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름의 정치드라마, ‘태왕사신기’

담덕(배용준)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연가려(박상원)와 화천회 대장로(최민수)의 음모에 빠져 가우리검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 가우리검은 심장을 찔러 하늘이 그 죄를 묻는다는 일종의 정치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왕가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부족들이 고안한 장치. 담덕은 자신이 진짜 쥬신의 왕이 맞다면 하늘이 그걸 인정해줄 것이라며 칼 앞에 가슴을 열어제친다. 칼은 정확히 담덕의 심장을 꿰뚫지만 순간 신비로운 빛과 함께 담덕은 살아난다.

이런 일은 가우리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호개(윤태영)에게 쫓기던 담덕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현고(오광록)의 신물이 빛을 뿜으면서 시간을 멈춰놓는다. 눈 한 번 깜짝할 그 순간에 담덕은 자신을 보호하다 죽은 절노부의 아들들을 가지런히 눕혀놓고 거기 멋진 글까지 남겨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 정도라면 담덕은 그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절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환타지 사극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와 그런 능력이 없는 인간의 대결인가. 이렇게 보면 누구든 맥이 빠질 것이다. 이미 둘의 싸움의 결론은 정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왕사신기’의 대결구도가 팽팽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이 사극이 그리는 대결의 목적이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정치의 승리에 있기 때문이다. 담덕은 그 초인 같은 힘으로 호개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정치적인 승리가 아니다. 정치적 승리란 백성들의 지지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환타지 사극이 그리고 있는 것은 태왕의 두 후보들이 서로 경선을 벌이는 것이다. 현재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는 호개이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숫자가 그것을 말해준다. 백제와의 전쟁이 임박한 상황, 호개는 3만이 넘는 병사들을 그러모았지만, 담덕은 채 1만이 되지 않는 병사를 갖고 있다. 그러니 이 대결은 여전히 두고 볼만한 흥미진진한 양상을 띄고 있다. 물론 결과는 담덕이 이길 것이 분명하지만(모든 사극은 사실 결과가 나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다.

정치인으로 호개와 담덕을 비교하면 그 색깔이 확연히 구분된다. 백제와의 전쟁을 토대로 확실한 인기몰이를 하려는 호개와 상반되게 담덕은 전쟁을 피하려 한다. 이유는 백성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담덕의 그런 면을 겁쟁이로 손가락질 하지만 그렇다고 담덕이 거기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는 호개의 전쟁을 뒤에서 도우려고까지 한다. 거기에 대해 현고가 의문을 제기하자, 담덕은 오히려 이렇게 묻는다. “선생의 임금은 백성이 없어도 되는 임금이오?” 즉 호개의 군사들 역시 자신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정치적 대의뿐만 아니라, 이 사극은 경선 과정의 흥미진진함까지 다루고 있다. 담덕이 거물촌장인 현고와 절노부 족장을 통해 꾸리고 있는 것은 이른바 경선 캠프인 셈이다. 무엇보다 담덕이 먼저 ‘어느 곳의 소식이든 모르는 것이 없고 어느 곳이든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 정보력과 언론을 가진 현고와 손을 잡은 것은 현대적 의미로 정치에서 얼마나 그것이 힘을 발휘하는가를 말해준다. 담덕은 이 베이스 캠프를 중심으로 차례차례 네 부족의 지역을 향해 세 몰이를 해나갈 것이 분명하다. ‘태왕사신기’는 태왕이 네 부족의 지지를 얻는 과정을 그린 정치적 행보를 다룬다.

따라서 이 환타지사극이 말하는 정치적인 메시지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주제가 되는 담덕의 정치스타일을 통해 드러난다. 대장장이인 바손(김미경)을 찾아와 무기를 만들어달라며 담덕은 이렇게 말한다. “내 군사들이 다치지 않게 무기를 만들어줘.” 최고의 대장장이 바손은 그 말에 담덕의 베이스 캠프에 합류한다. 무기라 하면 누군가를 상하게 하는 도구이지만 담덕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가 된다. 누군가의 피를 제물로 그 위에 서는 죽이는 정치를 하고 있는 호개와 달리, 담덕의 정치는 ‘살리는 정치’를 지향하고 있다. 인기정치와 남을 비방하는 정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담덕의 큰 정치는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문제가 아닐까.

‘황금신부’가 가진 두 가지 의미

‘황금신부’라는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엿보인다. 그 첫 번째는 사랑이 그 첫 번째 조건이 되어야할 결혼에 ‘황금’이란 물질적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세태를 꼬집는 의미로서의 ‘황금신부’다. 드라마 상으로 봤을 때, 거기에 부합하는 캐릭터는 강력한 신분상승 욕구로 사랑마저 저버린 옥지영(최여진)이 될 것이다.

하지만 ‘황금신부’는 물질적 가치로서의 ‘황금’이 아닌 ‘황금처럼 귀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대단히 보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것이지만 우렁각시 같은 남편 뒷바라지에 시부모 공경하는 신부라는 뜻의 ‘황금신부’를 뜻하기도 한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그런 캐릭터가 비현실적이라고 작가 스스로도 생각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맞는 캐릭터로 베트남에서 데려온 진주(이영아)를 설정하니 말이다.

‘황금신부’는 그러니까 이 서로 다른 두 캐릭터와 가치가 부딪치는 드라마다. 옥지영이 결혼한 김영민(송종호)과, 진주가 결혼한 강준우(송창의)의 두 집안은 계층에서부터 생활환경, 사고방식, 가치관까지 첨예하게 다르다. 영민이네가 운영하는 웰빙푸드라는 회사가 표준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이라면, 준우네가 운영하는 소망식품은 가내수공업에 가깝다. 웰빙푸드가 케이크를 만든다면 소망식품은 떡을 만드는 식이다. 여기에는 현재와 과거, 현대와 전통이 부딪친다.

이런 환경이 만들어내는 사고방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영민이네가 성공지향적이라면 소망식품은 행복지향적이다. 작아도 거기서 어떤 행복을 찾아내는 것. 드라마는 종종 시청자들에게 “돈이 다는 아니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그리고 이 두 집안을 악연으로 엮어내면서(이건 현실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구조적인 역학관계 같은 것을 암시해 보여준다.

영민이네집 사람들은 대부분 준우네집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 양옥경(견미리)은 정한숙(김미숙)의 남자였던 김성일(임채무)을 가로챘고, 김성일은 자기가 버린 딸인 진주를 부정하며, 옥지영은 강준우를 버려 공황장애에까지 빠뜨린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상류사회라는 곳에 편입되거나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공했고 부자가 되었다. 한숙이 자기 딸인 세미와 양옥경의 아들이 결혼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자, 옥경이 가족들을 모아 놓고 하나하나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죄의식과 허위에 얼룩진 얼굴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구도에 최근에는 새로운 인물이 가세했다. 바로 과거에 강준우를 사랑했지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차인경(공현주)이란 인물이다. 이 인물은 이미 더 이상 왠만한 시련에는 끄덕 없게 되어버린 진주 앞에 약해져버린 옥지영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그것은 국적과 학력, 계층 같은 것에 대한 보다 강한 차별의식을 무기로 진주를 괴롭히는 일이다. 그녀의 도를 넘어선 차별의식 속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로 대변되는 편견은 종종 특권의식을 가진 상류층들의 전형적인 악덕으로 그려지곤 했던 소재들이다.

‘황금신부’는 이러한 사회적인 차별의식과 계층 간의 갈등을 두 가족의 엇갈린 운명 속에서 제시하고 있는 드라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대립각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우리네 사회가 가진 상당 부분의 갈등양상을 읽어낼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대결양상이 너무나 선명하게 구획되어져 있다는 점이다. 자칫 성공, 현대적 가치 같은 것은 죄악이고 행복, 과거적 가치만이 옳은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기왕에 사회극 같은 설정을 가진 이 드라마가 사회적인 편견에 대해 진정한 답을 주기 위해서는 ‘황금신부’의 두 가지 의미, 즉 성공이라는 현대적인 가치와 더불어 인간적인 정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한 캐릭터 안에서 구현시켜야 하지 않을까. 진주가 그런 의미에서의 황금신부가 될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향방에 귀추가 주목된다.

김처선인가, 조치겸인가

‘왕과 나’의 오프닝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차례차례 나온다. 그 순서를 보면 김처선(오만석), 윤소화(구혜선), 성종(고주원)이 나온 연후에 조치겸(전광렬)이 등장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의 중심스토리라인이 김처선과 윤소화의 운명적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종이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국내 사극으로서는 대단한 파격이다. 지금까지의 사극들은 대부분 왕을 첫 번째 자리에 놓고 드라마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즉 성종은 이 사극에서는 조연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하는 인물이 조치겸이다. 멜로 라인을 빼놓고 보면 조치겸은 사실상 이 사극의 뼈대를 형성한다. 김처선이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월화(윤유선) 밑에서 자라면서 내시양성소를 운영하는 소귀노파(김수미) 밑에서 일하게 되는 데는 조치겸이 그의 아버지를 죽게 한 사건에서부터 비롯된 일이다. 드라마적으로 봐도 조치겸은 내시라는 사극 속에서 좀체 눈길을 주기 힘들었던 직종(?)을 빛나게 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드라마가 대중들의 어떤 욕망을 대리해주는 역할을 해준다고 할 때, 조치겸이라는 내시는 여타의 사극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동정이 가는 인물이 아닌 대중들이 욕망할 만한 캐릭터이다.

흔히 ‘내시포스’로 대변되는 조치겸의 카리스마는 내시라는 지위가 가진 선입견(무언가 여성스럽고 비굴한 그런 인물)을 깨기에 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치겸은 양물을 자르고 내시가 되는 이들에게 그저 거세된 고자가 아닌 그 이상의 대의명분을 만들어주었다. 사실상 ‘왕과 나’란 사극의 초반부 힘은 바로 이 조치겸에 의한 것이라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까지도 조치겸의 부채신공을 흉내낼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치겸의 실제모델이 전균이라는 내시라고는 하지만 드라마 상에서 그는 가상의 인물이다. 바로 가상이라는 이 설정이 조치겸이란 캐릭터의 질주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반면 오프닝 타이틀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김처선과 윤소화, 성종은 역사의 실제인물이다. 본래 초기 시놉시스 상에서 이들의 사랑은 좀더 파격적이었다. 궁에 들어가기 전, 이미 김처선과 윤소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극이 초반부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을 빚게 되면서 이러한 애초의 시놉시스 설정은 변경되었다. 그러자 김처선은 윤소화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역할로 굳어졌고, 성종은 윤소화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인수대비(전인화)의 치마폭에서만 살아가는 마마보이(?)가 되었다. 윤소화 역시 비련의 주인공으로 굳어져 시종일관 눈물로 밤을 지새는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처선과 윤소화, 성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어려워도 밝고 씩씩한 모습 대신, 참고 눈물을 삼키는 모습이 부각됐다. 이것은 역사왜곡 논란이라는 칼날 아래 자유롭게 캐릭터를 운용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왕과 나’는 과거의 사극들과는 전혀 결을 달리하는 사극으로 현대적인 관점이 그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사극이다. 왕의 시각이 아닌 나의 시각으로 그린다는 점만 해도 그렇다. 바로 이런 초기 설정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 사실을 변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그러니 왜곡 논란은 접어두고 드라마적인 극적 구도에 더 집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왕과 나’는 그 시도 자체가 사극이 더 이상 역사교육의 도구가 아닌 재미 자체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극이 아닐까.

체제순응적이고 수동적인 김처선이 ‘왕과 나’에서 나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히려 조치겸이 그 빈 자리를 채워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가 부정적이든 권력에 눈이 멀었든 그는 어쨌든 자신의 생각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좀더 현대적인 시각이 투영된 인물이다. 김처선이 조치겸이 만들어놓은 밥상에서 숟가락을 들기 위해서는 좀더 현대적인 시각을 투영시켜야 되지 않을까.

합당한 스토리 없는 클로즈업, 자칫 자극으로만 흐를 수 있어

‘왕과 나’는 김재형 PD 특유의 클로즈업의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똑같은 대본이라도 김재형 PD가 연출하면 좀더 집중력이 높아지고 극중 인물의 감정 선이 폭발하는 것은 바로 이 클로즈업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줌 인으로 들어가면서 잡아주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얼굴 표정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사극이 흘러가는 기본적인 힘, 즉 갈등을 증폭시킨다. 여기에 심장을 쿵쾅대게 만드는 배경음악이 깔리면 극은 무언가 대단한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 진풍경을 연출하고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만든다.

클로즈업은 어찌 보면 TV라는 매체가 가진 속성이기도 하다. 영화와 같은 대형스크린에서는 원경의 그림 구도를 잡아놓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인물묘사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다채로운 볼거리를 잡아넣을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주변 배경의 표정들 역시 인물 감정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미학적인 감정처리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TV는 화면이 작다. 따라서 롱샷으로 처리할 경우, 인물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TV는 기본적으로 클로즈업으로 인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TV가 영화와 매체의 성격이 다른 데서도 기인한다. 돈을 지불하고 집중해서 보게 되는 영화와 달리, TV는 집안 일을 하거나, 잡담을 하거나, 식사를 하면서 그저 틀어놓고 보는 매체이다. 그만큼 집중도도 떨어지고 중간중간 끊어지면서 보게되는 경우도 많아진다. 그러니 지나치게 미학적인 화면은 오히려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이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쇼 프로그램, 그리고 심지어는 뉴스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클로즈업은 TV라는 매체가 가진 특징을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는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러한 TV의 클로즈업 공식은 유효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TV 화면이 점점 대형화되고 고화질화되면서 TV 영상에 대한 기대치가 과거보다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왕사신기’나 ‘로비스트’ 같은 블록버스터는 영상 자체만으로 볼 때, 거의 영화에 가깝다. 과거 드라마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와이드한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서 ‘로비스트’나 ‘태왕사신기’의 제작진이 키르키즈스탄까지 날아가는 것은 이제 드라마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여기에 HD급 화질과 거기에 부응하는 CG 활용이 본격화되면서 TV는 말 그대로의 안방극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변화되는 상황에서 클로즈업의 공식은 깨지고 있다.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매는 방식보다는, 뛰어난 미학적 화면을 통해 시청자가 스스로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영화적인 방식이 TV 화면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 우리네 사극역사에 한 획을 그은 김재형 PD의 연출방식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제는 새로운 사극들에게 자리를 내줘야하는 상황이다.

물론 시청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클로즈업의 연출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과거와 달리 높아졌다는 점이다. 클로즈업의 연출방식이 유효하려면 그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즉 극적인 스토리 구조가 기본이 되어야 납득이 된다는 점이다. 평이한 스토리에 과도한 클로즈업은 자칫 연출에 대한 신뢰성을 깨뜨릴 수도 있다.

‘왕과 나’는 왕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서 보는, 시대를 앞서가는 기획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앞선 기획과 달리, 신파적인 스토리 구성과 인물구도 등의 드라마 진행은 김재형 PD만의 강점인 클로즈업의 연출방식조차 자칫 구태의연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초기 기획처럼 과감하고 혁신적인 스토리 진행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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