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웃겨서 슬픈 ‘메리 대구 공방전’

먼지 가득하고 어두침침한 만화가게에서 대낮부터 무협지나 만화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 청춘은 속도 그렇게 유쾌할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메리 대구 공방전’이 그려내는 청년실업의 풍경이 그렇다. 겉으로 보면 시종일관 키득거리게 만들지만 한 꺼풀만 벗겨내 보면 그 처절한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느낌의 청춘풍경.

무협작가를 꿈꾸는 강대구(지현우)와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황메리(이하나). 하지만 그들이 가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그들은 고개 숙여 눈물이나 흘리는 찌질한 청춘들이 아니다. 이유는 하나. 꿈이 있으니까. 꿈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까. 이것이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사회문제를 다룬 이 드라마가 한없이 가볍게 다뤄질 수 있는 근거다.

그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꿈이라는 진통제이자 자양강장제이며 때론 젊음만이 갖는 치유제를 맞으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모두들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라 하지만 그들에게 꿈은 영혼이다. 그러니 강대구가 이소란(왕빛나)의 집에서 보디가드에 자서전 작가로 일하는 것에, 혹은 황메리가 돈을 받고 지방 무대(사실은 사기꾼들이었지만)에 서려는 것에, 그들은 서로 “영혼을 팔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꿈꾸는 걸 가로막는 건 돈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이다. 번듯한 직장과 번듯한 집, 빳빳한 지폐가 가득한 지갑,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그리고 심지어는 돈으로 만들어내는 외모까지, 돈 없는 그들 앞에 놓여진 현실은 암담한 것이다. 피자 한 판을 공짜로 먹으려 동네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쿠폰을 모으고, 공짜로 고기를 먹기 위해 뽀뽀를 하며, 동네 구멍가게 아르바이트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들은 처절하다.

“내 꿈은 충치야. 품고 있어도 아프고 빼도 아프다.” 황메리의 이 말은 꿈의 달콤함과 현실의 처절함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그것도 지금 같은 현실에서는 더더욱) 청춘들의 고통을 말해준다. 그런 꿈을 먹고사는 상처투성이 천연기념물 청춘들이 서로 만났으니 어찌 통하지 않을까. 강대구에게 영감을 주는 그녀나, 꿈을 포기하려는 황메리에게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게 싫어진 거야”라고 말하는 그는,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동료의식은 사랑으로 커나간다.

한편 ‘메리 대구 공방전’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윗세대들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캐릭터는 꿈을 버리고 돈을 좇는 이세도(이기열)라는 인물. 돈이면 뭐든 된다고 믿는 황금만능주의의 표상처럼 보이는 이세도는 그러나 자기만의 공간에 향수처럼 삐에로 복장을 놓아두는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 설정은 꿈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하는 메리와 대구에게 마치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는 효과를 준다. 꿈을 버려 얻은 돈으로 꿈을 꾸지 못하는 신세가 된 이세도를 통해, 드라마는 현실만을 좇는 세태와 그렇게 청춘들을 몰아가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건드린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 모든 메시지가 철저한 반어법으로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모두 애써 웃고 씩씩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겁고 질척해지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위장전술이다. 그저 쿡쿡 웃으며 가볍게 귀여운 캐릭터들의 툭탁거림을 보고 있다보면 아주 가끔씩 보이는 캐릭터들의 속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취해지고 있는 만화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취하고 있는 이런 태도는, 실제 현실의 청춘들이 갑갑한 사회 현실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도대체 이제 막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청춘들에게 그 대가로 꿈을 버리라고 하는 사회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애써 자학하지 않고 꿋꿋이 웃으면서 “그래도 난 꿈이 있어!”하고 당당하게 외치는 방법 외에 말이다.

시종일관 명랑 쾌활해 보이던 메리와 대구는 문득 상대방에게 눈물을 보였을 때, 그래서 속마음을 들켰을 때, 그것을 무마해주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오늘밤에 웃으면 당신 끝장이야!” 그 명랑하면서도 상대방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말은 또한 웃다가 울게 만드는 이 드라마에 공감하는 시청자들에게 드라마가 던지는 격려처럼 들린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이 시대의 부자와 가난한 자

물론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현실이라는 기본 전제가 없는 한, 드라마가 가진 공감의 틀은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자를 동경한다거나 좋은 배경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은 그 사회가 가진 현실의 한 측면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드라마들이 잡아내는 현실은 과거와 같은 그런 막연한 현실, 혹은 천편일률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구체적인 현실이다. 마치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질 만한 사회적 이슈를 담은 소재들이 드라마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쩐의 전쟁’, 개인부채 문제를 건드리다
우리 사회가 가진 개인부채와 파산의 문제를 사채업자라는 구체적인 직업을 통해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는 ‘쩐의 전쟁’, 겉으로 보기엔 백수들의 희망가처럼 보이지만 밑바닥에 청년실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메리 대구 공방전’, 그리고 우리의 암담한 교육현실은 물론 천민자본주의가 가진 천박한 현실 등 가장 첨예한 지역불균형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강남엄마 따라잡기’가 그것이다.

‘쩐의 전쟁’은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사채 대부업의 폐해에 직격탄을 날린다. 돈에 웃고 돈에 우는 세상을 정작 드라마는 만화처럼 그려내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현실의 반응은 뜨겁다. 연예인들의 잇따른 대부업체 광고 중단은 물론이고 그로 인해 급격히 떨어진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금리인하까지 고려하게 된 대부업체들의 상황은 이 드라마가 건드린 현실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메리 대구 공방전’, 청년실업문제를 다루다
‘메리 대구 공방전’은 장기화되고 있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다룬다. 3번 정도 회사의 문을 두드리면 입사할 수 있었던 70년대의 상황은 이제 아련한 향수가 됐다. 지금은 심지어 300번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 앞에 청년들은 절망하고 있는 상황이다. 메리(이하나)와 대구(지현우)는 바로 그들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좀더 우회적으로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메리와 대구가 처한 사회현실은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보다 드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는 꿈과 희망’의 이야기로 발전시킨다. 이것은 드라마적으로만 보면 좀더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시도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다루는 현실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시청률 상승 같은 즉각적인 반응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강남엄마 따라잡기’, 교육 불평등 문제를 다루다
새로 시작한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이 모든 사회문제의 총체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천민자본주의가 가진 경박한 세태는 물론이고, 강남강북으로 나누어진 지역 불균형의 문제, 입시위주 교육정책이 양산하는 사회문제가 들어 있다. 청년실업과 사채업의 문제가 이 교육문제, 경제적 불균형의 문제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고 그 지역에서 공부한 결과가 성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성공과 실패가 이렇게 부의 세습과 직결된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세 드라마가 결국 다루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돈의 문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 물론 부자는 모두 잘못됐고 가난한자는 모두 옳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 드라마가 그려내는 부자들의 모습이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 제대로 쓰는 이가 없기에 비판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가난한 자라는 점이고, 그들이 이런 사회적 문제 앞에 취하는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힘겹게 만든 이 돈을 마치 경멸하는 것처럼 대하지만 결국 그 욕망 앞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만큼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물림의 틀이 견고하다는 방증이며, 그만큼 우리에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그 견고함을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것이 이들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평면적이기보다는 강력한 욕망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이유이며, 또한 이들 돈의 현실을 다루는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남자의 여자’, 불륜 소재 한계 넘었다

‘내 남자의 여자’가 가진 스토리를 보면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전개를 보여준다. 친구와 남편이 바람을 피고, 그 바람 핀 것이 발각되고, 결국 살림까지 따로 차리고 이혼했는데, 정작 친구와 남편은 파경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 놀라운 반전도 없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불륜이란 소재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면서도 이 드라마의 어떤 점이 도대체 시청자들을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과거의 불륜드라마들은 대부분 가부장적인 남성이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불륜도 남자가 저지르고, 그 불륜을 저지른 남자와 여자가 파멸에 이르는 권선징악적 결론에 다다르며, 배신당했던 조강지처는 멋진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는 식의 끝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주부들의 시각을 대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환타지라는 점에서 고스란히 가부장적 체계 속으로 귀납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대신 ‘내 남자의 여자’는 여자가 주도적인 불륜드라마이다. 준표(김상중)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반면, 지수(배종옥)와 화영(김희애)은 주도적으로 자기 인생을 그려나간다. 불륜을 저지르고(화영), 불륜에 아파하다가 자립의 길을 걸어가는(지수) 이 둘은 마치 대결구도처럼 보이지만 순간순간 여자라는 입장을 통해 서로를 소통한다. 이것은 달라진 세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불륜이라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여자들의 삶에 천착한 결과이기도 하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리하여 이 드라마는 불륜이 갖는 환타지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불륜 속에 깃든 사회현실 같은 것들을 건드린다. 결혼이라는 틀 속에 엮어지게 되는 수많은 관계들이 주는 억압을 들춰내는 것이다. 그 관계의 억압은 화영을 불륜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그 불륜 또한 성공하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다. 불륜에 피해를 본 지수가 불륜을 저지른 화영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똑같이 관계의 억압을 받았던 여자라는 동질감이 주는 어떤 유대감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궁금해했던 결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 드라마가 깨려고 하는 것은 불륜,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결혼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통념과 부딪쳐 상처 입은 것은 이 세 남녀지만, 적어도 그들이 다시 결혼이란 틀로 들어오지 않고 각자 홀로 서서 “이게 더 편하다”고 말하는 단계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불륜이란 소재를 선택했지만 표피적인 접근이 아닌 진지함에 도달한 것은 확실한 이 드라마의 성과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그간 ‘불륜’이란 소재를 죄악시하게 만들었던 여타의 불륜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따라서 “불륜도 다루기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 김수현 작가의 말은 실증된 셈이다. 이것은 아무리 진부하고 식상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접근방식에 따라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이런 불륜드라마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토록 재주 많은 작가가 왜 하필 불륜이란 소재를 다루었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도 다양한 소재에 대한 갈증이 ‘성공한 불륜드라마’보다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화영이 보여주는 ‘내 남자의 여자’의 진실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지수(배종옥)만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 드라마는 자극과 신파로만 치닫는 한심한 불륜드라마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이 드라마는 제목처럼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지수의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화영(김희애)과 그들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준표(김상중)가 그 나머지 주인공들이다. 준표야 그렇다 쳐도 화영이란 캐릭터를 그저 멀쩡한 친구 남편 꼬드긴 ‘쳐죽일’ 불륜녀로만 생각하는 건 이 드라마의 나머지 축을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참 사랑하기 어려운 여자, 하지만 이해는 되는 화영이란 캐릭터가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해주는 진실은 무엇일까.

어떻게 지수는 화영을 이해하는 걸까
화영에 대해 지수는 “딱하다”고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자기 남편과 바람이 나 가정까지 버리게 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그녀들의 관계를 준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받기만 했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줘본 기억이 별로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다르다. 입장이 서로를 반대쪽에 세우게 했을 뿐이지 그녀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몸을 던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지수는 20년 간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화영은 준표를 얻기 위해 1년 동안 겪을 수 있는 모든 수모를 겪었다. 이 공유점에서 지수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을 갖게 된다.

준표가 화영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지수에게 “당신네 우정은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지수는 ‘경민의 엄마로서 고맙다’고 말한다. 화영을 절망에 빠뜨린 준표의 ‘아이거부’를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엄마로서는 또한 고맙기도 하다는 것. 이런 상반된 감정이 가능한 것은 지수에게도 이른바 관계의 역할이라는 것이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자로서 20년 동안 헌신한 대가로 돌아온 고통을 겪은 지수는, 1년 동안 자신을 버려가며 얻으려 했던 사랑이 무의미해진 화영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된다. 지수의 마음은, 또한 시청자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는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화영이란 캐릭터에 문득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수가 이해하고, 시청자들이 안됐다고 생각하는 화영의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관계의 거미줄에 걸린 화영
화영은 관계라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다. 그녀가 미국사회에서 생활하다 국내로 들어왔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토록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가족과 사회란 관계에 진저리를 칠만 할 것이다. 그녀 자신의 미국생활조차도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이란 개인적 존재는 없었던 시간들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한 남자에게 빠져들고 그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일깨우는 것이었기에 앞뒤 가리지 않는 절실함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것, 아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있다. 준표라는 남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관계의 거미줄들이 쳐져 있었다는 것. 화영은 먼저 친구인 지수와 연결된 거미줄을 잘라야 했고, 지수의 언니, 은수(하유미)와 아들 경민, 그리고 준표가 그다지도 끊기 어렵게 생각했던 부모와의 거미줄조차 잘라야 했다. 그렇게 준표를 거미줄로부터 떼어내어 둘만의 공간으로 오자, 이제는 준표의 속에 남아있는 거미줄의 기억과 습관이 그녀를 괴롭힌다. 준표는 지수의 밥에 끌리고, 경민에게 끌리고, 사회적 관계, 부자지간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끌린다.

문제는 준표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화영은 지수 같은 아버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화영을 옭아매고 있는 거미줄들은 그 둘의 관계를 자꾸만 뒤틀어버린다. 1년 동안 그녀가 해온 일은 바로 그 복잡한 관계의 거미줄들과의 사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자식을 원치 않는 준표는 그간의 관계를 부부관계가 아닌 정부관계로 돌려놓고, 그녀가 발견한 처리되지 않은 준표와 지수의 이혼서류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준표 속에 있는 관계의 거미줄은 여전히 튼튼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 게다가 결혼을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여기는 사회적 풍토와 그 풍토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준표에 화영은 더 이상 자신이 없어진다.

화영의 분노가 이해되는 것은
“내가 겁나는 건 당신부모도 당신도 아냐. 바로 내 자신이야. 조심해. 잠잘 때도. 내가 당신 목을 조를 지도 몰라. 밥에도 독을 탈지도 몰라.” 화영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녀가 겪었던 “모욕, 수치, 경멸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들어버린” 준표 때문이다. 그녀는 “내 사랑, 내 선택, 당신이란 남자, 당신 사랑의 의미를 찾는 중”이라 말한다. 살면서 보상해주겠다는 준표의 말에 그것은 “오히려 지긋지긋한 올가미가 아닐까”하고 쏘아댄다. 준표가 원하는 것은 영원히 친구처럼 연인처럼 사는 것이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그 관계의 거미줄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화영이 말한다. “당신 사랑은 비겁해. 아주 아주 비겁해.”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치 지수의 주부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준표의 사고를 깨버리는 화영의 존재다. “나를 지수로 만들려고 하는 게 화가 나. 나 자신도 지수처럼 되가는 거 싫어. 아내는 아내지 종이 아냐. 밥해주기 싫은 날이 있어. 그런데 해줬어. 그래서 지수가 되가는 거 같애.” 화영은 지수 같은 천사표 아내의 삶을 당연시 생각하는 이 시대 남성들의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냄비를 내주며 해장국을 사다달라고 한다. 준표 같은 남자가 평생 해보지 않았을 그 일을.

화영이 지수와 전화통화를 하는 내용은 한국이란 사회에서 결혼해 살아가는 여자들이 새로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당해야하는 관계의 부당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이해 받지 못하면서 왜 이해해야하는 지 모르겠어. 네가 경탄스러워.” “나는 모자라잖아. 모자라서 그렇겠지.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 별거 아니잖아. 자꾸 파면 좋을 거 없잖아.” 그녀들이 공유하는 이 부당한 대접은 과거 가부장적 가족의 틀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관계와 서열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가족의 틀. 김수현 작가는 이 불륜극을 통해 바로 그 틀의 견고함과 그 안에서 개인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불륜이란 두 가지 힘의 충돌을 말한다. 그 하나는 사회가 가진 규범, 틀의 힘이고, 또 하나는 그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이다. 김수현 작가는 이 두 힘의 충돌을 그리면서 그 화학작용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관계의 거미줄들을 잡아낸다. 비굴하고 치사하게 만드는 그 관계들 속에서 결국 그녀들이 얻은 것은, 관계 속에 매몰된 삶이 아닌 자신의 당당한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서 마주보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극에서 시작해 심리극으로 치닫다가 말미에 사회극의 뉘앙스를 풍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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