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잘한 ‘쩐의 전쟁’, 끝이 아쉬운 이유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에 대한 욕망과 그 헛됨을 드라마를 빌어 함부로 얘기하는 건 참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허망한 자기부정이 되거나 혹은 진부한 건전 드라마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쩐의 전쟁’은 다양한 장치(?)로 그 어려운 줄타기를 해낸 드라마다.

참 잘한 돈에 대한 풍자적인 접근
돈이란 소재가 얼마나 뜨끔한 것인가는 이미 이 드라마로 인해 촉발된 현실의 변화들에서 충분히 감지된 바 있다. 그러니 적당한 장치가 필요할 밖에. 이 드라마가 가진 만화적 연출과 스타일은 보다 극적인 상황을 만들면서 동시에 드라마와 시청자가 적당한 거리를 갖게 해준다. 만일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게 보여주었다면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논란의 거미줄에 잡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건 만화 같잖아’하며 심각한 상황이 넘어가는 순간, 거기에는 묘한 풍자의 힘이 생긴다. 풍자는 자기부정을 통해 비틀린 세태를 함께 비웃으면서 새로운 자기 인식을 일깨우는 장치이다.

‘사채업자들에 의해 모든 걸 잃은 금나라(박신양)가 스스로 사채업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가 인간이 아닌 돈 중심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의 드러내기 싫은 속살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글자로 표현될 때만 아이러니하게 보일 뿐, 실제 현실은 당연한 것이니까. 이 사회에서 돈을 받아쓰다가 돈을 벌게 되는 상황이 시작되는 것은 금나라와 같은 상실을 실제 겪거나 혹은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길 때이다. 그 때부터 금나라처럼 돈을 좇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러니 사채업자로 변한 금나라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잠재적 욕망을 대리해주는 통쾌함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시청자가 보기에 그다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결국 돈에 혈안이 된 인간(어쩌면 거기서 새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일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함께, 캐릭터 설정을 통해 금나라의 변신을 용인하게 만든다.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인물이 있다. 하나는 금나라의 스승인 독고철(신구)이고 또 하나는 서주희(박진희)다.

독고철과 서주희가 말하는 ‘참 잘했어요’
독고철은 이 드라마 상에서 돈이라는 욕망이 또한 좋은 욕망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인물이다. 그러니 금나라가 돈 귀신의 구렁텅이에서 개처럼 구르며 마음껏 욕망을 탕진하는 상황에서 그를 구원해주는 인물은 독고철이 될 수밖에 없다. 독고철과 금나라와의 수직적인 관계는 마치 사회에서 간도 쓸개도 빼며 하루를 살아낸 샐러리맨이 집으로 돌아와 이미 그 같은 경험을 하고 탈속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독고철은 금나라가 무언가 일을 제대로 할 때 돈으로 보상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장을 찍어준다. 우리네 아버지들처럼 ‘참 잘했어요’하고 등을 두드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집 안에서의 위안이다. 집 밖으로 나가면 돈 귀신에 슬쩍 슬쩍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속출한다. 그래서 필요한 캐릭터가 수평적인 관계로서의 서주희다. 금나라가 서주희네 집의 빚을 해결해주고 그녀를 담보 삼는 순간, 그것은 금나라에게는 현실의 진창에서 구르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잠시 서주희에게 담보해주는 셈이 된다. 양심을 맡긴 채권자인 금나라는 흔들릴 때마다 담보인 서주희에게 달려와 맡겨둔 양심을 꺼내본다. 그가 아버지 같은 존재인 독고철에게서 배운 ‘참 잘했어요’라는 문구를 그녀의 채무노트에 찍어주는 순간, 스스로 ‘참 잘했다’는 위안을 받는다.

이 수직적인 관계로서의 독고철과 수평적인 관계로서의 서주희라는 캐릭터로 인해 금나라라는 돈에 대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은 두 가지를 얻게 된다. 첫째는 그의 욕망에 기꺼이 시청자들이 이입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상반되어 보이는 욕망으로부터의 탈주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선 도통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박신양의 연기가 돋보이는 건, 이런 실현 불가능한 현실을 넘어선 이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도 한몫을 차지한다.

엔딩이 참 잘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
이것은 또한 ‘쩐의 전쟁’이란 드라마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중적 잣대(욕망 추구와 그 헛됨)를 어느 정도는 성공적으로 그려낸 요인이 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차츰 드라마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애초에 독고철과 서주희라는 캐릭터를 설정하면서부터 예기된 결과이다. 사실 드라마의 힘은 욕망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 바, 돈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던 금나라가 최초에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한 독고철과 서주희라는 인물에 집중하면서 그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금나라의 욕망을 무너뜨리는 인물들이다.

드라마가 섣부른 해피엔딩으로 달려가지 않고 금나라를 정점에서 쓰러뜨리는 것은 장태유 PD 특유의 풍자의 칼날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지만 시청자들이 용납하기엔 어려운 설정이다. 독고철과 서주희라는 캐릭터를 설정했을 때부터, 장태유 PD는 금나라의 욕망을 끌어내리겠다는 생각을 한 셈이지만 그것이 꼭 그의 죽음으로 갔어야 했을까.

마동포가 원수라는 걸 알게된 금나라가 방황할 때, 독고철이 한 말이 있다. “너의 아버지를 죽인 건, 마동포가 아니라 돈”이라고. 결말은 금나라를 버리기보다는 돈을 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환타지적인 결론이라도 끄집어내는 게 안전했다. 이런 환타지가 싫다면 애초부터 독고철이나 서주희라는 캐릭터는 더 이상 금나라와 지금 같은 관계로 이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쩐의 전쟁’의 엔딩은 지금까지 금나라를 통해 욕망의 무한질주를 즐겨오다가, 차츰 그 욕망이 사라지자 아쉬워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그리워하는 작은 기대마저 부서뜨리는 힘이 있다. ‘쩐의 전쟁’은 그것마저 부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그것은 아쉽게도 지금까지 ‘쩐의 전쟁’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드라마의 결말은 작가가 내고 싶어서 마음대로 내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납득할 수 있는 끝을 보여주는 것이다.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졌다가 또 그 어수룩한 캐릭터들에 관조적인 입장이 되어 웃다가, 어느 순간 뜨끔한 기분을 느꼈던 시청자들은 이런 도장을 찍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어려운 줄타기 “참 잘했어요”라고.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마지막 엔딩이 나온 후로 이 도장에는 반어적인 뉘앙스가 하나 더 붙게 되었다. 그것은 아쉽게도 비꼬는 투의 “참 잘했어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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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다큐 프로그램들이 보여주는 것

강직성 척추염을 앓아 허리가 90도로 꺾어진 20대 청년이 말한다. “포기했습니다. 포기하게 되더라구요. 나이는 20댄데 몸은 70대니.” 몸이 뒤틀려 삶의 희망을 저버린 청년에게 PD가 꿈을 묻는다. “꿈요? 그저 보통이 되는 거요. 허리를 일자로 쫙 펴고 자는 거요.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동네를 걸어보는 거요. 그럼 정말 좋을 거 같아요.” 병원 다큐 프로그램, ‘닥터스’에서 소개된 새우등 청년 진백씨의 이야기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 5회에 걸쳐 방영되어 호평을 얻었던 ‘휴먼다큐 사랑’. 특히 2회에 방영되었던 ‘안녕 아빠’편은 죽음을 앞둔 아빠의 가족과 함께 보낸 마지막 날들을 담담하게 담아내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런데 5편 중 단 1편(벌랏마을 선우네)을 빼곤 나머지 4편 모두 병원이 등장한다.

뉴스다운 뉴스 보기 어려운 세상에 진짜 살아가는 사람들의 훈훈한 뉴스를 전해주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이 프로그램에도 여지없이 등장하는 것은 병원의 이야기다. 강화도에서 한 순간의 사고로 입은 화상으로 55년 동안 바깥세상 구경을 못한 화문석 할머니의 이야기,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아픈 남편을 지켜온 명랑 아줌마, 김옥선씨의 이야기에도 병원은 여지없이 등장한다.

이런 병원 다큐 혹은 병원 다큐 성격을 가진 영상들에 우리가 흔히 붙이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휴먼다큐’. KBS가 지난 98년 6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7년에 걸쳐 방송한바 있는 ‘영상기록 병원24시’의 후속으로 방영되고 있는 ‘현장기록 병원’ 역시 ‘메디컬 휴먼다큐’를 지향한다. MBC의 ‘닥터스’는 두 가지 포맷을 담고 있는데 ‘응급실 24’는 리얼다큐를, 그리고 ‘미라클’은 역시 휴먼 다큐를 지향한다. 가정의 달 특집으로 방영된 5부작 다큐는 아예 ‘휴먼다큐 사랑’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다큐멘터리에 굳이 휴먼이란 단어를 붙인 것은 병원이란 공간이 갖는 특별함 때문이다. 만일 병원이란 공간에 대해 그저 아픈 사람 치료하는 곳 정도의 기능적 해석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아파서 병원을 찾아보지 않았던 사람이거나, 자신의 몸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나 가족이 아파 병원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병원이란 공간이 가진 특별함을 이해할 것이다. 그 곳에는 죽어 가는 사람이 있고 살리려는 사람이 있다. 그 접점은 물리적인 수술이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거기엔 그들의 사연이 교차한다.

‘휴먼’이란 단어는 이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제 아무리 기계처럼 감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래서 자신도 결국 아프고 병에 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일 지라도 병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 스스로 사람이라는 걸 자인하게 된다. 어차피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앞에 두는 순간부터, 병원 밖에서 꿈틀대던 거대한 욕망은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카메라는 그저 물리적인 수술실의 메스의 놀림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메스를 든 사람의 이야기와 그 메스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리고 때론 기적 같은 소생과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담는다. 그 순간, 환자와 의사의 눈물은 그걸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아 나도 사람이로구나’하는 감동으로 전달된다.

병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벗어버린 욕망이란 외피 탓일까. 그저 사람이란 알맹이들이 꿈꾸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보통이 되는 것’, 혹은 ‘평범한 삶’이 그들의 꿈이다. 그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환자는 물론이고 의사들까지 사투에 가까운 노력을 한다. 병원 다큐가 시사하는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 앞에서 거대한 욕망이란 신기루 같은 것이며, 평범하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동 없는 세상에 병원 다큐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잊고 있던 자신의 실체와 다시 만남을 주선한다는 점이다. 만일 당신이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이 당신과 당신의 실체가 만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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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커피 프린스∼’, ‘경성스캔들’, ‘메대공’

‘커피 프린스 1호점’, ‘경성스캔들’, ‘메리 대구 공방전’의 드라마 구도는 어딘지 익숙한 것들이다. 우리가 보았던 멜로드라마나 트렌디 드라마, 심지어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가졌던 구도들. 시청자들이 이제는 식상하다며 외면했던 바로 그 틀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들이 과거의 그것들과 전혀 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 드라마들은 전혀 식상하지 않고 오히려 참신하며 그 참신함을 넘어서 무언가 새로운 드라마 트렌드의 탄생을 예상하게 만든다. 그 키워드는 바로 만화적인 감수성이다.

만화적 감수성의 시도는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풀 하우스’와 ‘궁’에서 시도되었고, ‘환상의 커플’에서 만화 원작이 아닌 드라마 자체로의 시도를 성공리에 끝낸 바 있다. ‘환상의 커플’은 더 이상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수식어가 ‘황당하고 허술하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재미있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3차원 드라마 세상에 나온 갑작스런 4차원 드라마의 출현이었다. 지금처럼 같은 시기에 비슷한 경향의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비현실적이라고? 효과는 만점
만화적인 장치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카메라 연출이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화면 속에 넣어지는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을 담은 자막들은, 만화책의 프레임과 말 풍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참신하게 다가올 것이다. 드라마에서라면 조금은 거북할 법도 한 캐릭터들의 과잉행동은 그러나 만화적인 앵글과 편집으로 경쾌하게 변신한다. 갑자기 본 드라마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상 속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 역시 바로 그런 만화적 감수성의 룰 안에서 용인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만화적 감수성은 단지 카메라 연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캐릭터의 설정이라든가, 이야기 전개에까지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메리 대구 공방전’에서 대구의 아버지인 풍운도사(이영하)의 캐릭터 소개는 말 그대로 만화적 설명이라 할 정도로 우화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경성스캔들’에서 모던 뽀이 선우완(강지환)의 캐릭터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사용된 장치 역시, 그를 따르는 지라시 출판사의 만화 같은 캐릭터들의 만화 같은 행동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커피 프린스 1호점’ 역시 최한결(공유)이 남장여자인 고은찬(윤은혜)을 애인처럼 보여 선보는 여자들을 따돌리는 설정과 장면들은 바로 그 만화적 장치를 활용했다. 그 과정을 통해 그 둘의 관계가 이어질 거라는 점에서 이 만화적 장치는 비현실적이지만 효과적이다.

이러한 드라마 속 만화적 장치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반드시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대체로 세대로 나뉘어진다. 만화적 표현을 실생활처럼 받아들이면서 살아온 젊은 세대들은 그 장면들에서 편안한 익숙함을 발견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들은 오히려 낯설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마치 인터넷 소설에 대한 세대  간의 반응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인터넷 소설이 가진 가벼움을 기성세대는 경박함으로 말하는 반면 젊은 세대들은 상큼 발랄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공교롭게도 세 편 모두 인터넷 소설(한심남녀공방전, 커피 프린스 1호점), 로맨스 소설(경성애사)이 원작이다. 어떻게 대중소설이 만화적 감수성을 갖고 있는가는 그 소설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문학이 가진 완고한 문학적 틀에 반항하기라도 하듯 이들 소설들은 영상의 세례를 받고 태어났다. 그 영상이란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만화도 포함된다. 글이 가진 문학적 묘미보다는, 영상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로서의 글을 갖고 있기에 이들 작품들은 만화적 감수성과 교류한다.

질척이던 멜로를 구원한 만화적 감수성의 힘
새로운 드라마 트렌드의 탄생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이들 드라마들이 만화를 캐스팅하면서 분명히 얻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참신한 스토리다. 과거의 사랑타령(?)을 담은 멜로 드라마나 트렌디 드라마들은 거의 빤한 스토리 속에 안주하고 있었던 반면, 이들 드라마들은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담은 스토리를 제공한다.

‘메리 대구 공방전’은 백수인 청년들을 내세워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기본적으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기에 제목에서 암시하듯 커피 프린스 1호점을 세우고 키워나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얹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경성 스캔들’은 일제시대라는 무게감 때문에 다루지 못했던 그 시대의 연애를 경쾌하게 다루면서도 또 한편으로 당대 젊은이들의 아픔을 놓치지 않는다. 만화적 상상력의 자유로움은 리얼리티가 가진 무게를 벗어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드라마가 만화적 장치를 가져오면서 그간 멜로 드라마들이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갖지 못했던 감정의 균형감각을 획득했다는 점이다. 식상한 최루성 멜로 드라마와 트렌디 드라마들이 일시에 가라앉으면서 드라마가 고민해야했던 것은 앞으로 드라마 속에 어떻게 사랑 이야기를 넣느냐는 것이었다.

통속화되고 공식화된 멜로 드라마들이 만들어놓은 ‘사랑타령’으로 일축되는 현실 앞에서, 드라마의 재미 중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랑이야기의 배치는 첨예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하얀거탑’ 같은 사랑이야기가 없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탄생은 마치 ‘사랑타령’을 드라마의 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으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만화는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지나친 심각함에 빠지지 않으면서 하고자하는 어떤 메시지로 접근해간다. 아무리 생과 사가 오가는 심각한 장면이라도 만화 속에서는 이른바 희화화된 캐릭터의 얼굴이 등장하면서 적절한 감정의 균형상태를 만들어낸다. 만화를 통해 가져온 이 균형감각으로 인해, 이제 드라마들은 과거처럼 질척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 느닷없이 경쾌한 시그널이 삽입되고(경성스캔들), 속내를 내내 숨기며 시종일관 웃기고 있다가 느닷없이 눈물 한 방울로 찡하게 만들며(메리 대구 공방전), 당장 올려줄 전세금이 없으면 쫓겨나야 할 상황을 오히려 웃음의 원천으로 바꿔버리는(카페 프린스 1호점) 힘은 바로 그 만화적 장치에서 나온다.

지금 등장한 이러한 드라마가 하나의 트렌드를 이룰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같은 시기에 등장했을 뿐인지는 현재로선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드라마의 탄생이 식상한 멜로 드라마와 트렌디 드라마가 해놓은 드라마의 퇴행을 다시 진화의 방향으로 돌려놓은 공이 있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멜로를 포함한 사랑이야기는 드라마가 배제하기 어려운 소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멜로를 무조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로 식상하지 않은 멜로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돈 vs 사람, 누가 이길까

돈 앞에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신문을 펼치기만 하면 어느 면에서나 그 글자들 이면에 흐르는 돈 냄새를 맡게 되는 시대, 돈에 웃고 돈에 우는 물신화된 세태를 사채업자라는 직업을 통해 극화한 ‘쩐의 전쟁’은 이제 이 본격적인 질문에 근접해가고 있다. ‘쩐의 전쟁’이란 제목은 표면적으로 보면 금나라(박신양)로 대변되는 ‘착한 쩐’과 하우성(신동욱)으로 대변되는 ‘악한 쩐’의 전쟁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돈과 사람의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칼바람이 도는 드라마 속에서 탈속한 듯한 인물로 그려지는 독고철(신구)마저, “사람은 돈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돈의 위력은 사람으로서는 넘어서지 못할 산처럼 보인다. 주인공 금나라 역시 마찬가지. 마동포의 지하금고에 숨겨진 돈 보물을 얻게되자 보이지 않는 돈의 욕망이 그를 잠식해 들어간다. ‘제일 무서운 것이 돈 중독’이라는 독고철의 말처럼, 금나라 역시 저 스스로의 돈 중독이란 무덤을 파고 들어간 마동포의 욕망을 느낀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 ‘돈의 노예’가 되느냐 ‘돈의 주인’이 되느냐를 두고 갈등한다. 금나라의 든든한 ‘담보(?)’인 서주희(박진희) 또한 거액의 돈 앞에 양심을 버릴 결심까지 하게 된다(물론 무위에 끝났지만). 금나라의 친구인 철수는 가족을 위해서라는 핑계 앞에 우정을 저버린다(이것도 역시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돈에 대해 아쉬울 게 없이 자란 이차연(김정화) 역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불량채권 해결을 위해 악명 높은 불량처리반(?)을 부른다.

이야기는 천사리 마을로 장소를 옮기면서 좀더 대결구도를 본격화시킨다. 독고철이 어려운 사람들의 일수를 받아 살 터전을 마련한, 천사리 마을은 독고철의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적인 사랑이 좀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화된 공간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하우성이 내놓는 돈의 유혹 앞에 쉽게 흔들린다. “난 실패한 부자다.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어도 사랑은 안 그렇거든.” 천사리 마을과 그 마을에 살던 독고철의 옛사랑 이야기와 오버랩되면서 드라마는 금나라와 서주희의 사랑을 엮어낸다.

초반부 욕망의 질주에서 드라마는 이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꿈틀대는 돈에 대한 욕망 대신 멜로 구도가 본격화되고, 천사리라는 환타지적인 공간이 등장하면서 조금은 도식적이고 교훈적인 결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초반부의 긴장감을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마동포(이원종)는 병원신세를 지고 있어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독고철의 격언 같은 문구들은 초창기의 그것과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초반부의 경구들에는 ‘돈 벌기’에 대한 노하우를 담고 있었지만 이젠 ‘돈 제대로 쓰기’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내가 부자가 된 건 많은 가난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진실을 말하는 독고철의 이야기가 어딘지 나와는 동떨어진 교훈적인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혹 우리의 관심은 ‘부자’나 ‘돈 벌기’에 있었지 ‘가난한 사람’이나 ‘돈 제대로 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돈도 있어야 가난한 사람도 돌아보고, 제대로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돈이 먼저인가, 아니면 돈에 대한 곧은 생각이 먼저인가 하는 고민 앞에서 우리 역시 돈과 사람이 대결하는 ‘쩐의 전쟁’의 한가운데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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