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만도 못한 정치판, 민생은 어디로

MBC 월화 사극‘이산’의 이산(이서진)은 노론 벽파의 강한 저항 앞에서도 결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이산이 보는 조선의 정치는 썩었다. 조정대신들은 금난전권이라는 특혜를 시전상인들에게 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활용한다. 금난전권(난전을 금할 권리)을 가진 시전상인들은 생계를 위해 난전을 차릴 수밖에 없는 상인들을 핍박한다. 이러니 양극화 현상이 가중된다. 조정대신들과 시전상인들의 곳간은 넘쳐나고 난전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은 배를 곯는다.

영조(이순재)에 의해 전권을 위임받은 이산이 그 첫 번째 개혁으로 금난전권을 폐하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전상인들과 조정대신들의 검은 고리를 끊어 정적들의 돈줄을 죄는 한편, 백성들에게 편하게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주기 위함이다. 사정이 이러니 여기에 가만히 있을 시전상인들과 조정대신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쌓아놨던 물품들을 불태우고 상점을 문닫아버리며 도성으로 물건들의 유입을 막자, 난전은 활기를 잃는다. 이를 틈타 조정대신들은 영조 앞에 나아가 난전의 허가를 물리라는 압력을 넣는다.

‘이산’이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들의 일면들은 몇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대기업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요즘, 정경유착과 특혜비리의 고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민생들만 곤궁한 삶을 살게되는 그 시스템 속에서 개혁을 해달라며 뽑아놓은 정치인들이 오히려 검은 돈과 유착해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곤궁에 빠뜨리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상황은 비단 ‘이산’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왕과 나’에서 수렴청정을 벗어난 성종(고주원)이 맞닥뜨리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뇌물과 비리와 청탁이 오가는 조정대신들과 유착된 내시부의 개혁을 먼저 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패한 내시부 수장들과 원로내시들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조치겸(전광렬) 판내시부사의 탄핵과 거기에 맞서는 하급내관들의 충돌은 몇 년 전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연상시킨다. 비리를 파헤쳐야 할 감찰부가 원로내시들의 명분과 근위부의 무력을 쥐고 전횡을 일삼는 것 역시 어딘지 낯설지 않은 그림들이다. 성종이 김처선(오만석)을 앞세워 이런 개혁을 진행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런 전횡 속에서 곤궁해진 백성들을 보듬기 위함이다.

대선의 막바지에 있는 현재,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서 국민들은 암담하기만 하다. 일찌감치 선두권을 확보한 후보는 각종 부정시비에 휘말렸고, 그를 견제해야할 다른 진영은 아직까지 누가 그 후보가 될지 정해지지 조차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미 몇 차례 국민의 냉정한 평가를 받고 고배를 마셨던 후보가 슬그머니 등장했다. 다양한 공약들이 쏟아져야할 판에 정치공세가 난무하는 오리무중 정국 속에서 국민들의 관심은 저만치 밀쳐진 지 오래다. 국민들은 그런 정치가 지겹고 피곤하다. 적어도 자신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는 정치인이란 사극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민생뿐이다.

수시로 궁을 빠져나와 도성을 직접 살피는 이산의 백성을 향해 내미는 손이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이권만을 챙기며 그 헤게모니를 놓지 않으려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대신들 앞에서 조목조목 준비한 논리의 칼을 내세우는 이산이 속시원한 건 그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직접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이산이 진정한 백성들의 지도자로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낮은 자를 두려워하고 긍휼히 여기는 이산이 더 높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과연 이런 사극 속의 정치인들은 환타지에서나 존재할 뿐일까.

‘왕과 나’가 보여주는 정치세계

‘왕과 나’가 본격적인 정치색(?)을 띄면서 캐릭터의 되살이(뿌리를 잘랐으나 다시 살아나는 것)를 시도하고 있다. ‘왕과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왕인 성종(고주원)과 나인 김처선(오만석)의 캐릭터가 조치겸(전광렬)이란 권력형 내시의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그러자 드라마는 궁중여인들의 암투극으로 흐르면서 본래 하고자 했던 방향성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왕과 나’는 예종독살설이 불거져 나오면서 판내시부사인 조치겸의 탄핵설이 등장하고, 이러한 원로내시들의 전횡에 맞서는 김처선의 내시부 개혁과 쇄신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잘만 하면 이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 그간 살아나지 않았던 왕(성종)과 나(김처선)의 캐릭터가 되살이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성종이 정희왕후(양미경)의 수렴청정을 벗어나 본격적인 정치의 첫발을 디디면서 우선적으로 뇌물청탁이 오가는 내시와 조정대신들의 고리를 끊는 것을 첫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며, 그 핵심에 김처선이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왕과 나’는 두 캐릭터를 되살리고 본격적인 정치세계의 이야기로 전환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개혁, 쇄신, 탄핵, 퇴진, 뇌물청탁, 부정비리...’ 같은,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뉴스를 통해 들었던 수많은 단어들을 쏟아내면서 이제 ‘왕과 나’의 이야기는 정치로 접어들고 있다. 단어들의 뉘앙스로서 알 수 있듯이 ‘왕과 나’가 보여주는 정치세계는 우리가 지난 5년 전 숱하게 들으며 염원했던 개혁이다. 김처선과 성종은 본분을 잊고 사리사욕에 빠져 전횡을 일삼는 내시부 수장들과 한명회(김종결)를 위시한 조정대신들에 대한 개혁의 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재미있는 것은 ‘왕과 나’가 보여주는 정치인의 모습이다. ‘왕과 나’의 인물들은 청렴과 부패로 명확히 나눠지지 않는 캐릭터를 갖고 있다. 조치겸은 현재 부패한 원로 내시들의 탄핵을 받는 인물이지만 그 자신 또한 청렴결백하다 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 드라마 상이지만 그 자신도 권력을 위해 예종을 독살하고 김처선의 아버지까지 죽인 부패한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조치겸은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이 주상전하를 위한 충정이었다는 변명만을 거듭한다. 즉 ‘왕과 나’의 조치겸이란 인물로 그려진 정치세계란 대의명분을 위해 저질러지는 악행이 받아들여지는 세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치겸은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거둬 지금의 위치까지 세워준 노내시(신구)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김처선의 개혁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개혁의 중심에 자신이 서지 못하는 것은 저 스스로 떳떳한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조치겸이 노내시와 척을 지고, 주상전하가 하사한 칼자루를 김처선에게 건네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저 스스로 노내시라는 뿌리를 자르고, 김처선의 뿌리로서의 자신 역시 잘라내야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결국 이 국면의 전환도 조치겸이란 캐릭터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치겸은 노내시 앞에 김처선을 세우고 그에게 자신까지 제거할 칼까지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왕과 나’가 지금 다루고 있는 정치개혁의 이야기는 이 사극이 보여주는 뿌리를 자르고 된 내시들의 이야기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뿌리를 자르면서 욕망(사리사욕)을 버려야 했던 내시들이 오히려 부귀영화라는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족벌이라는 또 다른 뿌리를 만들어내는 상황. 이것을 개혁하고자 조치겸은 노내시라는 뿌리를 자르고, 김처선은 조치겸이란 뿌리를 잘라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뿌리를 자른다는 행위는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가지지만 분명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패의 고리로서의 뿌리를 뽑아내는 개혁의 이야기가 어찌 내시가 등장하는 사극 속의 허구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약해 보이기만 했던 김처선이란 인물이 강한 면모를 보이면서 단행하고 있는 개혁 속에서 좀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작금의 정치현실과 내통한 심사가 편치만은 않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본래 대중들이 희구하는 환타지를 기본적으로 담고 있다면 ‘왕과 나’의 그것은 이제 몇 일 남지도 않은 투표일을 앞두고 최선책보다는 차선책을 찾아야 하는 절망감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라도 김처선이란 캐릭터가 되살이되어 개혁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과 생활을 아우르는 고부갈등을 포착하다

‘며느리 전성시대’의 스토리 라인은 양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족발집과 청담동집 양가 사이에 벌어지는 유쾌하고 발랄한 며느리, 조미진(이수경)과 시어머니의 부딪침이다. 물론 그 갈등 속에서 며느리의 고충은 당연하지만, 겹사돈을 향해 달려가는 스토리로 볼 때, 역지사지의 위치에서 양가는 며느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 명백하다. 제목 그대로 ‘며느리 전성시대’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코믹터치로 그려지면서 갈등 자체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가볍고 경쾌한 진행은 고부갈등이라는 해묵은 드라마 소재를 새롭게 만든다. 며느리는 눈물 짜고 시어머니는 구박하는 공식에 익숙했던 분들이라면 이 상큼 발랄한 며느리의 좌충우돌 이야기에서 신선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고부갈등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가 가볍게만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칫 무거운 소재를 희화화시킨다는 비난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또 하나의 스토리 라인을 병렬적으로 다룬다. 그것은 차수현(송선미)이 며느리로 있는 성북동집 이야기다. 족발집 고부간의 이야기와는 상반되게 이 이야기는 무겁고 심각하다. 시어머니인 이명희(김혜옥)는 이미 며느리를 쫓아낸 전적(?)까지 있는 인물. 며느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게다가 남편이라는 사람은 전처를 잊지 못해 방황하니, 며느리인 차수현은 마음 둘 곳이 없다. 제목과 정반대의 ‘며느리 수난시대’를 보여준다.

극단적인 시집살이 속에서 차수현은 자꾸만 눈을 바깥으로 돌린다. 김기하(이종원)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그것은 불륜이다. 불륜을 다루는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그 원인으로 욕망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공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성공이 될 수도 있고, 육체적 욕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불륜의 이유는 시집살이다. 욕망이라기보다는 도피에 가깝다. 따라서 끝없는 핍박과 무관심 속에서 누군가의 관심을 간절히 바라는데서 비롯되는 그녀의 불륜은 비난보다는 동정을 끌어낸다.

반면 시어머니인 이명희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거의 폭력에 가깝다. 며느리에게는 늘 명령을 하고, 잘 했다는 칭찬보다는 못한 부분을 끄집어내기 바쁘다. 며느리는 그 안에서 시어머니의 말 잘 듣는 기계처럼 무표정해진다. 점점 기대감이 없어지자 차수현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자신의 불륜에도 그만큼 당당해진다. 차수현은 이 관계의 끝을 이미 목도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전처가 갔던 그 길을 말이다. 차수현의 도피로서의 불륜은 이쯤 되면 거의 생존에 가깝다. 생존을 위한 선택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비난하기가 어렵다.

이 성북동집 이야기는 ‘구박하는 시어머니 - 당하는 며느리’의 전통적인 고부갈등 드라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여기에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며느리가 과거처럼 그저 당하기만 하고 누군가에 의한 구원을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답답하기만 했던 차수현이란 캐릭터가 적극적으로 불륜을 선택하는 지점에서 드라마는 전통적인 고부갈등의 틀을 넘어선다. 시집살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륜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고부갈등에 있어서 도발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두 스토리가 가진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대결구도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조미진이 며느리로서 겪는 어려움은 불편함의 차원을 넘지 않는다. 그것은 퇴근 후 족발집에서 일을 해야 하거나, 주말에 회사에 나가려고 눈치를 봐야 하는 정도에서 멈춘다. 그러니 그 대결은 새로운 사람이 다른 환경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서 서로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파국을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차수현의 어려움은 불편함을 넘어서 불쾌함에 다다르고 급기야는 인간적인 모멸감에 이른다. 이것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족발집의 대결구도가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성북동집의 대결구도는 생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생활과 생존이라는 서로 다른 무게감의 고부갈등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에서 ‘며느리 전성시대’는 재미와 공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된다. 생활을 다루는 족발집의 이야기가 시집살이의 디테일들을 통한 웃음을 유발한다면, 생존을 다루는 성북동집 이야기는 시집살이가 주는 감정의 편린들을 모아 공감과 눈물을 유발한다. 불륜이라는 소재가 가진 논란의 소지는 시집살이라는 새로운 틀 속에서 공감으로 바뀌고, 또 한 편의 발랄한 이야기를 세움으로 해서 그 무게에 함몰되지 않는다. 또한 고부갈등을 희화화시키는 가벼움은 다른 한 편의 심각한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 발을 디디게 만든다. ‘며느리 전성시대’의 재미와 공감은 바로 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시키는 두 스토리의 변주에서 생겨난다.

수사물에서 메디컬 에로까지 장르사극의 세계

과거 사극이라면 역사적 사료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사극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과거로서의 역사적 시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진 사극은 점점 상상력을 키워왔고 이제 장르와 몸을 섞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이제 환타지(태왕사신기)에서부터 수사물(별순검), 미스터리(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메디컬 에로(메디컬 기방 영화관)까지 다양해졌다.

환타지 사극을 주창한 ‘태왕사신기’는 저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실존인물을 환타지라는 장르 속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행했다. 쥬신의 운명을 타고난 태왕 담덕(배용준)이 사신(네 신물, 네 부족)을 취하는 과정을 그린 이 사극은 환타지라는 장르를 활용하고 있기에 그 자체를 리얼리티로 볼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은 환타지라는 장르 속에서 하나의 상징이나 메타포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마치 한 실제 인물을 하나의 신화로서 그려내는 것과 같다. 이 모험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어떤 영향을 줄 지는 알 수 없으나 드라마라는 허구의 장르가 이런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만 하다.

케이블 시청률의 마의 벽을 연일 깨고 있는 조선시대 버전 CSI인 ‘별순검’은 국내에서는 현대물에서조차도 시도되지 않은 ‘과학수사’를 기치로 내세운 수사물이다. 국내의 수사물들이 ‘현장수사’라는 발로 뛰는 액션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면 ‘별순검’은 조선시대의 ‘중수무원록’이라는 과학적인 법의학의 잣대를 내세워 본격적인 수사물의 장르를 세우고 있다. CSI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현대물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어려운 법의학이란 장르가 조선시대의 특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자 우리 드라마만의 독특한 소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무게를 벗어 던진 사극은 그 시점만 옮겨놓아도 장르물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은 영화 ‘영원한 제국’으로 일찍이 조선시대판 ‘장미의 이름’을 축조해냈던 박종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스텝들조차 영화인들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명실상부한 무비드라마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미스터리 사극이 될 것이다.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암살시도라든가, 원행에서 벌어지는 갖은 음모들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추리와 맞물려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실제 정조의 죽음에 대한 분분한 설들이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는 이 사극은 역시 조선시대라는 배경이 주는 독특함이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된다.

‘메디컬 기방 영화관’에 이르면 이제 사극의 장르와의 만남은 무한히 증폭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성과 의학을 접목시킨 이 사극은 그 안에 모든 장르들이 가진 코드들을 내포하고 있다. 에로물의 성격에다가 액션이 가미되고 거기에 메디컬 장르가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이 드라마는 그 각각으로 봤을 때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들이 그 그릇이 되는 사극이란 틀 속으로 오자 참신해진다.

사극의 장르화는 이미 영화에서 시도되었다. ‘음란서생’, ‘혈의 누’, ‘황산벌’ 같은 사극영화들은 이미 장르화된 현대물의 사극 버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진정한 사극의 전성시대는 드라마 사극과 장르가 맞닿는 부분에서 생겨나고 있다. 공중파에서 정통사극의 틀을 벗어 퓨전 사극이 새로운 사극 중흥의 불씨를 마련했다면, 케이블TV의 공격적인 자체방송 제작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공중파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한 표현들이 가능해지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자, 영화인들의 드라마 제작이 무비 드라마라는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류 속에서 드라마로서는 가장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는 사극이 체계화되면서 장르화도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 사극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는 게 사실이다. 현대물로서 성공했던 장르 드라마들은 고스란히 사극으로의 변용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로써 사극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현대물의 대척점에 설 수 있는 다양성을 확보하게 됐다. 장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공의 시스템으로서 제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한동안 사극전성시대는 지속될 것이 분명해졌다. 장르와 기왕에 몸을 섞은 사극이 다양한 얼굴과 개성을 가진 자손들을 퍼뜨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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