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전성시대’ vs ‘황금신부’

주말드라마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시즌의 변화다. 여름 휴가 시즌이 지나면서 주말 시간대 시청자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것. 하지만 아무리 시즌이 달라져도 돌아온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놓을 컨텐츠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때마침 시작해 주말극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며느리 전성시대’와 지루했던 투병(?) 이야기를 지나 베트남 신부, ‘진주(이영아)의 친부 찾기’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황금신부’가 그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먼저 ‘며느리 전성시대’가 갖는 의미는 가장 크다 할 것이다. 전통적인 주말드라마가 가진 가족드라마의 성격을 온전히 회복시킨 이 드라마는 고전적인 소재이면서도 시대를 넘어 먹히는 ‘서로 다른 양가집의 결혼이야기’를 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것은 마치 저 ‘사랑이 뭐길래’의 변주처럼 보인다. 보수적인 대발이 아버지(이순재) 대신 오향심 여사(김을동)가, 현모양처에 가끔 반항적 행동을 하는 어머니(김혜자) 대신 서미순(윤여정)이, 신부와 집안 양측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발이(최민수) 대신 복수(김지훈)가, 톡톡 튀는 개방적인 아내(하희라) 대신 미진(이수경)이 포진해 결혼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해프닝을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보수적인 아버지 대신 보수적인 시어머니를 집어넣어 요즘 달라지고 있는 고부 관계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전 세대에 걸쳐 공감을 자아내게 마련인 결혼이란 이벤트 아래 벌어지는 고전적인 스토리에, 현대적인 변주가 힘을 발하는 이유다. 혹자들은 식상하다 할 것이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잘 먹히는 결혼소재는 결혼을 해야하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얽힌 양가집 사람들의 관계가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의 시청층이 결혼이란 대사를 치른 사람이거나, 곧 치를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공감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즉 결혼이란 시대불문, 관심을 가질 가족의 이벤트라는 것이다.

반면 ‘황금신부’가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너무나 변화무쌍하다. 처음 라이따이한의 소재를 잡은 시작은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가진 드라마였는데, 차츰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로 흘렀다. 지영(최여진)에게 배신당한 준우(송창의)가 공황장애를 겪고 이를 사랑으로 지켜낸다는 진주의 이야기가 전통적인 신파의 구조로 그려졌다. 중요한 것은 신파가 먹히지 않는 달라진 지금의 현실에서, 그 공감대를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베트남 신부를 데려왔다는 점이다. 순애보 같은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는 도시는 물론이고 시골처자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공감되지 않는 현실과는 별개로 전통적인 순애보와 신파를 원하는 보수적인 시청층이 존재한다는 점. ‘황금신부’는 베트남 신부를 통해 그 부분을 공략한 결과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현재 ‘황금신부’는 이 순애보적 이야기에 가족극으로서의 훈훈한 이야기를 섞는 반면, 동시에 ‘출생의 비밀’이라는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여러모로 이 드라마는 베트남 신부라는 설정 하나로 과거의 신파 드라마가 갖는 파괴력을 끌어 모으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신파라면 어떨까. 여전히 거기에 공감하고 재미를 느끼는 층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며느리 전성시대’와 ‘황금신부’는 어떤 면으로든 주말 드라마의 위기의식에서 생겨난 퇴행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도 나름의 현대적인 공감의 틀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며느리 전성시대’가 가진 새로운 고부 관계의 틀과, ‘황금신부’가 가진 순애보가 사라진 시대의 다국적 사랑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단순히 구닥다리라 여기며 비판만 할 일이 아니다. 모든 드라마가 잣대를 젊은 층의 시선에만 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 전통적인 드라마들이 여름 시즌을 지나 돌아오고 있는 시청자들을 온전히 안아줄 수 있다면 말이다.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 사이, 이준기

참 지독한 배역을 맡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를 오가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이준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연기자들과 캐릭터는 적어도 드라마를 찍는 동안에는 동일인물이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면 캐릭터가 살 수 없기 때문.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기억과 관련해 자기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은 비단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수현만이 아니다. 그 연기를 하고 있는 이준기 역시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이준기라는 배우를 발굴해낸 멘토의 김우진 이사는 “이준기의 인기는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중성적 매력에 있는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중성적 매력이란 여성적이란 뜻이 아니다. 여성적인 꽃미남의 외모를 갖추고 있지만 또한 남성적인 날카로움 혹은 터프함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려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지금의 이준기를 있게 만들어준 캐릭터는 ‘왕의 남자’의 공길이다.

공길이란 캐릭터는 말 그대로 중성적이다. 겉으로 표현된 것은 여성적인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배역을 두고 게이라던가, 동성애 같은 말들이 나오지 않았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연기한 공길은 기본적으로 남성이지만, 모성애 같은 여성성이 극대화된 캐릭터였던 것.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연산군이나 장생을 보듬는 모성애로서의 여성성은 이준기의 여장남자 연기에 사회적 편견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게 했다.

문제는 공길이란 캐릭터를 벗고 스크린 밖으로 나온 중성적 이미지의 이준기가 공길을 통해 얻게된 이미지, 즉 여성성이 강조된 꽃미남, 예쁜 남자 같은 크로스 섹슈얼로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후 이준기가 토로했듯이 ‘벼락스타가 짊어질 운명’ 같은 것이었다. 이미지 자체가 자산인 연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로 굳어진 이미지는 양날의 칼이다. 연기자의 본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로의 변신’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따라서 연기자 이준기에게도 똑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살해당한 부모의 아픔을 갖고 자라온 이수현이 강중호(이기영)의 보살핌 속에서 국정원 요원이 되고, 상처가 지워질만할 때 원수인 마오(최재성)를 만나는 장면에서 이준기는 첫 번째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었다. 평범한, 어찌 보면 ‘마이걸’의 서정우 같은 이미지의 이준기는 돌연 눈에 핏발을 잡아가며 총을 들이대는 거친 남자로 돌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호탄이었을 뿐. 언더커버로 들어간 청방에서 갑작스런 사고로 당한 기억상실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원수 밑에서 충실한 개가 되어 비열한 썩소를 날리는 이준기는 복수심과 따스함의 이중성을 갖고 있던 이수현에서 어두운 그림자로서의 케이라는 인물을 끌어낸다. 그리고 결국 정해진 대로 케이가 자신이 이수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캐릭터는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려 할 때,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처럼 청방에서 언더커버로 활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기억의 양파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수현이란 한 인물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지만, 거기에 기억이 덧붙여지면서 이 캐릭터는 다양한 프리즘의 빛깔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준기가 연기하는 이수현의 이런 다양한 모습들은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복수심은 때론 훌륭한 동기부여가 된다”거나, “기억을 잃었다는 건 완벽한 언더커버 요원이 됐다는 걸 뜻한다”는 식의 대사들은 이 드라마가 한 가지 현상에 부여된 양면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드라마를 죽 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저 이수현이란 친구를 저렇게 힘들게 만드는 걸까. 물론 그것은 정보를 쥐고 있는 자들인 정학수(김갑수)나 마오(최재성) 같은 인물들이, 정보가 없는 자들을 이용해 벌이는 권력게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파껍질 같은 기억을 갖게 된 인간이란 존재의 문제다.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억이란 장치 하나로 숨가쁘게 변신하는 감정을 가진 존재. 따라서 이준기에게 이런 양면을 보여주는 이수현이란 캐릭터는 넘어야할 산이면서도 그 자체로 이미지 변신의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한 드라마에서 두 이미지가 다 보인다)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인간다움에 끌리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

한 때 SBS 금요드라마를 보면서 ‘어 이거 금요일 맞아?’하고 의아함을 느끼게 만든 드라마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지우 작가의 ‘내 사랑 못난이’다. 이 시간대의 드라마들은 대부분 성인극을 들고 나와 보기에 민망한 불륜과 치정을 드러냈던 반면, 이 드라마는 보는 이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에서 ‘내 사랑 못난이’의 진차연(김지영)이나 호태(김유석), 신동주(박상민), 정승혜(왕빛나)의 면면이 떠오르는 건, 정지우 작가가 일관적으로 갖고 있는 인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백수찬(김승우)의 부성애는 진차연의 모성애를 떠올리게 하고, 백수찬과 친구 먹은 정윤희(배두나)는 측은지심 가득한 호태를 닮았다. 겉으로는 얼음이지만 착하고 따뜻한 내면을 가진 유준석(박시후)은 저 신동주를 떠올리게 하고, 묘한 삼각관계 속에서 때론 냉정하지만 결국은 착한 내면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되는 고혜미(민지혜)는 정승혜란 캐릭터의 연장선으로 보여진다. 또한 ‘내 사랑 못난이’가 금요드라마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던 주인공 주변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고스란히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의 도처에서 반짝거리는 이웃들의 모습으로 살아난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내 사랑 못난이’와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사랑 못난이’가 아무래도 금요드라마라는 틀 안에서 세련됨보다는 직접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설정들이 많았던데 비해,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물기와 기름기를 쪽 뺀 듯한 느낌이다. 사랑과 배신 같은 ‘내 사랑 못난이’의 기본 설정 구도가 가진 질척거림은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에 와서는 이웃 간의 사랑과 의리 우정 같은 코드로 엮이면서 발랄해진다.

“진가년 그년에게서는 사람냄새가 나”라는 조옥자(여운계) 여사의 말을 통해서 이 세상 못난이들의 잘난 이들과의 한판 승부가 바로 그 사람냄새에서 결판날 것을 암시한 정지우 작가는, 이야기를 이웃으로 가져와 진짜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를 하려 작정한 듯 하다. 제비라는 것이 들통났어도, 또 허울좋은 개살구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어도 행복마을 사람들은 백수찬과 그 집에 더부살이하는 양덕길 부자를 걱정한다. 특히 도저히 농촌총각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미희(김성령)는 바로 그 측은지심으로 인해 점점 양덕길에게 끌리는 중이다. 그것은 역시 언발란스 하기만 한 정윤희가 얼음처럼 차갑기만 한 유준석 실장을 특유의 독특함(?)으로 녹이는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저 ‘내 사랑 못난이’에서 호태가 그저 주변 인물이 아니었듯이, 이들 중심인물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다. 아끼라는 말이나 할 줄 알았지 따뜻한 말 한 마디 못해줬던 아내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자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김대식(김동균),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아내를 구속하는 위대한(박광수), 집에서는 잘난 마누라와 자식 땜에 회사에서는 직장 상사들에게 굽신거리느라 기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변희섭(이원재)이란 캐릭터들이 그들이다. 특히 “나는 남자들의 삶이란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자식에게 제 살점 하나씩 떼 주면서 그렇게 사는 거지.”라 말하는 변희섭이란 캐릭터는 물이 오른 듯한 이원재의 어눌한 연기에 덧붙여져 보는 이들을 짠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이처럼 자꾸만 보고 싶게 만드는 반짝반짝 빛나는 못난이 캐릭터들에 있다. 이 캐릭터들을 갖고 드라마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인간다움’에 서로 끌리는 이야기를 엮어간다. 그것은 백수찬이란 전직 제비와 정윤희의 우정관계, 정윤희라는 개념상실 비서와 얼음장같은 유준석 실장의 사랑관계, 농촌 총각으로 결혼 한 번 해보지 못한 양덕길과 무려 세 번의 이혼을 한 정미희의 애정관계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좀더 시각을 넓게 해서 보면 좀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행복마을 사람들의 이웃으로 엮인 공존 자체가 어떤 희망 같은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정지우 작가가 말하려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그러니까 빈부나, 출신, 계층, 지역, 남녀 같은 것을 넘어서는, 인간이라면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 바로 ‘사람을 사람냄새 나게 만드는 그 무엇’에 있는 게 아닐까.

‘강남엄마 따라잡기’가 가진 가치

SBS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풍자극으로 출발했다. 한석봉의 일화를 패러디한 첫 장면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왜 굳이 제목을 강남엄마로 잡고, 구체적인 지역을 거론했을까. 드라마 종영에 즈음해 생각해보면 ‘강남엄마’라는 직설어법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풍자란 에둘러 현실을 꼬집는 재미를 주어야 하는데(여기서 꼬집는 현실에는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한다) 강남엄마란 직접적인 용어는 풍자극을 심각한 사회극으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시선을 잡아끈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강남에 사는 엄마들의 입장에서 보면 속상할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현실적으로 환원된 드라마는 현실의 검증이란 쓸데없는 논란까지 만들어낸다. 여러 모로 보나 우리 교육에 대해 용기 있는 문제제기를 한 이 드라마의 가치는, 초반부에 너무 쓸데없는 힘을 빼면서 중반을 지나서야 차츰 가치를 드러나게 된다. 아들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하는 현민주(하희라)라는 캐릭터가 드라마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게 된 것은 강조된 현실로 인해 풍자극으로서 충분히 희화화되지 않은 캐릭터가 공감을 얻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남으로 이사온 후, 부딪치는 학교에서의 문제들, 예를 들면 과열된 엄마들의 치맛바람이나, 촌지 문제, 학력 논란, 학원문제 등등은 모두 공감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들로 구성된다. 애초부터 이 교육의 문제는 엄마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현실, 즉 잘못된 교육정책이나 거기에 철학 없이 따라가는 학교들이 양산하는 문제였다. 즉 드라마가 강남이니 강북이니 하는 지역 논란을 제쳐두고 학교 문제에 집중하자 공감대의 폭은 넓어졌다는 말이다.

조금 자극적인 설정일 수도 있지만 윤수미(임성민)의 아들 이창훈(김학준)이 자살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전해주려는 메시지를 가장 적절히 보여준 에피소드로 보여진다. 학원을 땡땡이 치고 한강으로 놀러간 진우(맹세창), 지연(박은빈), 준옹(이민호)이 오랜만에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과 교차 편집된 창훈의 자살 장면은 교육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 에피소드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결국 아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을 제대로 꼬집는다. 직접적인 장면의 자극을 피하고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는 장면을 통해 미학적으로 처리된 것 역시 적절했다 보여진다.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굳이 강남이 아닌 우리나라의 교육풍토를 풍자한 드라마다. 엄마들과 아이들, 그리고 선생님들이 엮어 가는 드라마 속의 희비극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가 처한 교육의 희비극과 맞닿는다. 새벽부터 새벽까지 아이를 학원으로 돌리고, 엄마이기를 포기한 채 학습매니저가 되어 가는 엄마들, 아이를 교육시켜야할 선생님들이 순위표에 줄 세우기를 해야 하는 현실, 학교는 뒷전이고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 이런 현실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생각해보면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픈 이 시대의 희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그걸 우리 앞에 끄집어내 준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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