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 붕괴된 가족을 복기하다

형 동철(김범)이 동생 동욱이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간다거나, 그 진실을 어머니에게 비밀로 숨긴다거나, “목숨걸고 공부해라”던 형과의 약속을 지키고 동욱이 서울대 법대 수석으로 합격을 한다거나 하는 ‘에덴의 동쪽’의 에피소드들은 옛 드라마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들을 그대로 재연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구태의연한 드라마들이라 비난하던 가난, 원한, 복수, 출생의 비밀, 재벌과 얽히는 삼각관계 같은 신파의 코드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7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코드들 앞에 21세기를 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시간을 되돌려 가족을 복기하다
‘에덴의 동쪽’에서 어린 동철(신동우)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다가 가슴을 툭툭 치고 입가로 손을 가져간 뒤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민다. 그 수신호는 자신이 아버지를 “하늘만큼 사랑한다”는 뜻. 이 수신호는 이 드라마에서 어떤 대사보다 더 강렬하게 가족 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장치다.

죽은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너무 놀라 말조차 잊어버린 동철은 마지막 가는 길에 이 수신호로 대신 마음을 전한다. 동생이 홧김에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마을을 떠날 때, 열차 위에 오른 동철이 따라오는 동생 동욱에게 이 수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동생이다!”라고.

만일 이 드라마의 시대가 현재라면 어떨까. 아마도 가족 간의 사랑은커녕 따뜻한 눈길조차 어색해져 버린 작금의 상황에 이 수신호는 코미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행스럽게도 그 시대가 70년대인데다 장소도 태백 황지의 막장 탄광촌이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자 지금 시대라면 촌스러울 수도 있는 노골적인 가족애의 표현들은 진정성을 갖게 된다.

무엇이 이 가족을 붕괴시켰나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을 그 중심에 세우고 있다. 즉 신태환(조민기)이라는 한 인물에 의해 붕괴되고 해체된 가족이 복수심과 가족애를 무기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다. 신태환이라는 인물을 악역으로 세우면서 최초로 내세운 에피소드가 그의 애인이었던 미애(신은정)의 아기를 강제로 지우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로써 신태환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붕괴시키는 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반대편에 선 인물은 동철이다. 그는 신태환이 붕괴시키려는 가족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고 묶어두려고 노력한다. 이역만리 마카오로 챙(박찬환)에게 억지로 끌려가면서 “가족을 버리고 못가요! 난 죽어도 돌아가야 해요.”라고 외치는 동철은 가족을 지키는 자, 즉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렇게 동철과 동철의 가족들이 서로를 절절히 생각하게 된 것은 모두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가족을 위해 매일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막장의 노동을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에게 동철이 건네던 새장이 망가져 버렸을 때, 그것은 단지 아버지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탄광일로 늘 어깨에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아버지의 멍 자국이, 달동네로 연탄을 나르며 공부를 하던 동욱의 어깨에도 똑같이 대물림되는 것은 이 젊은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만들어낸 굴레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신태환과 이기철(이종원)의 사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현재를 만든 개발과 노동의 대립에서 비롯된 시대의 아픔이다.

붕괴된 가족이 세상과 맞서는 방법
이 드라마에서 동철의 어머니가 둘이라는 점은 이채롭다. 아버지 부재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두 명의 어머니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세상과 직접적으로 맞서고(양춘희-이미숙), 다른 하나(정자-전미선)는 아이들을 보듬는다. 또 그들은 힘겨울 때 서로를 돕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한 울타리에 묶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기철이라는 이미 사라져버린 가장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유독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 끈질기게 그려진다. 칼에 맞은 챙을 구해준 동철에게 “네가 날 업고 뛸 때 애비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고 하는 챙의 진술은 인상적이다. “형이 있다죠?”하고 혜린(이다혜)이 동욱에게 물었을 때, 동욱이 “네 내겐 아버지 같은 존재죠”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동철이 돈을 벌기 위해 세상을 전전하는 것은 그 부재한 가장을 메우려는 몸부림이고, 동철의 서울대 법대 수석입학은 그것에 대한 자식 같은 동생의 화답이다. 아버지는 늘 가족을 위해 떨어져 있고(죽었거나 도망중이거나), 가족들은 늘 그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은 떨어져 있어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역만리에서도 신문에 난 법대 수석 기사를 통해, 전화 한 통화를 통해 더 절절해지는 관계다.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았던 원죄의식
드라마가 어떤 복수극의 틀을 가져왔다면 지금 가족들이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부재한 자리를 채워줄 동철의 귀환이다. 법대에 수석 입학한 동욱이 “형 만한 아우 없어요”라고 말하고, 합격 환영식장에 가는 동욱에게 춘희가 “네 형도 같이 간다고 생각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동철에 대한 그리움은 없어도 있는 자로서 자리할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시청자들은 이미 이 운명의 쌍곡선을 보아버렸다. 복수를 위해 미애가 아기를 바꾸는 장면을.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이 절절한 형제애와 가족애로 똘똘 뭉친 이들이 사실은 철천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거꾸로 신태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붕괴시키려 했던 것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끈끈한 혈연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속에서 어떤 파란을 예고한다.

이것은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원죄의식을 끌어낸다. 개발시대, 그 어깨에 지워질 날 없는 멍 자국을 훈장으로 만들었던 건 가족이라는 우선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그 때,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가족이 터전을 잃고 피눈물이 흘린 자리에 울타리를 세우고 살고 있었다. 개발이란 이처럼 자원의 파헤침(파괴)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흔하디 흔한 출생의 비밀이란 코드가 이 드라마에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가족의 역할 바꾸기, 혹은 상황 뒤집어보기를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에덴의 동쪽’은 먼저 70년대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 점점 해체되어만가는 가족을 복기해 놓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가족에 대한 향수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끈끈하게 만들어버린 시대의 아픔을 거기서 들여다보고는, 이내 가족을 넘어 인간애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지금 이 21세기에도 이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유효해지는 이유다.

 '노다메 칸타빌레'와 김명민에 대한 기대감


이제 단 2회를 했을 뿐인데, '베토벤 바이러스'가 내뿜는 전염성은 강하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온 네이버 검색어 순위에는 10개 중 7개가 '베토벤 바이러스'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시청률도 사극이 아닌 현대극으로서 첫 회에 15%를 넘긴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게시판도 뜨겁다 못해 찬양 일색이다. 도대체 이 강한 전염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 식의 '노다메 칸타빌레'에 대한 관심

'베토벤 바이러스'가 '노다메 칸타빌레'의 표절이다 아니다라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드라마는 바로 그 '노다메 칸타빌레'에 대한 관심 때문에 더 주목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작년 일드 열풍의 한 가운데 있었던 '노다메 칸타빌레'를 봤던 시청자라면 아마도 누구나 그 클래식이라는 독특한 소재의 드라마가 또 없을까 찾아보곤 했을 것이다.


그러니 '베토벤 바이러스'는 '노다메 칸타빌레'와는 다른 작품이라 주장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연장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즉 우리 식의 '노다메 칸타빌레'는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 그것이 아니라도 또 다른 '노다메 칸타빌레'류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이 이 드라마의 초반 승승장구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그리고 여기에 김명민이라는 배우는 '노다메 칸타빌레'와 같은 소재라도 다른 식의 해석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미 '하얀거탑'의 장준혁이란 인물을 통해 일본의 원작을 뛰어넘는 우리 식의 '하얀거탑'을 세웠던 전적이 있다. '명민좌'로 통하는 그의 연기 포스는 작품 전체를 새롭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까지 갖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 선 사나이, 김명민

따라서 이 드라마가 준비된다고 했을 때, 그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단연 김명민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연기 몰입으로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이 시대 샐러리맨의 표상으로까지 만들었던 김명민. 그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가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나 펼칠 코믹 연기에 어찌 기대가 없을까.


드라마 속에 강마에로 분한 김명민의 연기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진지함 속에 유머가 있었다. 강마에가 데리고 다니는 개, 베토벤이 수면제를 먹고 쓰러지자 "토벤아-"하고 부르며 어쩔 줄 몰라하고, 119에 전화해 진지하게 "개가 수면제를 먹고 쓰러졌으니 속히 위 세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심각한 김명민의 연기와 맞물려 폭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만화 톤의 스토리 전개는 자칫 드라마를 가볍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 무게를 다시 잡아준 것 역시 김명민이다. 강마에의 몇몇 대사들, 예를 들면 "환불해 달라고 하세요", "브람스 CD 사서 들으세요", "집에 가서 목욕하세요. 귀 빡빡 문지르시고요"같은 만화톤의 말투도 김명민을 만나면 웃음 이면의 어떤 힘을 느끼게 만든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가진 초반의 강한 전염성은 이례적인 것이다. 사극은 초반 스펙터클을 통해 시청자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기 때문에 시청률이 순식간에 오르지만, 현대극은 차츰 감정을 쌓아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베토벤 바이러스'의 초반 성적은 작품 자체가 준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더 많이 좌우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지 닥터’가 된 리얼 버라이어티, 그 이유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들. 그런데 그 이미지가 이미 낡아버렸거나, 너무 과장됐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변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과거라면 아마도 대부분은 이미지의 생명이 끝나면서 연예인으로서의 삶도 끝장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고치면 되니까. 어떻게? ‘이미지 닥터(?)’를 찾아가면 된다. 다름 아닌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말하는 것이다.

없던 이미지도 만들어드립니다!
‘1박2일’에 출연하기 전까지 은지원은 그저 힙합아이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1박2일’은 그에게서 조금은 막무가내지만 귀여운 초딩 이미지를 끄집어내 주었다. 자신감을 가진 은초딩은 지금 은둘리 같은 보다 적극적인 캐릭터로 점차 진화하고 있다.

김C는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가 낳은 캐릭터다. 좀더 연기를 해야하는 과거의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라면 좀체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거꾸로 연기를 하지 않아야 더 각광받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속에서 그는 그저 자신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새로 세웠다.

‘개그콘서트’에서 고음불가로 캐릭터를 세웠던 이수근은 버라이어티쇼로 와서 적응기가 필요했다. 초반 이렇다할 캐릭터를 구축하지 못하던 그였지만 차츰 차츰 발현하게 된 그의 재치 있는 입담은 무덤덤하게만 보이던 국민일꾼이란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꽤 오랜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준 ‘1박2일’의 덕이다.

한편 ‘패밀리가 떴다’의 박예진은 어딘지 무뚝뚝해 보였던 이미지를 ‘달콤살벌한(?)’ 이미지로 바꿔주었다. 또 이천희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진지하기만 했던 이미지를 벗고 어딘지 엉성한 이미지를 부가해 천데렐라라는 캐릭터를 갖게 되었다. 없었던 이미지도 만들어주는 곳, 바로 그 곳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낡은 이미지는 편안하게, 과장된 이미지는 친근하게, 비호감은 호감으로
윤종신은 늦둥이로 예능계에 진출해 라디오에서 단련된 특유의 입담을 선보였다. 그의 깐죽 캐릭터가 점차 수면에 올라오게 된 것은 ‘라디오스타’, ‘명랑히어로’ 같은 캐릭터화된 리얼 토크쇼를 통해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윤종신의 캐릭터를 잡아준 것은 ‘패밀리가 떴다’다. 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윤종신의 단지 깐죽거리는 캐릭터 이외에 ‘미식전문가’ 같은 성격을 부여하면서 오래된(?) 이미지를 오히려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한편 같은 프로그램의 이효리나 대성, 혹은 간혹 게스트로 출연하는 아이돌 스타들은 연예활동을 통해 쌓여진 과장된(?) 캐릭터를 이 프로그램을 통해 보다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유재석과 늘 툭탁거리며 짝을 이룬 이효리는 여지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요정의 이미지에 털털한 이미지를 덧붙였다. ‘무한도전’의 멤버가 된 전진은 ‘패밀리가 떴다’에도 출연하면서 꽃미남 아이돌 스타 이미지에 코믹한 성격을 부여했다.

비호감 이미지였던 서인영은 ‘우리 결혼했어요’를 통해 신상녀 이미지를 덧붙였고 이를 통해 예능계의 신데렐라가 됐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갖는 진솔한 모습이 비호감 이미지까지 호감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방송활동이 뜸했던 연예인들은 리얼 버라이어티를 통해 복귀를 꿈꾸고 있다. 새롭게 케이블 채널 tvN에서 시작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180분’의 이영자와 이찬이 그 주인공이다.

무엇이 리얼 버라이어티를 이미지 닥터로 만들었나
이밖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리얼 버라이어티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세우고 싶어한다.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들은 그만큼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를 그저 부여안고 있을 틈이 없다. 자꾸만 변해 가는 신상 캐릭터에 대한 요구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잊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연예인들이 이미지 변신을 하는 방식은 작품을 통해서였다. 즉 배우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가수들은 새로운 음반을 통해서, 개그맨은 새로운 개그코너를 통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강력하게 등장한 것이 바로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배우든 가수든 개그맨이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 쇼는 이른바 리얼리티를 통해 그네들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실제로 드러낸다기보다는 그럴 것이라 상상하게 만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이 ‘진정성의 형식’속으로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의 이미지 ‘변신, 수리, 복구(?)’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몰랐던 면들을 발견하게 되고, 잘못된 면들도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 전제는 진솔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지만.

지금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이미지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해진 연예계에서 어떤 피난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지쳐있던 이미지는 그 속에 들어가 새로운 활력을 얻기도 하고, 부담스럽게 과장된 이미지는 그 속에서 털털한 친근감을 얻기도 하며, 한 때의 잘못으로 복구 불능에 빠진 이미지는 그 속에서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희망을 찾기도 한다.

이미지 닥터가 된 리얼 버라이어티쇼. 이것은 거꾸로 리얼리티 세상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문제에 있어서 그 무엇이든 솔직한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법 속의 이야기 vs 법 바깥의 이야기

금요일 밤의 SBS 프리미엄 드라마 ‘신의 저울’은 여러모로 ‘프리즌 브레이크’를 닮았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앤트워스 밀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제 사형을 앞두고 있는 형을 구해내기 위해 저 스스로 법을 어기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한편 ‘신의 저울’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형, 장준하(송창의)를 위해 동생 장용하(오태경)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수감되며, 형은 누명을 벗고 동생을 구해내기 위해 검사가 된다. 이 두 드라마는 모두 억울하게 누명을 쓴 자가 있고 그래서 교도소에 들어간 자가 있으며 바깥에 남은 이는 그를 구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점에 있어서 유사하다.

또한 이 두 드라마는 똑같이 어떤 식으로든 법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내보인다.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스코필드가 형을 직접 구하기 위해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순간, 법에 대한 이 드라마의 태도가 드러난다. 법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니 탈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신의 저울’에서도 법에 대한 태도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동생이 대신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법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세상, 그러니 저 스스로 법을 집행하는 권력자가 되어 동생을 구해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자를 끄집어내기 위한 주인공들의 선택에서 이 두 드라마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리즌 브레이크’는 애초부터 법을 버림으로써 말과 말이 부딪치는 법정싸움은 포기하고 추리를 방불케 하는 스릴러와 액션의 세계로 나아간다. 반면, ‘신의 저울’은 법을 선택함으로써 칼과 칼의 부딪침보다 더 살벌한 말의 전쟁인 법정드라마의 길을 걷게 된다. 철학적인 질문보다는 짜릿한 퍼즐게임 같은 탈옥 드라마를 선택한 ‘프리즌 브레이크’와 달리, ‘신의 저울’은 “정의란 무엇인가”,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의 저울’에 대한 기대감은 이러한 철학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물설정에서 비롯된다.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김우빈(이상윤)과 그의 아버지인 청렴한 검사 김혁재(문성근)는 그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사건 이후에 법과 함께 서 있던 자기 존재가 흔들리게 된다. 깨끗한 법조인의 대명사인 아버지를 본받아 살려했던 김우빈은 죄책감에 점점 타락의 길을 걷고, 김혁재는 자신의 아들의 범법사실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편 이 결정적인 살인사건을 후에 조사하게 될 인물이 장준하와 김우빈의 중간에 서게 될 여자, 신영주(김옥빈)라는 점은 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신의 저울’이 ‘프리즌 브레이크’의 설정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다른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진지한 질문들 때문이다. 결국 법이란 ‘신의 저울’이라는 허울을 쓰고는 있지만 사람에 의해 그 무게가 달아지는 ‘인간의 저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신의 저울’은 과연 복수극이라는 단순함을 넘어서 이 법정드라마의 근원적인 질문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그 향배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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