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없이는 드라마가 재미없다

스포트라이트는 주연배우라는 얼굴에만 집중되지만 그 얼굴을 지탱해주는 건 드라마의 허리가 되는 조연들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한층 높아진 수준과 수직적 관계보다는 수평적 관계로 보려는 사회적 경향이 만나면서 조연들은 더 눈에 띄게 되었다. 어딘지 분위기가 있는 손현주,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박철민, 만나보고 싶은 정감을 느끼게 하는 권해효 그리고 편안하면서도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김창완이 그들이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에 출연하고 있는 손현주는 좀 독특한 연기의 결을 갖고 있는 연기자다. 40대 초반이란 무게는 주연의 발랄함보다는 조연의 묵직함이 더 어울리는 나이. 하지만 손현주에게 있어서 이런 나이는 편견에 불과한 것 같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에서 순박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농촌 총각 양덕길이, 저 부하와 상사 사이에서 생고생을 하던 ‘히트’의 조규원 경정이었고, 한때 ‘여우야 뭐하니’에서 패션모델 고준희(김은주)와 사랑에 빠진 괴팍한 명품 브랜드 사장 박병각이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가 연기한 조연은 사실 조연에 머무르지 않고 극의 중심에 늘 놓여있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조연들과 차별화 된다.

한편 영화 ‘화려한 휴가’ 시사회장에 온 박철민은 독특한 인사말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쓸데없이 많이 찍어서 한없이 부풀어올랐다가 편집 과정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화려한 휴가’의 수석 조연 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해 폭소가 터졌던 것. 하지만 이 소개는 단지 우스개만은 아닌 것 같다.

유난히 택시기사가 잘 어울리는(?) 그는, ‘화려한 휴가’에 이어 2부작 특집 드라마, ‘그라운드 제로’에서도 택시기사 유동선 역할을 하면서 웃음을 주면서도 가슴 찡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저 ‘불멸의 이순신’의 김완 역할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징한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박철민의 연기는 바로 그 선량함과 토속적인 맛이 어우러지면서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또한 늘 인상쓰면서 귀차니스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권해효는 늘 드라마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극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역할에 충실해왔다. 최근 종영한 ‘에어시티’에서는 본부장으로서의 경험은 풍부하지만 젊은 인재에게 어딘지 밀리는, 그러면서도 그걸 기분 좋게 인정하는 인물, 민병관 역을 해냈고, ‘여우야 뭐하니’에서는 대한민국에 건전한 성문화를 널리 퍼뜨리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세시봉 출판사 사장으로 코믹한 드라마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삶의 권태를 담은 인물들이 주로 차지한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는 날 백수에 가까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고시생으로,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쓸데없이 요리에 목숨거는 보나빼띠의 총지배인으로 분했다. 그는 직장에 가면 꼭 있을 것만 같은, 그리고 같이 일하고 싶은 엉뚱하면서도 정이 가는 직장상사 같은 연기자다.

이밖에도 최근 주목할만한 조연 연기자는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귀차니스트 홍으로 열연하고 있는 김창완이다. 그의 연기는 능글능글할 정도로 능수능란 한 편안함에서 나온다. 연기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연기의 결은 때론 연기라기보다는 그게 본 얼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그런 생각을 멋지게 뒤집은 작품이 ‘하얀거탑’이다. ‘하얀거탑’에서의 우용길 부원장은 순식간에 얼굴이 바뀌는 야누스적인 매력을 보여주었다.

주연보다도 때론 더 중요해진 조연배우들. 때론 감초처럼 맛을 주고, 때론 지나가는 말로 감동을 던지는 그네들이 있기에 드라마는 더 진실되고 재미있게 된다. 그것은 또한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짜 삶에서 만났던 중요한 인물들이 드라마의 주인공 같이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지만 없으면 안될 사람들인 것처럼 말이다.

퓨전의 맛을 만드는 ‘위장’이라는 요리법

색다른 맛을 가진 퓨전시대극, ‘경성스캔들’의 요리법은 ‘위장’이란 코드다. ‘경성스캔들’은 제목부터 그 속에 무엇이 담겨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경성’이란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용어에 ‘스캔들’이라니. 드라마는 시작부터 비밀댄스홀이 등장하고 바람둥이 선우완(강지환)이 기생 차송주(한고은)와 함께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등, 이 드라마의 방향성을 교란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일제시대라는 무거운 역사의 틀을 과감하게 벗겨냈다는 호평과 함께, 아무리 그래도 그 비장한 시대에 로맨틱 코미디류의 멜로를 다룬다는 혹평이 동시에 나왔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경성스캔들’이란 퓨전의 첫 번째 위장술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일 뿐이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그 베일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면서 그들이 그저 일제시대라는 상황을 잊고 연애나 하는 한량들이 아니었음 밝히기 위한 위장술 말이다.

드라마 말미에 가서 결국 알게된 것은 차송주나 이수현(류진), 나여경(한지민), 강인호(안용준), 심지어는 지라시 출판사의 삼인조에서 바람둥이 선우완까지 어느 누구 하나 시대의 고통을 회피하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그렇게 되자 교과서 속에서 보았던 박제된 독립운동가들의 이미지는 보통 사람들의 항일운동으로 되살아난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도 사람이고 사랑을 하고 아파한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사랑의 아픔은 시대의 아픔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항일투쟁의 가장 강력한 혁명전술이 위장연애’라는 설정은 이 드라마 속의 멜로와 시대극이 퓨전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들이 보여주었던 트렌디한 신파류의 멜로는 참신해진다.

‘사랑한다’는 마음은 위장술의 뒤편으로 숨는다. 차송주를 사랑하는 이수현의 마음은 위장술 속에서 적인 것처럼 서로를 대하게 만들고, 나여경의 선우완을 사랑하는 마음은 종종 수줍게도 위장술로 위장된다. 사랑하는 사람(선우완)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여자(총독부 보안과장의 딸)와 함께 몇 일간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설정은 멜로가 시대적 아픔과 맞닥뜨려 시너지를 내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이런 위장술을 멋진 양념이 되게 한 공은 출연한 연기자들의 몫이다. 위장술을 하는 연기자들의 연기란 결국 두 가지의 모습(드러난 모습과 드러낼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강지환은 바람둥이에서 사랑을 통해 투사가 되어 가는 모습을 통해 시청자들을 때론 웃기고 때론 울려주었고, 한지민은 당차면서도 귀여운 소녀 같은 이미지를 보여줬다. 류진은 일본 앞잡이와 애국지사라는 양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어려운 역할을 소화해냈다. 무엇보다 한고은은 제 몸에 맞는 옷을 챙겨 입은 듯 차송주의 역할을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했다.

그리하여 이들 연기자들에 의해 활용된 위장술이란 요리법을 통해 ‘경성스캔들’이란 제목의 스캔들이 무엇인가가 밝혀진다. 그것은 스캔들을 위장한 독립운동이며 그 독립운동 속에서 아파하며 사랑했던 당대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물론 이 퓨전 시대극이 시대의 아픔을 지나치게 가볍게 풀어냈다는 비판을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부분이 또한 이 퓨전 시대극이 이룬 성과이기도 한 것은 일제시대라는 중압감을 벗어난 연후에야 새로운 시도가 가능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념이 사라지고 생활이 남은 시대,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이념보다는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 드라마는 의미를 갖게된다. 비장하진 않지만, 웃고 울고 실수하고 후회하는 당대 민초들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아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했던 것은 어찌 보면 위장술이 아니었을까.

드라마 속에 꼭 있는 화제의 장면들

종영한 ‘쩐의 전쟁’의 한 장면. 갑자기 사채업소인 동포사가 춤바람에 휘말린다. 금나라(박신양)와 서주희(박진희)가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춘다. 단지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만 드라마 상의 감정라인과 조우할 뿐 스토리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몇 장면이 가진 효과는 커서, 다음날 인터넷에는 어김없이 이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가 네티즌들 사이에 화젯거리가 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한 장면. MT를 간 카페 직원들과 사장이 함께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은 그대로 UCC로 변모하면서 ‘완소한결’, ‘어라라은찬’ 같은 문구들이 달라붙는다. 극중에서 은새(한예인)가 이 UCC를 올려 카페가 인기를 끌게 된 것처럼, 드라마가 방영된 후, 인터넷은 이 UCC 동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드라마와 인터넷은 언제부턴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저 방영된 드라마에 대한 평가에서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제 인터넷으로 오면서 새롭게 재창조되기도 한다. 장면들이 재편집되거나 서로 다른 드라마들이 엮어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패러디는 물론이고, 캐릭터에 간략한 특징을 붙여 만드는 사자캐릭터 창조는 이제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인터넷의 화제성을 가장 잘 활용한 드라마가 ‘거침없이 하이킥’이다. 거의 모든 캐릭터에 사자캐릭터가 붙은 이 시트콤은 그 날 밤 어떤 장면을 연출했는가가 어김없이 다음날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순재가 야동을 보고 악플을 다는 장면이 네티즌들에게 큰 호응과 반응을 얻어낸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 시트콤이 처음부터 인터넷의 화제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결과이다.

화제를 일으키는 방법도 가지가지. 그 중 여성 캐릭터들의 주먹다짐 역시 화제를 끌어 모으는 한 장치가 되었다. ‘내 남자의 여자’의 화영(김희애)을 업어치는 은수(하유미)의 장면은 오래도록 네티즌들 수다의 소재가 되어주었다. 최근 ‘강남엄마 따라잡기’에서 강북엄마 현민주(하희라)와 강남엄마 윤수미(임성민)가 한바탕 붙는 장면에서 ‘내 남자의 여자’의 주먹다짐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과거라면 그저 심한 말다툼 정도로 처리되었을 이런 장면들은 이제 머리끄댕이 제대로 잡아 당겨주고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막싸움으로 변모했다. 그만큼 화제성이 충분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미 화제가 되었던 장면을 다시 끌어다 쓰는 경우도 있다. 최근 종영한 ‘불량커플’의 준수(유건)가 한영(최정윤)에게 피아노를 치며 프로포즈하는 장면은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했던 장면을 그대로 패러디한 것. 창피해 자리를 뜨려하는 한영에게 “어이 거기, 핑크는 자리에 좀 앉지”라고 외치는 장면에 이은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열창은 화제가 된 시퀀스 전체를 가져와도 여전히 화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경우이다.

드라마가 네티즌 혹은 시청자를 의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드라마들의 홍보경쟁도 치열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네티즌들의 입 소문은 이제 드라마를 소위 띄우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팬 서비스 같은 이런 장면들의 연출은 드라마의 흐름과 잘 맞물리는 한 그다지 나쁠 게 없다. 하지만 때론 화제가 공감으로 가지 않고 비호감으로 가는 경우도 생긴다. 과도한 장면들의 남발이 그것이다. 드라마 진행과 상관없는 과도한 노출이나,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도 않은 관계의 남녀가 갑자기 키스신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것들은 공감보다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가장 좋은 것은 드라마 자체가 갖는 이야기와 화제가 될만한 장면이 빈틈없이 딱 맞는 경우이다. 특별히 연출할 것도 없이 그런 장면들은 고스란히 화제가 되고 후에도 명장면으로 남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연타석 홈런을 날린 은찬(윤은혜)과 한결(공유)의 포옹신에 이은 키스신이나, ‘쩐의 전쟁’에서 금나라와 서주희가 보여준 오이키스신 같은 것들이다. 저 드라마에 흔하디 흔한 포옹과 키스 장면이 이다지도 가슴 떨리고 오랜 잔향을 남기는 것은 그 이면에 있는 수많은 감정들이 그 한 장면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화제를 만들어내는 장면의 연출보다는 장면의 극적 상황 자체가 화제가 될 때, 시청자들은 깊은 공감 속에 기꺼이 화제에 동참할 것이다.

윤은혜, 이준기, 수애, 그들의 변신에 박수를

연기자가 연기 변신을 하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증명인 셈. 하지만 이게 그리 쉽지 않은 것은 대중들이 바라는 이미지와 변신한 이미지의 간극이 클 경우이다.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로 고정되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만, 동시에 연기자들에게 그것은 족쇄로도 작용한다.

한번 가수출신 연기자라는 연기논란에 휘말린 이미지를 가지면 하는 역마다 연기논란을 일으키고, 한번 미소년 이미지로 강한 인상을 남기면 터프한 연기가 잘 먹히지 않으며, 청순 가련 이미지로 고정되면 명랑한 역을 맡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자신이 가졌던 이미지와 다른 변화된 캐릭터를 요구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저 자신의 이미지가 먹힐 시대가 또다시 오기를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연기변신을 시도할 것인가. 이런 면에서 보면 지금 윤은혜, 이준기, 수애가 몸부림치는 연기변신은 이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지금 연기자들 앞에 펼쳐진 시험대. 그것은 변신이다.

여자는 울고 남자는 인상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청순가련형 여성 이미지와 마초적이기만 한 카리스마의 남성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소비되지 않는 시대다. 언제부턴가 TV 속의 여성들은 점점 강인한 인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질척할 정도로 드러내지 않게 됐다. 반면 남성들은 거꾸로다. 오히려 눈물을 흘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이미지가 더 많이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조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에서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IMF 이후 급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성들과, 감성적인 사회가 요구한 여성인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여성들로 전도된 남녀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무너진 욕망을 대체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들이 포진한 남성 타깃 드라마(사극이나 전문직 장르 드라마 같은)와, 종속적이지 않고 독립적인 연애방식으로 상큼 발랄한 관계를 꿈꾸는 여성 타깃 드라마(청춘 멜로 드라마)가 공존하는 상황이다.

이 변화된 상황 속에서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연기자들은 변신이 불가피해졌다. 윤은혜는 ‘궁’과 ‘포도밭 그 사나이’를 통해 명랑 소녀의 이미지를 굳혔지만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가수 출신 연기자’의 연기논란이었다. 획기적인 변신이 아니면 넘기 어려운 이 꼬리표를 떼낸 것은 명랑 소녀에서 한발 더 나아간 남장여자라는 캐릭터이다. 여자를 포기하자 윤은혜는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이 가능해진 것. 중요한 것은 그 남장여자라는 캐릭터가 지금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라는 점이다. 보이시한 여성이 인기가 있는 것은 수직적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마치 남성과 남성 같은 우정의 관계로까지 수평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징후이다.

‘9회말 2아웃’이 보여준 수애의 변신은 이제 더 이상 울지 않는 여성 캐릭터 시대에 가장 잘 우는 연기를 소화해내는 연기자가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경우이다. ‘해신’에서부터 주목받은 수애의 연기는 이병헌과 호흡을 맞춘 ‘그 해 여름’을 통해 우는 연기자의 이미지로 굳어져갔다. 그런 수애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에, 술 먹고 주사를 부리는 모습의 홍난희 역할을 맡은 것은 연기자로서의 대단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왕의 남자’를 통해 여성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이준기의 경우는 거꾸로 남성적인 카리스마 변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변신은 일단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살해된 부모의 복수극이라는 점도 연기자 이준기의 입장에서 보면 연기변신에 힘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새롭게 맞닥뜨린 원수 앞에서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연기는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 정도의 연기변신이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물론 고정적 이미지를 가진 연기자들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기자들에게 있어 고정적인 이미지는 양날의 칼과도 같다. 좋은 작품에서의 호연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는 고정화될 위험성을 늘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그 이미지를 팔려고 하는 기획사와 시장이 만나면 자칫 그 이미지에 눌러앉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연기자들이 연예인이 아닌 예술가로 느껴지는 순간은 그 속에서 늘 자신을 다잡고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일 때이다.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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