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기화 되가는 TV, 그 매체의 힘 평가절하 말아야

‘!느낌표’가 폐지된다고 한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시청률 부진이다. 시청률이 TV 프로그램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깊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의미 있는 도전을 했고 그 도전에서 TV의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TV의 오락기능과 공익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물론 그것은 노동과 생산성이 지고선이 되고 즐기는 문화가 별로 없던 시절의 얘기다. 즉 ‘논다’는 것과 ‘의미 있는 노동’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느낌표’는 보기 좋게 이 편견을 뒤집어 버렸다. 사회의 공익적인 부분을 소재로 가져가면서도 거기에 충분한 오락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느낌표’가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설정한 아이템들은 ‘공공선’이었다. 즉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질 수 있는 공감 가는 아이템을 선정함으로서, 그것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정한 즐거움을 대리충족 시켜주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자 이 프로그램은 재미와 즐거움을 넘어서 감동을 선사하게 되었다.

또한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이 가치는 실제 사회의 변화까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국에 어린이 도서관을 짓고,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인 오지에 의료봉사를 가고, 사람들이 꺼려하던 장기기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등의 일들은 하나의 오락프로그램이 한 성과로 보기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느낌표’는 정부의 관계부처 사람들조차 하기 힘들어하는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한편으로 매일 보면서도 그토록 폄하하고 있는 TV라는 매체의 힘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카메라가 담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그 문제를 공론화 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TV가 기본적으로 가지는 보도의 기능이면서 그만한 힘을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다.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르뽀 프로그램들이 부정적인 코드, 즉 비판적 코드를 활용했다면, ‘느낌표’는 긍정의 코드를 활용했다.

따라서 르뽀 프로그램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물음표(?)의 프로그램들이었다면, ‘느낌표’는 마음을 움직여 참여를 하게 만드는 느낌표(!)의 프로그램이었다. 부정보다 긍정이 나은 점은 좀더 참여를 적극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느낌표’는 무엇보다도 TV가 가진 긍정적인 힘을 제대로 알고 활용했던 프로그램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

시청률 부진으로 폐지되는 ‘느낌표’는 또한 지금의 TV 프로그램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단초가 된다. 감동보다는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재미가 우선이 된 요즘, 우리는 점점 TV를 오락기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TV는 사용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는 도구다. 오락과 재미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TV가 가진 전부라고 평가절하 하는 건 문제가 있다. TV의 그 또 다른 힘을 ‘느낌표’가 충분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로비스트’가 가진 묘미와 딜레마

일주일 내내 사극이 방영되는 요즘, 현대물로서 ‘로비스트’의 가치는 오히려 더욱 빛난다. 실제로 매번 과거의 역사 속 드라마들의 시간대를 보다보면 늘 같은 밥상에 물리듯 싫증도 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 ‘로비스트’는 입맛을 돋워주는 별미 같은 드라마가 된다. 무엇보다도 보는 맛이 일품인 드라마다. 그 색다른 코스요리는 먼저 스케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보는 맛이 일품인 드라마
드라마들이 국내의 가정집들을 오가고, 기껏해야 지방 정도의 공간을 이동하던 것에 비하면 ‘로비스트’는 스케일이 큰 드라마다. 해외로케를 한 드라마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해외에 상주하면서 찍은 드라마는 일찍이 없었다. ‘로비스트’라는 직업상 국제적인 면모를 띨 수밖에 없는 것. 드라마가 이동하는 공간은, 동해안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부터 시작해 미국의 뉴욕, 워싱턴은 물론이고 키르키즈스탄까지 광대하다.

단순히 장소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움직이는 인물들의 면면도 새롭다.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말.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미국 정보국 인물들과 마피아들, 거기에 연루되는 무기 거래상들 그리고 국정원 요원들까지 드라마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캐릭터들이다. 그 속에 서로 다른 이유로 로비스트가 되어가는 해리(송일국)와 마리아(장진영)의 뒤얽히는 이야기는 지금껏 우리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이라는 점에서 참신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드라마는 동해안 북한잠수함침투사건이나 린다 김 사건 같은 실제 벌어졌었던 사건들을 드라마 속에 풀어놓는다. 물론 허구적인 상상력이 곁들여진 것이지만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았던 그 사건들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연된다. 이미 알고 있던 사건의 심층적인 재연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된다. 이것은 최근 들어 사실에 허구의 상상력을 부여하는 팩션이 열풍처럼 유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토리를 앞서는 볼거리
이런 정도로만 봐도 ‘로비스트’는 블록버스터 드라마로서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블록버스터는 흔히 사이즈가 크다는 것으로만 인식되어 있는데, 좀더 정확히 얘기한다면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이것 또한 ‘로비스트’가 현재 달라지고 있는 매체 환경에 제대로 적응한 드라마라는 걸 말해준다. HDTV의 보급과 점점 커져서 홈 시어터로 가고 있는 TV, 그리고 이제는 국외까지 넓어진 시장에 맞게 좀더 큰 스케일에 대한 요구 등을 이 드라마는 정확히 수용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드라마의 블록버스터화는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블록버스터화 되다보니 생기는 문제점들도 있다. 먼저 블록버스터는 기본적으로 시청자들의 볼거리 욕구를 자극시키는 영상들을 잡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로비스트’가 소재로서 보여준 동해안 북한잠수함침투사건이나 첫 회에 미리 보여준 키르키즈스탄에서의 총격전은 스토리보다 그 볼거리가 더 중요한 장면들이다.

보통의 드라마가 스토리를 먼저 구성하고 거기에 맞는 장소를 헌팅 하는 순서로 작업된다면 블록버스터 드라마는 때론 그 순서가 역전된다. 먼저 볼거리가 되는 장소나 설정을 먼저 구상하고 그 위에 스토리를 얹는 것이다. 해리가 마리아에게 총을 겨누는 미국에서의 대면장면 같은 것은 그 장면이 보여주는 자극적인 볼거리가 먼저 구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총을 겨눠야 한다는 설정 자체가 시청자들에게는 어떤 스토리의 인과성 이상으로 더 어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장면은 여러 번, 예고장면을 통해서 방영되며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게 사실이다.

블록버스터의 딜레마
이것은 볼거리를 강조해야 하는 블록버스터들이 어쩔 수 없이 갖는 딜레마일 것이다. 그리고 실상 그 볼거리만으로도 드라마는 충분히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반복되면 문제가 된다. 스토리 속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 선이 시청자들에게 이입되기도 전에 계속되는 볼거리에 짓눌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극중인물들은 자칫 볼거리에 압도당한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볼거리 속에 끼워 맞춰질 수 있다는 얘기다.

‘로비스트’는 기획이나 제작, 그리고 소재까지 잘 만들어진 드라마다. 특히 몸을 아끼지 않는 송일국과 장진영, 그리고 선과 악의 이중적인 면을 특유의 카리스마 연기로 소화하고 있는 허준호, 비운의 주인공, 한재석 게다가 놀라운 연기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김미숙까지 연기자들의 호연이 두드러지는 드라마다. 하지만 가끔 이 연기자들의 연기가 너무나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스토리 자체가 자연스러운 극적 긴장감으로 가지 못하고, 볼거리 설정 속에서 연기력으로 장면을 소화해내야 하는 연기자들의 고충이 언뜻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볼거리 많은 색다른 맛의 드라마, ‘로비스트’가 가진 딜레마다.

‘이산’과 ‘왕과 나’가 왕을 그리는 방식

적어도 현재 방영되고 있는 사극에서라면 왕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산’의 이산(이서진)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노론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아 왕이 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싸움 속에서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하는 역할이다. 그는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 이산을 보호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이산을 그 위험 속에 던져 넣는다. 기댈 곳 없는 이산은 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왕과 나’에서는 그 양상이 다르다. 인수대비(전인화)의 치맛바람과 사실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정희왕후(양미경)의 수렴청정 속에서 성종(고주원)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기댈 곳 없는 왕실의 든든한 뒷배를 가지기 위해 인수대비는 한명회의 여식과 성종을 정략결혼을 시키고, 그런 상황에서 무엇하나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성종은 국사를 돌보기보다 여인들에 더 집착한다. 그는 무엇하나 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 두 사극이 그리고 있는 왕의 모습은 궁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로 쉽게 비교된다. ‘이산’에서의 궁은 이산 자신을 끝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 몰아넣는 장소이며,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 없는 곳이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이 궁으로부터의 도피는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산이 할 수 있는 것은 궁 밖의 인물들(혹은 지체가 낮은 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산은 수시로 궁 밖 출입을 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감옥 같은 공간인 궁을 벗어나는 이런 행위는 왕을 좀더 능동적인 캐릭터로 그려낸다.

하지만 ‘왕과 나’에서의 성종은 궁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인수대비와 정희왕후가 사실상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는 궁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은 채 살아간다. 성종의 고민은 궁 밖에 두고 온 정인, 윤소화(구혜선)와의 혼인 약조를 지키지 못한 것이지만, 단 한 번 먼발치에서 보고 궁으로 돌아왔을 뿐 그렇다고 궁 밖을 수시로 왕래하지는 않는다. 그마저 윤소화가 궁 안으로 들어오자 왕은 궁 밖을 쳐다볼 이유조차 없어진다. 성종은 궁 안에서 보호받는 인물로 두 여인의 치마폭에 살아가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들의 지상과제는 모두 성군이 되는 것.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산이나 성종이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궁 밖을 자주 나다니는 이산은 백성들과의 친밀도가 거의 친구 관계에 가깝게 그려진다. 박대수(이종수)에게 얻어맞고도 영원한 동무임을 말하는 이산은 늘 어렵고 핍박받는 백성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인물이다. 반면 성종은 궁 밖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봐야 그것은 궁 안으로 들어온 김처선(오만석)을 충신으로서 아끼는 정도이다. 이렇게 된 데는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이산과, 누구나 다 자신을 도와주는 성종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물론 이것은 사극으로서 극화된 캐릭터일 뿐이며, 실제의 성종과 정조가 그런 모습이라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극의 캐릭터는 현대적인 시점에서 해석된 것이기에 그 모습이 반영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이다.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기만 하면 그저 왕으로 살아가는 그런 왕의 이미지는 이제 구세대의 유물이 되었다. 왕은 탄생하는 게 아니고 이처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현대적으로 볼 때 정치적인 의미도 되고, 교육적인 의미도 된다. 정치적으로는 나라의 대표자를 만드는 것이 주변인물들과 국민들의 정치관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고, 교육적으로는 인재를 만드는 것이 주변인물들이 가진 교육관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어느 쪽의 방식을 선택할 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새로운 전원드라마의 가능성, ‘산너머 남촌에는’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후속이라 하지만 ‘산너머 남촌에는’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원드라마의 새로운 코드가 들어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 즉 이문화(異文化)의 공존이다. 전원드라마의 전범이라 할 ‘전원일기’가 고향을 떠나온 도시인들에게는 농촌의 따뜻한 정감을, 그리고 농촌에 사는 이들에게는 현실을 어루만졌다면,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전원도시로 변모해가는 우리네 농촌의 모습을 포착했다. 이어 방영되고 있는 ‘산 너머 남촌에는’은 농촌과 도시의 교감을 다루고 있다.

사실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한계로 지목됐던 부분은 드라마가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 농촌에 대한 시청자들의 인식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농촌에 사는 현지인들 만을 대상으로 드라마를 제작하기에는 현실적인 시청률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따라서 도시인들의 환타지를 자극할 수 있는 농촌(전원이 가까울 것이다)의 모습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산너머 남촌에는’의 등장인물들은 여러모로 이런 요구들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길선(반효정)의 종가집과 양산댁(김지영)네는 지금까지의 전원드라마들이 구축했던 가장 안정된 설정 그대로다. 완고한 전통 속에 살아가는 종가집이 있고, 시골의 정감을 한껏 살리는 양산댁이 서로 아옹다옹하며 마을에게 살아가는 그런 구도 말이다. 하지만 전에 없던 설정들이 눈에 띈다.

사업을 실패하고 도시에 염증을 느껴 귀농하는 나진석(이진우)네 귀농 가족은 도시인들의 이목을 잡아놓을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갑갑한 도시생활과 막연한 전원에 대한 동경은 도시인들의 마음 한 켠에 늘 남아있는 환타지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런 환타지를 건드리면서도 귀농의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외지인으로서의 나진석과 시골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엮어갈 것인가는 지금 도시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시골생활에 적응해가는 모습과 시골아이가 도시에서 느끼는 신기함 같은 것은, 도시와 시골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문화를 보여준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드라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장집 봉순호(배도환)와 부부가 될 베트남 신부 하이옌(하이옌)을 다룬다. 결혼하기 힘든 농촌청년들의 문제와 그 대안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외지인 신부 간의 부부생활이 보여줄 재미는 이 드라마의 공감을 넓힌다. 농촌사회에서의 외국인은 이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산너머 남촌에는’은 따라서 생활환경과 국적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람이 사람으로서 어떻게 공존하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이것은 전원드라마가 가졌던 한계인 시골에 국한된 시각을 도시로까지 넓히면서 갖게된 힘이다. ‘산너머 남촌에는’은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로 시작하는 박재란이 부른 동명의 노래가 떠오르는 드라마다. 노래 가사처럼 봄 바람이든 진달래 향기든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올까.’ ‘남촌서 남풍 불 때마다’ 좋은 그런 전원드라마의 탄생을 기대해봄직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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