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극과 캐릭터, 그리고 보편적 가족애

'자이언트'에서 박소태(이문식)라는 캐릭터는 독특하다. 그는 주인공 이강모(이범수)와 어린 시절 함께 구두닦이를 하며 생존해온 인물. 어찌 보면 가까운 절친이지만, 그 하는 짓은 영락없는 강모의 적이다. 그는 정식(김정현)이 살인을 저지르고 그 혐의를 강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을 알면서도 돈 몇 푼에 친구를 팔아먹는다. 심지어 강모를 살해하라는 사주를 받고는 감옥까지 일부러 들어오기까지 한다. 그 때마다 강모는 위기를 모면하는데, 그렇다고 강모가 박소태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박소태는 그런 강모 앞에 참회하는 듯 보이다가도 기회만 잡으면 다시 강모의 적으로 돌아서곤 한다. 결국 노역장에서 다리를 절단하게 될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한 강모 앞에 드디어 박소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적으로도 보이고 절친으로도 보이는 박소태라는 인물의 끝없는 심적 갈등과 변화는 '자이언트'의 캐릭터들이 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지를 잘 말해준다. '자이언트'에는 박소태처럼 주인공은 물론이고 적까지 평면적인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물들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절대악인 것처럼 보이던 인물이 어떤 순간에는 아주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드라마의 캐릭터가 한 일면으로 극화되는 경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조민우(주상욱)는 조필연(정보석)의 아들로서 강모와 대립하는 인물이지만, 미주(황정음)와의 관계 속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캐릭터에 대한 다차원적인 조명은 단지 캐릭터를 생생하게 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어떤 틀에 묶이지 않는 캐릭터들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킨다. 캐릭터들의 변화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이야기도 복수극이라면 늘상 반복되는 선악구도 그 이상을 넘어선다. '자이언트'를 보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천변만화의 스토리가 놀라웠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자이언트'만의 캐릭터들 때문에 가능해진 것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스토리가 자칫 대중들에게는 복잡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이언트'는 여기에 두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그 하나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시대적 사건을 배경으로 채용한다는 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삼청교육대 같은 시대적 비극 속에서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그 어떤 가상의 사건들보다 더 잘 이해가 된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시대극이 가진 한계(이미 결과를 다 알 수밖에 없는)를 오히려 가능성으로 바꿨다는 얘기다. 단순해 보일 수 있는 시대극의 사건들 속에 조금은 복잡한 심리변화를 겪는 인물들을 집어넣어 긴박감을 살려낸 것.

이밖에 또 다른 안전장치는 가족이다. 시대극은 자칫 그 거대한 흐름 때문에 사건들이 응집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질 수 있지만, '자이언트'는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겪는 가족을 통해 그려냄으로써 그 위험성을 벗어난다. 게다가 이 가족이란 코드는 자칫 정치적으로 흐를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되돌려놓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권력과 욕망을 향해 달려가지만, 거기에는 끈끈한 가족애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면죄부를 얻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가족코드가 좀 더 폭넓은 시청층을 끌어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자이언트'의 강모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가 만나는 그 시점부터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자이언트'가 초반 부진을 깨고 대반전에 성공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지점들이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대극이라는 조금은 느슨할 수 있는 시대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그 위에 천변만화하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심리전이 긴박감을 높이면서도, 가족애 같은 보편적인 정서를 놓치지 않은 점. 이것이 바로 '자이언트'라는 거인을 다시 일으킨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끼', '자이언트', '제빵왕 김탁구'가 70년대를 택한 이유

드라마와 영화의 시대적 배경으로 70년대가 다시 피어나고 있다. 수목드라마로 40%의 시청률을 넘보고 있는 '제빵왕 김탁구'는 70년대의 질곡을 겪고 자라난 김탁구(윤시윤)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현재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자이언트'도 70년대 개발시대 강남땅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개발전쟁을 다루고 있다. 한편 벌써 2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이끼'도 그 근간을 보면 70년대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70년대 개발시대에 아버지가 겪은 고통의 시간들을 현재의 신세대 주인공이 하나씩 되밟아가는 이야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70년대 개발시대를 이들 콘텐츠들이 다루고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이들 작품들이 이 시대를 다루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끼'는 70년대 개발시대가 갖고 있던 그 폭력적인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영화가 그리는 것은 지금 현재를 만든 그 과거의 왜곡된 폭력의 역사를, 현재의 신세대를 대변하는 주인공이 파헤쳐가는 이야기다. '자이언트'는 군사정권에서부터 개발시대를 지나오면서 한 가족이 겪게 되는 파멸과 생존 그리고 복수와 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이끼'와 거의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이것은 '제빵왕 김탁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 결국 제빵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것이 또 7,80년대의 폭력적인 시대와 연관을 맺는다. 즉 이들 작품들은 모두 개발시대가 남긴 트라우마를 현재의 주인공이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작품들이 70년대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담으면서 각 장르가 가진 한계를 넘어고 있다는 점이다.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70년대를 하나의 극적 장애요소로 다루면서 이제 한 물 간 것이라 여겨진 시대극을 다시 부활시켰다. 과거 '에덴의 동쪽'이나 '태양을 삼켜라' 같은 시대극들이 과거를 재현하고 그 속에 꿈틀대던 욕망들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것에 만족함으로써 어떤 한계를 드러냈다면,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그 과거가 현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결국 과거를 소재로 하지만 과거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현재와 만나는 지점을 찾아냄으로써 그걸 보는 현재의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청세대의 확장이다. 70년대를 다룸으로써 현 드라마의 주시청층인 중장년층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 시대를 넘어 성장하는 주인공을 그려냄으로써 현재의 젊은 시청층까지 소구할 수 있었다. 이들 드라마들의 높은 시청률은 바로 이 시청 세대의 폭넓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 '이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웹툰 원작의 영화가 거의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그 소구 세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웹툰이 좀 더 젊은 세대가 향유하는 매체라면 영화는 좀 더 폭넓은 세대를 겨냥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와 현 세대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이끼'는 그 한계를 70년대라는 시점을 끌어들여 넘어서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개발시대는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이면에 또한 많은 상처를 남긴 게 사실이다. 최근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개발시대는 막연히 당대를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그 아픔을 넘어서려는 안간힘을 보여준다는 데서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로드 넘버 원'의 높은 완성도와 남는 아쉬움

"봉순아. 보이는 겨. 이놈들이 사람이었구먼.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었어.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어느 날 갑자기 징집되는 바람에 가족과 헤어져 전장에 와 있는 박달문(민복기) 이병이 적의 참호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도망치지도 못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북한군 병사의 사슬을 풀어주며 하는 대사는 '로드 넘버 원'이 어떤 드라마인가를 잘 드러내준다. '로드 넘버 원'을 가지고 애초에 '반공으로의 회귀'를 걱정했던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있고, 남과 북이 서로 총칼을 들이밀고 싸우고 있지만, 그들에게서 서로에 대한 증오보다 더 절실해 보이는 건 생존이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단지 승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로드 넘버 원'은 바로 그 길, 가족으로 가는 길과 다름 아니다.

그 길은 단순해보이지만 험난한 여로다. 만일 평시였다면 아무런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그 길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된다. '로드 넘버 원'은 강물 하나를 건너는 에피소드에 드라마의 시간으로서는 꽤 긴 30분 이상을 쓰고, 진지 하나를 넘어서기 위해 한 회 분의 시간을 사용하는 드라마다. 평시라면 단 몇 분의 에피소드에 그쳤을 길이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힘겹기 만한 그 길은 이다지도 새로운 의미들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죽으며, 또 길 위에서 가족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길 위에서 동료에게 총을 들이대기도 한다. 그 평범한 길이 예측불가능해진 건 전쟁 때문이다. 그러니 '로드 넘버 원'은 전쟁물이면서도 또한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그렇게 힘겹게 찾아간 고향은 또 어떨까.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사선을 넘어 찾아온 오종기(손창민) 앞에 놓여진 고향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다. 가족이 마을사람들의 내부고발로 몰살된 것. 이것은 아마도 오종기 개인의 비극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지목하는 그 상황의 기억은 당대를 살아낸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남아있을 트라우마일 테니까. 이미 그들이 찾아갈 고향의 모습은 그들이 길 위에서 상상하던 그 고향이 아니다. 그 무엇도 희망이 되지 못하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 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전쟁물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마저 던지는 것만 같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군인들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계급이라는 구조는 종종 불합리한 그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장우(소지섭)와 신태호(윤계상)의 계급 관계가 그렇다. 처음에는 신태호가 이장우의 상관이었지만, 고지 점령의 전과를 올린 이장우는 중대장이 되어 이장우의 직속상관이 된다. 하루아침에 호칭을 달리해야 하는 어색한 상황이 허용되는 그 길. 바로 전쟁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낸 그 길의 법칙이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려내는 모습들도 흥미롭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그 계급의 허용은 상관의 리더십이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말해준다. 혹자는 계급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하고 혹자는 승리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려 한다. 물론 이장우처럼 모든 이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세운 이들도 있지만.

'로드 넘버 원'은 사전제작 드라마로서 꽤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는 드라마다. 이것은 단지 뛰어난 영상의 완성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스토리구조에 있어서도 '로드 넘버 원'이 거두고 있는 휴머니즘적 시각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 역시 사전제작이라는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초반부의 분위기를 장악하며 전체적인 스토리의 균형을 흔든 이장우와 신태호 그리고 김수연(김하늘)의 멜로 라인은 옥에 티를 넘어서 드라마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려 놓았다. 왜 멜로를 그처럼 내세웠을까 하는 이유는 일면 이해가 된다. 전쟁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전쟁드라마라면 떠올리던 반공이라는 트라우마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또 도외시될 수도 있는 여성 시청층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멜로는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은 '로드 넘버 원'의 한계로 작용했다. 오로지 김수연을 만나기 위해 전쟁에서 생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이장우와 신태호의 모습은 지나친 멜로로의 귀결로 보일 수밖에 없다. 멜로가 아니라 휴머니즘 자체에 천착했더라면 어땠을까. 부대원들 개개인들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멜로를 대체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서 아이러니하게 갖게 되는 생각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만들어낸 사전제작 드라마가 또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다. 만일 '로드 넘버 원'이 사전제작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초반부 멜로에 쏟아진 비판을 받아들여 어떤 궤도 수정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로지 길 하나에만 집중해도 충분했을 이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못내 남는 아쉬움이다.

선악구도의 재현은 대중들을 공감시키지 못한다

"마마 대응책이라뇨? 지금 그걸 누가 마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마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마마께서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뿐입니다. 그게 정치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궁지에 몰린 장희빈(김소연)은 남인의 수장, 오태석(정동환)을 불러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하지만 그의 반응은 싸늘하다. "권력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그른 것"이라는 장희빈 자신의 말대로 된 것이다. 힘이 없어진 그녀는 이제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써야 할 위기에 처했다.

장희빈의 권력에 대한 인식은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권력관계가 만들어내는 힘의 불균형이 있을 뿐이다. 사실 권력에 대한 이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어떤 실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사람의 심성, 의지에 따라 모든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달라지는 것은 그 권력관계 속에 들어가는 인물들뿐이다.

'동이'에서 장희빈이 초반부에 동이(한효주)의 도움을 받아 중전의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그녀는 마치 선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결국 중전에 오르자 입장은 달라졌다. 권력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권력을 쥔 것이 아니라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입장이 달라진 것뿐이다. 따라서 권력을 얘기하면서 흔히 권력을 쥔 자는 악이고 권력에 이끌리는 자는 선이란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동이 역시 그 상층부의 권력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장희빈처럼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동이'의 장희빈이 '선덕여왕'의 미실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것은 이 사극의 구도가 지나치게 선악구도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동이는 무조건적인 선이고 장희빈은 악이다. 권력이 없는 동이와 권력자인 장희빈의 대결구도, 그래서 장희빈을 무너뜨리고 그 권력을 동이가 쥐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그려진다. 여기에 사극은 장희빈이 저지르는 일련의 일들을 부도덕한 처사로 몰아간다. 즉 게임의 법칙, 정정당당함을 잃은 장희빈은 악이 되는 것이다.

장희빈의 몰락은 그래서 권선징악적인 이 사극의 목표처럼 보인다. 바로 이 단순한 구도는 장희빈이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장희빈이 "권력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그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사극의 권력에 대한 인식는 선악구도의 그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식이 그런 것과 실제로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뉘앙스는 다르다. 이 사극은 지금껏 선악구도(운명적으로 선인 동이와 그 반대인 장희빈)를 전면에 내세웠다.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는 뼛속까지 악역이고 서인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심운택(김동윤)은 늘 선이다. 그들은 결국 권력을 향해 달려간 두 인물일 뿐이지만.

'선덕여왕'의 미실이 악역이면서도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이 사극이 선악구도를 그리기보다는 보다 권력의 관계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미실은 덕만(이요원)과 대립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멘토 같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권력의 법칙을 잘 이해했고 그래서 미실이 최후를 맞이할 때 덕만 또한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덕만이 여왕의 자리로 등극한 이후에 심지어 미실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부재를 깊이 느낄 만큼, 사극은 선악구도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관계의 다이내믹함(끝없이 변화하는 힘의 움직임)을 잘 잡아냈다. 반면 '동이'의 대립구도는 지나치게 선악구도에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이 권력의 시스템이 그 구도 아래 가려지는 상황을 맞이한다. 과연 이 사극처럼 동이가 장희빈을 내쫓고 나면 시스템은 달라질까. 해피엔딩은 올 것인가.

장희빈은 그래서 미실만큼 매력이 없다. 이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다. 캐릭터가 가진 매력의 문제다. 역사에서 정치의 상층부로 올라갔던 여성의 성장과 몰락의 과정에서 장희빈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반면, 미실이 꽤나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희빈하면 우리는 그 배역을 연기한 배우들의 명연기와 억지로 사약을 받는 그 체통도 우아함도 잃은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주변적인 관심들은 어쩌면 이 공고한 시스템을 가리고 이 모든 것들이 선악의 문제라고 강변하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선악구도의 변화는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한때 이 악녀로 그려졌던 장희빈에게 열광하던 시대가 가고, 이제 그 단순함에 별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권력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 또한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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