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사랑이 섞인 그 오묘한 맛, ‘경성스캔들’

시대가 달라지면서 입맛도 달라지듯 드라마의 맛도 다양해지고 있다. 비빔밥하면 고추장에 나물, 참기름, 계란프라이를 떠올리던 건 과거지사다. 이제 비빔밥은 새싹, 한치, 날치알 등등 넣을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넣어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드라마도 마찬가지. 역사라는 용기에는 퓨전된 상큼한 맛의 현대적 멜로가 복고풍의 아릿한 향수와 섞이고, 감칠맛 나는 설정과 캐릭터 대사들이 양념으로 들어가 독특한 맛을 낸다. 그 정점에 있는 드라마라는 음식은 바로 ‘경성스캔들’이다. 만일 퓨전이 뭔지 알고 싶다면 이 드라마의 맛을 살짝 보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네가 혁명을 가르쳐 줘 난 사랑을 가르쳐 줄께
“네가 나한테 혁명이 뭔지 가르쳐 줘. 그럼 내가 너한테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줄께.” 급기야 바람둥이 선우완(강지환)이 나여경(한지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들어 있는 단어들이 예사롭지 않다. 혁명과 사랑이라니.

과거라면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았을 일제시대라는 배경에 멜로 라인을 퓨전한 이 독특한 비빔밥은 의외로 참 맛이 좋다. 그것이 그냥 새로운 맛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달라진 시청자들의 입맛을 정확하게 맞춰 이뤄낸 퓨전이기에 그 맛이 좋다는 것이다.

혁명과 사랑이 동떨어진 단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상주의가 가진 낭만주의의 속성은 이 두 단어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밀착되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럼에도 여기에 간극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일제시대를 다루던 여타의 작품들 속의 사랑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이다. 시대의 무게감을 버텨내지 못해 사랑보다는 혁명이 더 앞서있었던 것.

하지만 ‘경성스캔들’은 다르다. 사랑을 다루되 가볍게 건드린다. 그리자 혁명과 사랑은 선우완의 대사처럼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등가의 힘을 갖는다. 마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두 가지 버전처럼 진행된, ‘조마자(조선마지막여자) 모던걸 만들기’와 ‘바람둥이 혁명남 만들기’같은 이 드라마의 핵심 재미 요소는 이런 힘 배분으로 인해 가능했던 시퀀스들이다.

과거의 가치와 현재의 가치를 버무리다
이러한 ‘경성스캔들’의 시도는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시대상을 너무 가볍게 건드려 공감은커녕 반발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이 드라마는 신구세대 시청자들이 함께 앉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드라마가 된다.

일제시대가 주는 과거적 배경에 대한 향수는, 경쾌한 댄스홀의 음악들과 중절모로 대변되는 멋쟁이 신사들, 구어체적인 연극적 대사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유교적 가치를 지닌 캐릭터들이 버무려지면서 만들어진다. 무엇보다도 그 향수의 정수가 되는 것은 이념이다. 지금 같은 이념 없는 시대에, 무언가에 대항할 수 있는 이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적 감각의 가벼운 멜로는 만화 같은 장르적 장치들을 활용하면서 젊은 세대들의 감성에 조우한다. 댄스홀이라는 공간에서의 집단댄스 장면은 마치 뮤지컬 같은 기분을 자아내게 만들며, 선우완이 근무하는 지라시 출판사의 세 남자 김탁구(강남길), 신세기(허정민), 왕골(고명환)은 마치 고대희극의 유쾌한 코러스 같은 역할처럼 활용된다.

그리고 이 과거와 현재는 선우완과 나여경이라는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멜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즉 선우완은 현재적 가치를, 나여경은 과거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그 두 가치들은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며, 그러기에 그 둘은 서로에게 그 가치를 일깨우는 중이다.

일제시대라는 무거움과 무채색으로 상징되던 시대에, 가벼움과 화려함으로 부활한 혁명과 사랑은 그렇게 이 한 드라마에서 만나게 되었다. 과거를 다루었으되 현재의 가치가 번득이고, 그럼에도 과거의 가치를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이어가는 ‘경성스캔들’. 그 퓨전의 맛이 오묘한 이유다.

서글픈 치맛바람, ‘강남엄마 따라잡기’

SBS 월화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는 왜 굳이 ‘강남엄마’라고 구체적으로 지칭했을까. 제목이 선정적이긴 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 강남에 사는 엄마들은 그저 좀 부유한 엄마들이었지 이 드라마가 만들어낸 신조어처럼 ‘강남엄마’라는 테두리로 구획되진 않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강남의 엄마들이 다 드라마가 묘사하는 것처럼 자식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휘날리진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실재 강남의 엄마들이 그렇지 않다면 전혀 현실성 없는 이 드라마에 요지부동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 할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왠지 마음 한 구석을 울리는 데가 있다. 왜 그럴까.

그녀가 강남엄마가 되려한 까닭
그것은 ‘강남엄마’라는 지칭이 그럭저럭 이해되는 현 교육의 문제와 여기에 미묘하게 얽혀있는 빈부격차의 문제가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강남이란 지명의 의미는 그저 지시적인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8학군으로 상징되는 교육열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동산 과열현상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그저 강남의 문제만이 아니고 강북 혹은 지방에서도 소위 명문이라는 학교들 주변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니 ‘강남엄마’는 그런 비뚤어진 교육열과 부동산으로 대변되는 소위 부유층의 특권의식을 가진 엄마들을 표상할 뿐 실제 강남의 엄마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의 ‘강남엄마’가 되기 위해서 현민주(하희라)는 “자식을 위해 미친 년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원조강남엄마’인 윤수미(임성민)의 도발적인 말 때문이다.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란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민주를 더 눈 뒤집히게 만드는 것은 윤수미와 시댁식구들이 보이는 강남으로 대변되는 소위 가진 자의 특권의식이다. “지들이 무슨 수로 여길 와”하는 그녀들의 태도는 현민주로 하여금 진짜 ‘미친 년’처럼 자존심도 뭉개고 수모를 참아가며 강남으로 이사가고 말겠다는 오기를 만든다.

엄마 vs 학습매니저
하지만 이렇게 오기가 생기면서부터 그것은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의 욕망이 되어버린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소위 강남엄마들은 엄마라기보다는 ‘학습매니저’다. 아이들의 교육 프로그램을 짜고 그 일정에 맞춰 차로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매니저들. 그래서일까. 드라마 속 아이들은 왠지 엄마들의 도움을 받는다기보다는 엄마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질투에서 비롯됐고, 그러다 차츰 남의 자식과 비교하기 시작했으며, 상대방을 욕하다가 결국 따라하게 됐고, 점점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현민주가 겪는 욕망의 역전은 이 시대 엄마들이 엄청난 사교육의 부담 속에서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현민주가 말한 ‘자식을 위해서’라는 변명 속에는, 실은 자신은 돈이 없어 못한 공부 자식은 원 없이 시키겠다는 자신의 욕망이 숨어 있다. 진우의 좋은 엄마였던 현민주는 점점 학습매니저가 되어간다. 현민주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 원조강남엄마라는 윤수미의 상황은 더 비극적이다. 현재 그녀의 존재는 오로지 아이들의 학습매니저로서만 증명된다. 바람 피는 남편조차 아랑곳 않고, 아버지 생일에 아이의 특강을 고집하는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다. 그녀는 한 남자의 여자도 아니고 아이들의 엄마도 아니다.

무엇이 엄마이길 포기하게 만드나
학부모의 이야기와 함께 드라마 한 축의 이야기를 차지하는 서상원(유준상)으로 대변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이 교육과 부의 문제가 구조적이라는 걸 증명해준다. 명문대 나와서 사립중학교의 선생님 혹은 유명 학원강사가 되어 돈을 벌겠다는 꿈을 꾸는 서상원이란 캐릭터는 결국 강남으로 표상되는 부유층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히 자가 발전되는 이 사회의 구조를 보여준다. 교육이 부를 낳고 부는 똑같은 교육조건을 강요하는 순환구조가 반복된다. 이것은 마치 명문이 부동산 과열을 낳고 그 부동산 과열로 인한 부가 다시 교육열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 속에서 윤수미 같은 ‘강남엄마’이든 현민주 같은 ‘강남엄마’를 따라잡고 싶은 엄마이든, 아니면 그 가족들이든 모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가 엄마이길 포기하고 학습매너저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아이들이 아이들이길 포기하고 학습기계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강남의 엄마들도 그저 엄마라 불리지 않고 굳이 ‘강남엄마’라 불리는 이 사회는 불행하다. 그래서일까. ‘강남엄마 따라잡기’를 보면서 가끔씩 그 치맛바람의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은.

막돼먹은 세상, 여자로 산다는 것

그녀는 이름이 이영애(김현숙)다. 하지만 그녀는 이 예쁜 이름이 싫다.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거나, 남자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름과 매칭이 되지 않는 얼굴과 몸매를 본 사람들의 불쾌한 반응이 싫기 때문. 사람들은 이영애란 이름에서 “저로 인해 모든 것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하고 묻는 장금이를 떠올리며 기꺼이 “얼마를 더 다짐받으셔야 나와 함께 떠나시겠습니까?”하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를 보는 순간, 그들은 입을 삐죽거린다. 영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중이다. “너나 잘 하세요!”

‘막돼먹은 영애씨(금요일 밤 11시 tvN방영)’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 드라마는 막돼먹은 세상을 그린다. 영애씨가 대면하는 세상은 버스 치한이 오히려 “당신 같은 사람 엉덩이를 미쳤다고 만져!”하며 소리치는 세상이고, 멀쩡한 이름이 있지만 늘 ‘덩어리’라 부르며, 여직원이 앞에 있는데도 포르노를 보면서 “같이 볼래? 배워둬야 하잖아”하는 성폭력과 성희롱이 일상화된 회사이다. 이런 막돼먹은 세상을 그려내는데(그려낸다기보다는 고발하는데) 필요한 것은 나긋나긋한 드라마라는 안전한 틀이 아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다큐 드라마라는 새로운 형식을 빌어 영애가 대면한 세상 속으로 시청자들을 끌고 들어간다.

형식은 tvN이라는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케이블 채널 속의 르뽀 프로그램을 보는 듯 하다. 시작부터 모자이크 처리된 영애씨가 음성변조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은 ‘리얼스토리 묘’의 한 장면 같고, 영애씨의 동생 영채(정다혜)가 배신한 남자친구를 좇아 비디오방을 급습하는 장면은 ‘독고영재의 현장르뽀 스캔들’을 보는 것 같다. 곳곳에 ‘인간극장’을 연상케 삽입되는 내레이션은 드라마라는 환타지로 들어가려는 시청자들의 발목을 잡아 다시 현실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다큐 드라마는 기존 드라마들이 해온 관습적인 장면들을 해체하는 기능까지 수행한다. 그런 드라마들은 돈 많은 남자와 잘빠진 여자가 만나 아옹다옹 대는 모습들을 보여줘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를 유포한 혐의가 짙지 않은가. 그러니 이 다큐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거침없이 늘어진 뱃살을 보여주고, 인정사정 없이 음식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런 비현실적 이미지를 만들어놓은 트렌디 드라마들에 대한 공격이아닐 수 없다. 사실 드라마 속 주인공들도 집으로 돌아오면 맨 얼굴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화장실에서는 자연인이 된다.

이 드라마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어글리 베티’ 같은 드라마와 같은 류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막돼먹은 영애씨’는 ‘못난 여자의 성공기나 연애담’같은 환타지를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리얼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환타지를 깨는 지점에서 드라마는 가치를 발한다. 영애씨의 고군분투가 안타까우면서도 힘을 주고 싶은 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저 트렌디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욕망하는 왕자님이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삶이며, 기본적인 예의라는 점 때문이다. 막돼먹은 건 영애씨가 아니라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세상이다.

해체된 가족이 보여준 새로운 가족의 희망

오랜만에 실컷 웃어보았고 오랜만에 실컷 감동을 받았다. 8개월 간 시청자들을 웃기고 울린 ‘거침없이 하이킥’에 쏟아지는 찬사들이다. 그 방영시간대가 좀체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일일드라마들이 떡 버티고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그 드라마들과 거침없는 대결을 벌인 이 시트콤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일 가족드라마가 가진 관성적인 시청과는 차별화 된 ‘거침없이 하이킥’. 거침없는 그들이 하이킥한 것은 무엇일까.

캐릭터, 세대 간의 벽을 하이킥하다
이 시트콤의 주 시청층은 30대 이하의 젊은 층. 특히 10대 시청층은 5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일드라마가 가진 40대 이상의 시청층과는 사뭇 다른 구조인 셈이다. 일일드라마와 똑같이 가족을 다루고 있지만 이렇게 젊은 시청층을 TV앞에 끌어 모을 수 있었던 힘은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이 시트콤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이 시트콤이 처음부터 하이킥한 대상은 일일드라마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다.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집안의 최고 어르신의 이미지는 이 시트콤으로 들어와 ‘야동’, ‘굴욕’, ‘악플’, ‘애교’ 같은 젊은 세대의 기호들과 만나면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야동순재와 애교문희 같은 4자 캐릭터가 탄생하면서 어르신은 고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무언가 좀더 젊은 세대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캐릭터로 변신했다. 그 분들의 거침없는 무너짐을 보며 폭소를 터뜨리는 순간, 그 폭소의 반향이 다음날 인터넷을 통해 회자되는 순간, 두터워만 보였던 세대 간의 벽은 쉽게 허물어져 내렸다.

이것은 가부장적인 옛 가족의 형태가 무너지고 점점 수평적으로 파편화되어가는 현재의 가족상을 반영한다. 캐릭터들은 과거의 수직적 관계들을 모두 해체해 재구성해 놓는다. 고개 숙인 가장 식신준하(정준하), 거침없이 OK를 할 줄 아는 당당한 커리어우먼 OK해미(박해미)는 부부관계의 역전을, 동생이지만 형 같은 완소윤호(정일우)와 형이지만 동생 같은 카리스마 민호(김혜성)는 형제관계의 역전을, OK해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애교문희의 모습은 고부관계의 역전을 그려낸다. 이 역전을 통해 드라마는 거침없이 그간의 권력적이고 수직적인 가족관계를 해체한다.

거칠 것 없는 패러디, 탈 장르
달라진 가족관계를 좀더 효과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시트콤은 패러디와 탈 장르 같은 연출기법들을 사용했다. 패러디는 시트콤의 주요한 웃음의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거침없이 하이킥’이 사용하는 패러디의 소재나 대상은 거의 전방위적이라 할 만큼 광범위하다. ‘거침없이 하이킥’은 기존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광고, 심지어는 뉴스 속에 관습적이라 할 만큼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관습적 장면들을 거침없이 패러디한다.

예를 들어 ‘악플순재’로 유명해진 에피소드에서 악플 때문에 순재 대신 경찰서에 출두했다 나온 윤호를 맞는 장면에서, 마치 영화 ‘대부’에서 비롯되어 조폭 영화에서 흔히 관습적으로 나오는 장면을 패러디하는 것 같은 것이다. 검은 세단과 순재의 ‘수고했다’ 같은 대사는 심각한 영화 속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우스꽝스런 순재와 윤호, 준하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준하와 해미의 결혼기념일 에피소드에서 육교에서 노래를 부르고 과장된 몸짓으로 육교 위로 달려가 서로 안는 장면에서 마침 터져 오르는 축포 같은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또한 민호의 카리스마 에피소드에서는 코를 찡긋거리면서 하는 영화 ‘홀리데이’의 최민수의 연기를 고스란히 패러디해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이 같은 심각하지만 관습적으로 처리되는 장면들의 패러디를 통해 터져 나오는 웃음의 원천에는 반드시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인물들과 그 인물을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준하와 해미의 결혼기념일 과장된 사랑행위는 범이에게 목격된다. 범이의 어처구니없는 얼굴은 친절하게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장면의 희극성을 상기하게 만든다. 민호가 코를 찡긋거리면서 이것이 효과가 있다고 착각할 때, 그 모습을 흉내내는 가족들의 모습을 객관적 입장에서 보는 범이의 얼굴이 삽입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 시트콤이 패러디를 넘어 거침없이 탈 장르에까지 이른 것은 크나큰 성과라 할만하다. 슬랙스틱 코미디에 멜로 드라마적 구도와 스릴러적인 요소, 심지어는 SF까지(최초 우주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유는 이 장르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넘나들었다는 건, 이 시트콤이 얼마나 거침없이 패러디를 활용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민정과 최민용이 출연한 광고들이 모두 패러디 광고(“깎아주세요”를 “먹여주세요”로 바꾼 비빔면 광고나 드림걸즈를 연상케 하는 카드광고 등)라는 점은 이 힘이 고스란히 광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해체된 가족에서 희망을 보다
하지만 패러디를 통해 파편화되고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면서도 그 웃음이 그저 냉소에 머무르지 않은 점은 작가와 PD가 이들 가족 구성원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트콤에서 웃다가 갑자기 가슴 먹먹한 사연이 교차되는 것은 바로 그런 애정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이다.

고압적으로만 보이던 순재가 문희에게 사랑의 마음을 골세레머니를 통해 전하기 위해 죽어라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달라진 가족 관계 속에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끌어내 준다. 잘 나가는 아내와 모든 게 잘 풀리지 않는 남편인 해미와 준하의 관계가 그저 달라진 권력관계가 아니라 거의 닭살에 가까운 애정관계로 유지된다는 점도 그렇다. 이것은 툭탁대면서도 서로를 도와주고 존중하는 민호, 윤호 형제도 마찬가지며, 민민, 신민, 윤민 커플이 보여준 새로운 애정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은 여타의 일일드라마가 하듯 과거적 가치로 되돌아가는 가족의 모습보다는, 현재 파편화되고 있는 가족 그 자체의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새로운 희망을 예기하게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족들은 각자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족이란 틀 안에서의 정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거침없이 하이킥 한 것은 달라진 가족관계 속에서 과거의 가족관계만을 보여주는(심지어는 강요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습적 일일 가족드라마이다. 그 거침없는 하이킥은 그러나 비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해체된 가족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고마운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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