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사극 속 사제간의 인생은 반복된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퓨전사극, ‘황진이’와 ‘주몽’에서는 사제간의 반복되는 인생유전이 독특한 재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주인공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고, 극의 대결구도를 만들어주며, 주인공이 성취해야할 일에 대한 목적의식을 부여하기도 한다.

황진이-백무 vs 부용-매향 :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
부용(왕빛나 분)은 황진이에 대해 칭찬을 하는 스승 매향(김보연 분)이 밉기만 하다. 그런 부용에게 매향은 말한다. “그렇게 명월이가 이기고 싶으냐? 내가 그 맘을 잘 안다. 천재는 늘 노력하는 준재를 가슴아프게 만드는 법이지.”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은 ‘황진이는 천재며 부용은 준재’라는 것과 ‘그런 마음을 매향은 잘 안다’는 것. 매향 역시 저 백무에게 같은 감정을 가졌었다는 말이다.

백무-황진이와 매향-부용의 사제관계는 천재와 준재라는 개념으로 반복된다. 이것은 마치 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보는 것만 같다. 매향은 스승이 백무를 총애했다고 생각하면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게 가졌던 질투심과 증오심을 키우며 그것은 바로 부용에게도 이어진다. 재미있는 건 황진이가 백무에게 복수하려 매향의 수제자로 들어오면서다.

황진이를 통해 매향은 자신의 질투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스승은 편애를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춤을 전수해주었던 것을 알게된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자 매향은 부용의 질투심에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을 가지면서도 또한 그것이 부질없다는 걸 알게된다. 백무가 황진이를 매향에게 선뜻 보낸 것은 황진이에게 춤을 새로 추게 하려던 뜻도 있지만, 매향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뜻도 있었다는 말이다.

황진이-김정한 vs 백무-익환 :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운명
황진이가 자신에게 가진 증오심을 이용해 춤을 추게 한다는 뜻이 있다 해도 어떻게 자신의 적이라 볼 수 있는 매향에게 백무는 선뜻 애제자를 보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황진이가 백무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백무는 시종일관 자신과 동일한 상황(기녀라는 상황)에서 기예의 길을 가는 황진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황진이와 백무의 인생유전은 또한 황진이-김정한 그리고 백무-익환의 관계 속에서도 반복된다.

장악원의 부제조 영감 익환(현석 분)이 황진이를 시켜, 떠나려는 예판 김정한(김재원 분)을 잡으라고 한 사실을 알게된 백무(김영애 분)는 익환을 나무란다. 그러다 또다시 마음의 병을 앓을까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자 익환이 백무에게 말한다. “명월이는 자네를 여러모로 닮았어. 내가 자네보고 기예의 길을 버리고 오라면 자네가 왔겠나?” 이 말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황진이 역시 백무처럼 기예의 길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과 ‘익환 역시 정한처럼 백무를 사모했으나 그녀가 거절했다는 것’이다.

주몽과 해모수 vs 금와 : 동료와 경쟁자의 관계
드라마 ‘주몽’에서도 이러한 사제간의 인생유전이 드러나 보인다. 주몽의 스승은 다름 아닌 아버지 해모수. 해모수가 초기에 부여의 왕자, 금와와 다물군을 함께 이끌다, 후에 부득불의 함정으로 위기에 처하고 감금되는 상황은, 최근 주몽의 행적과 유사하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들여 다물군을 이끈다는 점과, 아버지가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것처럼 자신도 예소야와 떨어져 지내는 점, 또한 가까웠던 금와와 적이 되어버리는 상황 등은 정확히 해모수와 주몽 그리고 금와 사이에서 벌어지는 반복이다.

이러한 반복이 되는 이유는 바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살아있는 금와의 존재 때문이다. 금와는 복합적인 성격의 캐릭터다. 명분상으로는 해모수와 함께 다물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치고 싶지만 부여가 처한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 해모수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여미을이 말한 대로 오히려 그것을 바라는 경쟁자로서의 마음도 갖고 있다. 해모수가 새로운 나라를 새우는 것은 부여에게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 역시 해모수에 대해 저 살리에르와 같은 질투심을 속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스란히 주몽에게도 연결된다. 사실 금와는 주몽을 보호하고 키웠다기보다는 그 잠재성을 부여라는 감옥 안에 가두고 있었던 셈이다. 주몽이 해모수를 따라 대업을 이루려고 나서자 상황이 반복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전설적인 존재의 카리스마를 이어받다
이러한 퓨전 사극에서 사제간의 반복되는 인생유전이 보이는 것은 드라마 상의 주인공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다. 철부지였던 ‘주몽’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는 건 그의 아버지가 전설적인 존재인 해모수였다는 점이다. 그의 예사롭지 않은 탄생은 ‘지금은 저렇지만 앞으로는 대단한 일을 할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또한 ‘황진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는 전설적인 무보, 학춤을 물려받은 백무가 그녀를 유일한 수제자로 지목하는데서 비롯된다. 황진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백무의 라이벌이었던 매향의 군무까지 이어받으면서 독무와 군무 양쪽의 재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이어받는 건 재능만이 아니다. 그들의 경쟁자까지 똑같은 인생유전을 통해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 1회전보다 2회전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경쟁의 생리 상, 2회전을 치르는 주인공들의 대결구도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 그들은 또한 대업 혹은 운명을 이어받는다. 그렇기에 반복되면서도 그 반복 속에서 스승을 뛰어넘어 큰 일을 이루어내는 주인공의 길은 더 드라마틱하게 되기 마련이다.

무대를 탈피한 개그로 돌아온 웃음충전소

KBS에서 본격 코미디를 자처하며 새로 시작한 ‘웃음충전소’는 그간 개그의 대세로 자리잡은 공개무대개그의 시공간적 한계를 넘어서며 신선한 재미를 주. 무대개그의 장점은 즉석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단점은 공간적 제약이 있어 연극적인 상황설정에 의한 개그가 주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또한 정해진 시간 내에 개그를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시간 흐름과 변화를 통한 개그에는 어려움이 있다. ‘웃음충전소’는 바로 그 어려움을 좀더 정교한 세트와 야외 촬영의 교차편집으로 넘어서면서 카메라가 자유로워진 지점에서 새로운 웃음을 유발한다.

화제를 모으고 있는 ‘타짱’은 긴박감 넘치는 영화 ‘타짜’의 분위기를 개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화면은 긴박한 배경음악과 함께 마치 영화의 예고편 같은 카드판의 손동작들이 반복되다가 해설자로 나오는 김준호의 얼굴에서 멈춰 서며, 개그가 시작된다. 이러한 긴박감 넘치는 장면 후에 나오는 개그대전이 이 코너가 웃음을 주는 핵심요소이다. 대전은 자학적이라 할 만큼 자해적인 장면들을 보여주고 그걸 보고 ‘웃지 말라’는 대전의 법칙을 통해 웃음을 배가시킨다.

‘미스터 박’은 여러모로 ‘미스터 빈’을 떠올리게 하는 개그다. 무대를 벗어나 카메라는 미스터 박의 일상을 쫓아가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는다. 소시민적이고 약해 보이는 미스터 박이 좀더 강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남자들과 경쟁하는 이 구도는, 미스터 빈이 같은 개그를 통해 사회의 위선들을 꼬집었던 바로 그것과 같다.

‘막무가내 중창단’은 세트와 야외 촬영을 절묘하게 교차시켜 웃음을 유발한다. 세트에서 노래를 하다가 그 중간 어느 소절에서 멈춰 서며 그 소절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는 설정이다. 일종의 행동개그라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건 그 행동이 무대라는 제한적 공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낮의 찌는 더위는’을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 진짜 찜질방에 들어가고, ‘벽에 걸린’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담벼락에 몸을 건다. 심지어는 ‘늪에 빠진 거야’를 보여주기 위해 늪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세트로 돌아온 그들의 망가진 몸은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지친다 지쳐’는 과거 유머일번지식의 세트 개그이다. 시골 풍경을 가끔 도입하지만 그것은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한 도구이며 실제로는 세트에서 대부분의 개그가 이어진다. 약간은 모자란 듯 하면서도 정이 가는 촌사람들의 좌충우돌이 핵심이다.

여러모로 무대개그에서 가장 많이 탈피한 코너는 ‘정의의 따귀맨’이 될 것이다. 이 코너는 영상개그라 할만하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와 슈퍼맨과 같은 히어로, 액션이 엮어져 한 편의 개그가 완성된다. 화면연출의 즐거움을 또한 갖고 있는 이 개그는 다큐적인 요소까지 끌어들인다. 시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를 괴롭히는 장면에서는 시사다큐프로그램의 모자이크처리와 흔들리는 카메라, 장중한 나레이션이 동원된다. 따귀맨이 나타나 악당들을 쫓아가는 장면에서는 들고 뛰어가며 찍는 카메라가 선보인다. 그리고 절정은 따귀맨이 악당들을 따귀로 물리치며 마치 매트릭스처럼 정지된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장중한 나레이션 장면이다. 이 개그는 전체적으로 진지함을 고수하는 영상에 단지 우스꽝스런 따귀맨이라는 캐릭터가 만나면서 놀라운 웃음의 폭발력을 보여준다.

‘대안제국’은 마치 ‘개그콘서트’에서의 ‘봉숭아학당’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차이라면 대신 세트라는 점이며, 과거라면 개그맨으로서 가장 중심으로 놓여야할 왕의 자리에 이계인이라는 연기자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 이 이계인이라는 인물의 개그 프로그램 등장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개그가 무대 위에서의 순간적이고 단발적인 웃음보다 어떤 개그맨의 캐릭터 형성을 통한 웃음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주몽’의 모팔모에서 얻어진 이계인의 캐릭터는 이 개그에서 왕이라는 자리에 앉혀지면서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한다. 또한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그 중심을 잡는 인물에 개그맨이 아닌 아나운서가 자리하는 것처럼, 탤런트 이계인이 주는 편안함이 개그에 대한 어떤 압박감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웃음충전소’는 대사보다는 몸에 의지한 개그가 더 많다. 이것은 자학적인 개그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상의 힘을 얻어서 더 강력해진다. ‘웃음충전소’는 좀더 자유로운 촬영을 통해 무대개그가 갖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은 개그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무기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웃음충전소’의 미덕은 이제 저 칼바람 넘치는 무대개그에서 어느 정도 발굴된 캐릭터들을 온전히 지속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통 코미디 프로그램으로의 회귀는 현재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달라진 방송환경과 붕괴되는 아나운서라는 직종

그들은 연예인인가, 아나운서인가. 혹은 아나운서 출신의 연예인인가, 혹은 연예인인 아나운서인가. 최근 들어 끊이지 않는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은 마치 겉으로 보기엔 아나운서 자신들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대부분 아나운서들의 연예활동(물론 그 영역을 어디까지 봐야할지 알 수 없지만)에 대해 그것이 적절하냐 아니냐에서 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력이라는 도덕적인 잣대만을 아나운서들에게 들이대는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다.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아나운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달라진 방송환경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
먼저 아나운서의 위치에 있어 과거와 비교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나운서를 뉴스진행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 활동영역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킨 착각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아나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쇼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교양프로그램에도 나왔으며,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오래도록 ‘가요무대’를 진행했던 김동건 아나운서, 오랜 세월 ‘아침마당’을 이끌어온 이상벽 아나운서, ‘명랑운동회’로 유명한 변웅전 아나운서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아나운서의 연예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최근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이미 과거부터 죽 진행되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달라진 것이 있다. 진행자로서의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력이 좁아졌다는 점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 전체를 장악하고 조정하는 역할보다는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진행자가 아닌 출연자로서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한다. 이 현상은 마치 아나운서들의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더 많은 분야에 투입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진행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들은 여기저기에서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미지가 과거 김동건이나 이상벽, 변웅전 만큼 명료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일관된 이미지 구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퓨전 프로그램으로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
그들이 전문 진행자가 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은 달라진 프로그램의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프로그램들이 융복합을 통해 다양한 퓨전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느낌표’는 연예오락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고 ‘비타민’은 교양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상상 플러스’의 ‘올드 앤 뉴’나 ‘말달리자’, ‘스펀지’, ‘도전 골든벨’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양과 오락의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고 어느 순간에는 오락쪽으로 어느 순간에는 교양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러한 인포테인먼트 경향의 프로그램들이 야기한 것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이며, 동시에 연예인들의 아나운서화이다. 이 중간지대는 이제 치열한 아나운서와 연예인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은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의 혼란이다. 과거 전문화된 아나운서들이 특유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장악했던 것에 비교하면 지금의 아나운서들은 연예인과 동격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과거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요무대’를 진행하던 모습과, 노현정 아나운서가 ‘올드 앤 뉴’를 진행하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연예인화된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방송사들은 분명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에 연예인과 같이 끼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끼가 있는 아나운서를 필요로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 말해주듯 이들 아나운서들은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외모와 지성과 교양을 두루두루 갖춘 이들은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시청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공신력 있는 아나운서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 같은 아나운서로 갈 것인가.

그 한 가운데 놓여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인기를 끌고는 일찌감치 줄에서 내려온 아나운서가 바로 노현정이다. 노현정은 과감하게도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라는 공신력을 잡아먹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연예인 같은 인기를 끌면서도, 끝끝내 아나운서의 줄을 놓지 않고 동시에 뉴스 프로그램도 진행한 아나운서다. 방송사는 그가 연예인이든 아나운서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최대한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보낼 의무(?)가 있으므로, 스타 골든벨에 유사한 방식으로 노현정을 출연시켰다. 노현정의 줄타기는 점점 더 위험해졌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인기는 더 높아갔다. 최정점에서 줄을 내려온 노현정은 시청자들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잘된 일이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어떻게 봐야 하나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행운아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공신력의 선을 넘어 연예인화 되어버린 아나운서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아나운서의 생명이 공신력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방송사에 소속되어 아나운서로서 계속 있어야할 명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나운서는 급격한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공신력을 바탕으로 좀더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연예인은 그 생명력이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강수정 아나운서나 임성민 아나운서의 프리 선언은 그들이 이제 아나운서의 길보다는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걸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을 아나운서로 부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다. 성경환 문화방송 아나운서국장의 말대로 그들은 ‘방송인’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의 전직 아나운서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이미지로서 연예인이 되어도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쇼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는 그들을 보며 “어 아나운서가 이젠 연예인 다 됐구만”하는 오해를 하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보고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 후배 아나운서들이다. 그들은 달라진 방송환경에 아나운서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시도를 추구한다. 문화방송 이정민, 한국방송 김경란, SBS 김지연 아나운서의 남성잡지 모델 출연이나, SBS 김주희 아나운서의 미스 유니버스대회 참가 등은 이렇게 달라진 아나운서들의 인식을 말해준다.

떨어지는 공신력, 생존경쟁의 시작
이것은 또한 아나운서들의 생존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는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말이 나오는 직종이다. 한 아나운서의 행동이 전체 아나운서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재는 연예인의 길을 걷는 이들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이로써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아나운서들의 공신력은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몇몇 뉴스 프로그램에 남은 아나운서들을 제외하고는 이제 연예인들과 똑같이 아나운서들도 생존경쟁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쇼 진행자가 되기도 하고, 교양 프로 진행자가 되기도 하며 때론 연예인이 되기도 하는 모습에서 아나운서의 길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아나운서라는 본래의 직업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개그맨이나 가수가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고, 아나운서가 연예인이 되는 상황은, 아나운서만의 고유영역이 가진 공신력이라는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나운서들은 이제 ‘좀더 넓어져 보이는 길 위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점점 아나운서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송환경, 기회처럼도 보이고 위기처럼도 보이는 이 달라진 방송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만화적 감수성과 드라마의 만남

‘풀 하우스’, ‘궁’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만화와 드라마와의 공생 관계는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 ‘타짜’, ‘아파트’, ‘다세포소녀’, ‘데스 노트’ 등의 성공은 만화가 가진 상상력의 힘과 탄탄한 드라마성, 그리고 캐릭터에다가 그 자체로서 영상화가 가능한 비주얼의 힘이 더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원작 만화의 매니아들이라면 이러한 작품들이 원작만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를 보지 못한 대부분의 시청자, 혹은 관객들은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 존재를 알게 되고 만화를 찾아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의 성공이 단순히 만화가 가진 그런 장점들 때문만일까.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에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원작 만화를 드라마화 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이 그 단초를 제공해준다.

더 이상 부정적 의미가 아닌, ‘만화 같은 이야기’
과거 드라마 작가들이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조금 난감한 말이 있다. 그것은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과도한 엄숙주의와 진지함이 배제하려 했던 이 말은 이제는 제작자나 기획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할 그 어떤 의미가 되었다.

과거 그들은 만화보다는 소설에서 그 모티브를 찾아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만화와 소설의 달라진 위상이다. 독자를 찾지 못하던 문단 중심의 소설들은 최근 독자를 찾아 나서면서 만화적인 가벼운 감성들이 무거운 주제로 엮어지는 실험적인 시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만화의 상황은 정반대다. 가벼운 만화의 특성은 이제 진지함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화의 진화와 소설의 독자 찾기는 어떤 접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만화 같다’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적 의미로 작용한다. 이제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든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든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만화 같은 드라마, ‘환상의 커플’
그런 면에서 ‘환상의 커플’은 정말 ‘만화 같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만화 같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싸가지 귀족녀, 안나 조의 일거수 일투족과 그녀의 “맘에 안 들어”라는 말 한 마디에 확확 바뀌는 화면 구성은 의도된 만화적 설정들이다.

기억상실로 인해 나상실(이름 역시 만화적이다)이 되고 장철수의 집에서 살아간다는 설정 자체도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다. 살짝 정신이 나간 강자나 빌리 박의 옆에서 나름 모사를 꾸미는 공실장 역시 현실에서 약간은 허공으로 들린 인물들이다. 이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고 대사는 말풍선만 달면 그대로 만화가 될 정도이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코믹이란 장르는 이러한 만화적 설정들을 더 잘 공감하게 만드는 장치다. 우리는 그 대책 없는 유쾌함 속에 개연성이라든지, 진정성 같은 복잡한 생각들을 접어놓고 드라마에 빠지게 된다. 마치 잠깐 만화를 볼 때 그 만화적 재미에 푹 빠져드는 것처럼.

진지한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
‘환상의 커플’은 그러므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갖는 허구적인 놀이를 하면서 그 놀이 이면의 어떤 이야기를 포착하는 드라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만화 같지만 그 만화적 전개 속에는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이 최악의 커플이 ‘환상의 커플’이라는 반어법으로 읽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다툼과 부딪침이 아닌 그 이면에서 생기는 사랑의 감정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아마도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하는 진지한 척 하는 태도가 지겨워진 것 같다. 드라마 속의 사랑이라고 하면 무언가 운명적이고 비극적이며 진지한 것이라는 태도가 갖는 상투성이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때론 그런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과거의 부정적 의미로서의)고 생각되는 건, 그만큼 그들이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더 이상 드라마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데 있다. 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게임이며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고픈 편안한 환상이기도 하다.

‘환상의 커플’은 이러한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안겨주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들과 그들의 상황들, 그런 장면들을 역시 만화적 배치로 맛을 살린 연출은 누구나 한번 보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재미를 유발한다. 한예슬을 스타덤에 올린 것은 기대 이상 보여준 그녀의 호연 때문이지만, 또한 이 드라마만이 갖는 만화적 캐릭터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던 탓도 있다. 이 드라마로써 우리의 주말 밤은 상큼 발랄 유쾌해졌다. 굳이 만화방에 가지 않고도 채널 하나만 돌리면 그 안에 만화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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