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들
올해는 사극은 약진하고 현대극들은 주춤했던 한 해였다. 처음에는 월화 드라마를 ‘주몽’이 잠식하더니, 주말 드라마에 ‘연개소문’과 ‘대조영’이 포진하고, 수목 드라마마저 ‘황진이’가 장악하면서 현대극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과거 형태의 구태의연한 답습을 거듭하는 트렌디 드라마는 더더욱 살아남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들이 있다. 시청률과는 무관하게 특별한 시도와 보다 높은 완성도를 무기로 이들은 우리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의 징후를 읽게 해준 그 드라마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웰 메이드 드라마, ‘연애시대’
‘연애시대’가 끝난 지 꽤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금단증상을 이야기한다. ‘연애시대’를 축으로 그 이전의 드라마가 있고, 그 이후의 드라마가 있다고 할 정도로, 스토리면 스토리, 연기면 연기, 연출이면 연출 어느 하나 군더더기 없는 이 드라마로 인해 여타의 드라마들이 어딘지 시시해 보인다는 것. 영화인들이 참여해 만들어낸 이 드라마는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사전제작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정도로 완성도를 높였다. 감우성, 손예진의 감칠맛 나는 연기에 주연만큼 빛났던 공형진, 이하나는 물론이고 김갑수, 서태화, 오윤아, 문정희까지 어느 조연하나 뺄 수 없이 드라마의 독특한 감미료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연기자들의 호연을 바탕으로 악역이 없는 대신 내적 갈등을 만들어 상황을 관조하게 하는 설정과, 충분한 공감을 일으키면서도 도발적인 ‘이혼 후 시작된 연애’라는 소재,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연출력이 잘 어우러졌다. 이로써 ‘연애시대’는 지금까지 드라마가 해온 그 이상을 만들어내며 ‘웰 메이드 드라마’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내러티브의 실험, ‘굿바이 솔로’
최근 들어 종종 볼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로서 다중스토리 구조를 들 수 있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비중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어떤 울림을 만들어가는 내러티브 방식이다. ‘러브 액추얼리’와 ‘숏컷’ 그리고 ‘크래쉬’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 현상을 목도한 적이 있다. 노희경 작가가 ‘굿바이 솔로’를 통해 무려 1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해체된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 캐릭터들은 하나둘 카메라 속으로 모여들어 유사가족을 만들어낸다.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노희경 작가는 이들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어우러짐을 주관 개입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카메라 속에 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시대 가족드라마(가족보다 이웃이 낫다)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었다.

드라마에 대한 만화적 접근, ‘환상의 커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가 ‘환상의 커플’이다. 원작만화를 드라마화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요인은 ‘만화 같은 이야기’가 더 이상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말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던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던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특히 만화적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낸 한예슬은 수많은 유행어를 남길 만큼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코믹 드라마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의 상투적인 진지함을 벗어나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만들어주었다.

남자의 눈물을 보여준 ‘투명인간 최장수’
이른바 ‘남성신파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극중에서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남녀의 사회적 위상이 반영된 결과. 드라마를 보는 주 시청자는 여성이지만 그들은 더 이상 우는 여성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현상처럼 나타난 것이 남자의 눈물이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이 시대에 가족에게 있어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가장의 이야기. 알츠하이머에 걸린 최장수를 통해 가족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고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냈다. 이 사나이 울리는 신파 드라마는 그러나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물에 오른 유오성으로 인해 아버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 신파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드라마 시청층의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이다.

장르의 폭을 넓힌 ‘돌아와요 순애씨’
‘투명인간 최장수’의 정반대편에 선 ‘돌아와요 순애씨’는 아줌마들의 웃음을 공략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40대 아줌마와 20대 처녀의 영혼이 바뀐다는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는 그러나 그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감성을 매료시켰다. 시트콤에나 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설정이 수목드라마에서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소구한 것은 장르적으로 선택한 코미디에 진한 페이소스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연대에서부터, 생활력에서부터 만들어진 아줌마 속성에 대한 웃지 못할 풍자, 젊은 여자에 대해 갖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등등 남녀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다룬다. 40대 아줌마에서 20대 처녀로 탈바꿈한 순애씨의 거침없는 비판과, 욕망의 분출은 TV 앞에 앉은 수많은 우리 시대의 아줌마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진지함이 시청자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드라마다.

상큼발랄 아줌마 트렌디, ‘발칙한 여자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 비로소 ‘여자’를 보기 시작한 드라마, 바로 ‘발칙한 여자들’이다. 이 질척하지 않은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상큼했던 것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아줌마’ 캐릭터로부터 가능해진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발칙한 여자들’은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을 깨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을 보여준 드라마다.

사회적 편견과 맞선 진짜 트렌디, ‘여우야 뭐하니’
‘여우야 뭐하니’는 과거와는 달라진 사랑방정식으로 보여준 트렌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먼저 재벌집 아들도 아니고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자도 아닌 보통 남녀의 사랑으로 선회한다. 이 밋밋해 보이는 설정에 드라마성을 가미해주는 것은 최근의 결혼풍속도라 할 수 있는 연상연하 커플. 나이와 나이에 따른 현실 등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편견과 맞선 트렌디라 할만하다. 결국 사랑이야기에, 그 사랑에서 선택해야할 것이 현실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드라마이지만 요즘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낸 진짜 ‘트렌디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의 다양한 시도들
이밖에도 저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읽게 해주었던 ‘인생이여 고마워요’, 금요드라마는 불륜드라마라는 공식을 깬 ‘내 사랑 못난이’, 공백을 메꾸려 채워졌지만 호평을 받으며 사회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내 인생의 스페셜’, 최근 아직 종영하지 않았지만 불륜과 불치에 대한 새로운 공식을 써나가는 ‘90일 사랑할 시간’ 등등 열거하지 못한 많은 트렌디 드라마들의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주6일사극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인해 더 치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시청률은 저 사극들의 빛에 가려졌지만, 보다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를 한 몇몇 드라마들이 있어 트렌디를 뛰어넘는 포스트 트렌디를 기대하게 만든다.

2006, 욕하면서 봤던 드라마

욕하는 것만큼 쉬운 비평이 없다고 한다. 흠을 잡아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2006년 시청률 상위의 드라마들은 대부분 욕을 먹었다는 것. 그것은 분명 그럴만한 소지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쩌면 욕을 먹는다는 건 그만한 기대감이 컸다는 반증은 아니었을까. 올 가장 화제가 된 SBS‘하늘이시여’, KBS‘소문난 칠공주’, MBC‘주몽’을 예로 들어, 많은 욕을 먹었으나 시청률은 높았던 드라마들의 논쟁점과 완성도, 중독성 등을 체크해보자. 혹 욕에 가려져 보지 못한 미덕을 발견하게 될지 누가 아는가. 어쩌면 시청률과 욕의 상관관계가 밝혀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늘이시여’, 논란드라마의 정수를 보여주다
지난 12월13일 민주언론시민연합에 의해 올해의 나쁜 방송으로 꼽힌 SBS ‘하늘이시여’는 논란드라마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본때를 보여준 드라마. 방영되기 전부터 자신의 친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시어머니와 호적 상 외삼촌을 사랑하는 조카의 관계 설정으로 ‘패륜 드라마 논란’을 일으켰다. 이영희 PD는 이에 대한 해명과 함께 “친 피붙이와 같이 키운 아들을 실제 친 피붙이인 딸과 결혼시키는 이 딜레마가 이 작품이 시청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다”라고 덧붙여 사실상 논란드라마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지난 해 9월10일 13.5%의 시청률로 시작한 ‘하늘이시여’는 2회부터 ‘분장사 비하 발언’으로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이후 배득(박해미 분)의 악녀 열연으로 조금씩 시청률을 높여간다. 11월 통산 18.4%의 안정된 시청률을 확보한 ‘하늘이시여’는 10회 연장 방영을 결정한다. 이것이 첫 번째 연장이다. 그리고 1월 특정 운동기구의 특징과 사용방법 등을 무려 5회에 걸쳐 방영하는 간접광고로 방송위원회로부터 법정제재를 받는다. 또한 어릴 때 헤어졌던 친딸을 나중에 며느리로 삼는다는 이야기의 기본 구조가 일본작가 렌조 미키히코의 84년작 단편소설 ‘어머니의 편지’와 유사하다며 표절 의혹에 휩싸인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1월 21.5%의 시청률을 확보한 ‘하늘이시여’는 2월 25.4% 시청률을 기록하며 75회로 연장을 결정한다. 두 번째 연장이다. 드디어 3월 28.8%의 시청률로 전체 시청률 1위를 차지한 이 드라마는 4월에 다시 81회로 연장을 결정한다. 세 번째 연장. 그 와중에도 논란은 계속되어 치위생사 비하발언이 불거진다. 5월에 30%대를 넘긴 ‘하늘이시여’는 다시 4회 연장을 결정하고, 6월에는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청장이 직접 출연해서 불거진 ‘국정 홍보 논란’이 벌어진다. 드라마가 종반으로 향하면서 친딸을 며느리 삼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홍파(임채무 분)와 영선(한혜숙 분)의 결혼 등으로 논란은 더 커져갔다. 여기에 무리한 설정에 따른 등장인물들의 어이없는 죽음으로(홍파의 처 은지와 배득의 친구 소피아) 이른바 살생부 논란이 이어졌다. 이로써 7월에 40.2%의 시청률로 ‘하늘이시여’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란 오명을 남기고 종영했다.

제2의 ‘하늘이시여’, ‘소문난 칠공주’
4월에 시작된 ‘소문난 칠공주’는 시청률 50%를 넘긴 ‘바람은 불어도’(1996), ‘애정의 조건’(2004), ‘장밋빛 인생’(2005)등에서 성공을 보여준 문영남 작가를 내세워 주말 볼만한 가족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놨다. 그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단 한 달만에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한 ‘소문난 칠공주’는 5월 드디어 그 본 모습(?)을 드러낸다. 덕칠(김혜선 분)의 자극적인 애정신 묘사가 나오더니, 급기야 임신한 딸을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이 방영된 것이다. 바로 그 다음주에는 덕칠의 바람피는 장면을 목격한 남편 구수한(이대연 분)이 덕칠의 뺨을 때리는 장면과 이혼만은 안 된다며 덕칠이 자신의 손으로 자기 뺨을 때리는 장면이 방송됐다. 여기에도 모자라 덕칠 앞에서 구수한이 룸살롱 접대부들을 끌어안은 채 덕칠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는 장면이 나왔다. 이 정도 되면 주말 온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앉아 볼 수 있는 드라마는 포기한 것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계속 올라 7월 29%를 넘어 8월 33.6%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소문난 칠공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놓는다. 겁탈장면이 무분별하게 방송되는가 하면, 설칠이 친딸이 아니라는 출생의 비밀이 노출되면서(친부의 죽음이 나양팔과 관련이 있지만) 자신을 키워준 부모를 원수라고 표현하고 분노하는 대목이 나와 억지스럽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9월에 여타의 논란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30회 연장방영(총 80회)을 발표했고, 특정 제품의 간접광고로 권고조치를 받았다. 9월에 특히 논란을 많이 일으킨 인물은 셋째딸 미칠(최정원 분). 그녀와 시댁의 트러블이 자극적으로 방영되며 시청률을 35%대로 높였다. 이제 거의 포기하면서 관성으로 보게 되는 이 중독적 드라마는 한동안 이혼이나 여성비하 문제를 드러내며 40%대 고지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12월에 들어 미칠의 이혼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김해숙 분)가 “사위자식 개자식”이라는 대사를 내보네 막말논란을 일으켰다. 이로써 제2의 ‘하늘이시여’라는 명성(?)을 얻은 ‘소문난 칠공주’는 ‘주몽’의 시청률을 위협하며 순항(?)중이다.

완성도에 대한 논란, ‘주몽’
위 두 편의 드라마가 주로 억지설정이나 자극적인 진행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다면 ‘주몽’의 논란이 위치한 지점은 이것들과는 다르다. ‘주몽’은 주로 드라마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이 많이 일었던 점으로 미루어 높아진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결과로 생긴 논란으로 보는 게 옳다.

‘주몽’이 처음 직면한 문제는 역사고증 논란이었다. 등장인물의 의상이 중국풍이며, 건축물도 조선시대 양식이고 고조선이 한나라의 철기문명에 멸망했다는 드라마 도입부 설정은 거짓이며, 주몽과 소서노, 예씨 부인의 삼각관계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 등 퓨전사극이 가진 논란거리에 휩싸인 것이다. 그러나 ‘주몽’은 5월 첫방영에서부터 7월 말까지 단숨에 37%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소금산 에피소드’에서 실망한 누리꾼들은 8월 부영이 중도하차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9월에 들어 함량미달 전투신 스케일 논란이 고개를 쳐들었다. 주몽이 이끄는 별동대의 스케일이 고작 십수 명에 불과하다는 점은 300억 드라마라는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그리고 40%대의 장벽을 맞은 ‘주몽’은 ‘주몽없는 주몽’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그 고지를 가볍게 넘어선다. 이 즈음 방송시간을 10분씩 더 잡아 광고수익을 높였다는 방송시간 편법운용 논란이 불거졌다.

그리고 10월에 들어서 여타의 논란드라마처럼 ‘주몽’도 슬슬 연장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이미 45%대의 시청률을 확보한 상태였다. 완성도에 대한 비판 여론도 깊어져 중순에는 ‘주몽은 납치 전문 판타지 드라마’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11월은 한달 내내 연장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발언, 송일국의 연장 불가 선언, 그러나 약 2주도 되지 않아 송일국과 최완규의 연장 수용으로 이어지면서, 12월1일 송일국 20회 연장 최종 합의로 연장은 결정되었다. 포커스를 송일국의 입에 맞춤으로서 시청자들의 의견은 교묘하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 이른바 ‘신물3종세트’논란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사극으로서의 주몽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욕과 시청률과 완성도의 함수관계
위의 세 드라마를 하나로 싸잡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논란의 포인트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주몽’의 경우, 시청자들의 더 높은 완성도에 대한 주문으로 논란을 이해할 수 있지만, ‘소문난 칠공주’의 경우에는 기대감보다는 극중 자극적 설정들에 대한 혐오감 내지 분노가 논란의 이유였다. 여기에 ‘하늘이시여’는 이러한 드라마 내적인 논란은 물론이고 외적인 논란까지 덧씌워 논란드라마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욕을 많이 먹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높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이 보고 관심도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층위는 존재한다. 그것은 의도성의 문제다. ‘주몽’은 의도했다기보다는 자연스레 불거져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두 드라마는 애초부터 의도했다는 혐의가 짙다. 그것은 최초 설정 자체부터 논란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 드라마들을 모두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소재와 설정과 주제가 비정상적이고 자극적이라는 면을 빼놓고 보면, ‘하늘이시여’의 완성도는 높은 편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네 가족관계가 가지고 있는 어찌할 수 없는 혈연의 끈끈함을 이 드라마는 정곡으로 찌르고 있다. 반면 ‘소문난 칠공주’는 완성도 면에서 여러모로 떨어진다. 이 주말극이 일일극의 느낌을 주는 것은 그때그때 임기웅변적인 사건 전개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한편 ‘주몽’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만 시청자들의 더 높은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당연히 욕 또는 시청률은 완성도와 별 관계가 없다. 다만 욕이나 시청률이 관계가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중독성이다. 이 세 드라마는 모두 고른 중독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나쁘다 판단되어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논란드라마가 확보하려는 궁극적인 것은 바로 이 중독성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청률과 완성도는 마치 비례하는 것처럼 오인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점이다. 시청률과 비례하는 건 중독성이다.

◆ 논란일지
하늘이시여
2005  9월10일 : 첫 방영
  9월11일 : 분장사 비하 발언
10월23일 : 배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데렐라 괴롭히기
11월16일 : 10회 연장 결정
2006   1월4일 : 간접광고로 방송위원회로 부터 법정제재
  1월19일 :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 표절 의혹
  2월27일 : 75회로 연장결정
  4월11일 : 81회로 연장결정
  4월24일 : 치위생사 비하발언
  5월20일 : 4회 연장결정
  6월5일 : 행정도시 홍보 논란
  6월17일 : 소피아의 죽음으로 살생부 논란
12월13일 : 민주언론시민연합 올해의 나쁜 방송 선정

소문난 칠공주
2006   4월1일 : 첫 방영
  5월22일 : 자극적 애정신 묘사/ 임산부 논란
  5월27일 : 룸살롱 시퀀스 논란
  8월2일 : 겁탈장면 방송
  8월13일 : 설칠의 키워준 부모 원수 발언 논란
  9월5일 : 80회로 연장결정
     9월 : 방송위, 마루제품을 간접광고로 권고조치
  9월25일 : 미칠의 시댁 트러블 설정 논란
12월10일 : 사위자식 개자식, 막말 논란

주몽
2006   5월1일 : 역사고증 논란 시작
  5월15일 : 첫 방영
  5월31일 : 방송시간 연장 논란(10분 더)
  7월25일 : 소금산 에피소드 논란
  8월7일 : 부영 중도하차 논란
  9월5일 : 함량미달 전투신 스케일 논란
  9월6일 : 예소야 송지효 캐스팅 논란
  9월13일 : 주몽 없는 주몽 논란
  9월18일 : 소탄등에 대한 고증 논란
  9월26일 : 방송시간 편법운용으로 광고이익 증가 논란
  10월9일 : 연장성 논란 시작
10월17일 : 납치 전문 판타지 드라마 논란
11월12일 : 최완규 연장 불가
11월15일 : 송일국 연장불가
11월27일 : 송일국 연장 수용
11월28일 : 최완규 연장 수용
  12월1일 : 송일국 20회 연장 최종 합의
  12월5일 : 신물3종세트 논란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역사를 날 것 그대로 꺼내 보여준다면 재미있을까. 예상은 부정적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퓨전사극이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퓨전사극의 계보는 과거 ‘다모’, ‘대장금’, ‘해신’ 등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지만 최근 열풍의 진원지는 역시 ‘주몽’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주몽’이라는 강력한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는 소재에,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더 전개가 자유로워진 퓨전사극이라는 형식이 맞물린 결과다.

결과적으로 시청률면에서 승승장구한 주몽은, 최근 연장방영에 대한 논란들마저 연착륙시켰다. 이례적으로 MBC 신종인 부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그간 거듭돼온 방송사의 고무줄편성에 대한 시청자들의 우려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주몽 만큼은 끝까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각인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나온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른바 ‘신물 3종 세트’가 논란이 되면서 ‘주몽’은 “이러려고 연장했냐”는 누리꾼들의 비판에 직면해있다.

드라마 ‘주몽’은 시청률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미 스케일 문제나,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억지설정, 고구려 건국보다는 부여패망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한 전개구성 등등 완성도에 있어서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이 문제로 인해 ‘주몽’은 완성도의 비판 위에 그 정체성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것은 과연 이 드라마를 더 이상 사극으로 봐야하는가의 문제다.

환타지 같은 전개와 환타지 그 자체는 다르다
‘주몽’이 시작과 함께 호평을 받은 것 중 하나는 그것의 전개가 게임이나 환타지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유사한 재미를 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주몽’은 그 배치된 인물과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거의 롤플레잉게임을 닮았다. 시작부터 완성된 영웅이 아닌 단계적으로 미션을 완수하면서 업그레이드되는 영웅, 점점 강한 아이템을 얻어 가는 과정,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갑옷들 등등 그런 것들은 실제 게임과 환타지를 즐기는 젊은 시청자들의 입맛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것이 과도했던 걸까.

최근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출연과 그 출연과정에서 보여준, 사극이라 하기엔 과도한 환타지적인 요소, 게다가 그녀가 주몽에게 제시한 “다물활 이외의 남은 두 개의 신물” 발언은 지금까지 위태롭게 유지해왔던 사극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과거 ‘주몽’의 환타지적인 요소를 굳건히 사극의 틀로 붙잡아두고 있던 인물들은 여미을을 중심으로 한 신녀들이었다. 그것은 과거 신권과 왕권이 혼재된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 속 실재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왕자들간의 경합에서 나온 다물활 에피소드는 여미을 신녀의 신탁만 있었을 뿐, 실제로 다물활의 어떤 환타지적인 능력을 보여준 바는 없다. 이것은 전부 여미을 신녀가 하는 말을 통해 그 상징적 의미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식이 일어나는 에피소드에서 역시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위에 여미을의 예언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여전히 환타지가 아닌 사극의 범주 안에 놓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여미을이 죽고 사라져버린 예언의 힘 때문일까.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등장(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빛과 연무에 휩싸인 화려한(?) 등장)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게다가 그 신녀의 목적은 새로운 신물을 찾으라는 퀘스트의 제시이다. 이로써 ‘주몽’은 환타지적인 전개와 환타지 사이에서 하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넘어버린 격이 됐다.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과거에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드라마 제작자들이 숨는 지점은,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일까. 퓨전사극이 주목받는 시대라 마치 정통사극은 역사, 그 자체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물론 사극 역시 역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역사를 극화한 것이 사극이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왜곡이 아닌 이상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사극으로 수용되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퓨전사극으로 넘어가면 이건 좀더 복잡해진다. 그 한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사극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상식뿐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삼국지’를 창작물로 생각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역사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호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가상으로 설정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을 법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유기’는 다르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와 ‘수호지’가 역사소설에 가깝다면 ‘서유기’는 환타지에 가깝다. 이 역사소설과 환타지 사이가, ‘주몽’이 지금까지의 여타 사극들과 다르게 위치한 지점이다.

과거에도 ‘소금산 에피소드’에서 ‘주몽’은 이 서유기적인 면모를 보인 바가 있다. 드라마 인물들의 유기적인 전개가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 신탁에 의해 준비되어진 결과는 시청자들을 실망시킨다. ‘주몽’의 사극제작에 있어서‘사료가 없다’는 것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넘어서는 공상이나 환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저 무협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때 처음엔 즐거웠으나, 차츰 ‘날아다니지 못하면 바보 되는 주인공들’에 식상해진 경험이 있다. 퓨전사극은 여전히 사극이며 환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극으로 기대하고 있던 드라마가 그 경계를 넘어버릴 때 시청자들은 사극의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뜨게 된다. 퓨전사극처럼 그것이 땅이 아닌 허공에 매달린 줄이라고 해도, 떠오른 몸은 다시 줄로 내려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한 판 줄타기의 소재가 어느 시대나 한두 번쯤 나올 수 있는 그런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오던 그 신화적 인물, 주몽에 대한 이야기다.

환상 속의 커플이 환상적인 커플이 되다

‘환상의 커플’은 웃음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리얼리티 같은 걸 잠시 접어두고 우리는 드라마 내내 웃음을 터트리다가 어느새 종영을 맞았다. 어찌 보면 조금은 허탈할 수 있는 이 웃음폭탄은 그러나 마지막에 와서 1%의 눈물을 보여주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공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한예슬이라는 연기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나상실 혹은 조안나라는 캐릭터이다.

환상적인 커플, 환상 속의 커플
드라마 종영의 시점에 와서 ‘환상의 커플’이란 드라마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는 걸 알게된다. 그것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면서도 차츰 마음을 열게되는 나상실과 장철수(오지호 분), 이 안 어울리는 듯 잘 어울리는 커플을 ‘환상적인 커플’이라는 의미로 지칭하는 ‘환상의 커플’이다. 그런데 후반부로 가면서 이 ‘환상의 커플’은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커플’이란 의미가 하나 더 덧붙여졌다.

조안나로 돌아온 나상실에게 빌리박은 말한다. “모든 걸 환상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한다. “환상이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어.” 빌리박은 또 묻는다. “당신은 나상실이야? 조안나야?” 그러자 그녀가 말한다. “그 둘 다가 나야.” 이 일련의 대사들은 그녀 안에서 조안나와 나상실이 서로 공존하며 부딪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녀에게는 두 개의 현실이 있는 셈이고 빌리박은 조안나가 현실이며 나상실은 환상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이 두 인물의 공존이 웃음도 만들고 눈물도 만들었다는 점이다.

99%웃음의 주역, 조안나인 나상실
‘환상의 커플’이 그 특유의 톡톡 튀는 웃음을 시종일관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상실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있다. 어마어마한 부자에 싸가지녀였던 조안나가 기억상실과 함께 나상실이 되는 그 지점은 그 자체로 웃음의 진원지가 된다. 과거의 우아했던 영광은 사라지고 몸빼 바지에, 자장면, 막걸리를 먹으며, 소파에서 자야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조안나적인 도도함의 습성은 시청자들을 웃게 만들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자칫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던 캐릭터가 도도함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꼬라지하고는”하고 툭툭 내뱉는 대사에 어찌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 자신의 꼬라지 역시 그다지 우아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드라마의 만화적인 과장된 연출과 패러디, 그리고 교차편집은 이런 나상실의 캐릭터를 극대화시켜주었다. 막걸리에 취해 춤을 추는 장면과 연회 장면의 교차편집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면서 점점 서민들의 생활에 익숙해져가는 나상실에게서 우리는 이 도도녀의 내면 속에 숨겨진 따뜻한 정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나상실이라는 이름과 캐릭터는 장철수에 의해 지어진 환상이었으나 점차 그녀는 자신 속에 숨겨진 나상실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1%눈물의 주역, 나상실인 조안나
그런데 점점 그녀가 나상실이 되면서부터 1%의 눈물이 시작된다. 나상실이란 이름을 지어준 장철수에게 그녀가 마음을 열게 되자, 문제는 복잡해진다. 사실 나상실은 환상이고 조안나라는 현실의 인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기 때문이다. 조안나로 돌아온 그녀는 그렇지만 과거의 조안나가 아니다. 그녀 속에 또 한 명의 인물, 나상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안나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녀는 여전히 막걸리를 찾고 소파에서 잠이 들며 나상실이란 캐릭터의 언저리를 배회한다.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장철수를 만나게 된 나상실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려 하자 장철수가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그가 그녀를 영원히 나상실로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장철수는 내민 그녀의 손을 잡지 않고 떠나며 “그 손을 잡으면 다시는 놓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고, 그런 장철수를 뒤에서 꼭 껴안은 그녀는 “내 이름은 조안나”라고 말한다. 그 장면에서 뚝 떨어지는 장철수와 조안나의 눈물에 시청자들 역시 똑같은 공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 이름은 장철수와의 이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뒤집어진 환상으로 공감을 만들어낸 ‘환상의 커플’
우리는 누구나 현실에서 벗어나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환상을 꿈꾼다. 그것은 대체로 ‘신데렐라 콤플렉스’같은 형태의 환상이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지위도 상승되는 그런 변신 말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커플’은 그 환상의 방향을 거꾸로 뒤집어 놓는다. 완벽하고 뭐하나 부족한 게 없는 인물 조안나가, 온통 부족한 것 투성이의 꼬라지인 나상실로 변하는 것이다.

상향되는 변신이 어떤 로맨틱한 행복감을 예감케 하는 반면, 추락된 변신은 무언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정반대의 유쾌한 캐릭터를 창출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코믹으로 드라마를 전개했다는 것, 만화적인 설정들을 잘 활용했다는 점은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이 나상실-조안나 캐릭터에 단순한 힘을 부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하향적 변신에서도 유쾌한 캐릭터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 조안나가 겉으로 보기엔 완벽해도 속으로는 부족함 투성이었다는 것이며, 그 부족함을 역시 부족해 보이기만 한 장철수와 그 주변사람들이 채워주었다는데 있다.

환상 속의 커플이 환상적인 커플이 되다
그 주변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강자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바보들이 늘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무거울 수 있는 나상실 주변을 맴돌며 그 무게를 가볍게 해주었다. 나상실로서 “사랑할 수도 없고” 조안나로서 “사랑 받을 수도 없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얼음’ 상태를 ‘땡’해주는 인물이 강자이다. 강자의 ‘땡’은 남해에 눈이 오는 기적(?)을 만들고, 떠나려는 조안나를 붙잡으며, 그녀 앞에 장철수를 데려다놓는다. 장철수는 이제 그녀를 조안나로도 나상실로도 받아들인다.

그녀가 조안나든 나상실이든 그 행복했고 행복한 만큼 아프기도 했던 것들은 모두 그녀에게 현실이다. 드라마를 보며 현실 속에서 환상을 꿈꾸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행복감과 아픔이 모두 현실인 것처럼 말이다. ‘환상 속의 커플’이 ‘환상적인 커플’이 되는 이 어쩔 수 없는 유쾌함 앞에서 잠시 현실을 잊고 환상에 젖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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