 전혀 모르는 아내 홍경주보다 우연히 프로젝트를 함께 하게 된 앞집 여자 채송하에게 눈길이 간다. 커리어우먼으로서 남자들도 버티기 힘든 광고판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내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원리원칙주의자인 남편 안선규와는 달리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원칙을 포기하는 민상식에게 마음이 가는 채송하나, 늘 부엌데기로 자신을 무시하는 민상식과는 달리 자상한 안선규에게 마음이 가는 홍경주도 마찬가지다.

 

<네 이웃의 아내>는 이처럼 불륜, 그것도 크로스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다 중년의 성담론이나 리얼한 사회생활 속에서의 접대 문화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자극이 약한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우리가 흔히 불륜 드라마라고 부르는 드라마와는 완전히 상이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왕가네 식구들>에서 옛 남자친구인 허우대(이상훈)를 만나는 왕수박(오현경)이나, 조강지처를 내버려두고 은미란(김윤경)의 돈에 빠져드는 허세달(오만석)의 불륜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륜을 다뤄도 그 목적이 다른 데서 나오는 차이다. 즉 <왕가네 식구들>이 다루는 불륜은 그 뻔뻔함을 통해 보는 이들을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식으로 자극을 위한 자극이 목적이지만, <네 이웃의 아내>는 위기의 중년부부가 겪는 권태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동시에 부부가 서로를 역지사지로 이해해가는 과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

 

즉 정의로운 의사로서 원리원칙을 자존심으로 버텨온 안선규는 민상식을 통해 아내가 겪는 사회생활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아내를 위해 원칙을 꺾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생활을 전혀 모르는 아내를 늘 가정부처럼 부리며 무시하던 민상식은 채송하를 통해 그의 아내 역시 사랑받기를 원하는 여자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이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불륜의 구조는 다분히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즉 민상식과 채송하는 살벌한 직장생활의 공감대를 보여주고, 안선규와 홍경주는 가정생활의 공감대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이 네 인물이 보여주는 각자의 입장들이 모두 이해되고 공감이 간다는 점이다.

 

가족을 위해 물라면 물고 짖으라면 짖으며 개처럼 사회생활을 해온 민상식이나,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뛰어넘어 커리어우먼으로서 당당히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채송하, 돈은 못 벌어도 환자를 위한다는 그 의사의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안선규나, 가족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며 살아왔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 자신을 위한 삶을 꿈꾸는 홍경주 모두 중년의 시청자라면 고개가 끄덕여질 인물들이다.

 

이렇게 각자의 처지에 대한 공감대를 가진 인물들이 잠시 잠깐 타인에게 눈길이 가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둔감해진 부부 사이의 위기를 역지사지로 넘어서는 드라마가 바로 <네 이웃의 아내>다. 따라서 <네 이웃의 아내>는 불륜의 설정은 갖고 있어도 그 일정 수준의 선은 넘지 않는 거리두기의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상상 불륜이라고나 할까. 누구나 한번쯤 상상했을 법하지만 그렇다고 실행에 옮기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자극제로 부부관계를 되돌아보는 것.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네 이웃의 아내>와 <왕가네 식구들>은 제목과는 다른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주는 셈이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에서 따온 <네 이웃의 아내>가 아예 대놓고 불륜을 소재로 내세우면서도 불륜의 늪에 빠지지 않는 반면, <왕가네 식구들>은 마치 전형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낼 것처럼 보이면서도 오히려 불륜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니 말이다.

 

드라마에서 불륜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그 숱한 고전들 속의 남자들이 ‘이웃의 아내’를 탐해왔다는 것은 이것이 결혼제도를 갖게 된 인간의 본능적인 서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단지 불륜 코드가 갖는 자극만을 담아내기 때문에 흔히들 ‘불륜 드라마’라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네 이웃의 아내>는 ‘불륜드라마’라기보다는 간만에 보는 ‘성인들을 위한 공감드라마’라고 여겨진다.

<세결여>, 김수현 작가표 드라마의 한계인가

 

여전히 똑같다. 재벌가 사람들의 수다와 누가 누구와 결혼했고 이혼했으며 또 결혼하려 하는가 하는 이야기. 게다가 여전한 문어체 대사 어투는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몰입을 방해한다. 물론 이 속사포로 쏟아지는 문어체 대사는 과거에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김수현 작가표 명대사로 칭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다. 하소연이나 넋두리 같은 문어체 대사는 관찰 카메라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가감 없이 찍어 보여주는 시대에는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그럼에도 김수현 작가라는 이름 석자의 힘을 무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메시지를 갖고 왔는지에 우선 이목이 집중된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제목이 담고 있는 것처럼 달라진 결혼관에 대한 담론을 담고 있다. 과거의 결혼이라고 하면 어딘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면, 요즘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혼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나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된 시대다.

 

과거의 드라마들이 대부분 결혼을 목표로 하고 한 식구가 될 그 당사자들과 집안사람들 간에 야기되는 갈등들을 주로 다뤄왔다면,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난 후에 발생하는 삶들, 이를테면 이혼이나 재혼 같은 것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가장 파격적인 인물은 이 드라마의 제목이 지칭하는 주인공, 오은수(이지아)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재혼을 했지만 전 남편과 가진 아이와는 떨어져 살고 있다. 새 남편의 집안에서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오은수는 여자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 사이에 서 있는 인물이다. 요즘 세태에서 이혼이라고 하면 “그래 그럴 수도 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이 문제라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까지 포기하고 재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사회적 통념이 얘기하듯이 여성으로서의 잘못된 삶일까. 바로 이 질문이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기존 드라마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흥미로운 건 오은수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가 이지아라는 점이다. 대중들 모르게 서태지와 함께 살았고 헤어졌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져 큰 파장을 만들었던 배우. 어찌 보면 상당히 오은수라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지아라는 배우가 이 배역에 캐스팅 되었을 것이다. 김수현 작가가 이지아에게 주문한 말 “네 안의 틀을 깨고 나와라”라는 말은 그래서 작품의 캐릭터를 위한 얘기이면서, 동시에 이지아에 대한 충고이기도 하다. 즉 이 작품은 이혼에 대한 통념을 깨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또한 이지아로 대변되는 이혼녀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도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제의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김수현 작가가 여전히 쥐고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틀이다. 물론 이혼을 얘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결혼제도라는 프레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보자. 결혼? 이제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 정도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결혼이 주는 사회적 부담감이 너무 큰 데다가 ‘혼자 사는 삶’ 이른바 ‘싱클턴(Singleton)’이라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라이프스타일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가 아닌가.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주제의식은 과거 세대에게는 파격적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지금 현 세대들에게는 고루하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리얼하게 들리지 않는 문어체식의 대사들은 드라마의 몰입을 방해한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지아의 성형설이 먼저 불거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작용한다. 그 하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이지아의 표정연기가 대단히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고, 또한 드라마의 대사 톤들이나 천착하는 메시지가 그다지 일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김수현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여전히 도발적이다. 엄마로서의 삶보다 여자로서의 삶이 과연 나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렇다. 하지만 요즘은 혼자 살아가면서 엄마로서도 여자로서도 살 수 있는 시대다. 굳이 결혼만이 유일한 여자의 삶의 선택지는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이 시선으로 바라보면 왜 저들이 저렇게 결혼과 이혼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지아 성형설이 먼저 불거진 데는 그만큼 몰입하게 되지 않는 드라마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신처럼 군림하며 맘대로 써서 거액을 번다면...

 

흔히들 대중들은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에 대한 부러움이 있다. 물론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은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필자가 아는 드라마 작가는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10년씩은 늙는다고 한다. 그래서 고료가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제 피와 살을 깎는 비용이라고 토로하기도.

 

'오로라공주(사진출처:MBC)'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우리네 드라마 제작현실은 특히 작가들에게 더 취약하다.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가지 않은 작가라면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방송사의 요구에 의해 때로는 스타 배우의 요구에 의해 굴욕적이게도 대본을 고쳐야 하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피 말리는 쪽대본을 생각해보라. 지옥이 따로 없을 게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작가가 작품에 대해 진지하고도 심각한 고민을 할 때의 이야기다. 만일 마치 작가가 신처럼 군림하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인물을 뺄 수도 있고 새롭게 끼워 넣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분량도 마음껏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심지어 방송사의 통제에서도 벗어나 요구사항 따위는 들어줄 필요도 없고, 원한다면 50부 정도는 연장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면?

 

그렇게 하면서도 회당 몇 천만 원씩을 원고료로 받아간다면 이만큼 편한 일도 없을 게다. 작품을 할 때는 모두가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신적인 존재고, 작품이 끝나고 나면 손에 몇 십 억을 벌 수 있으니 이만큼 손쉽고 즐거운 일도 없겠다.

 

<오로라 공주>의 임성한 작가가 실제로 이렇게 즐거울 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나름대로의 스트레스와 고충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작품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은 이렇게 편안한 작가도 없다는 느낌이다.

 

인물 하나가 죽는 일에는 거기에 합당한 개연성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작가의 소임이다. 그런데 그녀의 드라마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별로 없다. 갑자기 웃다가 죽어버리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다가 죽는 데는 이유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주요 캐릭터들이 중도에 하차하거나 새롭게 들어가는 것에도 상당한 고민이 필요한 게 드라마 작업이다.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란 필요 없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끝까지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별다른 이유 없이 해외로 보내버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캐릭터를 하차시킨다면 어떨까.

 

작가로서는 완성도를 포기하는 대신 고민을 덜게 된다. 결국 피해는 그 캐릭터에 몰입해온 시청자들에게 돌아간다. 시청자들의 비난이나 원성이 생기겠지만 거기에 별 개의치도 않는다면 작가는 별다른 스트레스도 없을 게다. 이런 작가 생활만큼 편안한 일이 있을까.

 

이것이 드라마 작가라면 사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캐릭터 몇 명을 세워놓고 이리저리 관계를 엮다가 뭔가 반응이 온다 싶으면 발전시켜나가고 그게 아니라면 중도에 캐릭터를 죽이던가 해외로 보내는 식으로 하차시키고 다른 인물을 세워 또 다른 관계를 엮어나가면 그만이다. 애초에 완성도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그걸 두고 쏟아지는 논란이나 비난은 그다지 부담될 일도 아니다. 게다가 논란은 때로는 화제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일일드라마를 보는 서민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어느 누구는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돈 10만원 벌기가 힘든 이들도 있을 게다. 그러니 하루의 값싼 여가로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캐릭터들에 감정이입해 다른 삶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든 목이 날아갈 수 있는 현실과 똑같은 일이 드라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어떨까. 또 완성도는커녕 개연성마저 찾기 힘든 드라마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그리고 누구는 그렇게 해서 시청률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가고, 반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욕하며 애써 드라마를 봄으로써 그 허수의 시청률을 만들어준 시청자들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가게 되는 상황. 어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임성한 작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그래서 단지 작품의 무개념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대중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들어가 있다. 작품을 쓰는 창작자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단지 작가라는 이름을 빌어 펜대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가는 것에 대한 박탈감. 이러한 박탈감과 거기서 비롯되는 분노는 자칫 이런 권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송국에게로 옮아갈 지도 모른다.

승승장구 <기황후>, 제목만 달랐더라도...

 

<기황후>는 예상대로 승승장구다. 시청률이 4회 만에 14%를 넘겼고 매회 끝날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은 이 드라마가 화제성면에서도 압도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언플이라고 비난받지만 드라마 내용을 주로 다루는 기사도 호평 일색이다. 만일 <기황후>라는 제목을 달고 나오지 않았고 역사와는 상관없는 창작물이었다면 칭찬이 쏟아졌을 사극이다.

 

'기황후(사진출처:MBC)'

남장여자라는 설정은 흔할 수 있지만 이 사극에 등장하는 기승냥(하지원)이라는 인물은 특성상 여러 극적인 코드를 동시에 갖고 있다. 기승냥을 사이에 두고 왕유(주진모)와 타환(지창욱)이 벌이는 삼각구도는 바로 그 남장여자라는 설정 때문에 남자들 사이의 우정처럼 읽히면서도 동시에 남녀 사이의 멜로가 된다. 남녀 시청층을 동시에 끌어안을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라는 얘기다.

 

게다가 많은 남장여자 캐릭터들이 나왔지만 하지원만큼 이를 잘 소화해내는 배우도 드물다. 잔뜩 눈에 힘을 줄 때는 여장부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다가도, 남자들 앞에서 짐짓 부끄러워하고 두근거림에 토끼 눈을 할 때는 전형적인 여자 신데렐라로 돌변한다. 무엇보다 액션 연기를 이만큼 강렬하게 해낼 수 있는 여배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이미 <대조영>같은 대하사극에서부터 <자이언트>같은 시대극까지 넘나들며 마치 삼국지 같은 스케일의 인간사를 즐겨 그리는 타고난 이야기꾼 장영철 작가의 스토리는 지지부진함 없는 속도감을 선사한다. 팽팽한 스토리에 흥미로운 캐릭터 설정 그리고 그걸 최대치로 연기해내는 배우까지 있으니 드라마에 눈길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좋은 요소들은 역사 왜곡이라는 문제 앞에서 이 드라마가 돌팔매질을 당하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기승냥이라는 인물에 우리를 몰입시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성패일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은 동시에 더 철저한 역사 왜곡의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고려 말,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으며, 일부 가상의 인물과 허구의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실제 역사와 다름을 밝혀드립니다.’ 이 같은 사전고지를 하고 있지만 기황후라는 제목은 여전히 실제 역사의 이름 그대로이고, 그녀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다는 것은 가상과 허구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재해석이라는 뉘앙스를 깔고 있다. 고려의 정사를 농단하고 침공하려고까지 한 인물을 입지전적인 성공사례처럼 재해석하는 건 국민정서상 용납되기가 어렵다.

 

애초에 제목을 달리하고 누구나 허구임을 알 수 있는 판타지라던가 무협적인 요소를 덧붙였다면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게다. 연기자가 연기를 잘 하고 작가가 작품을 잘 쓰고 있지만 그것이 칭찬이 아니라 비난이 되는 상황. 잘 하면 잘 할수록 고려를 핍박한 인물을 오히려 미화하게 되는 이런 상황은 작가는 물론이고 연기자에게도 고스란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안타까운 건 하지원이라는 늘 대중들의 호감을 받는 여배우가 겪는 부담이다. 하지원은 연기자로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지만 그 결과는 혹독한 비난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것은 재능의 이중성으로까지 비춰진다. 좋은 재능은 잘 사용될 때 좋을 수 있지만 반대로 사용되면 독이 된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하지원이라는 괜찮은 배우를 이런 시험대에 오르게 했단 말인가. <기황후>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가능성이 높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두고두고 거기에 편승한 이들에게 부담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